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39. 선택(3)
상황이 마뜩지 않은 건 진호만이 아니었다.
영화에는 많은 투자자들이 존재했고, 이들 역시 선택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했다.
대부분은 현 정권에 반하지 말고 개봉을 미루자는 의견이었다.
손해를 보더라도 그나마 현상을 유지 할 수 있는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호는 내키지 않았다.
“영화는 독립적이어야 해. 영화에 정치적인 색이 완전하게 배제된다고는 말 할 수 없어. 하지만 그래도 서로 분리하여 움직이려고 노력은 해야지. 이딴 식으로 정치적 공작에 희생되는 건 영화만이 아닌, 영화계 자체의 수치야.”
영화는 영화 자체여야 한다.
영화가 다른 무언가의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
진호는 연기의 즐거움을 알기 때문에 더욱 더 영화가 그 자체로 존재해야 된다고 믿었다.
“그럼 선택하기로 한 거야?”
“응. 국내개봉을 미루고 해외로 먼저 움직일 거야.”
“쉽지 않을 텐데. 반대가 많을 거야.”
“그 사람들은 내가 설득하겠어.”
투자자들의 반대는 예정된 일.
진호는 이 역시 각오하고 있었다.
“배급사는?”
“접촉 중이야. 파라, 닐슨, 영, 마운틴······흥미를 보이는 곳은 꽤 있어. 문제는 영화 수입과 개봉에 대한 의견 차이지.”
“그리 낙관적으로 안 보는구나.”
“실험적인 개봉이나 한인이 많이 사는 곳 위주로 개봉을 하려 하지.”
“그 정도로는 파급력이 약할 텐데.”
“이것도 직접 설득을 해봐야지.”
배급사도 어디까지나 영화의 가능성을 보고 움직인다. 자본이 충분한가, 흥행할 요소가 있는가, 배우가 유명한가, 시대에 맞는가 등.
기본적으로 진호 영화에는 많은 취약점이 존재했다.
“중국은 어때? 전에 오빠가 도와 준 것도 있고······”
“아쉽지만 그쪽도 상황이 썩 좋진 않아. 정쟁이라고 해야 할까. 또 한바탕 피바람이 부는 거 같아.”
“그 동네는 뭐가 이렇게 무서워.”
중국시장도 검토해보지 않은 건 아니다.
하지만 왕호룽의 말을 빌리자면 중국은 지금 아수라장.
괜히 발 담갔다가는 골로 가기 십상이었다.
“일본이나 동남아 쪽은 약한가?”
“가능성은 있지만 원체 파이가 좁아서. 역수입 할 만큼 파워가 나올 거 같지 않아. 물론, 시도는 해보겠지만.”
“힘드네. 그냥 연기만 하지. 괜히 투자해서 오빠만 힘들게 됐잖아.”
“한 일에 후회는 없어. 그리고 그 돈 덕분에 영화는 잘 뽑혔잖아. 지금은 잠깐 고생하겠지만, 난 결국 빛을 볼 거라 믿어.”
좋은 영화라는 점에서는 한 점의 의혹도 없다.
그렇기에 진호는 선택을 내릴 수 있었다.
“한 번 해 보자고.”
어려운 길을.
#
먼저 설득해야 하는 건 역시 투자자들이었다.
진호는 연락을 돌려서 사람들을 한 곳에 모았다.
일을 진행하기 위해서는 의견을 모을 필요가 있었다.
“터무니없는 생각입니다. 해외 개봉이 성공하리란 보장이 없는데.”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이 마당에 해외개봉을 추진하면 영등위가 어떻게 보겠습니까? 아니, 정부에 찍힐 수도 있어요.”
“괜한 짓 하지 말고 그냥 기다립시다. 회담 끝나면 알아서 풀어줄지도 모르는 일이고.”
당연히 대부분은 반대했다.
돈이 들어간 만큼 안전하게 가자는 것이다.
“알고 계시겠지만 여러분만큼 저도 많은 돈을 투자했습니다. 당연히 영화를 성공시키고 싶죠.”
“그럼 그냥 기다립시다. 그 편이······”
“더 안전하다? 네. 저도 알고는 있습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세요. 회담이 끝나고도 영등위에서 지침을 바꾸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제한 상영가로 개봉을 해요? 우리나라에 몇 관이 있는 줄 아십니까?”
“그건······”
“제한 상영가로 개봉하라는 건 상업적으로 완전히 포기하라는 의미입니다. 전, 영화인의 마인드로 자존심을 들어서 설득하는 게 아닙니다. 심플하게 돈으로 그려봅시다.”
사람마다 중요한 포인트다 다 다르다.
진호에게 영화로서의 가치가 중요하듯 이들에게는 돈이 우선이었다.
“전 이미 2억불 이상의 수익을 올린 배우입니다. 제 나이에 그 정도 커리어를 지닌 사람은 많이 없습니다. 게다가 논단에서도 평가가 후합죠. 성공 요인이라면 충분하게 있습니다.”
“홍 배우님 커리어를 의심하는 건 아닙니다. 다만, 그래도 외국에서 한국영화가 개봉하는 거 아닙니까. 아무런 근거 없이 개봉해서 성공한 사례가 있습니까?”
“우리가 처음이 되면 되죠.”
“말은 쉽죠. 실패하면 어떻게 합니까?”
실패 안 한다고 장담 할 수 있을까?
그렇다고 실패의 결과를 이들에게 보장 할 수 있을까.
둘 다 불가능하다.
“전 무작정 절 따라오라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현실적인 조건을 보고 판단해 보세요. 해외 개봉을 먼저 할 경우 우리가 얻는 것과 잃는 건 뭔가요?”
“그야 뭐······흥행 실패를 할 경우 영등위와의 관계도 악화되고 국내 개봉 효과도 기대하기 어렵겠죠.”
“반대로 성공하면요?”
“해외개봉으로 인한 수익과 자연스러운 여론 형성? 국내 개봉도 가능해지겠죠.”
“그럼 국내 개봉을 기다리는 건 어떻습니까?”
“얻는 건 영등위의 마음과······”
사람들이 머뭇거렸다.
안정적인 국내개봉, 이라고 확실하게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지지부진 1년 2년 이렇게 미뤄질 수도 있습니다. 그때의 남북관계도 이렇다 하고 보장 할 수 없고요.”
“끄응. 하지만 리스크가 너무 크지 않습니까?”
“그 리스크라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국내 개봉 후에 해외로 나간다 해도 성공하리란 보장은 없어요. 애초에 그런 케이스가 많은 것도 아니죠. 어차피 성공 할 영화는 성공합니다.”
“······성공 할 자신이 있다는 겁니까?”
“제 개인적으로 말하자면 그렇습니다. 이 영화. 훌륭합니다. 빼어난 미장센과 깔끔한 서사구조를 지녔으며 씬의 분할 역시 좋습니다. 제가 배급사의 대표라면 이 영화를 선택 할 겁니다.”
자화자찬이지만 망설임은 없었다.
그만큼 진심으로 믿고 있다는 얘기였다.
그리고 이 태도가 꽤 많은 영향을 끼쳤다.
“에이. 이렇게 된 거 한 번 해 봅시다.”
“주연 배우가 이렇게 자신하는데 망하기야 하겠습니까?”
“까짓것 뭐. 영등위가 뭐라고 우리가 쫍니까?”
진호를 중심으로 투자자들이 뭉쳤다.
#
투자자들을 설득했다고 일이 끝난 건 아니다.
영화의 흥행은 배급사의 역량과도 직결된다.
현재 직접적으로 연결 된 배급사는 세 곳 정도.
각 회사의 역량과 관심 정도가 모두 달랐다.
[무리한 투자는 어렵습니다. 미스터 홍의 명성을 고려한다고 해도 미국 땅에서 낯선 나라의 영화가 흥행하는 건 상상하기 어렵군요]
진호는 AJ그룹 사람과 함께 이들을 하나씩 만났다.
실무적인 지식은 전혀 없었기 때문에 계약 건으로 이야기를 나눌 때 몇 마디 첨언하는 역할이었다.
전체적인 분위기는 비슷했다.
세 곳의 배급사 모두 ‘진호’라는 브랜드는 탐냈지만 영화의 가능성은 낮게 보고 있었다.
[영화의 퀄리티는 매우 훌륭합니다. 번역도 상당히 좋은 편이고. 하지만 주제가 썩 와 닿지 않아요. 무엇 때문에 주인공이 열을 내는 건지 알기 어렵습니다]
가장 중요한 점은 역시나 문화적 차이였다.
영화를 사전에 확인한 관계자들 모두가 그 부분을 지적했다.
분명 훌륭한 영화이나, 관심을 끌기 어렵다.
관람에 어려움이 따를 것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배우 대부분이 아시아인입니다]
게다가 배우의 인종적 편중도 거론했다.
서구권에서는 여전히 아시아인만 등장하는 영화에 대한 거부감이 존재했다.
전체적으로 문화적 장벽이 얇아졌다고 한들, 뿌리 깊은 편견을 무시 할 수는 없었다.
[생각해 보겠습니다]
진호는 모든 의견을 수렵하고 다시 돌아왔다.
뚜렷한 한계와 현실적인 어려움은 수긍하되, 그 안에서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야 했다.
쓴 소리를 들었다고 포기 할 생각 따위는 없었다.
애초에 이런 장애물은 진호부터가 고려하고 있던 점이었다.
“현지화를 하지 마세요. 포스터도 바꾸지 말고, 분위기도 미국식으로 꾸미지 말아요.”
“무슨 소리는 하는 거야?”
“어차피 모방한 선례가 없어요. 우리가 트렌드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럼 현지화전략으로는 안 먹혀요. 차라리 그들이 우리를 따라오게 해야 해요.”
“트렌드를 만들자고?”
그렇기에 진호는 다른 전략을 구상했다.
“할리우드에 불고 있는 PC주의에 대해서는 알고 있죠?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이야기.”
“알고는 있는데······”
“PC주의의 단점은 제외하고 흐름만 봐요. 이건 일종의 유행이에요. 흑인, 동양인, 인도인······이런 식의 조합. 올바름을 추구해야 하는 것이 일종의 규칙처럼 번지고 있죠.”
PC주의에 대한 규탄도 많지만 이것이 할리우드를 장악하고 있는 흐름임은 부정하지 못한다.
많은 이들이 이를 따르고 추구하는 중.
“이런 상황에서 아시아문화는 트렌드가 될 수 있어요. 서구권 위주의 할리우드 시장에 순수 아시아색이 진한 영화로 도전하는 거죠. 홍보도 이런 식으로 가야 합니다. 어설프게 현지화를 하는 것이 아닌.”
“그러니까 유행처럼 만들어서 보게 하자?”
“안 보면 시대에 뒤쳐지는 것처럼. SNS를 통한 홍보도 이런 흐름으로 가면 될 겁니다.”
“······독특하긴 하네. 하지만 먹힐까?”
“먹힐 겁니다. 아니, 먹히게 해야죠.”
누차 말하지만 영화 자체는 훌륭하다.
필요한 것은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방법.
이것이 통하기만 한다면 흥행은 유행을 등에 없고 들불처럼 번져갈 것이다.
“다시 한 번 미팅 잡아주세요.”
과연 배급사에서 이런 전략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진호는 한 번 더 움직였다.
#
배급사 세 곳을 모두 만나 설득했다.
셋 모두 나름의 관심을 보였고 전략을 귀담아 들었다.
하지만 정도는 모두 달랐다.
“론 웨이. 이곳으로 합시다.”
“론 웨이? 어째서? 셋 중에서는 가장 작은 회사이지 않습니까?”
진호는 이를 AJ측 관계자와 이야기했다.
방향성에 대해서는 합의를 봤지만 선택 문제에서는 나름의 의견차이가 있었다.
“어차피 규모가 크다고 전력으로 서포트 해 줄 것도 아닙니다. 그나마 가장 적극적인 반응을 보인 론 웨이 측이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군요.”
“으음. 하지만 회사 규모는 무시하지 못합니다.”
“최근 할리우드 배급사 기록을 살펴보셨나요?”
“······아뇨, 그것까지는.”
“최대 규모의 회사도 고전을 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규모가 반드시 승리를 가져오는 건 아니죠.”
영화의 흐름이 이상해졌다.
유명하던 프렌차이즈들이 대거 실패하고 새로운 것들이 엄청난 히트를 때렸다.
배급사들 역시 기존의 방식을 고수하다가 여럿 말아먹었다.
경직된 방식으로는 한치 앞도 보기 힘든 것이다.
“어디까지나 제 생각에 불과하지만 론 웨이를 제외한 나머지 두 회사는 저희를 파트너로 보고 있지 않아요. 쓰기 좋은 홍보물 정도로 보고 있죠.”
“흠. 확실히 론 웨이 쪽 사람이 영화에 대한 걸 제대로 파악하고 있었죠.”
“네. 상품으로만 영화를 본 것이 아니라, 순수하게 즐긴 얼굴이었습니다. 적어도 남은 둘 보다는 진지하게 대하고 있다고 봐야죠.”
억측일 수도 있지만 어차피 일정 부분 이상은 감에 의존해야 한다.
진호는 남은 두 회사보다는 론 웨이 쪽에서 좋은 느낌을 받았다.
“후. 알겠습니다. 어차피 회사에서도 이번 일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진호 씨를 믿고 있는 바. 진호 씨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대로 진행 될 겁니다.”
“AJ에서 말입니까?”
“당한 일이 있으니, 면면이 조사해 해 본 거죠. 진호씨에 대해서라면 진호씨 본인을 제외하고 저희가 가장 잘 알고 있을 겁니다.”
“그게 또 그렇게 되는 겁니까?”
운칠기삼이라 하지 않던가.
AJ측에서 보기로 진호는 운적인 면에서 매우 강한 기운을 가지고 있었다.
“좋습니다. 그럼 제 생각대로 진행해 보죠.”
화를 복으로 바꿀 만큼의 운.
큰돈을 걸어도 좋을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