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만 전생 배우-98화 (98/178)
  • Chapter43. 나와 같은 이들이(4)

    루카는 발뒤꿈치를 들며 주변을 기웃거렸다.

    종종 오곤 하는 마을 광장에 평소보다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마을 대표가 ‘굉장한 볼거리’라며 사람들을 몰아온 덕분이었다.

    현지인과 관광객들이 뒤섞여 꽤나 난잡했다.

    [뭘 보러 오라는 거야 대체]

    루카가 불만 섞인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전날 봤던 외지인 중 하나가 ‘내일 광장으로 와 봐.’라는 말로 자신을 밖으로 꿰어냈다.

    혹해서 오기는 했지만 복잡하게 엉킨 군중들 속에서 얻을 만 한 건 없어 보였다.

    ‘어차피 지나가는 외지인이야.’

    진지하게 춤을 봐 주고 속 좋은 제안을 해 준 것은 고맙다.

    하지만 그것 뿐.

    어차피 외지인인 그는 이곳의 삶을 이해하지 못한다.

    [저기, 니피 꼬맹이다. 소매치기 조심하라고]

    [쯧. 저, 거렁뱅이 같은 것들]

    [아예 출입금지를 시킬 수는 없나?]

    귀에 칼날처럼 박히는 목소리들.

    루카가 어금니를 꽉 물고는 몸을 돌렸다.

    역시 이곳에는 오는 것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이렇게 모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때였다.

    누군가의 목소리가 돌아서는 루카의 발을 잡아챘다.

    몇 번 들어본 것이 전부인 목소리였지만 이상하게도 머리에 뚜렷하게 남아 있었다.

    [제 이름은 진호. 한국에서 온 영화배우입니다]

    그래, 저 남자.

    루카의 몸이 다시금 돌아서고 있었다.

    #

    진호는 루카의 입장에서 생각했다.

    과연 어떻게 해야 루카가 자신을 믿고 따를 수 있을까.

    말로? 그건 어렵다.

    애초에 자신은 외지인.

    마음에 벽을 딱 치고 있는 아이를 고작 몇 마디 말로 설득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기에 보여주기로 마음을 먹었다.

    진호가 그렇듯, 세미가 그렇듯, 엘빈이 그러했듯.

    동류는 동류를 알아보는 법이다.

    직접 두 눈으로 자신과 같은 부류를 보고 느낀다면 백 마디의 말보다 나을 것이라 여겼다.

    [에이전트 식스! 맙소사! 진호라고, 진호!]

    [한국의 영화배우? 세상에! 유명 배우가 페루에는 무슨 일로 온 거야?]

    [봐봐, 멍청아. 온 게 중요한 일이 아니라고. 대체 저런 배우가 왜 여기서 공연을 하는 거야?]

    웅성거리는 사람들.

    관광객을 중심으로 하나 둘 알아보기 시작하니 금세 들불처럼 번졌다.

    길거리에서 얼굴을 반 쯤 가린 채 돌아다니는 진호와 무대 위에서 떳떳하게 선 진호는 다른 사람이었다.

    오가며 몇 번이나 얼굴을 봤던 관광객들도 이제야 그의 얼굴을 알아보고 환호했다.

    [전 휴가 중입니다. 마음의 안식을 얻을 겸 이곳 페루로 여행을 왔죠]

    소요가 가라앉았을 때 진호가 천천히 운을 떼었다.

    [마을은 아름답고 문화는 찬란하며 사람들은 친절했습니다. 영화 촬영으로 지친 제 몸과 마음을 충분히 다독여 주었죠]

    호의적인 인사로 좋은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 첫째.

    [그래서 저도 무언가 보답을 하고 싶었습니다. 이왕이면 의미가 있는 것으로. 그래서 찾다보니 이곳의 전통춤이 눈에 들어오더군요]

    익숙한 것으로 시작하는 것이 둘째였다.

    진호의 손짓에 대기하고 있던 무리들이 우르르 올라왔다.

    관광객들을 상대로 전통춤을 추던 무리였다.

    [짧은 시간에 불과하지만 이곳의 춤을 배워 봤습니다. 축제는 서로 어울리는 것 아니겠습니까? 제가 여러분들을 위해서 흥을 올려볼까 하니 부디 흉하다고 욕은 하지 마시기를]

    [우와! 우리가 어디 가서 유명 배우의 춤을 봅니까!]

    [멋져요! 페루에서 페루의 춤이라니!]

    [꺄아악! 저 완전 팬이에요!]

    적당히 분위기가 잡혔다.

    진호가 무대 위로 올라온 이들과 눈을 맞춘 뒤 자리를 잡았다.

    연습 기간은 고작 하루에 불과했지만 충분했다.

    어차피 완벽한 춤을 추고자 하는 건 아니었다.

    둥. 둥.

    묵직한 북소리와 함께.

    진호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

    사람들은 환호했다.

    진호의 춤은 완벽하지 않았지만 그럭저럭 전통춤의 형태를 구현하고 있었다.

    그걸로 충분하지 않은가.

    이국의 유명 스타가 자국의 전통춤을 배워서 공연을 해 준다는 사실 자체로.

    [······]

    하지만 한 사람 만큼은 그럴 수 없었다.

    바로 루카였다.

    루카는 진호의 무대를 보며 손을 움켜 쥔 채 참아야 했다.

    동작과 동작.

    호흡과 호흡 사이의 이질감이 그를 계속 자극했기 때문이다.

    차라리 진호가 아닌 다른 팀이면 괜찮다.

    저들은 어차피 개량된 춤을 그에 맞춰서 출 뿐이니까.

    하지만 진호는 달랐다.

    그의 춤은 개량된 춤을 따라하고 있지만 그 안에서 얼핏얼핏 전통의 것이 드러나고 있었다.

    루카가 추었던 바로 그 전통춤의 모습이었다.

    [······아닌데]

    어색함. 불편함. 짜증남.

    루카가 목 언저리와 팔을 손으로 벅벅 긁었다.

    무엇이 어떻다, 라고 말로는 표현하지 못해도 몸은 확실하게 느끼고 있었다.

    진호의 춤은 잘못된 것이었다.

    [하하! 이게 전통춤이구나! 멋진데?]

    [확실히 배우라 그런지 표현이 남달라. 오랫동안 배운 것도 아닐 거잖아. 실력이 좋은데?]

    [나도 배워보고 싶네. 따로 수강을 할 수는 있나?]

    주변 사람들의 목소리가 귀를 자극했다.

    대체 어딜 봐서 전통춤이란 말인가.

    어떻게 봐야 저걸 표현력이 좋다고 말 할 수 있단 말인가.

    루카는 짜증이 나고 화가 나서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좋은 춤이었습니다. 다들 고생하셨어요]

    그 사이, 무대가 끝났다.

    전통춤을 추던 무리가 우르르 내려가고 무대 위에는 진호 혼자만이 남았다.

    [그럼 이번에는 다른 춤도 한 번 해볼까 합니다]

    손을 앞으로 쭉 내미는 진호.

    그 방향을 따라 관중의 시선이 쏠렸다.

    한 명씩 몸을 돌려 방향을 쫓다보니 큰 길 하나가 무리 사이로 파였다.

    [······나?]

    그 선 끝에는 루카가 서 있었다.

    고작 여덟 살짜리 꼬마가 수백의 시선을 한 몸으로 받으며 덩그러니 놓인 것이다.

    게다가 그를 알아 본 일부는 매우 적대적인 시선 역시 보냈다.

    소매치기가, 니피 무리가 마을의 축제를 망친다는 시선이었다.

    [해 볼 테냐?]

    하지만 그런 시선은 들어오지 않았다.

    루카의 눈에 보이는 건 진호였고, 귀에 들리는 건 그의 목소리였다.

    작고 가는 팔과 다리가 가볍게 흔들렸다.

    쿵쿵, 거리는 심장 소리는 유별나게 컸다.

    [그렇게 추는 게 아니라고!]

    이건 흥분이었다.

    어떤 흥분인지는 모르겠지만, 참기는 어려웠다.

    루카가 사람들 사이를 가로지르며 무대 위로 올라갔다.

    [이게 전통이야!]

    휘파람 소리와 함께 루카가 몸을 움직였다.

    #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어째서 진호 정도 되는 스타가 꼬마아이와 한 무대에 서는지를.

    [이상한 춤이야]

    [대체 왜 저런 걸 보여주는 거지?]

    [애처로워 보이는군. 꼬마 아이가 발악하는 거 같아]

    게다가 그 춤이 복잡하고 괴상하다면.

    이런 이상한 무대를 꾸미는 진호마저 이상하다고 여길 수밖에 없었다.

    [······근데 보고 있자니 몸이 좀 달아오르는 거 같지 않아?]

    [꼬마애가 추는 춤을 보고?]

    [어딘가 좀 신나는 거 같기도 하고]

    하지만 낯선 춤의 기괴함이 눈에 익숙해지자 새로운 것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루카의 휘파람과 발 구름.

    경쾌한 몸놀림과 나는 듯한 몸동작까지.

    전 무대에서 보여준 전통춤처럼 대중적이지는 않지만 어딘가 강력하고 독특한 매력이 있었다.

    [이거 꽤 재미있네. 발을 이렇게 구르면 되나?]

    [하하. 박수도 같이 치라고]

    [오. 된다. 나 어때? 그럴싸하냐?]

    [우하하! 머저리 같아! 머저리!]

    관광객들은 웃으며 루카의 춤을 따라했다.

    어색했던 건 잠깐에 불과했다.

    지금은 무대에서 느껴지는 경쾌함과 즐거움.

    뜨겁게 다가오는 열정이 더 컸다.

    [······즐거워]

    그리고 이건 무대 위의 루카도 마찬가지였다.

    발을 구르고 몸을 움직일 때 마다 느껴지는 상쾌함.

    호흡과 호흡 사이로 이어지는 뜨거움.

    ‘더 이상 오래된 건 필요 없다.’라며 괄시 받던 예전과는 전혀 다른 기분이었다.

    즐거웠다.

    그래, 단순하게 말해서 즐거움이었다.

    춤을 추고 환호를 받고 마음껏 감정을 쏟아내는 느낌.

    전통과 의미, 이 모든 걸 떠나서 무대 위에서 춤추는 지금이 즐거웠다.

    [더. 더 추고 싶어]

    땀이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지만 괜찮았다.

    힘에 부친 팔과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참을 수 있었다.

    얼굴에는 미소가 번지고 심장은 요동치고 있었으니까.

    계속, 계속.

    춤추고 싶었다.

    #

    너의 춤을 보았으니 감복했다, 라는 만화 같은 전개는 없었다.

    전통춤을 추던 무리는 무대가 끝나고 난 뒤 진호와 루카에게 한 소리를 했다.

    밥줄이 달려 있으니 민감한 반응이었다.

    하지만 이런 건 크게 상관이 없었다.

    루카는 사소한 반발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춤의 여운에서 빠져나오지 못해 멍하니 흘려 들었을 뿐이다.

    [그래. 그런 일이 있었구나]

    그리고 그 길로 돌아와 할머니를 만났다.

    [설마 저분께서 만나러 온 것이 너였을 줄이야]

    [날 만나러 왔다니? 누가?]

    [귀인이란다. 네가 믿고 따라야 할 귀인]

    노인은 루카에게 많은 걸 설명했다.

    니피로서 그녀가 본 것들.

    루카가 그를 믿고 따라야 하는 이유를 열거했다.

    [하지만 그러면 할머니는 어떻게 해?]

    [난 신경 쓰지 마렴. 이곳에서 할 일이 있으니]

    [할 일? 무슨 할 일? 만약 내가 저 외지인을 따라야 하는 거라면 할머니도 같이 가!]

    [루카야]

    노인은 허리를 숙여 루카와 시선을 맞췄다.

    고작 여덟 살.

    누군가의 손에 맡기기에는 지나치게 어린 나이다.

    마음으로는 보내는 것이 쉽지 않다.

    [이 할머니는 이곳을 떠날 수 없단다. 마을에 남은 유일한 니피니까]

    [그 니피, 내가 하면 되잖아!]

    [춤은 배워도 니피의 업은 싫어했지 않느냐. 이제 귀인을 만나 네 삶에 다른 길이 열렸으니 이 할머니는 신경 쓰지 말고 나아가렴]

    하지만 그녀는 보내 주어야 함을 안다.

    니피로서 본 어떤 숙명 같은 걸 제외하더라도, 고작 소매치기로 연명하기에는 루카의 재능이 너무 아까웠다.

    핏줄이 더 나은 삶을 살길 바라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루카. 걱정 할 것 없다. 마을 대표와 이야기를 나눠서 전통춤을 보존하는 학교를 세우기로 했어. 네 할머니는 그곳에서 지내실 거야]

    [저, 정말이야?]

    진호가 불안을 한 술 덜어내 주었다.

    문화 연구와 전통의 계승······같은 거창한 이름을 걸어서 니피와 전통춤을 보존하기로 했다.

    비록 학교 하나일 뿐이지만 시작이 중요한 것이다.

    [그러니까 네게 물어보고 싶어. 만약 이곳을 떠나는 것이 정 불안하다 싶으면 그냥 할머니와 함께 남을 수 있게 해 줄 거야. 강제하려는 마음은 없으니까. 중요한 건 결국 네 마음. 어린 나이에 어려운 선택을 주어 미안하지만 그 답이 필요해]

    [내 선택······]

    루카가 진호와 할머니를 번갈아 보며 고민했다.

    고작 여덟 살.

    이런 중요한 문제를 판단하기에는 머리가 굳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널 따라가면 그런 춤을 또 출 수 있어?]

    [물론이지]

    무대 위에서 진호와 나눈 교감.

    어리지만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이곳에 남아서는 더 이상 그것을 찾을 수 없다는 사실.

    [알았어. 널 따라갈게]

    루카는 나아감을 선택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