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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0만 전생 배우-96화 (96/178)
  • Chapter43. 나와 같은 이들이(2)

    은서는 고개를 기웃기웃 거리다 포기했다.

    벽 너머로 모습은 얼핏 보였지만 소리는 도통 들리지 않았다.

    입술을 비죽 내밀고는 평상 비슷한 곳에 엉덩이를 걸쳤다.

    “안에서 무슨 얘기를 하는 걸까요?”

    근처에서 산 과일을 씹으며 가이드에게 물었다.

    “글쎄요. 저도 니피를 만나는 건 처음이라, 꽤 당혹스럽군요.”

    “니피? 아까 가 노인분이 니피라는 건가요?”

    “네. 우리로 치자면 무당 같은 거죠. 옛 잉카 시절의 전통 신앙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무당이라니. 그런 사람이 진호 오빠한테 무슨 볼일이 있는 걸까요?”

    “그건 저도 모르죠. 그보다 진호 씨가 원래부터 스페인어를 알고 있었습니까? 아까 쓰는 걸 보니 굉장히 능숙하던데.”

    은서가 고개를 흔들었다.

    페루에 도착하기 전만 해도 스페인어 인사말도 잘 모르던 진호였다.

    갑자기 네이티브가 되는 건 당혹스러운 일이었다.

    “일단 기다려보죠. 대화가 끝나고 나온 다음에 물어보면 되는 일이니.”

    “그래야죠. 에휴. 관광 하다가 이게 무슨 일인지. 괜히 공연을 보러 갔나······응?”

    한숨 짓던 은서가 눈을 크게 떴다.

    집 밖,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루카가 일단의 무리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친구인가 싶었지만 루카보다는 나이가 훨씬 많고 분위기도 썩 좋지 않았다.

    “저기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을까요?”

    “아. 루카 말이군요. 음······”

    가이드가 귀를 쫑긋거렸다.

    루카를 포함한 아이들은 목소리를 죽이지 않았던 터라 알아듣는 건 쉬웠다.

    “루카가 소매치기를 하다가 걸린 걸 들었나 봅니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요?”

    “상인도 있고, 공연하는 사람도 있고. 루카가 소매치기를 하는 터에 관광객들이 불안해한다고 타박 놓는 모양이에요.”

    “따끔하게 한 소리 들었으면 좋겠네요.”

    잘못 된 것도 아니지 않은가.

    은서가 팔짱을 낀 채 바라봤다.

    “······어!”

    하지만 말뿐이 아니면 이야기가 다르다.

    루카를 둘러싼 사람들의 언성이 높아진다 싶더니 한 두 명이 손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고작 여덟 살에 불과한 루카는 힘으로 이기지 못하고 바닥에 고꾸라졌다.

    “저거 좀 말려 봐요. 아무리 그래도 애를 때리면 쓰나!”

    “크, 크흠. 외지인이 이런 일에 나서면 안 좋아요.”

    “에이, 그래도요! 열 살 도 안 된 애를 저렇게 때리면 어떻게 해요? 빨리요 좀!”

    가이드가 마지못해 나섰다.

    루카를 둘러싼 사람들에게 다가가 사정을 설명했다.

    처음에는 불만스럽게 보던 이들도 외지인인 은서가 보이자 툴툴 거리며 물러났다.

    관광객 앞에서 행동을 조절 할 이성 정도는 있는 거였다.

    “루카에게 괜찮냐고 물어봐 주실래요?”

    “······괜찮을 겁니다. 익숙하기도 할 테고.”

    “익숙해요?”

    “이런 다툼은 굉장히 흔합니다.”

    “흔하다니. 그럼 이렇게 맞으면서도 계속 소매치기를 하는 건가요? 다른 일을 찾거나, 어른들이 애를 보호하지는 않습니까?”

    “어려운 이야기를 하시네요. 루카와 같은 이들은 인디오 중에서도 최하층입니다. 사실상 직업을 갖는 게 불가능하죠.”

    가이드는 입술을 달싹이다 말았다.

    페루 내부의 사정 같은 걸 관광객이 알 필요는 없었기 때문이다.

    “아, 저기 진호 씨가 나오는군요. 이만 가 봅시다.”

    “음······”

    관광객은 관광객으로 족했다.

    #

    진호는 노인을 따라 방 안으로 들어갔을 때.

    눈에는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자신을 보고 있다고 느꼈다.

    어딘가 복잡한 기운의 시선이었다.

    [이리로 앉게]

    노인이 손으로 나무 밑동을 가리켰다.

    방 안 곳곳에 잘린 채 방치된 나무 밑동들이 줄지어 놓여 있었다.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자리를 잡은 진호는 먼저 예의를 챙겼다.

    [알 필요 없네. 자네와 나는 스쳐가는 인연뿐이니]

    [스쳐가는 인연이라. 우리에게 어떤 인연이 있다는 말인가요?]

    [그건 나보다 자네가 더 잘 알 텐데? 그리고 깊이 들여다보며 무엇을 궁금해 하는 건가]

    노인의 백색 눈이 진호를 응시했다.

    표현하기 어려운.

    진호는 기묘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제대로 설명을 해 주세요. 어째서 내가 당신을 통해 이런 느낌을 받는 것입니까?]

    [정말로 기묘하군. 어째서 우리 땅이 아닌 다른 곳에서 이런 자가 태어났단 말인가. 이 세상의 섭리라는 건 이해하기 어려워]

    [이런 자? 어떤 걸 말하는 겁니까?]

    [보는 자. 경험하는 자. 이끄는 자. 아니, 이런 말들은 다 의미가 없겠군]

    노인은 허리를 굽히며 긴 파이프를 손에 쥐었다.

    담배. 아니면 그보다 독한 무언가였다.

    불을 붙이자 뿌연 연기가 흘러나왔다.

    [중요한 건 자네가 내 앞에 나타난 이유야. 안 그런가?]

    [이유가 있다는 겁니까? 전 그저 휴가를 왔을 뿐입니다. 수많은 나라 중에 우연하게 고른 것에 불과하죠]

    [하하.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나? 그저 우연에 불과하다고?]

    노인의 웃음에 진호는 답하지 못했다.

    과연 페루를 선택 한 것은 오롯이 자신의 의지였을까.

    아니면 다른 무언가의 개입?

    딱 잘라서 말하기 어려웠다.

    [······정말이지 재미있군. 자네가 혼란스러워 하니 주변의 수많은 존재들이 같이 떨고 있어. 어째서 자네 같은 사람이 있을 수 있지?]

    [무슨 의미입니까?]

    [알고 있지 않은가. 자네는 산 것이 아닌 자를 보고 듣고 경험하네. 그 흔적들이 그저 바람에 날려서 사라 질 것 같았나?]

    진호의 몸이 가볍게 떨렸다.

    이제야 방 안에 들어 올 때 느꼈던 기묘함의 정체를 알 것 같았다.

    자신을 바라보던 시선의 정체.

    [어째서. 어째서 제가 이런 걸 느끼는 겁니까?]

    [이유를 내가 어찌 알까. 하지만 조금은 보는 것을 오래 한 자의 입장으로 한 가지만 알려 주겠네]

    노인의 손이 진호의 머리 위를 가리켰다.

    [자네는 이어져 있어. 그것도 아주 커다랗게. 지금껏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 신기할 정도라네]

    [이어져 있다니요? 어디와?]

    [어디겠나. 이곳이 아닌 다른 곳이지]

    [······]

    노인은 파이프를 입에 물고 다시 연기를 뿜었다.

    사방이 연기로 뿌옇게 물들었다.

    진호는 어딘가 몽롱해지는 자신을 발견했다.

    [무엇이 보이는가?]

    [나는······]

    연기가 몽글몽글 뭉치더니 어떤 형태를 이루었다.

    그건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종류였다.

    마치 낮은 도수의 눈으로 광활한 모래밭을 바라보는 것 같았다.

    알갱이 하나하나가 뭉개져서 보이는.

    [수많은 삶들이 보여요. 오래된 역사 속 인생도 있고, 누군가 이름을 불러 만들어진 인생도 있습니다. 그것들이 하나하나 모여서 거대한 모래밭을 만들었어요]

    [모래밭? 대체 얼마나 많은 걸 보고 있는 건가?]

    [모르겠어요. 어떨 때는 별자리라고 느껴지기도 해요. 끝이 없어요. 무한하게 이어지는 삶의 연장선. 전 그저 그 일부를 보고 느낄 뿐이에요]

    진호가 홀린 듯 말을 하며 손을 뻗었다.

    몽글몽글 뭉쳐있는 수많은 삶의 구름들 사이에서 무언가 손에 잡혔다.

    유독 도드라져 빛으로 자신을 유혹하고 있었다.

    [어린 니피여. 이분을 시험하지 말지어다]

    그러자 낯선 목소리가 입을 통해 흘러나왔다.

    진호는 이것이 자신의 의지가 아님을 알고 있었다.

    무언가가 자신을 통해서 노인에게 말을 하는 것이다.

    막으려면 막을 수 있지만, 지금은 지켜보고 싶었다.

    [누, 누구십니까?]

    [그대와 같고, 그대와는 다른. 지금보다 조금 더 오래된 시간 속의 보는 자라네]

    [헉! 어, 어째서 당신 같은 분께서 이곳에?]

    [그저 충고 할 뿐이네. 우리는 스쳐가는 자들. 역할 이상의 것을 넘본다면 노여움을 사게 된다네]

    노인은 퍼뜩 놀라더니 파이프를 구석 항아리에 집어 던졌다.

    그리고는 냉큼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제, 제가 어찌해야 합니까?]

    [그냥 흘러가게 두게나. 우리가 관여 할 필요는 없으니]

    [하지만······]

    노인은 무언가를 더 말하고 싶어 했으나, 진호의 몸을 빌린 존재는 그대로 사라졌다.

    그리고 그 공백의 감각이 진호를 깨웠다.

    몽롱하던 기분도 전부 사라져 있었다.

    [물. 물을 마시고 싶습니다]

    남은 건 깊은 갈증이었다.

    #

    더 이상의 이야기는 들을 수 없었다.

    노인은 진호에게 공경의 자세를 보일 뿐, 어떤 질문에도 답하지 않았다.

    [한 가지. 당신께서는 저 같은 자를 보기 위해 이 땅에 온 것이 아닙니다]

    대신 돌아서는 진호에게 한 가지를 조언했다.

    그 말조차 어딘가 붕 뜬 것 같아 크게 도움은 되지 않았지만.

    “오빠. 안에서 무슨 이야기를 나눈 거야?”

    “나도 잘 모르겠어. 오래된 점집을 다녀 온 기분이야.”

    “사기꾼이었어?”

    “아니. 그런 건 아닌데······”

    물어보는 은서에게도 답을 주기 힘들었다.

    진호 자신도 명확하게 답하기 어려운데 남을 설득시키는 건 더더욱 힘든 일이었다.

    “모르겠다. 지금은 그냥 푹 쉬면서 머리를 식히고 싶어.”

    “그렇게 해. 우리가 쉬러 왔지 고생하려고 온 건 아니잖아. 무릎 배게라도 해 줄까?”

    “갑자기 서비스가 좋아지네?”

    “오빠가 힘들어 보이니까 그러지.”

    은서가 소파에 앉아 무릎을 툭툭 두드렸다.

    여러 가지 일에 머리가 복잡 한 건 그녀도 마찬가지였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져 묻지 않았다.

    “그래. 휴가면 휴가답게 푹 쉬자고. 괜히······응?”

    “왜, 오빠?”

    “지금 이 소리. 나만 들리나?”

    진호가 귀에 손을 대며 물었다.

    희미하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약간의 음률이 섞인.

    어찌 들으면 노래 같기도 한 목소리였다.

    “무슨 소리? 난 아무 소리도 안 들리는데.”

    “굉장히 희미하지만 들리는데. 정말 아무것도 안 들려?”

    “응. 그냥 밖에서 누가 노래 부르는 거 아니야?”

    “아니. 그런 종류가 아니라······따라와 봐.”

    진호는 소파에 앉은 은서를 잡아 일으켰다.

    이 소리, 이 울림은 굉장히 기분 좋은 종류였다.

    왠지 모르게 이것을 은서에게도 들려주고 싶었다.

    “오빠, 오빠?”

    “근처에서 들려. 따라와 봐.”

    “이 양반이. 쉬자니까 또 어딜 가는 거야.”

    엉거주춤한 은서를 끌고 숙소 주변을 돌았다.

    이미 늦은 시간이라 거리에는 사람이 없었다.

    이런 시간에 나다녀도 괜찮은 걸까, 은서는 걱정했지만 진호는 망설임이 없었다.

    “어?”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은서의 귀에도 희미한 노랫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낯선 언어였지만 굉장히 아름다운 노래였다.

    “어때? 들리지?”

    “어, 어. 나도 들려. 근데, 오빠 대체 어디서부터 이 소리를 들은 거야?”

    “숙소에서도 들리던데. 내가 귀가 좀 좋잖아.”

    귀가 좋은 걸로 이해 될 거리인가?

    은서는 의아했지만 기분 좋게 웃는 진호의 얼굴에서 그냥 의문은 씻어 버렸다.

    “저기 있다.”

    “누군데? 무슨 악단이야?”

    “아니야. 한 사람이네.”

    마을 외곽 쪽, 인적이 드문 숲길의 중간이었다.

    달빛 아래에서 작은 그림자 하나가 폴짝이고 있었다.

    “어? 저거 설마······”

    그리고 그 그림자는 은서와 진호, 두 사람 모두가 아는 얼굴이었다.

    “루카잖아?”

    소매치기 꼬맹이.

    달빛 아래에서 춤추고 노래하는 건 루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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