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만 전생 배우-113화 (113/178)
  • Chapter51. 영화 보는 눈(2)

    차기작을 급히 골라야 한다는 부담은 없었다.

    광고는 계속해서 들어오고 있고 따로 할 일도 많았다.

    세미나 하윤이. 루카 같은 후진 양성.

    연출, 제작, 시나리오 집필 등 다각도의 공부.

    연기에서 뻗어나간 가지들을 하나씩 주웠다.

    “이건 별로. 이것도 별로.”

    물론, 시나리오를 살피는 것도 개을리 하지 않았다.

    진호는 영어를 비롯한 다른 언어가 되다보니 들어오는 시나리오도 다국적이었다.

    특히 할리우드에서의 러브콜이 굉장했다.

    한국 영화를 가지고 대박을 친 배우니 직접 할리우드에서 제작하면 더 대단한 거라 예상하는 것이다.

    “전작 때문인가. 액션 영화가 많네.”

    “액션 영화는 고사하게요?”

    불쑥 끼어 든 건 하윤이었다.

    창틀에 몸을 기댄 채 시나리오를 힐끔 힐끔 보고 있었다.

    “할리우드 액션 하면 블록버스터잖아. 나쁜 건 아닌데, 이번엔 좀 느낌 있게 가 보려고.”

    “예술 영화로요?”

    “그쪽도 좋긴 하지. 고민 중이야.”

    “흐응. 형도 은근히 흥행을 염두에 두고 있네요.”

    툭 던진 말에 진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렇게 보였냐?”

    “아······실언. 죄송해요. 그런 의미로 말 한 건 아니에요.”

    “아니, 괜찮아. 네가 보기에 내가 흥행을 염두에 두고 고르는 거 같았어?”

    “조금요? 상업성 고려 안하고 보면 좀 더 폭이 넓어 질 거 같아서요.”

    두 편 연달아 성공을 했다.

    벌어들인 돈이 수천억이고 이걸 펑펑 쓰는 재미도 충분히 누렸다.

    ‘나도 모르게 머리에 들어가 있었나 보네.’

    그러다 보니 무의식적으로 고려를 한 것이다.

    흥행과 돈이 나쁘다는 건 아니지만 순수하게 연기만 보자면 일종의 방지 턱이기도 했다.

    “어쩌면 네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연기를 길게 하고 싶으면 다른 시도도 해 봐야지.”

    “근데 형. 이런 얘기 내가 했다는 거 대표님한테는 말하지 마세요.”

    “왜? 혼날까 봐?”

    “내가 대표님 입장이면 굉장히 화낼 거 같아요.”

    진호가 우물쭈물하는 하윤이의 머리를 다독여 주었다.

    “우리끼리의 비밀로 할게.”

    굳이 말 할 필요는 없었다.

    #

    상업적인 시선을 배제하면 선택지는 더 넓어진다.

    회사로 전달 된 시나리오를 제외하고도 얼마든지 있었다.

    “독립영화중에서 찾는다고?”

    “아니. 독립 영화도 본다고.”

    이를 두고 은서와 상의했다.

    “굳이 독립영화까지 가야 해? 다른 시나리오도 많이 들어왔잖아.”

    “그냥 선택지를 넓히자는 거지. 상업성을 배제하고. 그냥 순수하게 영화 자체로.”

    “오빠. 의도는 좋은데 너무 빠지지는 마. 영화의 순수성만을 좇다가 되레 고립되어 버리는 배우들도 있다고.”

    은서는 이런 선택이 걱정되었다.

    영화판에서 상업영화와 예술영화가 각을 세우고 싸우는 것이 어디 하루 이틀인가.

    경계를 오가는 일이 쉽지만은 않다.

    “그래서 의논하러 온 거잖아. 내가 고른 시나리오를 네가 평가해 줘. 보는 눈이 얼마나 다른지 확인하고 싶어.”

    “날 의지해 주는 건 고맙긴 한데, 도움이 될까?”

    “부담가지지 말고 해.”

    진호가 미리 뽑아온 시나리오들을 건넸다.

    여러 루트로 획득한 시나리오들 중에서 느낌이 좋은 것들만 추린 것이다.

    물론, 기본적으로 진호의 취향이 반영되어 있었다.

    “이건 너무 복잡하고, 이건 너무 과하고.”

    은서가 시나리오들을 하나씩 제거했다.

    예술 영화는 기본적으로 의미의 함축이 들어간다.

    이 함축은 잘 풀어내면 예술이 되지만, 자칫 어렵게 꼬이면 관객과의 거리감으로 드러나 버린다.

    은서는 지나치게 어려운 영화들을 배제한 것이다.

    “내가 볼 때 그나마 괜찮은 영화는 이 두개.”

    “흐음. 어떤 면이 마음에 들었어?”

    “첫 번째는 풀어내는 방식. 사회고발적인 내용이지만 너무 무겁지가 않더라고. 담백한 방식이 마음에 들었어.”

    “뒤에 거는?”

    “이건 그냥 오빠랑 잘 맞을 거 같아서.”

    진호의 시선이 두 번째 시나리오로 향했다.

    재밌게도 은서의 감상이 자신의 것과 완전하게 동일했다.

    그도 시나리오를 처음 봤을 때 ‘나와 잘 맞겠다.’라고 생각을 했었다.

    “바보 이야기라.”

    이상하게 끌렸다.

    #

    바보 이야기는 서덕찬 감독에 JJ라는 작은 스튜디오 제작이었다.

    지체 아동을 후원하는 회사에서 홍보용으로 제작하면서 판이 커진 케이스였다.

    그래봐야 얼마 안 되는 자본 규모였지만.

    “그러니까 이 영화를 하고 싶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어떻게고 나발이고. 왜 이 영화인데?”

    “마음에 들어서요.”

    진호는 최현석에게 시나리오를 들고 갔다.

    “너 지금 할리우드에서 캐스팅 제의 들어오는 거 알고 있지? 기본 출연료 100억 이상이라는 것도 알고?”

    “알죠. 왜 모르겠어요. 근데, 꼭 돈이 되는 영화만 찍을 건 아니잖아요.”

    “그래. 그럴 수 있지. 근데 지금 아니면 못 찍을 수 있다는 것도 알아야 해. 할리우드는 상당히 폐쇄적이야. 인기를 등에 업은 지금은 몰라도 나중에 진출이 어려울 수도 있어.”

    최현석은 돈이 아닌 다른 부분도 지적했다.

    지금은 모든 것이 쉽고 편하지만 그게 영원하지 않으리란 건 그가 가장 잘 알았다.

    동양인이 할리우드에서 주연 먹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기회는 왔을 때 잡아라. 맞아요. 할리우드의 문이 언제까지 열려 있지는 않겠죠. 하지만 그래도 전 조금 돌아가고 싶어요.”

    “어째서?”

    “지금 들어온 캐스팅들. 전부 전작의 이미지를 그대로 차용하고 있어요. 인기만 업고 가겠다, 이거에요.”

    “끄응. 그게 상업 영화의 기본 아니냐?”

    “나쁘다는 건 아니에요. 그냥 마음에 안 들 뿐. 오만해 보일 수 있지만 그들에게 연기로 낙점 받고 싶어요. 캐스팅 하지 않으면 안 될 만큼의 수준으로.”

    최현석이 미간을 찌푸렸다.

    다른 사람 같으면 대뜸 면전에서 소리쳤을 것이다.

    그만큼 진호의 말은 꿈같은 소리였다.

    순수한 실력주의를 누가 거부하겠는가.

    하지만 현실은 이상과 다르다.

    할리우드의 수많은 배우들조차 실력 이상의 이미지와 상업 관계로 캐스팅 보드에서 탈락하는데, 아시아 배우가 그런 걸 꿈꾸는 건 과하다.

    아니 불가능하다.

    “그걸 위해서 이 영화다?”

    “지금은 너무 들떠 있거든요. 조금 가라앉을 필요가 있을 거 같아요.”

    “어휴. 영화는 좋고?”

    “시나리오는 마음에 쏙 들어요.”

    하지만 그런 최현석조차 진호에게서는 막연한 기대를 품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 해 온 것이 있으니까.

    이번에도 되지 않을까 하는 그런 기대.

    “나중에 할리우드에서 외면했다고 울고 그러면 안 된다.”

    “안 해요. 칼을 뽑았으니 무라도 베면서 나가야죠.”

    “그 무에 우리 회사도 썰리는 건 아닐까 두렵네.”

    “하하. 엄살이에요, 대표님.”

    “으이그. 내가 너 때문에 제명에 못 산다.”

    마지막 말은 진심이었다.

    #

    JJ스튜디오의 대표 윤길상은 귀를 의심했다.

    자신에게 걸려올 리 없는 전화가 걸려왔기 때문이다.

    JJ는 영화 제작사이기는 하지만 영세 규모.

    주로 외주 제작에 동원되거나 저예산 영화 제작을 위주로 하는 회사다.

    근데 왜 이곳으로 홍 진호라는 거물이 전화를 한단 말인가.

    “네, 네. 그러니까 저희 영화에 출연하고 싶다고요?”

    그것도 출연 제의였다.

    월드 와이드 10억 달라를 돌파한 엄청난 영화의 배우가 출연 제의를 한 것이다.

    꿈인가, 거짓말인가, 사기인가.

    현실을 제외한 선택지들이 먼저 떠올랐다.

    “지, 직접 오신다고요!? 네!? 바로 앞이라고요!?”

    그런 의심을 알고 있다는 듯 방문 의사를 밝혔다.

    그것도 대비 할 틈도 없이 바로 지금.

    윤길상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도 못한 채 창문 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오래된 소형 차 한 대가 들어오고 있었다.

    ‘저 차! 맞잖아!’

    진호가 오래된 승용차를 바꾸지 않고 계속 타는 건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이거 갑자기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차에서 내린 사람도 진호가 맞았다.

    윤길상은 뻣뻣하게 굳은 얼굴을 한 채 악수인지 뭔지 모를 행동을 취했다.

    제작사 대표이기 이전에 굉장한 팬이었기에 지금 상황이 더욱 당황스러웠다.

    “제가 너무 놀라게 해 드린 거 같네요. 나중에 다시 올까요?”

    “아······아니요! 괜찮습니다! 죄송합니다! 고맙습니다. 아니, 어떻게 오셨습니까?”

    “하하. 그건 전화로 말씀 드렸잖아요. 영화에 출연하고 싶다고요.”

    “영화. 네. 네? 그거 진담이었습니까?”

    “그럼요. 영화로 농담은 안 합니다.”

    눈을 깜빡이고 소매로 눈가를 슥슥 씻었다.

    여전히 그 자리에 그대로 진호가 앉아 있었다.

    역시 환상이나 꿈은 아닌 거 같다.

    “저기 말이죠. 제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되서 그럽니다. 진호 씨가 우리 영화에 출연을 하고 싶다는 거죠?”

    “네. 시나리오를 찾다가 마음에 들어서 이렇게 연락하게 됐습니다.”

    “아니, 왜······훨씬 더 좋은 영화도 많은데. 저기 할리우드에서 캐스팅 제의도 많이 오지 않았습니까?”

    “왔죠. 많이. 근데 지금은 그쪽보다 이쪽이 더 구미를 당기네요.”

    할리우드가 100이라면 이쪽은 얼마일까.

    윤길상은 아무리 생각해도 비교가 되지 않는다고 여겼다.

    “죄송하지만, 저희 영화는 굉장히 저예산입니다. 진호 씨의 출연료를 감당 할 수가 없어요.”

    “출연료는 적당히 주세요.”

    “저, 적당히요?”

    “돈보고 영화를 고른 게 아닙니다. 말했다시피 할리우드에서도 많은 제의가 왔으니까요.”

    “아. 하긴 그러겠네요. 근데, 괜찮습니까? 굉장히 적을 텐데. 출연료······”

    진호는 끄덕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애초에 상업적인 성공을 염두에 두고 고른 영화가 아니다.

    “어후. 이거 너무 갑작스러워서 정신을 차리기가 힘드네요. 우리 영화에 진호 씨가 출연을 하다니. 꿈같습니다, 정말.”

    “시나리오가 마음에 들었으니까요. 아, 근데 이 시나리오는 누가 쓰신 거죠?”

    “아. 그건 제가 썼습니다.”

    “대표님이 직접?”

    “네. 취미가 영화 시나리오 집필이거든요. 감독 할 깜냥은 안 되고 그냥 끼적이기를 좋아해서요.”

    진호가 조금 다른 눈으로 윤길상을 봤다.

    어딘가 나사 하나 빠진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재주가 좋았다.

    “그럼 감독님은 직접 고른 건가요?”

    “네, 네. 전부터 일을 같이 하곤 했습니다. 저랑 합이 잘 맞아서······아! 혹시 다른 감독을 염두에 두고 있다든지?”

    “그건 아닙니다. 그리고 전 그냥 일개 배우니까 너무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어휴. 어떻게 또 그럽니까. 무려 진호 배우님인데.”

    손사래 치는 모양이 진담이었다.

    큰 배우가 작은 영화에 투입 될 때의 전형적인 권력구도.

    진호는 그런 기류를 느꼈지만 일단은 무시했다.

    당장 말로 바뀔 그런 성격이 아니었다.

    “그럼 일단 감독님 불러서 얘기를 해 볼까요?”

    “아. 그래야죠. 우리 서 선생님 이야기도 들어봐야 하니까요.”

    “서 선생님?”

    “하하. 제가 서 덕찬 감독님 부르는 별칭입니다.”

    이쪽 관계도 제법 독특한 구석이 있었다.

    “여기서 잠깐만 기다리세요. 제가 후딱 전화하고 오겠습니다.”

    “여기서 편하게 하셔······벌써 나가셨네.”

    휑 한 소파를 보며 진호가 입맛을 다셨다.

    어쩐지 이번 영화.

    그냥 평범하게 흘러 갈 것 같지가 않았다.

    ‘이것도 예감인가?’

    아직은 모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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