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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0만 전생 배우-111화 (111/178)

Chapter50. 우리가 남이가(2)

사정을 알아보니 꽤나 일이 컸다.

회사 자금이 콱 막히면서 부도가 나고 이에 걸친 납품업체들이 줄줄이 박살 난 상황이었다.

빠르게 회생절차를 밟아서 최악은 면했지만 이래저래 손해가 막심했다.

살던 집까지 담보로 잡아서 대출을 했을 정도다.

“이게 어딜 봐서 수습이 된 일이야? 대출금이 버젓이 남아 있는데.”

“그건 집 판 돈으로 충당해야지.”

“그럼 형네 가족들은 어떻게 하게? 집이 사라지는 거잖아.”

“작은 곳으로 이사하면 돼.”

“내가 알기로 형네 본가에 부모님 말고도 세 식구 더 사는 걸로 아는데? 형네 할머님하고 동생 둘. 아니야?”

마침 막내 동생까지 군대를 제대해서 본가에 사람이 꽉 찼다.

지금 사는 집도 좁아서 툴툴 거리기 일쑤.

더 작은 집으로 이사를 간다는 건 마냥 쉽게 말 할 일이 아니었다.

“거 봐. 아직도 문제가 있잖아. 나한테 털어 놓는 게 그렇게 창피해?”

“······야. 그래도 내가 형이다. 아무리 급해도 동생한테 손 벌릴 수 있겠냐?”

“어휴. 내가 형 혼자면 잘했다고 해주겠는데, 지금은 아니다. 결혼 안 해? 형 애인은 생각 안 할 거야?”

“끄응.”

송학이 금세 또 입을 닫았다.

“이렇게 하자. 내가 일단 형네 집 대출금은 갚아줄게. 당장 집 넘어가는 것보다야 그게 낫지.”

“야, 야! 그게 한두 푼도 아니고······”

“어제도 광고 찍었어. 그거 단발로 7억이야. 이 돈 들고 산에 가서 묻기라도 할까봐? 형네 집안일에 돈 쓰는 건 안 아까워.”

“하, 하지만 그냥 받을 수는 없어.”

“누가 그냥 준데? 이거 다 당겨쓰는 거라고. 앞으로 줄 보너스 싹 몰아서 미리 준다고 생각해.”

송학이 입술을 깨물었다.

어둠 속에서 내려온 동아줄.

형으로서의 자존심과 부끄러움이 계속 발을 부여잡았지만 진호의 말대로 혼자가 아니었다.

가족도 그렇고 가족이 될 사람도.

“······이 은혜는 잊지 않을게.”

“걱정 마. 달력에 적어 둘 거니까.”

그날로 은행 채무는 사라졌다.

#

“아이고, 감사합니다!”

소식을 송학의 가족에게 알렸다.

처음에는 반신반의하던 이들도 채무가 소멸되었다는 증명서를 보자 대번에 만세를 불렀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그 만세를 진호를 향했다.

“아버님, 일어나세요.”

“집안 은인에게 그럴 수야 없지요. 내가 몇 번이고 절해도 부족합니다.”

“이러면 제가 너무 죄송스러워요. 송학 형 아버님이면 저한테도 아버님이죠. 편하게 대하세요.”

“아이고······어쩜 이렇게 좋은 분을 만났는지. 우리 송학이가 전생에 공덕을 쌓은 거여.”

뒤로도 몇 번이나 절하려는 걸 겨우 말렸다.

극적인 건 송학의 부친이 가장 심했지만 다른 사람들이라고 반응이 적은 건 아니었다.

어머니도 진호의 손을 꼭 잡은 채 눈물을 글썽였고, 두 동생은 자기가 매너지 수발 들겠다고 나섰다.

둘 다 송학을 꼭 닮아 있었다.

“고맙다, 진호야. 덕분에 가족들이 한 숨 던 거 같아.”

“이건 형을 돕는 일이기도 하지만 날 돕는 일이기도 해. 요즘 형이 없으니까 일이 잘 안 돌아간다고. 요즘 들어온 매니저가 형만큼은 못하더라.”

“새끼, 혼자서도 잘 하면서.”

“당연히 잘 하지. 근데 둘이면 더 잘하니까.”

진호가 송학의 어깨를 두드렸다.

쓴 소리 거하게 하긴 했지만 그동안 그가 느꼈을 부담과 책임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

많이 괴롭고 힘들었을 것이다.

“한 잔 해, 형.”

“그래. 이럴 때는 한 잔 해야지.”

어릴 적 송학이 쓰던 방.

나란히 앉아 술잔을 부딪쳤다.

“크으. 이거 보기보다 세네.”

“그거 아버지가 직접 담근 거다. 좋은 일 있으면 딴다고 애지중지 모셔 두더니 결국 오늘 따네.”

“귀한 술이었네. 내가 마셔도 되려나?”

“되지. 넌 우리 집 은인 아니냐. 이럴 때 아니면 또 언제 마시겠어.”

“은인은 무슨. 앞으로 형 무지하게 부려먹는다니까?”

“그래. 마구 부려먹어라. 내가 네 일이라면 불에 들어가는 것만 아니면 다 해주마.”

“흐흐. 약속 한 거다.”

잔을 부딪치고 술을 넘겼다.

짐을 덜었기 때문일까, 송학은 꽤나 가볍게 술을 마셨다.

“이거 맛있네. 어머님 솜씨?”

“어. 우리 엄마가 음식 손맛이 좀 있지.”

“형이 어머니 손재주 닮았나 보다. 형수도 곰 같은 양반이 여우같이 손 쓴다고 그러던데.”

“야야. 둘이서 그런 얘기까지 한 거냐?”

“그럼. 원래 없을 때 씹어야 제 맛이라고 하잖아.”

진호가 낄낄거리고 송학이 앓는 소리를 냈다.

“그래서 형. 결혼 날짜는 언제로 할 거야?”

“어, 어?”

“결혼식 말이야. 돈까지 모은 거 보면 구체적으로 시간 정한 거 같던데.”

“그야 뭐······이제 슬슬 때가 됐다고 생각했으니까. 일이 없었으면 이번 달 말쯤에는 하지 않았을까?”

“이번 달 말이라. 오케이. 그럼 그렇게 하자.”

진호가 젓가락으로 쟁반을 툭 쳤다.

술이 들어가서 그런지 묘하게 기분이 좋았다.

“잠깐만. 집 대출금까지도 갚아 줬는데 더 이상은 빚질 수 없어. 사람이 염치없게 어떻게 그러냐?”

“어휴. 곰 같은 사람. 이럴 때는 그냥 아무 말 없이 받는 거야. 형 결혼하는데 내가 선물은 해야 할 거 아니야. 결혼식을 그걸로 해 줄게.”

“결혼식이 한두 푼 하는 것도 아니고.”

“나 또 돈 자랑 해야 해? 자꾸 그러면 통장 깐다?”

“끄응.”

말마따나 결혼식 정도는 진호에게 푼돈이었다.

중요한 건 그걸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의 마음.

“난 말이야 형. 주변 사람들이 행복 한 게 좋아. 일 잘 되지 돈 잘 벌지 연애 잘 되지. 그럼 뭐가 더 필요하겠어? 그냥 가까운 사람들도 잘 됐으면 싶은 거야.”

“내가 그렇게 받아도 되는 사람이냐?”

“돼. 되니까 주는 거야. 아니다 생각했으면 내 곁에서 일하지도 못했을 거야. 형수랑 행복하게 살 생각이나 하고 동생 선물이거니 하고 받아.”

“그래, 인마. 고맙다. 잘 살게.”

“하하. 그래야지.”

쨍. 술잔이 다시금 부딪쳤다.

#

마리는 심란했다.

일단은 결혼을 생각했던 남자가 큰 일이 벌어졌는데도 아무 말 안 한 것.

이해는 하지만 속이 상한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다음은······

“아무래도 한 동안 부케 던질 일은 없겠다.”

결혼 문제였다.

괜찮다, 라고 말은 했지만 마음은 아니었다.

내심 결혼식을 얼마나 기대했던가.

당장 그 일이 무산됐다고 하니 속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진호 씨가 나서긴 했지만······’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당장 짐 담보 대출이 있어서 그걸 막아 주었다고 하니 더 이상 바라는 것도 욕심이었다.

“어휴. 송학 오빠도 너무하지. 그런 일 있으면 바로바로 상의를 해야 할 거 아니냐.”

“그러니까. 마리는 그것도 모르고 마냥 결혼, 결혼. 아주 꿈에 빠진 새색시마냥 떠들었잖아.”

“야, 야. 결혼 얘기는 그만 해.”

마음이나 달랠 겸 불러낸 친구들이 저마다 한 마디씩 했다.

“어쩌겠어. 사람이 살다보면 다 그런 거지. 솔직히 송학 오빠 능력에 과분한 일을 하긴 했잖아. 운이 있다가도 없는 거지 뭐.”

“······야. 너, 뭐라는 거냐?”

“아니, 그렇잖아. 송학 오빠가 무슨 스펙이 좋니 뭐가 좋니. 진호 씨 매니저라고 어깨에 힘주고 다니는 거 자체가 과했던 건 아닐까 싶어서.”

하지만 친구라고 다 같은 친구는 아니었다.

평소 마리를 아니 꼽게 보던 친구 하나가 심지를 비틀었다.

“사실 매니저와 연예인이라고 해 봐야 그냥 사무적인 건데. 무슨 형 동생처럼 말하고 다녔잖아. 진짜 그랬으면 이런 일 터졌을 때 냉큼 도와줬겠지. 돈도 많은 사람인데. 안 그래?”

“하. 넌 사람을 그렇게 봤던 거냐? 아니, 그런 식으로 보는 거냐?”

“사람마다 다 주제가 있다는 거지. 과하면 복이 날아가고. 안 그래?”

“너, 이······!”

가뜩이나 머리에 화가 차 있던 마리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입에 나오는 대로 떠드는 친구를 한 대 때려주고 싶었다.

“어, 어어?”

“뭐야!?”

“와! 진짜냐!?”

그 순간이었다.

술집이 갑자기 소란스러워졌다.

삼삼오오 모여 있던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나고 일제히 한 쪽을 응시했다.

“아, 저기 있네.”

“······진호 씨?”

그건 진호와 송학이었다.

차를 가게 앞에 주차하고는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왔다.

사람들이 우르르 몰렸지만 ‘사인과 촬영은 나중에 해 드릴게요. 지금은 급한 볼일이 있어서요.’라는 말로 물러 두었다.

“형수님. 낮부터 술입니까?”

“어, 어. 어떻게 오셨어요?”

“형이랑 대화를 하는데, 도통 답이 안 나와서 형수를 직접 만나러 왔죠. 잠깐 시간 돼요?”

“아······마 될 겁니다. 여긴 전부 제 친구들이에요.”

마리가 슬쩍 자신을 비꼬던 친구를 바라봤다.

턱이 빠질 듯 입을 벌리고 있는 꼴이 우스웠다.

‘넌 빠져’라고 말할까도 싶었지만 지금은 그냥 두고 보는 것이 더 나을 거 같았다.

“형수 친구 분들이면 차라리 잘 됐네. 도움 좀 구할게요.”

“어머나, 세상에. 형수래 형수. 진호 씨 그럼 여기에 마리랑 송학 오빠 때문에 온 거예요?”

“그럼요. 두 분이 곧 결혼한다고 하니 제가 한 손 거들어야죠.”

“꺄아아아! 지, 진호 씨가 결혼을 돕는데!”

“야이, 기집애야 좀 조용히 해 봐.”

부산스럽기는 10대 소녀 못지않았다.

마리를 비꼬던 친구 한 명을 제외하고는.

“여기 카탈로그를 뽑아왔어요. 형이랑 의논해서 깜짝 선물을 할까 했는데, 이 양반 심미안이 영 별로라서요. 그냥 같이 고르죠.”

“이거 결혼식장?”

“네. 최대한 형수 취향에 맞춰서 고르죠. 형도 잘못 한 게 있으니 고집은 안 부릴 겁니다.”

“하지만 돈이······”

“그건 신경 쓰지 마요. 제가 드리는 결혼 선물입니다.”

진호가 확실하게 못을 받자 주변 표정이 일제히 변했다. 친구들은 기쁨과 부러움이 반반 섞인 얼굴로, 마리를 쏘아붙이던 이는 당혹과 짜증으로.

“저, 저거 루이엔탈 호텔이잖아. 저기 시장 엄청나게 비싼 걸로 아는데.”

“야야. 저건 베르농이야. 우리나라 탑 쓰리.”

“와, 부럽다. 나도 저런 곳에서 결혼하는 게 소원인데.”

게다가 카탈로그라고 뽑아 온 식장들이 하나같이 초호화였다.

예약도 어렵고 비용도 엄청나서 엄두를 내기 힘든 곳들.

“이건 너무 과하지 않아요? 그냥 평범한 곳에서 식을 올려도 괜찮은데.”

“그래도 평생 한 번인 결혼식인데 화려하게 가야죠.”

“그럼. 그러엄. 마리야, 뭐해? 이럴 때 화끈하게 잡아야지.”

“있어 봐. 다들 왜 이렇게 주책이야.”

말은 그렇게 하지만 마리도 미소를 감추기 어려웠다.

그녀도 여자였고, 결혼을 앞둔 신부였다.

화려한 식장과 아름다운 드레스는 그녀에게도 로망이었다.

“오빠. 이거 진짜로 우리가 받아도 되는 거야?”

“에휴. 나도 그 얘기로 이 인간하고 한참을 싸웠다. 근데 어쩌겠냐. 주겠다는데 받아야지. 안 받으면 되레 화를 내는데 방법이 없어.”

“진호 씨. 이거 진짜 받아도 괜찮아요?”

“둘이 진짜 결혼 할 사람은 맞나 보네요. 어떻게 물어보는 것도 똑같아요. 네, 받으세요. 받아서 예쁘게 잘 살면 그걸로 됩니다.”

진호가 확실하게 답을 내어 주었다.

“고마워요. 진짜 고마워요.”

“그 고맙다는 말도 여기까지만 들을게요. 형하고 제가 어디 남입니까? 우리 사이에 이 정도 선물하는 거. 당연한 일이에요.”

가족에게 하는 선물에 더 이상 의미가 있을까.

그저 아끼니까 줄 뿐이다.

“그리고 뒤에 이건 드레스 사진이에요. 고를 게 많으니까 빨리빨리 합시다. 스케줄 빠지면 대표님한테 혼나는 건 내가 아닌 송학 형이라고요.”

“드, 드레스라니!”

누군가는 놀라고 누군가는 질투하고 누군가는 행복해하는.

그런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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