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만 전생 배우-101화 (101/178)
  • Chapter45. 태극기 휘날리며(1)

    이른 시간임에도 공항에는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다.

    방일은 맞이하는 공무원과 취재진은 둘째 치더라도 어떻게 알고 찾아온 일반인 숫자가 상당했다.

    공항 밖까지 사람이 꽉 메워져 있을 정도였다.

    “이건 누군가 흘린 거 같죠?”

    “아무래도. 시간까지 맞춰서 나올 정도라면 미리 알지 못하면 어려워.”

    “어지간히도 알리고 싶었나 보네요.”

    진호는 찾아온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며 중얼거렸다.

    이 정도의 규모의 인파라면 이미 언론 등에서도 소식을 연신 때리고 있을 터.

    적당히 묻어가기에는 일이 커진 상태였다.

    “진호 상. 일본에 오신 소감이 어떤가요?”

    취재진 중 누군가 한국말로 물었다.

    일본 쪽 취재명함을 달고 있었는데, 발음이 꽤 정확했다.

    “평소와는 다르게 조금은 긴장되네요. 양국의 우호를 위해 초대 된 만큼 제 역할을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체류기간 중에 일본 방송에 출연한다고 들었습니다. 사실인가요?”

    “네. 사전에 약속 된 프로그램이 몇 개 있습니다.”

    “어떤 건지 알 수 있을까요?”

    “글쎄요. 그걸 알아내는 것도 나름의 재미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진호는 에둘러 답을 하고는 자리를 벗어났다.

    어차피 정해진 기자회견 자리가 아니었던 터라 굳이 긴 말은 필요 없었다.

    “잠시 만요! 한 가지만 더 묻고 싶습니다!”

    물론, 그럼에도 달려드는 기자는 항상 있다.

    검은 모자에 점퍼 차림.

    턱 수염이 언뜻 보이는 남자가 잰 걸음으로 다가와서는 마이크를 내밀었다.

    “칼이다!!”

    “막아!”

    아니, 마이크처럼 보이는 칼이었다.

    남자는 앞 쪽 무리를 손으로 밀쳐내고는 들고 있던 칼을 진호 쪽으로 휘둘렀다.

    이동 중이라 경호원과의 거리가 살짝 벌어져 있던 상황.

    사람들은 공포와 놀람으로 비명을 내질렀다.

    쾅—!

    하지만 진호는 당황하지 않았다.

    순간적으로 조운의 경험이 힘을 발휘하며 칼을 쥔 손을 비틀었다.

    괴한은 중심을 잃은 채 그대로 고꾸라졌다.

    그 뒤를 경호원들이 덮쳐서 제압하는 건 순식간이었다.

    “크아아! 죠센징! 네놈들은 대일본제국 땅에 발붙일 수 없다!!”

    “······”

    “놔! 놔라 이 배신자들! 저 죠센징 놈을 이 자리에서 죽이는 것이 천왕 폐하에 대한 충성이다!”

    남자는 경호원에게 붙잡힌 상황에서도 발악했다.

    능숙한 한국말에도 불구하고 내용은 극단적인 극우 성향을 띄고 있었다.

    흔히 말하는 혐한론자였다.

    “진호 님. 이곳은 위험하니, 일단 이동부터 하시죠.”

    “······네.”

    경호원의 조언에 따라 진호는 시선을 떼고 이동했다.

    그 모습을 취재진들이 연이어 찍었다.

    한 때의 사고치고는 제법 큰일이었다.

    #

    한 번의 사고가 있었지만 일정은 계획대로 진해되었다. 각국의 대표들이 공식적인 만남을 가지고 현 정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진호도 이에 몇 마디 거들기는 했으나 기본적으로는 얼굴마담이었다.

    행사는 1시간 반 만에 끝나고 주연으로 이어졌다.

    [오오. 드디어 보게 되는군요]

    그리고 그 자리에서 일왕과 만났다.

    TV나 신문 등에서 보던 모습보다는 야위어 있었다.

    주름 가득한 얼굴에 사람 좋은 미소를 짓고는 진호 곁을 맴돌았다.

    그가 하는 말이라고는 영화에 대한 것 뿐.

    연출이 좋았다, 연기가 좋았다, CG가 훌륭했다.

    말 그대로 순수한 영화 팬의 감상뿐이었다.

    일왕이라 그래서 무언가 더 한 것을 기대했던 진호는 살짝 실망하고 말았다.

    [폐하. 이제 돌아가야 할 땝니다]

    [벌써 말인가? 아직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많은데]

    [정해진 시간이 있지 않습니까. 이 이상은 곤란합니다]

    그 시간마저도 길지 않았다.

    공무원 비슷한 사람이 와서는 일왕을 데려가 버렸다.

    못내 아쉬워하며 미련을 보인 일왕이었으나 거부하지는 못했다.

    왕 이면서 왕이 아닌 모습이었다.

    “천왕께서도 물러났으니, 이제 이야기를 나눠 봅시다.”

    그렇게 주연의 1차가 끝났을 때.

    일왕이 사라진 진짜 주연이 시작되었다.

    음식, 노래, 분위기, 시중드는 사람들까지.

    첫 번째 주연과는 모든 것이 달랐다.

    “자자, 진호 씨도 편하게 한 잔 합시다.”

    “······이게 무슨 자리입니까? 다들 익숙해 보이는군요.”

    “한일관계가 어디 떨어지려야 떨어 질 수 있는 관계입니까. 지금 으르렁거린다고 해도 언제든 다시 붙기 마련이죠.”

    “그럼 공식 일정은?”

    “일정은 일정이고 술자리는 술자리 아닙니까. 하하. 마음 편히 비우고 쉬시면 됩니다.”

    장관을 비롯한 수행 비서들.

    일본 쪽에서 나온 고위 관료들도 비슷했다.

    익숙하다는 듯 술을 마시고 농담을 지껄였다.

    양국 간의 우호를 위한, 이라는 표면적인 이유 따위는 전혀 상관없었다.

    “······절 부른 건 일왕 때문이었군요.”

    “이런 일에는 고집부리지 않는 사람인데 어지간히 팬이었던 모양입니다. 모양새를 맞추려면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모양새? 실무는 없는 겁니까?”

    “하하. 이게 실무 아닙니까. 자리만 갖추고 궁색만 맞추면 어차피 알아서 굴러 갈 겁니다. 한일관계라는 건 언제나 그랬으니까요.”

    진호는 대꾸 할 힘을 잃고 주변을 봤다.

    나라 일을 한다는 사람들이 태평하기 짝이 없었다.

    외부에서는 관계 단절이니 뭐니 위급하게 보는데, 정작 중심 실무자들은 이런 꼴이었다.

    일본 쪽 인사들이 태평 한 건 이해 할 수 있었지만 국내의 실무자가 이러는 건 납득이 안 됐다.

    “제 방송 출연이나 분위기를 위한 협조······같은 건 어찌 된 겁니까?”

    “말하지 않았습니까. 이렇게 있는 게 외교입니다. 우리가 날 세우지 않고 일본 쪽과 친밀하게 지내면 되는 거 아닙니까.”

    “······너무 대책 없는 말 아닌가요?”

    “하하. 설마 우리가 무슨 서희같이 외교 담판이라도 지을 줄 알았습니까? 진호 씨는 일왕의 초대 때문에 온 것이고, 저희는 늘상 있던 일이 어그러지지 않게 잘 봉합한 겁니다.”

    모양새 갖추기. 구색 맞추기.

    진호가 반드시 참석해야 했던 이유는 일왕의 요구에 따른 퍼즐이었던 것 뿐이다.

    실제로 어떤 역할도 없었다.

    이 모든 것이 요식행사였으니까.

    “전, 속이 안 좋아서 먼저 물러나죠.”

    더 이상은 이런 자리에 있고 싶지 않았다.

    진호는 흥겹지 않은 주연 자리를 벗어났다.

    #

    진호는 이 정도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정치인들이 썩고 하는 일이 엉망이라는 건 상식.

    하지만 그래도 똑똑한 이들로 선별하여 높은 자리에 앉혀 둔 것 아닌가.

    어느 정도 선은 지킬 거라 여겼다.

    “생각보다 더하다니.”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관계없다는 태도.

    내 자리 편하고 내 돈 멀쩡하면 그만이라는 마음.

    거창한 공식 행사와 많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타국까지 왔음에도 하는 일이라고는 없다.

    무능함도 이런 무능함이 또 있을까.

    이런 사람을 대표라고 응원하던 국민들이 불상할 지경이었다.

    “응?”

    그렇게 호텔 발코니에 몸을 걸치고 생각하던 찰나.

    도심의 잔영 사이로 반짝이는 불빛 무리가 눈에 들어왔다.

    그 숫자가 상당한 것이 기 백이 넘어 보였다.

    ‘공연이라도 있는 걸까?’

    멀리서는 제대로 된 모습을 알아보기 어려웠다.

    내려가서 볼까.

    망설임은 잠시.

    어느새 몸은 엘리베이터를 탄 채 움직이고 있었다.

    [일본에서 한국 놈들을 몰아내자!]

    [죠센징은 자기 나라로 꺼져라!]

    [일본은 일본인의 땅이다! 당장 꺼져라!]

    그렇게 플로어로 내려오자 소리가 뚜렷하게 들려왔다. 멀리서 보던 반짝임은 상상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거리를 가득 메운 무리는 시위대였다.

    그것도 한국인을 혐오하는, 혐한 시위대였다.

    “손님. 지금은 밖으로 나가지 않는 편이 좋을 겁니다.”

    문가를 서성거리는 진호에게 호텔 직원이 경고했다.

    발음이 뚜렷한 것이 한국인 같았다.

    “한국인입니까?”

    “아뇨. 국적은 일본인입니다. 한국에서 오래 산 덕에 말은 어렵지 않게 쓸 수 있죠.”

    “그렇군요. 일본인이라. 지금 나가면 위험하다 이거죠?”

    “네. 최근 들어 혐한 시위가 많아졌습니다. 거리에서 휘말리면 좋지 않은 일을 당할 겁니다.”

    이미 공항에서도 한 번 데이지 않았는가.

    눈에 핏발 세우고 소리치는 시위대를 보니 직원의 말이 농담으로는 안 들렸다.

    “요즘 분위기가 많이 안 좋은 모양이군요.”

    “매우 안 좋습니다. 심심치 않게 폭행 사건이 일어나는데, 경찰에서는 되레 쉬쉬하는 분위기입니다. 한국인을 폭행하면 잘 했다고 박수치는 사람도 더려 있죠.”

    “······진짜입니까?”

    “사람들이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분위기가 험악합니다. 대놓고 드러난 혐한 시위도 그렇지만, 암암리에 번지는 차별문화는 더욱 심하죠. 이젠 거리에서 한국인이라고 대놓고 말하기가 어려울 정도입니다.”

    직원의 목소리는 굉장히 작았다.

    이런 말조차 크게 못 할 정도로 주변 눈치를 보는 것이었다.

    “일본 사람들도 모두 그렇게 생각하는 겁니까?”

    “모두는 아니다······라고 말하고 싶네요. 하지만 최근 들어서는 젊은 층에서도 한국을 배척하는 분위기가 팽배합니다.”

    “젊은 층에서도 말입니까?”

    “정치권의 선동, 언론의 장난질, 뿌리 깊은 제국주의. 말하자면 한도 끝도 없죠.”

    “이런 현상을 싫어하는 눈치네요.”

    “10년 넘게 한국에서 살았습니다. 누가 옳은지 정도는 알고 있죠.”

    직원의 얼굴은 꽤나 참담했다.

    단순하게 10년이라 말했지만, 그보다 깊은 인연이 한국에 있었던 것 같다.

    “이건 꽤 우스운 일이네요. 한국 정치인들의 볼품없는 모습을 방금 보고 왔는데······”

    “정치인들로 치자면 일본은 악독한 쪽입니다.”

    “한 쪽은 한심하고 한 쪽은 악독하다. 결국 휘둘리는 건 보통 사람들이라 이거군요.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진호가 고개를 들고 호텔 밖을 바라봤다.

    깃발을 들고 행진하던 시위대가 저 멀리 사라져 가고 있었다.

    ‘한심함과 악독함 사이라. 애국심이 절절 끓지 않는 것이 서러울 뿐이군.’

    진호는 깊이 한숨지었다.

    #

    진호의 일본 매니저가 커다란 캐리어를 낑낑 거리며 끌고 들어왔다.

    한국에서 진호가 직접 챙겨서 가지고 온 옷들이었다.

    “저기, 진호 씨. 협찬 받아온 옷들은 안 입나요?”

    “생각해 봤는데 이번 방송에는 제 옷들로 챙겨 입고 갈게요.”

    “협찬 쪽에서 싫어 할 텐데.”

    “나중에 미안하다고 하면 되죠. 오늘 입기에 적당한 옷이 없어서 그래요.”

    진호가 캐리어를 툭툭 치며 답했다.

    “특별한 옷이라도 있나 봐요?”

    “그냥 쓸 곳 있나 싶어서 챙겨 온 옷인데, 아무래도 입어야 할 거 같아요.”

    “무슨 옷인지 봐도 될까요?”

    “그럼요.”

    매니저는 궁금한 얼굴을 한 채 캐리어를 열었다.

    여러 가지 무늬의 셔츠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딱히 특별하지는 않은데.’ 고개를 갸웃거리며 셔츠를 뒤적였다.

    “어? 뭐야, 이거.”

    그러다 진호가 말 한 특별한 옷을 발견했다.

    “괜찮겠죠?”

    “이거 진짜 입게요?”

    “어제 오늘 생각을 해 봤는데, 한 벌 빼 입고 확실하게 어필하는 것이 나을 거 같아요.”

    “······이거 뒷말이 꽤 나올 거 같은데.”

    “뒷말 나오라고 입는 거죠.”

    진호가 옷을 꺼내 양 손으로 쫙 펼쳤다.

    개량 한복 타입.

    상의가 무릎까지 내려오는 형태였다.

    이것까지는 대수롭지 않았지만 옷에 새겨진 문양이 꽤 자극적이었다.

    “앞면에는 태극기. 뒷면에는 광복절 기념이라.”

    “매운맛이죠?”

    낄낄 웃는 진호를 보며 매니저는 입을 다물었다.

    매운 맛을 넘어서 아린 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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