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만 전생 배우-97화 (97/178)
  • Chapter43. 나와 같은 이들이(3)

    루카의 춤은 묘했다.

    굉장히 느린 박자를 타며 발을 구름에도 몸이 둥둥 뜨는 듯 가벼웠다.

    입으로 내는 소리도 어딘가 특이했다.

    휘파람과 바람 소리를 섞은 듯 한 소리.

    발을 탁탁 구를 때는 혀를 딱딱 차며 박자를 맞췄다.

    춤이나 노래도 모두 괴상한 상황.

    근데, 두 가지를 함께하니 이상하게도 잘 어울렸다.

    이 노래에는 이 춤이, 이 춤에는 이 노래가.

    처음부터 하나였던 것처럼 조화로웠다.

    [—루카!]

    늦은 밤바람에 루카의 춤사위가 녹아 갈 무렵.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일단의 무리가 나타났다.

    루카의 집 주변에서 마찰을 빚었던 바로 그 무리다.

    [경고했을 텐데? 그 춤을 추지 말라고]

    무리는 순식간에 루카를 포위했다.

    고작 여덟 살짜리 아이를 건장한 청년들이 둘러싼 모양새라 썩 보기 좋지는 않았다.

    [여기는 사람들이 오지 않는 곳이야! 나 혼자 추겠다는데, 왜 방해를 해!?]

    [흥! 너 같은 사기꾼의 말을 어떻게 믿어? 어차피 그럴 듯 한 말로 사람들을 속이려는 거겠지!]

    [아니야! 난 그냥 내가 하고 싶은 걸 하는 거라고!]

    루카가 악 받힌 듯 쏘아봤지만 주변에 있는 이들은 그보다 배는 나이를 더 먹은 청년이었다.

    가슴을 툭 쳐서 밀어내니 루카가 그대로 고꾸라졌다.

    [우리가 힘들게 일궈놓은 땅이야. 너 같은 사기꾼 꼬마 놈 때문에 망치게 둘 수는 없어!]

    [내가 뭘 망쳤다는 거야! 원래 마을의 전통춤은 우리 니피의 몫이었다고! 네놈들이 힘으로 뺏어 놓고서는 이제 와서 그딴 말이라니!]

    [하! 니피의 몫이라니. 고루한 것들의 전통이 관광업에 한 점의 도움이라도 된 적이 있나? 우리가 세련되게 잘 다듬어서 관광객들을 유치하지 않았다면 마을은 이미 망했어]

    한 청년의 외침에 루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화가 나고 분한 것도 있지만 말을 전부 반박하지 못하기 때문에 더 그랬다.

    [알아들었다면 썩 꺼져! 네 낡은 오두막에 처박혀서 그 잘난 전통이나 지키면서 살라고!]

    [······!]

    루카는 입술을 앙 다문 채 몸만 부들부들 떨었다.

    힘도 안통하고 말도 안 통했다.

    고작 여덟 살짜리 꼬마가 할 수 있는 건 이게 전부였다.

    #

    진호는 외지인이기 때문에 나설 수 없었다.

    혹시나 주변 청년들이 손을 더 쓰거나 그러면 나섰겠지만 일은 가볍게 마무리 되었다.

    [괜찮냐?]

    그렇기에 남은 이들이 다 떠나고 루카만 남았을 때.

    뒤늦게 나서서 루카를 살필 수 있었다.

    [뭐야? 너도 날 놀리려고 온 거야?]

    [내가 외지인이기는 하지만 너 같은 꼬마애가 울고 있으면 그냥 지나치지는 못한다고]

    [난 꼬마가 아니야!]

    [그래. 꼬마가 아닌 루카. 눈물은 좀 그쳤어?]

    [······운 적도 없다고!]

    눈이 빨개서는 설득력이 없다.

    눈가를 손으로 슥슥 문지르고는 성큼성큼 걸어갔다.

    [무슨 일인지 얘기는 안 해 줄 거야?]

    [신경 꺼! 외지인들이 신경 쓸 문제가 아니야!]

    [그래? 아쉽네. 네 춤하고 노래. 마음에 들었는데]

    [봐, 봤어!?]

    [응. 여기 내 여자 친구도]

    뒤에 숨어있던 은서도 고개를 빠끔 내밀고 손을 흔들었다.

    이번에는 눈 말고 루카의 얼굴이 빨갛게 물들었다.

    [너, 너희가 봐도 좋을 춤이 아니야!]

    [전통춤? 마리네라나 우아코나다랑은 다른 거였지?]

    [그런 거랑은 완전히 달라! 잉카제국 시절부터 내려오는 유서 깊은 춤이라고!]

    [오. 잉카제국 시절부터. 그 소리는? 입으로 내는 거야? 굉장히 신기하던데]

    [흥. 너는 알려줘도 흉내조차 못 낼걸?]

    아이는 확실히 아이였다.

    금세 어깨에 힘이 들어가서는 잰 채 했다.

    [한 번 들을 수 있을까? 이왕이면 춤도 같이]

    [바보 같은 소리. 이건 외지인이 함부로 봐도 좋은 게 아니라고]

    [하지만 열심히 연습했잖아. 봐 줄 사람이 없으면 아쉽지 않아?]

    [······그건 그렇지만]

    루카는 입술을 비죽 내밀고 잠시 고민했다.

    평소 같으면 안 된다고 못 박았겠지만, 지금은 좀 달랐다.

    못된 무리 때문에 서러움이 턱밑까지 올라오지 않았는가.

    부드러운 진호의 목소리가 기분 좋았다.

    [딱 한 번만 보여 줄 거야]

    [응. 우린 조용히 보고만 있을게]

    진호는 은서를 옆으로 끌어와 앉힌 채 루카의 공연을 기다렸다.

    고작 여덟 살.

    한국 같으면 이제 겨우 초등학교에 들어 갈 나이였음에도 루카는 진지하게 임했다.

    입을 오므려 소리를 내고 발을 구르며 춤을 추었다.

    비록 다리는 짧아 춤사위가 어색하고 입이 다 자라지 않아서 소리가 비었지만 힘이 있었다.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분명하게 이해가 되었다.

    ‘엘빈하고 비슷하네. 아니, 세미와 닮았나?’

    문득 떠오르는 사람들이 있었다.

    [한 가지. 당신께서는 저 같은 자를 보기 위해 이 땅에 온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노인이 했던 말도 떠올랐다.

    운명론을 믿는 건 아니지만 만약 이 땅에 누군가를 보기 위해서 왔다면 그건 루카일 것이다.

    아직 어리고 제대로 하는 것이 없지만 진호는 알았다.

    다른 사람은 모르더라도 그는 알 수 있었다.

    [용기. 친구를 위한 마음. 나무 위의 과일. 이런 느낌인가?]

    [어······! 어떻게 알았어? 그거는 그냥 머리에서 생각 한 것들인데?]

    [표현에 대한 거라면 나도 일가견이 있거든]

    [하지만 넌 외지인이잖아]

    놀라서 빠끔거리는 루카 앞에 진호가 섰다.

    그리고 그가 했던 것과 비슷한 춤을 추었다.

    동작도 엉망이고 선도 마구잡이였지만 루카는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너 어떻게 출 수 있어!?]

    [말했잖아. 나도 표현에는 일가견이 있다고. 춤에는 딱히 재능이 없지만]

    [거짓말!]

    [거짓말이 아니야]

    진호는 발끈하는 루카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그러자 루카가 움찔, 하고 몸을 떨었다.

    왠지 모르게 진호의 모습이 전보다 조금 더 커진 것 같았다.

    [그럼 한 번 말해볼래? 왜 이런 춤을 혼자서 숨어서 춰야 하는지]

    [······]

    인된다고 말 못 할 만큼.

    #

    니피는 일종의 사제였다.

    신의 목소리를 전하고 민중을 선도하는 역할.

    하지만 시대가 변하면서 많은 것이 달라졌다.

    제국은 무너지고 나라가 변하면서 더 이상 사제는 필요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원하는 건 돈.

    보다 손쉽게 얻을 수 있는 재화였다.

    전통, 이라 부르며 추앙하던 니피들의 춤이 사라진 것도 이러한 맥락이었다.

    난해하기만 한 니피들의 춤은 관광객들에게 호응을 사지 못했다.

    적당히 현대적인 느낌을 섞은 ‘전통스러운’춤들이 환대를 받았다.

    “그래서 니피가 홀대를 받는 거야. 루카도.”

    마을의 젊은이들은 진짜 전통을 부정했다.

    지금은 만들어진 전통이 훨씬 더 잘 먹히고 있으니까.

    괜히 케케묵은 ‘진짜’ 전통이 관광객의 눈에 띄면 만들어진 전통의 힘이 빠져버릴까 봐.

    그러하면 기껏 만들어 둔 돈벌이가 무너질까봐 저어한 것이다.

    “너무하는군. 아무리 철 지난 전통 춤이라고 해도 엄연히 여기에 계승하는 사람이 있는데.”

    “돈이 안 되니까. 관광객들에게는 지금 선보이는 춤들이 진짜 전통이어야 효과가 좋잖아.”

    “그래서 그 가이드가 그런 얼굴을 했구나.”

    어찌 보면 치부에 가까운 내용.

    외부인에게 알리기를 꺼려하는 것도 당연했다.

    “이해 못 할 행동은 아니야. 확실히 니피의 전통춤은 외부인이 보기에는 지나치게 복잡해. 아니, 괴상하다고 보는 쪽이 옳겠지.”

    “루카의 춤은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는데.”

    “그야 루카의 솜씨가 좋았으니까. 성장도 다 안 된 꼬마가 그 정도까지 해 낸 거라고.”

    “역시 루카의 재능이 아쉬운가 보구나?”

    “당연하지. 이제 초등학교 1학년인가? 몇 년 만 제대로 트레이닝 받는다고 생각해 봐. 대단한 예술가가 탄생 할 거야.”

    엘빈이 노래로 세계적인 스타가 된 것처럼.

    진호는 루카에게서 비슷한 기질을 느꼈다.

    잘만 갈고 닦으면 춤 하나로 이름을 알릴 수 있는 그런 재능이었다.

    “그럼 뭐 해. 루카는 관심이 없어 보이는데.”

    진호는 이미 슬쩍 운을 떼 봤다.

    자신과 함께 한국으로 가서 제대로 배워보는 것은 어떻겠냐는 제안.

    못 믿어 의문뿐인 루카에게 자신이 유명한 연예인이라는 것도 설명했다.

    하지만 전부 거절당했다.

    “아무래도 오빠 말을 믿기가 쉽지 않지. 고작 춤 한 번 봐줬다고 먼 타국까지 따라가겠어?”

    “설명을 그렇게 해 줬는데 콧방귀도 안 뀌더라.”

    “영화 개봉이 안 된 곳을 찾아서 왔으니까. 못 봤으면 모르는 게 당연하지.”

    “곤란하네.”

    진호가 머리를 긁적였다.

    세미를 품었을 때보다 상황이 훨씬 어려웠다.

    “근데, 오빠. 정말로 루카를 한국으로 데려가고 싶은 거야? 솔직히 재능이 있다 한들 우리와는 결이 다르잖아. 연기도 아니고.”

    “음. 물론, 연기는 아니지. 한국으로 데려가도 우리가 직접 키우거나 할 형편은 아니야. 그래도 뭐랄까. 어떤 필연성 같은 게 느껴져. 루카와 같은 아이들을 거두어야 할 것 같은 느낌.”

    “필연성이라니. 어제 그 노인을 만나고 그런 거야?”

    “아니라고 말은 못하겠지만······이건 꼭 지금에 한정 할 문제가 아니야. 전에 세미를 만났을 때도, 엘빈과 교류했을 때도 어렴풋하게 느꼈었거든.”

    진호 자신과 비슷한 아이들.

    어떤 틀에서 벗어나 무언가를 표현 할 수 있는 이들 말이다.

    스타병에 걸린 멍청이의 망상일수도 있지만, 부정 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나와 이런 애들은 이끌려. 운명, 이라고 하면 거창하고 그냥 끼리끼리? 그나마 형편이 나은 내가 이끌어 줘야 할 것 같은 느낌이야.”

    “푸후. 오빠도 참 피곤한 성격이야.”

    “하하. 그건 부정하지 못하겠다.”

    머쓱하게 웃는 진호의 얼굴에 은서가 따라 웃었다.

    어쩌면 전부터 좀 괴팍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그런 모습에 반했는데.

    “방법을 강구해보자. 나도 머리를 빌려줄게.”

    콩, 소리 나게 이마를 박았다.

    #

    페루의 수도 리마 남단.

    문명과 전통이 교차하는 작은 마을이 있다.

    관광을 업으로 삼고, 고산 농지로 생계를 꾸려가는 곳이다.

    [축제를 말입니까?]

    이 마을의 대표인 파울로는 뜻하지 않은 손님을 맞이했다.

    [네. 괜찮다면 광장을 한 두 시간 정도 빌렸으면 하는군요. 가능할까요?]

    마을의 광장.

    여러 가지 축제의 중심이며 행사의 교차로인 지점이다. 보통이라면 정해진 스케줄에 따라 행사를 진행하지만 지금은 경우가 달랐다.

    [아이고, 가능하다마다요. 유명하신 분께서 오셨는데, 마다 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괜히 폐를 끼치는 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럴 리가요. 영광입니다]

    세계적인 영화배우가 직접 와서 축제를 빛내 주겠다는데, 거절 할 이유가 없다.

    관광객들에게도 뜻하지 않은 볼거리가 될 것이고, 많은 입을 통해서 화자도 될 것이다.

    손해 볼 것 없는 장사였다.

    [허면, 무엇을 도와드리면 될까요?]

    [가능하다면 마을 사람들을 조금 빌렸으면 하는군요. 전통춤을 추시는 분들로]

    [오. 전통춤 말입니까?]

    [네. 전통적인 것에 관심이 많아서요. 가능하면 이분들과 함께 무대를 만들고 싶습니다]

    파울로가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방식도 마음에 쏙 들었다.

    외국인이 방문해서 전통 문화와 함께 어우러진다면 이보다 좋은 모양새도 없었다.

    [아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소개를 시켜 드리죠]

    [감사합니다. 무리한 부탁인데도 이리 개의치 않고 들어주시다니. 오늘 있었던 일은 제가 꼭 보답하도록 하겠습니다]

    [하하하. 저야, 뭐 마을을 생각하는 마음뿐이죠. 아, 이럴 게 아니라 저녁에 파티를 열 테니 참석해 주시는 건 어떻습니까? 아내와 아이들이 아주 좋아 할 겁니다]

    [고마운 말씀이지만 공연을 준비해야 해서요]

    [아. 역시 프로는 다르군요. 감탄했습니다. 그럼 눈치 없이 방해하지 않겠습니다. 필요 한 게 있으면 언제든지 말씀해 주시길]

    파울로는 껄껄 웃으며 진호를 응대했다.

    유명세가 잘 먹히는 사람이었다.

    [그럼 공연 때 뵙겠습니다]

    딱 지금의 진호에게 필요한 인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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