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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0만 전생 배우-127화 (127/178)
  • Chapter57, 아이돌이 왕창(2)

    조금 이른 아침.

    진호가 예정보다 빠른 시간에 도착했다.

    서훈을 비롯한 스텝들이 한창 준비를 하고 있었다.

    “왜 이렇게 일찍 왔어?”

    “선생인데 미리 미리 둘러 봐야지. 여기 전부가 촬영지야?”

    “펜션을 통째로 빌린 거야. 도로 진입 전까지 카메라를 세팅 해 둘 테니까 알아 둬.”

    “오케이. 그럼 난 둘러보고 올게.”

    은서는 따로 출발을 한 터라 현장의 연예인은 진호 뿐이었다.

    인적 드문 거리에 살살 불어오는 바람.

    휴가 내고 놀러오면 딱 좋은 분위기였다.

    “닭장도 있네? 텃밭도 있고. 딱 보니까 게임으로 내기해서 일하게 생겼네. 리얼리티를 살리자면서 시키는 건 많아요.”

    펜션 뒤쪽을 살피며 진호가 툴툴거렸다.

    세팅된 분위기를 보니 연습 말고도 할 일이 많아 보였다.

    어느 예능이 다 그렇듯 완벽한 리얼리티는 존재하지 않았다.

    “저, 저기요. 저 좀 도와주시면 안 될까요?”

    “응?”

    그렇게 뒷산을 돌아 나오던 진호.

    희미하게 들려오는 목소리에 걸음을 세웠다.

    “저기서 뭐 합니까?”

    임시로 설치해 둔 펜스 중간에 걸쳐서 낑낑대는 여자가 한 명 있었다.

    짐 던지고 넘어오다가 치맛자락에 걸린 것이다.

    “죄, 죄송해요. 오늘 촬영이라고 해서 이동하다가 길을 잘못 들었어요.”

    “아. 출연자? 매니저는 어쩌고 혼자 왔어요?”

    “회사 매니저는 바쁘다고 혼자 가라고 그랬거든요. 그쪽 분도 출연자세요?”

    “······절 몰라요?”

    “제가 눈이 안 좋아서요. 바닥에 떨어진 안경을 쓰면 보일 텐데······”

    그러고 보니 바닥에 안경이 하나 떨어져 있다.

    참, 시트콤스러운 상황 아니던가.

    진호가 헛웃음 지으며 펜스에 걸린 여자를 구해 주었다.

    “가, 감사합니다. 어휴. 그쪽 분이 안 오셨으면 큰 일 날 뻔 했지 뭐에요. 이런 산에서 찾아오는 사람도 없이 꼼짝 못하면······상상만 해도 무섭네요.”

    “정 급하면 옷을 찢고 나올 수도 있을 텐데요.”

    “아. 그러면 됐겠네요.”

    살짝 모자란 것 같기도.

    진호가 상대를 눈으로 살피며 안경을 집어 주었다.

    알이 두꺼운 전형적인 멍텅구리 안경이었다.

    “감사합니다. 계속 신세만 지네요. 전······흐어억!”

    꾸벅, 하고 허리를 숙이려던 여자가 진호를 확인했다.

    그리고는 귀신을 본 사람마냥 펄쩍 뛰었다.

    “지, 진호 배우님 아닌가요?”

    “네. 저도 예능에 같이 나오는 건 알고 계시죠?”

    “물론이에요! 제가 진호 배우님 나온다고 얼마나 기대를 했는데요.”

    “몰라보시던데.”

    “허억! 제, 제가 너무 무례했죠? 죄송해요. 안경이 없으면 눈에 뵈는 게 없어서.”

    허리가 부러져라 연거푸 인사를 했다.

    순수함과 멍청함 그 사이에 있는 모습이었다.

    “됐어요. 다친 곳은 없죠?”

    “네. 진호 배우님이 도와주신 덕분에 털끝 하나 다치지 않았습니다. 역시 제 상상대로 상냥하신 분이네요.”

    “이런 상황이라면 누구나 도왔을 것 같긴 하지만······일단 내려가죠. 서훈 형이랑 아래에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어요.”

    “네!”

    이번엔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던져 놓은 캐리어를 잡아 끌었다. 근데 산길에, 몸 만 한 캐리어다 보니 잘 끌리지 않았다.

    흙에 박힌 바퀴를 끌끌 거리며 당기기만 했다.

    “줘요.”

    그 꼴이 답답해서 진호가 캐리어를 집어 들었다.

    “괘, 괜찮아요! 제가 들 수 있어요!”

    “그거 기다리다가는 촬영 늦겠어요. 근데 네비 켜고 왔을 텐데 어떻게 산으로 왔데요?”

    “리얼리티라고 해서 산에서 촬영 하는 줄 알았어요.”

    “······자연인도 아니고.”

    순수함 보다는 멍청함 쪽으로 추가 기우는 것 같다.

    캐리어를 번쩍 들어 돌돌 굴리며 진호가 아래로 걸음을 옮겼다.

    ‘가, 같이 가요!’ 라며 뛰어오는 목소리가 그 생각에 한 표를 더했다.

    #

    “아니, 우희 씨. 이쪽으로 바로 오시면 어떻게 합니까.”

    뒷산에서 내려오자 서훈이 당황했다.

    “여, 여기로 오라고 하시지 않았어요?”

    “어후. 학생 역할의 출연자들은 모였다가 한 번에 보기로 했잖아요. 제가 주소랑 다 보내 드렸는데.”

    “죄송해요······”

    펜션 뒤쪽으로 입구가 하나 더 있다.

    학생 역할의 출연자들은 그쪽에 모여서 단체로 이동하는 형식.

    괜히 혼자서 온다고 끙끙거리다 덜컥 먼저 나타나 버린 것이다.

    “형. 어쩌겠어. 지금이라도 그쪽으로 보내. 내가 못 본 척 연기 해 줄게.”

    “시작부터 꼬이네. 저기요, 우희 씨. 막내 작가 따라가서 대기하고 계세요. 부르기 전까지는 내려오지 말고요.”

    “네, 네! 이번에는 제대로 기다릴게요.”

    결국 막내 작가 편으로 합류 장소로 보내버렸다.

    양 손으로 캐리어 잡고 끙끙 거리는 모양새가 어쩐지 군대의 관심병사 보는 느낌이었다.

    “내가 진짜 못살겠다. 어쩌다가 저런 애를 보냈냐.”

    “어디서 보낸 거야?”

    “YUN. 윤 엔터에서 보냈어.”

    “윤이면 제법 규모 있는 곳이잖아. 가수 지망?”

    “아니, 배우. 자기 소개서를 15장을 써서 보냈더라고. 그래서 열정은 있겠다 싶어서 케스팅 한 거지.”

    “허. 15장이라니. 그게 나오기는 하나?”

    서훈이 말도 말라는 의미로 손을 흔들었다.

    15장 대부분이 각오와 다짐으로 꽉 차 있었다.

    “저렇게 어리바리 해서 제대로 카메라나 받을지 모르겠다. 그래도 여기 오는 애들이라면 떠보려고 힘 가득 들어가 있을 텐데.”

    “알아서 하겠지. 열심히 하면 눈에 띄는 거고 아니면 묻히는 거고.”

    “난 사고만 안 쳤으면 좋겠다. 너 끼고 방송하는 거라고 다들 매의 눈으로 주시하고 있는데.”

    “형, 쫄려?”

    “쫄리긴. 그냥 말이 그렇다는 거지. 너도, 가만히 있지 말고 가서 세팅해. 이제 모일 시간이다.”

    서훈의 말마따나 촬영장으로 차들이 속속 들어오고 있었다.

    개중에는 눈에 익은 은서의 차도 보였다.

    “다들 밥은 먹고 왔으려나.”

    시간은 아침 6시 반이었다.

    #

    “어휴. 어휴.”

    우희. 연 우희는 연달아 숨을 몰아쉬었다.

    긴장이 되어서 가만히 있기가 힘들었다.

    “이번에는 실수하지 말아야지. 또 실수하면 분명 찍힐 거야. 음. 음.”

    혼잣말을 되뇌며 각오를 다지기도 했다.

    이미 한 번 실수를 했던 터라 마음이 더 컸다.

    ‘회사에서는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고 했어.’

    배우 지망생이지만 얼굴도 매력도 부족한 아이.

    자체 평가에서 F등급을 받고 마지막이라 소개서를 쓸 기회를 받았다.

    그렇게 잡은 기회니 더 긴장이 되는 것이다.

    “거기 너. 좀 조용히 하지?”

    “······응? 네? 저요?”

    “그래. 너.”

    그런 그녀에게 누군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을 붙여왔다.

    임시 대기실을 같이 쓰는 출연자였다.

    “혼자서 계속 중얼중얼. 시끄러워서 못 있겠어. 입 좀 닫아주겠니?”

    “죄, 죄송해요. 너무 긴장이 돼서요.”

    “너만 긴장 돼? 여기 다른 애들도 있는데 혼자만 특별 한 척 하지 말라고.”

    “네······”

    “대답만 꼬박꼬박. 순진한 척 하면서 이미 눈도장이나 찍고 말이지.”

    우희는 조용히 수긍했지만 상대는 여전히 불만이었다. 다른 장소에서 서훈과 미리 만났다는 사실을 전해들은 것이다.

    “너, 아까 피디님이랑 만나서 무슨 얘기했어?”

    “네? 그냥 길을 잘못 들어서 안내해 주신 것뿐이에요. 진호 배우님이 뒷산에서 절 구해 주셨거든요.”

    “진호? 홍 진호 선배님 말이야? 너 만났어?”

    “아, 그게······뒷산에서 길을 잘못 들었다가 우연히 만났거든요.”

    진호를 거론하자 조용히 있던 다른 출연자들까지 일제히 우희를 쳐다봤다.

    이 프로그램이 어떤 취지이고 어떤 방식인지 모르는 사람은 없다.

    잘 보여야 하는 건 피디가 아니었다.

    “야. 이거 순진하게 생겨서 완전 여우네. 먼저 움직여서 눈도장을 찍었다 이거야?”

    “그런 거 아니에요. 진짜로 길을 잃어서 곤란해 하던 걸 진호 배우님이 구해주신 걸요. 그분 도움 아니었으면 아직도 거기서 끙끙거리고 있었을 거예요.”

    “그 이야기를 퍽이나 믿겠다. 너. 여기 모인 사람들 전부 급한 거 알지? 우리도 자기 코가 석자라고. 혼자서 잘난 척 나서지 말라 이거야.”

    “······잘난 척 안했는데.”

    “뭐!?”

    “아, 아뇨. 조용히 있을게요.”

    우희는 답 하는 걸 포기하고 입을 닫았다.

    살벌한 눈빛들이 사방에서 쏟아지는 터라 작은 간덩이로는 버틸 수가 없었다.

    “출연자 분들 준비해 주세요.”

    “네~”

    “네!”

    갑자기 사근사근해지는 목소리는 적응이 안 되고.

    가만히 고개만 끄덕였다.

    #

    프로그램 특성 상 진행자는 딱히 없었다.

    굳이 말하자면 선생 역할의 진호와 은서가 나름 진행자의 위치.

    특별 진행을 제외하고는 전체를 둘이 조율해야 했다.

    “그럼 소개도 끝났으니 간단하게 계획을 말 해 드릴게요. 수업은 저와 은서 씨가 분반하는 것이 아닌, 통합으로 계속 진행합니다. 연기와 아이돌 쪽을 분리해서 가르치는 것이 아니죠.”

    “그럼 아이돌 지망생인 저희도 연기를 배우나요?”

    “네. 알다시피 우리가 몇 달간 같이 합숙하는 건 아니잖아요. 저는 최대한 짧은 시간 안에 여러분께 제가 아는 것들을 전부 전해주고 싶습니다. 굳이 구별 할 필요는 없겠죠.”

    진호의 답에 출연자들은 설레는 표정을 지었다.

    진호가 누구인가.

    아시아인 최초로 10억불을 돌파한 영화의 주인공이며 국가 단위의 긴장감을 홀로 해소한 입지적인 존재다.

    경력 자체는 짧지만 파워 자체는 단연 톱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인물의 노하우를 배울 수 있는 것이다.

    “솔직히 프로그램이 예능이고 뭔가 많은 걸 보여줘야 한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아마 여러분들 중 일부는 배움보다는 인지도를 생각하고 있는 사람도 있을 거예요.”

    진호는 그런 설렘을 깨고 말을 이었다.

    “생각은 강요 안 해요. 그걸 원한다면 최선을 다해서 해 보도록 하세요. 하지만 전 확실하게 못 박아 두지만, 이곳에 예능의 느낌으로 출연 한 것이 아닙니다. 아는 걸 가르치고 배워 가는 사람이 있기를 원합니다.”

    “진지하게 말인가요?”

    “네. 최선을 다해서 가르칠 생각입니다. 중간에 프로그램 구성으로 게임 같은 게 들어있기는 하지만 적어도 제 생각이 그렇다는 건 전해 드리고 싶었습니다.”

    진지한 진호의 말에 웃음기가 쫙 빠졌다.

    서훈은 이마를 손으로 짚고 스텝들의 표정도 썩어 들어갔다.

    아무리 그대로 프로그램 시작부터 이렇게 진지해 버리면 채널 돌리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단기간에 제대로 배울 수 있을까요?”

    그런 분위기에서 누군가 질문을 던졌다.

    자신을 채소정이라 소개한 여자 배우였다.

    나이는 진호보다 두 살 아래.

    마땅한 커리어가 없는 3류 배우였다.

    “글쎄요. 그것까지는 저도 확답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최선을 다해서 배운다면 조금은 나아지지 않을까요? 전 이 프로그램이 여러분 인생의 어떤 반환점이 되었으면 합니다.”

    “반환점······”

    “저 역시 다른 사람의 도움으로 인생의 반환점을 돌았습니다. 예능에서 만난 사람이라고 해도 그런 기회가 되지 말란 법은 없지 않습니까?”

    진호의 어조에는 물기라고는 한 점 없었다.

    예능보다는 다큐멘터리에나 어울릴 법 한 말투.

    하지만 이 정도까지 진심으로 호소하면 어떤 힘이 생기기 마련이다.

    “열심히 해 볼게요.”

    “저도요!”

    “잘 부탁드립니다.”

    다시금 설레는 얼굴이 되어 외치는 출연자들.

    프로그램에 불이 붙었다.

    “예능인데······”

    서훈의 구상과는 달랐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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