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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0만 전생 배우-110화 (110/178)
  • Chapter50. 우리가 남이가(1)

    바쁜 일정이 어느 정도 마무리 되었다.

    광고 촬영 및 사업 견학으로 스케줄에 빈 곳이 없긴 하지만 당장 달려야 할 정도는 아니었다.

    숨 좀 돌리면서 차 한 잔 할 여유는 있었다.

    “이제야 좀 사람 사는 분위기네.”

    2사옥 발코니.

    진호가 저 멀리 보이는 산자락을 안주 삼아 와인을 홀짝였다.

    몸도 축 늘어져서는 제대로 된 휴식 자세였다.

    “진호. 형. 그거 맛있다?”

    “루카는 아직 어려서 못 마셔. 여기 초코우유 있으니까 이거 마셔.”

    “응. 초코 우유. 맛있다.”

    “후후. 아직 루카는 어리구나.”

    “세미야, 너 손에 들린 거 딸기우유 아니니?”

    덩달아 다른 식구들도 여유를 만끽했다.

    공연으로 바쁘게 달려온 건 진호만이 아니었으니 다들 쉴 자격 정도는 충분했다.

    게다가 루카와 세미는 진호 만큼은 아니었지만 세계적인 조명을 받고 있다.

    당장 글로벌한 섭외 요청을 받는 중.

    최현석과 진호가 이를 추려내지 않았으면 둘은 잘 시간도 부족했을 것이다.

    “은서 언니는 안 왔어요?”

    “스케줄. 연극 무대에 서고 싶다고 알아보는 중이야. 꽤 진지하게 해보려나 봐.”

    “연극하고 정극은 완전 다르잖아요.”

    “다르지. 발성이나 연기하는 방식도 전부. 그래도 하고나면 배우는 게 많을 거야.”

    진호 같은 치트키가 없다면 경험은 할수록 좋다.

    은서는 나름대로 자신의 길을 꾸준하게 걸어가고 있었다.

    “그보다 말이야. 너네 송학 형 얘기 들은 거 없냐?”

    “송학 삼촌이요?”

    “응. 저번에 일 있다고 휴가 낸 다음에 도통 얼굴이 안 보이네. 전에 전화했을 때는 금방 돌아간다고만 말 하고. 뭐, 오가면서 들은 거 없어?”

    진호가 넌지시 물었다.

    최현석에게 물어봐도 ‘개인사정이다’라며 대충 얼버무리는 통에 자세한 걸 듣지 못했다.

    혹시 꼬꼬마들이 돌아다니다가 뭐라도 주워 들었을까 싶었다.

    “글쎄요. 딱히 별 다른 얘기는 못 들었어요.”

    “루카도. 모른다. 송학.”

    “루카, 넌 못 봤지. 너 오기 전부터 쉬고 있어서. 잠깐만. 그러고 보면 벌써 한 달이 넘었네? 이 양반 대체 뭐하는 거래.”

    셈하고 보니 벌써 시간이 그렇게 지났다.

    잠깐 쉰다는 것이 한 달을 훌쩍 넘어버린 것이다.

    그냥 저냥 일이 있겠거니 하고 넘겼는데, 이 정도면 신경을 끄기 어렵다.

    “한 번 찾아가 봐야겠네.”

    깜짝 방문.

    연예인이 매니저를 모시러 가야 할 거 같다.

    #

    송학이 사는 집이라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직접 찾아가는 건 처음이었다.

    친하다고는 하지만 사적인 교류는 적었던 걸까.

    진호는 뜬금없이 인맥에 대해서 고찰을 하게 됐다.

    띵동—

    문 앞에서의 고찰을 끝내고 초인종을 눌렀다.

    조금 시간이 흐르자 ‘누구세요?’ 라고 인터폰을 통해 목소리가 들려왔다.

    “진호입니다. 홍 진호. 송학이 형이 담당하는 연예인이요.”

    짧은 담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굉장히 부산스러운 소음이 이어지고 거칠게 문이 열렸다.

    문을 연 건 30대 초반의 여성이었다.

    “세, 세상에! 세상에! 정말로 진호 씨에요?”

    “아. 그쪽이 미라 씨죠? 형 애인이라는?”

    “네! 네! 제가 윤 미라에요. 어머나, 진짜로 진호 씨를 눈앞에서 보게 되다니. 제가 전생에 무슨 복을 쌓았다고.”

    “하하. 진즉 한 번 찾아 왔어야 했는데, 이제와 오네요. 형은 안에 있나요?”

    “아, 그이는 잠깐 나갔어요. 금방 올 테니 안에서 기다리세요.”

    “그럼 실례 좀 하겠습니다.”

    금방 돌아온다면 크게 상관없다.

    “이거 선물이요. 형한테 애인 생겼다는 말 듣고 바로 사려고 했는데 계속 깜빡했지 뭐에요.”

    “어머나, 뭘 또 이런 걸 사오고 그러세요. 진호 씨가 오셨다는 거 하나만으로 충분한데.”

    “대단한 물건 아니에요.”

    커플 잠옷을 포함한 몇 개 세트였다.

    그냥 만나는 애인 정도였으면 이런 걸 선물하지 않았을 터였지만 송학의 말로는 꽤 진지했다.

    지금 한 집에서 사는 것만 봐도 그렇게 보였다.

    “커피라도 좀 드릴까요? 아, 진호 씨 정도면 굉장히 고급 커피를 마시겠죠? 집에 있는 건 그냥 인스턴트 뿐인데.”

    “저도 그냥 평범하게 마셔요. 인스턴트면 충분합니다.”

    “어머, 다행이네요. 잠깐만 앉아 계세요.”

    진호가 그녀 손짓대로 자리를 잡아 앉았다.

    그리고 말없이 주변을 둘러봤다.

    소박하고 평범한.

    두 사람의 흔적이 가득 담겨있는 집이었다.

    결혼 사실만 빼면 신혼집이라 봐도 충분했다.

    “뜨거우니까 조심하세요.”

    “감사합니다. 집이 굉장히 아늑하네요.”

    “다 그이 작품이죠. 은근히 손재주가 좋다니까요?”

    “아, 그건 저도 알죠. 자잘하게 뜯어지거나 그러면 형이 자주 고쳐줬어요. 곰 같은데 손은 여우라니까요.”

    “아하하. 그렇죠? 저도 처음에는 참 놀랐어요. 곰같이 생긴 양반이 얼마나 세심하던지.”

    미라가 무릎을 치며 웃었다.

    공통된 화제가 있어서 그런지 대화는 어색하지 않았다.

    “근데 한 가지 뭣 좀 물어봐도 될까요?”

    “아, 네. 얼마든지요.”

    “형이 요즘 회사에 안 나오던데. 개인사라 제가 관여 할 일이 아닌 줄은 알지만 걱정이 돼서요. 곤란한 일이라도 생긴 건가요?”

    “······네? 회사에 안 나오다니요?”

    진호는 미라의 표정을 보는 순간 입을 닫았다.

    무언가 잘못 된 질문을 던진 분위기였다.

    그리고 그 순간.

    찰칵.

    키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고 문이 열렸다.

    “자기야, 나 왔어.”

    송학이 돌아온 것이다.

    #

    어색한 느낌의 침묵이 잠시 흘렀다.

    그리고 송학이 뛰어 들 듯 안으로 와서는 입을 열었다.

    “진호야, 네가 여기는 왜 와 있는 거야!?”

    “어, 그게······”

    “잠깐. 자기야, 저 얘기 뭐야? 회사를 안 나가다니? 나한테는 매일 나간다고 했잖아.”

    순식간에 말이 엉키고 표정이 굳었다.

    세 사람 모두.

    “그건 사정이 있어서 그래. 진호야 너 이렇게 함부로 찾아오고 그러면 안 되지. 나가자. 나가서 얘기하자.”

    “어딜 가. 여기서 얘기해. 매일 회사에 간다면서 나갔는데 그럼 대체 어디서 뭘 한 거야?”

    “아니, 그건 있다가 얘기를 할게. 일단 진호부터 밖으로 보내고······”

    “자꾸 왜 진호 씨를 보내려고 하는데! 앞에서 말 못 할 일이라고 벌인 거야!?”

    송학이 눈을 질끈 감았다.

    그로서는 가장 피하고 싶던 일 두 가지가 동시에 찾아온 격이었다.

    “두 분 다 잠깐 진정해 보세요. 서로 간에 뭔가 오해가 있나 봅니다. 형, 이렇게 된 거 솔직하게 말해보죠.”

    “······왜 갑자기 찾아오고 그러냐.”

    “대표님도 제대로 말을 안 해 주고 형도 피하는 느낌이라 그랬죠. 형이 회사 출근 안한지 벌써 한 달이 넘었어요.”

    “하, 한 달!?”

    미라가 두 번째 충격으로 넘어갈 것 같자, 송학이 재빨리 다가가 부축했다.

    “미안해. 도무지 말 할 방법이 안 떠올라서 그랬어.”

    “아니, 자기야. 대체 무슨 일인데 회사를 나간다는 거짓말까지 한 거야? 응?”

    “그게······”

    송학은 다시 한 번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굉장히 긴 시간을 고심하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아버지 사업이 부도났어.”

    “······부도?”

    “응. 부도 소식을 듣고 그 일을 처리 하냐고 백방으로 뛰어다녔어. 알 만 한 사람들 찾아가 손 벌리고 은행에서 도움도 받고.”

    “형! 그런 일 있으면 나한테 먼저 알렸어야죠!”

    “아무리 그래도 이건 집안일이야. 너한테 뭐라고 말을 하니? 그리고 당시에는 수습 될 거라 생각했다고.”

    송학이 길게 한숨을 토해냈다.

    어떻게 고민을 안 해 봤겠는가.

    수십 번을 고민 한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

    “수습이 안 된 거야?”

    “응. 결국 부도 처리하고 넘어갔어. 그 과정에서 아버지 쓰러지셔서 병원에 입원하고······”

    “뭐!? 괜찮으신 거야?”

    “괜찮아. 큰 일 겪어서 잠깐 휘청하신 거야. 지금은 괜찮으셔.”

    “하아. 그건 다행이네. 그럼 지금까지 그 일 처리 하냐고 회사도 안 나왔던 거야?”

    “그것도 그런데······”

    송학이 미라를 곁눈질로 살폈다.

    “뭐, 뭐야? 일이 더 있어?”

    “부도 처리하는 과정에서 돈이 많이 깨졌어. 도의적인 책임감도 있고 하니······여러 가지로 해결해야 할 빚이 많았지.”

    “설마 빚이 어마어마하게 생긴 거야?”

    “아니, 그 정도는 아니야. 빚은 없어. 어떻게든 집안 살림 처분하면서 대충 다 틀어막긴 했지. 근데, 그러다 보니 모아둔 돈도 전부······”

    “모아 둔 돈? 설마 자기 그 돈?”

    “응. 우리 결혼 자금까지 전부 써버렸어.”

    송학이 무릎을 움켜쥐었다.

    어떻게든 돈을 융통해 볼까하고 백방으로 뛰어 다녔지만 마땅한 수가 없었다.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고민하다가 결혼 자금을 쓸 수밖에 없었다.

    “멍청아!”

    “아야!”

    그런 송학의 뒤통수를 마리가 힘껏 후려쳤다.

    얼마나 힘이 셌던지 몸이 들썩일 정도였다.

    “그 돈이 뭐라고! 당장 그 돈 없으면 우리가 죽어!? 아니면 나라가 망해!? 그런 일 있으면 나한테 말하고 같이 고민을 했어야지!”

    “하, 하지만 자기가 얼마나 결혼식을 고대했는지 내가 알고 있잖아. 그걸 어떻게 안 된다고 말을 해?”

    “멍청아! 이 곰탱아! 그래서 회사 나간다는 거짓말까지 해가면서 설친 거야!? 그게 대체 뭐하는 짓이야!? 여기 진호 씨도 걱정하게 만들고!”

    퍽. 퍽. 퍽.

    후속타가 이어졌다.

    마리는 작정을 하고 송학을 두들겼다.

    “지, 진호야 좀 말려봐.”

    “형은 맞아도 싸요. 나는 샌드백이다, 하고 좀 더 맞으세요.”

    “야, 너 의리 없게.”

    “의리는 형이 없죠. 날 얼마나 멀리 봤으면 그런 일이 있는데도 한 마디 안 해요? 우리가 같이 일 한 기간이 짧아서 그래요? 그냥 매니저 연예인 관계로 선 긋고 그러기로 했어요?”

    이번에는 진호가 따박따박 말로 송학을 후려쳤다.

    끄는 끙 소리만 내며 고개를 숙였다.

    이래저래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다.

    “진호 씨가 말 잘 했네. 사람이 의리가 없어. 결혼도 약속한 사람한테 어떻게 한 마디 안 할 수가 있어? 날 얼마나 남처럼 생각한 거야?”

    “아, 아니야! 절대로 그런 거 아니야. 괜한 걱정 끼치기 싫었을 뿐이라고. 다 잘 마무리 되면 굳이 걱정 안 해도 되니까.”

    “잘 되긴 이 화상아! 그런 일이 어디 뭐 말없이 끝나는 거 봤어? 게다가 아버님 병원에 간 일도 숨기고! 날 대체 어떻게 생각하시겠어!?”

    “그건 내가 잘 설명 해 뒀어······”

    “퍽이나 그대로 믿으시겠다! 염치없는 며느리로 보겠지!”

    송학의 고개가 점점 더 내려갔다.

    아예 바닥에 박힐 지경이었다.

    “하아. 미라······형수님이라고 불러도 되죠?”

    “지금 같아서는 좀 더 생각해 봐야 할 거 같아요.”

    “그래요. 저 곰 같은 사람과의 미래는 신중하게 한 번 고려해 보시고.”

    “야, 야! 너, 뭐라는 거야?”

    “됐고. 형은 나랑 같이 좀 가.”

    “어딜?”

    “일단 뭘 알아야 내가 돕든 지 말든지 할 거 아니냐고. 상황이 얼마나 안 좋은지 부터 확인하자.”

    진호가 아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야, 야! 그러지 마! 다 알아서 해결 했다고.”

    “결혼은? 안 할 거야? 아예 헤어지게?”

    “뭐래! 누가 헤어진다고 그래? 절대 안 헤어져! 내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우리 미라 행복하게 해 준다고!”

    버럭 외치는 송학에 미라의 얼굴이 붉어졌다.

    화를 내는 것도 다 애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모습에 진호가 가볍게 웃었다.

    “그러니까. 형은 잠자코 좀 따라와. 나 홍 진호야. 내가 형 결혼식 하나 정도 해결 못 할 사람으로 봐? 우리가 남이야?”

    “야······진호야.”

    “남으로 봤으면 아예 매니저 바꾸고.”

    “아니야! 누가 남으로 봤다고 그래. 너한테 그런 소리 하는 게 너무 미안하고 민망해서 그랬지.”

    “참, 형도 답답하다. 곁에서 봤으면서 날 그렇게 모르나? 내가 그런 거 외면할 사람이야?”

    송학이 고개를 저었다.

    아닌 걸 알기에 더 말하지 못했던 것이기도 했다.

    자신이 속물처럼 보일까봐.

    “알면 됐어. 따라 와. 내 매니저 정도 되는 사람이 생활고로 힘들다는 거, 내가 용납 못해. 결혼식? 아주 바스라지게 해 줄 테니까 각오 단단히 하고.”

    “······”

    “뭐해, 일어나!”

    그제야 송학이 곰처럼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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