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만 전생 배우-105화 (105/178)
  • Chapter47. 프로듀서(1)

    흐름이라고 해야 할까.

    진호가 던져 놓은 커다란 불씨는 걷잡을 수 없이 타올랐다.

    한 일 양국만이 아니라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 된 것이다.

    어떤 공연이 펼쳐지는 걸까, 누가 참여하는 걸까, 과연 결과는 어떻게 되는 걸까.

    세간의 관심이 쏠리다 보니 되레 정치적으로는 소강상태에 빠지게 됐다.

    “눈치 보는 거지?”

    “눈치 보는 거야.”

    은서의 질문에 바로 답하는 진호.

    양 국이 정치적인 행보를 잠시 보류하는 것이 공연의 여파라는 것이다.

    고작 공연 하나에, 라고 물을 수도 있지만 엮인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특히 일본의 경우는 일왕의 행보를 염두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 쪽이 우호적인 제스처를 취하는데 정치적 보복을 해 버리면 ‘왕가와 내각이 갈라졌다.’ 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일단 시간을 벌어서 좋아하는 눈치네.”

    “정치인들이 무능력해 보이는 건 둘째 치고 일본의 정치 보복을 일시적으로나마 멈추게 했으니까.”

    “그래서 오빠보고 외교관이라고 부르는 거구나.”

    인터넷에서 유행하는 말.

    민간 외교관, 진호.

    정부가 하지 못하는 외교를 민간인이 나서서 하고 있다는 비판을 담고 있다.

    “결국 공연만 제대로 하면 되겠네. 준비는 잘 돼 가?”

    “일단 공연장은 빌렸어. 도쿄돔.”

    “도쿄돔? 그걸 잘도 대여해 줬네?”

    “내각이 주춤하니 돈 냄새 맡은 사람들이 기어 나오는 거지.”

    정치적인 문제를 제외하고 이런 공연은 큰돈이 움직이는 기회다.

    실제로 일본 내부에서도 슬금슬금 출연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등장하고 있다.

    “구성은? 지금 출연진 목록 보자면 상상이 잘 가지 않는데 말이야.”

    “드라마틱하게 구성하고 있어. 전체 공연을 하나의 연극으로 꾸밀 생각이야.”

    “전체를? 이해를 못하겠어.”

    “기승전결을 뚜렷하게 두고 연기, 춤, 노래, 뮤지컬, 행위예술 등으로 이어가는 거야. 하나의 주제를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는 거지.”

    “······너무 난해하지 않을까?”

    “난해하지. 하지만 그 난해함을 관객들을 위해 풀어주는 것이 우리 아티스트의 역할이잖아.”

    진호는 머리에서 별빛이 반짝이는 걸 느꼈다.

    각기 다른 분야의 아티스트들이 한 가지 주제를 가지고 힘을 합치는 그런 장면.

    별빛처럼 반짝이는 모습이었다.

    “즐거워 보이네.”

    “즐겁지.”

    한 점의 거짓도 없었다.

    #

    일이 커지니 사람도 많이 모였다.

    진호가 섭외하고 인맥을 통해서 연락한 사람을 제외하고도 많았다.

    지금 이 상황을 기회라고 여긴 사람들이다.

    “처음 뵙네요. 유연주라고 해요.”

    큰 기획사 소속 연예인들도 여럿 연락을 해 왔다.

    눈앞의 여자, 유연주도 그런 부류였다.

    주말극의 여왕.

    채 서른이 안 된 나이로 농익은 연기를 하며 주말 안방을 사로잡은 여배우다.

    소속사를 통해 연락을 한 뒤 진호와 개인적인 만남을 부탁했다.

    “진호입니다. 오늘은 배우가 아닌 기획자로 만나게 됐네요.”

    “후후. 진호 씨는 명함이 많죠. 익히 알고 있습니다.”

    “그런가요?”

    “네. 배우, 투자자, 선생님, 기획자. 다음에는 또 무얼 할 지 궁금해지네요.”

    초승달 같은 눈웃음이 스크린에서 보던 것만큼 매력적이었다.

    “이번 공연에 참여하고 싶다고 했죠?”

    “네. 소속사를 통해서도 얘기를 드렸지만, 공연의 취지가 매우 마음에 들어서요. 한 손 거들 수 있다면 좋을 거 같아요.”

    “그렇게 생각해주시니 고맙네요. 근데, 이번 공연은 기존의 연기와는 조금 다를 겁니다. 정극을 하시던 분은 낯설 수도 있어요.”

    “달라봐야 얼마나 다르겠어요. 어차피 연기잖아요. 연기라면 어떤 걸 해도 자신 있습니다.”

    다소곳하게 말하지만 눈에서는 자신감이 읽혔다.

    그건 실력에 대한 반응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커리어에 대한 자부심이기도 했다.

    “그럼 혹시······동물 연기도 됩니까?”

    “네?”

    “개와 원숭이로 양국 관계를 표현하려고 하는데. 가능한가요?”

    “잠깐만요. 그런 건 애들 공연에서나 하는 거 아닙니까. 이런 대규모 공연에서 그런 걸 한다고요?”

    유연주는 불쾌하다는 듯 손사래를 치며 답했다.

    “연기에 애들이고 어른이 어디 있습니까. 전체적인 무대 흐름 상 필요한 부분입니다. 할 수 없다면 아쉽게도 같이 일하긴 어려울 거 같네요.”

    “잠깐만요. 농담이죠? 저 유연주에요, 유연주.”

    “압니다. 직접 소개하지 않았습니까.”

    “아니, 저 시청률의 여왕 유연주라고요. 절 그냥 동물 연기 같은 것에 쓸 생각이라고요?”

    “그래서 제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정극과 다른 부분이 많다고. 저한테 필요 한 건 무대를 위한 배우지 시청률을 견인하는 스타가 아닙니다.”

    어디 유연주 하나뿐이겠는가.

    혹시나 건수가 있을까 하고 문의를 넣은 사람이 한 트럭은 된다.

    대부분이 이번 공연을 단순한 퍼포먼스 정도로 취급하고 있다.

    얼굴을 비추고 스포트라이트만 받아 갈 기회.

    어림도 없는 생각이다.

    진호는 무대를 빡빡하게 구성하고 있다.

    스타고 유명인이고 상관 안하고 필요한 곳에 필요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하! 어디 얼마나 잘 나가나 두고 봅시다. 기가 막혀서. 동물 연기라니.”

    그렇게 지워진 이름도 수십.

    화내며 퇴장하는 유연주를 보며 진호가 리스트에 한 줄을 슥 그었다.

    페이지 90%를 채우고 있는 줄에 하나가 더해진 것이다.

    “대표님, 다음은 누구라고요?”

    그렇다 해도 기준을 낮출 생각은 없다.

    다음 지원자의 프로필을 꺼내들었다.

    #

    어쩌다보니.

    딱 그 말이 맞다.

    진호의 공연 계획은 우발적이었으나 행동 자체는 굉장히 치밀했다.

    그 바탕에 수많은 전생이 있음은 당연한 일.

    그렇다보니 몇 몇 손이 닿지 않는 영역에 전문가를 초빙한 걸 제외하고는 모든 일을 직접 처리했다.

    공연장 대관부터 아티스트의 섭외.

    무대 기획과 연출에 대한 전반적인 조율까지.

    조언을 구했다고는 하지만 결국 형태는 그의 손아래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거 참. 나도 연극바닥에 오래 있어봤지만, 너 같은 사람은 또 처음이다.”

    최현석은 곁에서 그 모습을 모두 지켜봤다.

    그리고 혀를 내두르는 걸 망설이지 않았다.

    소극장에서 하는 작은 연극조차 손이 얼마나 많이 가는가.

    무대 배치, 소품, 의상, 대사, 연기에 쓸 장비······

    능숙한 무대감독이라고 해도 버거운 일이다.

    근데 그걸 생짜 배우가 하고 있다.

    보고도 못 믿을 일이라는 것이 바로 이랬다.

    “그냥 하다보니까 된 거죠, 뭐. 다른 분들이 많이 도와주기도 했고.”

    “자식아, 이제 와서 겸손이냐? 무대 연출 회의 할 때는 그렇게 사납게 굴더니.”

    “그거야 중요한 부분이니까 그렇죠. 한 곳에서 실수하면 전체가 다 망하는 구성이잖아요.”

    “그야 그렇지. 참 너도 괴팍하게 무대를 구성했다.”

    공연에 대한 전체 틀이 잡혔다.

    주제는 관계의 회복.

    세상에 혼자 살 수 있는 사람은 없고, 결국 힘을 합치는 것이 해답임을 교훈적으로 제시하는 내용이다.

    주연은 둘로 구성되어 각각 일본과 한국을 대변.

    내용은 관계의 틀어짐, 갈등의 고조, 위기, 관계의 회복으로 구성되었다.

    “루카도 공연에 나간다고 했지?”

    “네. 관계를 회복하고 난 뒤 춤으로 그걸 표현 할 거예요.”

    “되겠냐? 아무리 재능이 있어도 열 살 도 안 된 애야. 그 큰 무대에서 감당 할 수 있을지······”

    “할 수 있어요. 아니, 루카가 아니면 안 되는 부분이에요. 문화적 차이를 떠나서 단순하게 춤 하나로 모두를 이해시킬 수 있는 힘. 그게 루카의 재능이에요.”

    진호는 가만히 루카를 상상했다.

    그의 빛이 하늘 위에서 반짝이는 기분이 들었다.

    수없이 연결된 별자리처럼 루카 역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참. 이럴 때는 재능의 벽이 뭔가 싶기도 하다.”

    “왜요, 대표님도 재능 있잖아요.”

    “놀리는 거냐?”

    “절 찾아낸 재능이요. 그거면 충분하지 않아요?”

    “뭐? 푸하하! 그래, 인마. 그게 가장 훌륭한 재능이다.”

    최현석이 크게 웃었다.

    말마따나 이보다 더한 재능이 또 어디 있겠는가.

    무려 진호와 계약을 따 낸 능력자니까.

    “가요, 재능 충분한 대표님. 할 일이 많아요.”

    “오냐. 이 재능, 마음껏 발휘해 주마.”

    나란히 웃으며 다음으로 나아갔다.

    #

    “대체 어떻게 하라는 겁니까?”

    장소가 정해지고 사람들이 모였다.

    그렇다면 무대를 위한 연습이 필요했다.

    워낙 다양한 인종, 다양한 분야, 다양한 방법으로 일하던 사람들이다.

    총 연출을 진호가 디렉팅 한다고 해도 한 번에 이해가 될 리 없었다.

    “두 분은 이쪽으로 서시고, 나머지 분들은 뒤로 이동해 주세요. 무대를 바라보는 방향으로.”

    “병풍처럼 말입니까?”

    “그러니까 여러분이 파도를 상징하는 겁니다. 한 번에 무대 앞으로 밀려오고 장내가 암전되었을 때, 연극 무대로 바뀌는 거죠.”

    “무대는 돔 아닙니까? 소극장도 아닌데······”

    “한 면씩 연습하는 겁니다. 전부 사면으로 구성할 거죠.”

    지금 이곳에 운집한 사람들은 전부 베테랑이다.

    특히, 연극 쪽에 잔뼈가 굵은 이들로 모였다.

    그런데도 진호의 연출 방식을 이해하지 못해서 헤맸다.

    “심플하게 한 번 보고 가시죠. 2번, 3번. 신호주면 조명 바로 꺼 주세요.”

    진호가 아예 무대 위로 올라갔다.

    서 있는 방향을 확인하고 발을 콱 굴렀다.

    쿵, 쿵, 쿵.

    세 걸음으로 무대 중앙에서 외곽 지역까지 닿았다.

    “조명.”

    그리고 신호에 따라 조명이 꺼지고.

    두 호흡 정도가 지났을 때, 다시 불이 들어왔다.

    무대를 훑으며 이동했던 진호는 처음 자리보다 두 걸음 더 뒤쪽에 도달해 있었다.

    “여기에서 장막이 리프트 됩니다. 파도가 걷히고 배우들은 연기를 하는 거죠. 이해했습니까?”

    “음. 암전 후에 바로 연기라. 배우들이 몰입하기 쉽지 않을 거 같습니다만.”

    “흐름을 쭉 가져와야죠. 백 선배님 잠깐 상대역 좀 해주실래요?”

    연극만 30년차, 백종하가 진호 손짓에 무대 위로 올라갔다.

    “이 무대 전이 행위예술인 건 알고 계시죠?”

    “아까 몇 사람 연습하는 거 봤습니다. 표현이 강렬하기는 하지만······”

    “그 상태에서 감정을 가져와야 합니다. 누가 봐도 다른 두 무대가 같은 걸 공유하고 있다고 느껴야 하죠.”

    “······지나치게 어려운 주문 아닐까요?”

    “이 무대 자체가 도전입니다.”

    진호가 손을 들어 올리고 딱 튕겼다.

    전과 마찬가지로 조명 팀에서 불을 껐다.

    사방이 암전되고 침묵이 5초 정도 흘렀다.

    그리고 다시 불이 들어왔을 때.

    “허.”

    진호는 바닥에 앉아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것도 괴로움에 한 쪽 눈이 파르르 떨리는 채로.

    여러 가지 감정이 뒤엉켜서 보는 사람이 다 괴로울 정도였다.

    “우린 연기자입니다. 전체가 극이라 생각하세요. 행위 예술가들을 팔처럼, 뮤지컬 배우들을 다리처럼, 댄서들을 혀처럼. 전부 하나의 연기라 생각해야 합니다.”

    “전체를 극으로 생각해라······”

    “우리가 흐름을 놓치면 관객은 따라오지 못합니다. 우리는 그들이 이해 할 만큼 강렬하고 직관적으로 표현해야 합니다. 할 수 있습니까?”

    “허. 이 나이에 그런 말을 들을 줄은 몰랐습니다.”

    “건방지게 들렸다면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아니에요. 연기에 위아래가 어디 있겠습니까. 모자라면 배우고 노력해야지.”

    백종하가 진호 맞은편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리고는 눈을 감고 무대의 흐름을 짚었다.

    행위 예술가들의 몸짓이 조금은 다르게 다가왔다.

    표현만 다를 뿐 그들 역시 같은 걸 연기하고 있었다.

    “해 봅시다. 나, 진호 씨랑 함께라면 할 수 있을 거 같습니다.”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선배님.”

    모자란 것은 배우며 채워간다.

    공연은 조금씩 생명을 품어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