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39. 선택(2)
진호 일행은 영등위 사무실을 예고 없이 찾아갔다.
당황하는 직원에게 이야기를 건네고 임원과의 미팅을 요구했다.
직원은 잠시 벙쪄있다가 황급하게 전화를 돌려서 사람을 찾았다.
이내 답신이 왔는지 일행을 상층으로 안내했다.
그곳에서 본 건 꼬장꼬장하게 생긴 중년여성이었다.
“언질도 없이 찾아오다니. 영문을 모르겠군요.”
소개도 없이 대뜸 건넨 말에 이무석의 표정이 굳었다.
상대가 영문을 모를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쪽은 이무석 감독님입니다. 저는 배우 홍진호라고 합니다. 영등위 관계자 되시나요?”
“네. 위원장 이영미라고 합니다.”
“아. 위원장이었군요. 그럼 저희가 찾아오신 이유도 충분히 알고 있을 텐데요?”
“글쎄요. 영등위가 하는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닌 터라. 왔으면 제대로 설명부터 해 보시죠.”
고압적인 태도에 깔보는 듯 한 눈빛.
진호만이 아닌 모두가 이영미의 태도에서 동일한 것을 느꼈다.
눈앞의 여자는 자신들을 좋게 보고 있지 않았다.
“어디서 모르는 척입니까? 우리 영화에 제한 상영가를 걸지 않았습니까!?”
“제한 상영가라. 아, 그러고 보니 최근에 영화 하나에 그런 등급을 내리긴 했죠. 이무석 감독님 작품이었던 모양이네요.”
“당신 어디서 뻔뻔하게······!”
“감독님. 진정하세요.”
발끈하는 이무석을 진호가 말렸다.
평소, 감정 고저가 많이 없는 이무석이었지만 자신의 영화에 대해서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괜히 사고치기 전에 만류를 해야 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묻죠. 어째서 제한 상영가 등급을 내린 겁니까?”
“이해를 못하겠군요. 등급에 대한 설명은 충분히 메일로 보내드린 거 같은데.”
“납득이 안 됩니다. 영화 내용 어디에도 제한 상영가를 받을 만 한 건 포함되어 있지 않아요.”
“아쉽지만 그건 저희 영등위에서 판단합니다. 마음에 안 든다고 이렇게 우르르 몰려와서 따지는 꼴은 그리 보기 좋은 모습이 아니군요.”
이무석만이 아닌 다른 이들도 발끈했다.
대뜸 소파에 엉덩이 걸치는 진호가 아니었다면 욱해서 한 소리 했을지도 모른다.
“그럼 가이드라인이라도 주시죠. 대체 어떤 부분이 제한 상영가를 내린 기준이 된 겁니까?”
“이런 것까지 일일이 설명을 드려야 하는군요.”
“영등위의 업무 중 하나 아닙니까. 제대로 납득시켜 주었으면 하는군요.”
“좋습니다. 그렇게까지 말 하면 간단하게 알려 드리죠. 영화의 전반적인 내용이 사회적인 가치와 국민정서를 반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제한 상영가를 내릴 수밖에 없었죠.”
“터무니없는 소리!”
참다 참다 이무석이 한 소리 했다.
시대가 어느 시대인데 정치적 흐름에 반했다고 그걸 기준으로 삼는다는 말인가.
“참, 이래서 영화만 보고 사는 사람들은 피곤해요. 다들 뉴스는 안 보시나? 요즘 돌아가는 정국 안 보여요? 우리라고 뭐 남들 눈치 안 보고 마음대로 활동하는 기관 같아요? 민간이라고?”
“그렇다고 해도 과합니다. 우리 영화가 특정 정당을 저격 하거나 고위급 인사를 대놓고 묘사 한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어째서 우리 영화만 이런 취급을 받는 겁니까?”
“글쎄요. 그건 저도 모르는 일이죠. 우리도 나름의 가이드라인을 가지고 일하는 거라.”
“그쪽이 영등위 최고 책임자 아닙니까. 그런 대책 없는 발언이 어디 있습니까?”
“여기 있습니다만.”
이번에는 진호도 화를 삭이기 어려웠다.
손으로 소파 팔걸이를 움켜쥐고 이를 악물었다.
우드득.
이음새 부근이 금이 가면서 거친 소리를 냈다.
그제야 이영미가 움찔하며 태연한 얼굴을 지웠다.
“······백 번 양보해서 그쪽 가이드라인이 그렇다고 칩시다. 하지만 그것 하나로 대뜸 우리에게 제한 상영가를 준다? 스포트라이트를 뜨겁게 받고 있는 영화에? 난 당신 혼자서 그런 결정을 내렸다고 믿지 못합니다.”
“으, 으음.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군요. 난 영등위 규칙에 따라서 판단했을 뿐입니다.”
“그게 얼마나 말이 안 되는 일인지는 그쪽이 더 잘 알고 있을 텐데요? 우리 영화에서 어떤 부분을 덜어내면 등급이 다시 책정된다고 딱 짚어서 말 할 수 있습니까?”
“······그렇게 억울하면 재심의를 받으시던가요.”
콰득—!
쥐고 있던 팔걸이가 부서졌다.
이영미는 깜짝 놀라 몸을 젖혔다.
진호는 그 모습을 잠시 노려보다 손을 털었다.
부스슥, 떨어지는 나무 파편이 이질적이었다.
“나무가 많이 낡았네요. 수리비는 제게 청구하세요.”
이곳에서는 답이 없었다.
#
여기부터는 진호 혼자서 어쩔 수 없는 영역이었다.
최현석과 이무석.
관계자들이 최대한 전화를 돌리면서 정보를 수급했다.
“문화부장관?”
“알아본 바에 의하면 그래.”
그 결과는 생각보다 무거웠다.
“갑자기 왜 장관이 영화에 태클을 거는 겁니까?”
“확실한 건 아니야. 정치적인 방법으로 영화를 이용하고 있다, 라는 추측만 하고 있을 뿐.”
“정치적인 방법으로?”
“조만간 있을 남북 정상회담의 일환으로 어필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어. 정권의 의향대로 문화부장관의 힘을 쓰는 거지.”
말하자면 비단길에 놓인 오물을 치워내는 격.
장관 입장에서는 정상회담에 앞서서 괜한 분란거리는 미리 제거한 것이다.
진호는 머리가 지끈거리는 느낌을 받았다.
“······우리나라 수준이 이거밖에 안 되는 겁니까?”
“사람이 높이 올라간다고 현명한 건 아니더라. 무식해지려면 얼마든지 무식해 질 수 있지.”
“미치겠네. 기껏 영화 잘 찍어 두었는데, 이런 방식으로 태클을 받고.”
영화계 인물들에게는 영화뿐이지만, 정치권의 눈에서는 고작 영화일 뿐이다.
그리고 둘 중 누가 더 힘을 지녔는지는 비교해 보지 않아도 뻔하다.
“대표님,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요?”
“얘기를 해 봤는데, 아무래도 방법은 두 가지 일 거 같다.”
“썩 좋은 내용일 것 같진 않네요.”
“궁여지책이지. 하나는 영등위의 권고를 받아들여서 영화를 뜯어 고치는 것.”
“불가해요. 시간이나 돈에 대한 문제도 있지만 이건 영화인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아요.”
“그럴 거 같았다. 그래서 두 번째 방법을 고려중이야. 개봉 날짜를 미루는 것.”
“······미뤄요? 얼마나?”
“적어도 정상회담이 끝나고 정치권 분위기가 바뀔 때 까지.”
현 정권의 임기는 아직 많이 남았다.
대충 수그리면서 눈치를 본다고 해도 그게 언제가 될지는 아무도 장담 할 수 없다.
“하아. 마땅한 해결책이 없네요.”
“너무 낙남하지 마. 일단 서류를 준비해서 재심의 넣을 테니까, 결과를 기다려 보자고.”
“태도를 봤잖아요. 장관이 직접 전화를 했든지 뭐 그런 거겠죠. 우릴 아주 같잖게 보고 있었어요. 재심의 넣는다고 변할 건 없을 겁니다.”
“끄응. 그래도 시도는 해봐야지.”
“······네.”
진호도 최현석이 노력하고 있다는 건 안다.
짜증에 자꾸 불편한 말이 튀어나왔을 뿐.
뒷머리를 긁적거리며 마지못해 대꾸했다.
#
일주일 뒤.
재심의 결과는 전과 같은 ‘제한적 상영가’ 등급이었다.
이무석을 비롯한 전원이 낙담했다.
이제는 근시일 내에 영등위를 거쳐서 상영 등급을 조정 할 방법이 없어졌다.
“진짜 너무하네. 어떻게 영화를 가지고 정치적으로 이용하려고 들어? 사람이 그렇게 머리에 정치밖에 없나?”
은서까지 찾아와 역정을 냈다.
그녀도 배우인 만큼 이런 상황이 굉장히 화가 났다.
“이렇게 된 거 그냥 소송을 걸자. 영등위라고 해도 무적기관인 건 아니잖아. 등급을 인정 못한다고 소송을 확 걸어버려.”
“그 이야기도 나왔었어.”
“근데 왜? 못 할 것도 없잖아.”
“소송 결과를 장담하지 못하는 이유도 있고, 그 기간이 굉장히 길 거란 예상이 많아. 한 두 달 정도로 짧게 결정 지어지는 거라면 시도를 해보겠지만······”
“그보다 늘어지면 의미가 없구나.”
영화는 적절한 개봉시기가 있다.
이미 예고편을 다 때려 넣고 기대감을 고취시켰는데, 개봉이 연기되면 김이 빠진다.
추후에 다시 분위기를 가져오려고 해도 처음만 못하다.
“그럼 뭐 어떻게 언론에 제보하는 건?”
“위험하지. 딱히 증거가 없잖아. 코에 걸면 코걸이고 귀에 걸면 귀걸이인 게 영화야. 저들이 나름대로 해석을 했다고 말 해 버리면 답이 없어. 여론이야 우리를 지지해 주겠지만, 그래봐야 몇이나 되겠어.”
개봉도 안 한 영화다.
진호의 인지도가 높은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천만 서명을 받아 낼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다.
잠깐 순풍이 불다가 역풍만 세게 맞을 뿐이다.
“으아아! 짜증나! 그럼 어떻게 해? 방법이 없어?”
“당장은. 상영 시간을 뒤로 미루는 것이 최선이지 않을까 싶어.”
“하지만 그건······으으!”
은서가 짜증에 발만 굴렀다.
마음 같아서는 영화관을 사서 개봉시키고 싶지만 그건 말 그대로 희망사항일 뿐이었다.
애초에 국내 개봉은······
“어? 잠깐만.”
“왜?”
“오빠. 혹시 영화 개봉 계획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어? 국내 말고 해외 쪽에서.”
“해외? 전문적인 건 내가 관여를 못해서 자세하게는 몰라. 대충 국내 개봉이후에 해외 쪽 개봉이 이어지는 걸로 아는데.”
해외도 마찬가지로 영화를 개봉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단계가 필요하다.
개봉허가는 물론이고 관을 확보하기 위한 배급사가 필수적이다.
언어 문제를 위해 번역 작업도 필요하고.
“그럼 가서 한 번 물어나 봐봐. 혹시 동시개봉을 계획해서 준비 중이었다면 국내 말고 해외에서 먼저 개봉해 버리는 건 어때?”
“해외에서 먼저?”
“응. 역수입이라고 하면 좋을까? 해외에서 반응이 좋으면 국내 여론이 형성 될 거잖아. 왜 우리는 못 보냐고. 미개봉 작 가지고 여론전 가는 거야 힘이 부족하다고 하지만 이런 경우라면 꽤 힘이 세지 않을까?”
진호가 눈을 가늘게 뜨고 말을 곱씹었다.
국내 영화는 당연히 국내 개봉이 우선, 이라는 것이 상식.
하지만 은서의 말대로 굳이 해외 개봉을 우선시 하면 안 되는 건 아니다.
“······해봐서 나쁠 건 없지. 일단 감독님에게 물어볼게.”
새로운 돌파구였다.
#
배급 관련 문제는 AJ그룹에서 담당했다.
괜히 대기업이 아닌 듯 이미 사전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번역 및 해외 개봉에 대한 것도 스케줄이 완벽했다.
“상황을 이해 못하는 건 아니지만 자칫 잘못하면 자충수가 될 수 있습니다.”
AJ에서 나온 관계자가 첨언했다.
그도 돌아가는 상황에 대해서는 빠삭하게 알고 있었지만 은서의 계획에는 부정적이었다.
“해외에서 흥행하지 못하면 국내에도 영향을 미칠 거라 보는군요.”
“네. 국내에서 흥한 영화가 해외로 가는 경우는 있어도 반대는 없습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낯선 이국의 영화를 아무런 근거 없이 관람해 줄 관객은 적습니다.”
“관 수 확보 역시?”
“네. 국내에서야 AJ그룹의 힘이 강한 편이지만 해외로 가면 이야기가 다릅니다. 거대 자본으로 찍어 누르는 배급사가 널리고 널렸는데, 경쟁력을 자랑하기는 어렵죠.”
해외 개봉 준비는 되어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국내 개봉 이후.
영화가 흥행을 했을 때, 그 힘을 가지고 해외에서 관을 확보하는 것이다.
지금처럼 대뜸 해외에서 개봉하는 걸로는 경쟁력을 가지기 어렵다.
“순수하게 영화의 재미로 승부를 보는 건?”
“재미 여부를 떠나서 관심도에서 차이가 납니다. 남북문제는 흥미로운 주제이나, 우리만큼 깊이 이해하는 사람은 드물죠. 외국 관객들에게 어필하기 어렵습니다.”
“으음.”
재미있는 영화라고 꼭 흥행하는 건 아니다.
지금의 상황은 흥행의 모든 악조건을 다 떠안고 있다고 봐도 충분하다.
그렇다고 예술영화처럼 개봉에 만족하면 될까?
아쉽게도 돈이 수백억이 들어간 이상 그런 건 용납되지 않는다.
최대 투자자인 진호가 납득한다 하여도 딸린 입이 수백이다.
“결국 선택이라는 건가.”
수용과 모험의 사이.
진호는 갈림길에서 고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