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만 전생 배우-84화 (84/178)

Chapter38. 우리 사위가(1)

영화촬영은 마무리 작업으로 향해갔다.

중요한 장면 촬영은 거의 끝나고 편집과 보강 촬영 등이 이어졌다.

덕분에 진호도 시간적인 여유가 조금 생겼다.

드라이브를 나가 커피 한 잔 할 시간 정도는 있었다.

“오빠, 야간 촬영이지?”

“응. 오늘은 아마 연락하기 어려울 거야. 촬영 끝나고 들어 갈 즈음에 내가 전화할게.”

“우리 오빠 힘들어서 어째. 얼굴도 많이 상했네.”

“아니, 얼굴은 원래 이랬습니다만.”

“에잇. 내가 상했다면 상한 거야.”

은서가 진호 얼굴을 양 손으로 쥐었다.

농담이 아니라 촬영으로 강행군을 이어온 탓에 살이 꽤 많이 빠져 있었다.

원래도 살집이 없는 타입.

지금은 볼 살이 쪽 빠져서 안쓰러울 정도였다.

“내가 준 약들은 다 먹고 있지?”

“어, 어. 영양제랑 홍삼 같은 거? 꾸준하게 먹지.”

“거짓말. 저번에 보니까 통이 그대로 남아 있더만. 귀찮다고 자꾸 거르면 몸이 축난다고. 챙겨 먹어.”

“아하하. 알았어. 이번에는 꼭 챙겨 먹을게.”

“응. 그래야지. 이제 오빠 몸은 오빠 혼자 몸이 아니라고. 혼나기 싫으면 관리 잘 해. 알았지?”

은서가 가볍게 진호 입술에 입을 맞췄다.

마음 같아서야 진하게 후두루찹찹하고 싶었지만 여유가 없었다.

‘그럼 들어가.’ 라는 짧은 인사말을 마지막으로 차 문을 열면서 밖으로 나왔다.

“은서야?”

“어? 엄마?”

그리고 그곳에서 만날 수 없는, 만나서는 안 되는 사람을 만났다.

오피스텔 지하 주차장에 장바구니를 든 채 서있는 중년 여성.

어머니였다.

“너······거기 차 안에는 누구야?”

“매, 매니저. 지금 나 집에 대리고 와 준 거야.”

“거짓말 할래? 소윤이랑은 방금 마트에서 만났거든?”

“······언니랑?”

“그래. 너 요즘 뭐하고 지내나 싶어서 말없이 올라와 봤지. 차에는 누군데? 계속 그러고 있을 거야?”

계속되는 다그침에 은서의 눈이 길을 잃고 방황했다.

어머니가 연애에 꽉 막힌 사람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열린 성격도 아니다.

어릴 때부터 아이돌인 자신을 뒷바라지 했던 몸.

사람 보는 눈이 까다롭고 따지는 것이 굉장히 많다.

솔직한 마음으로 아직은 진호를 보여 줄 용기가 없었다.

덜컹.

하지만 그녀의 바람이 어떻든 선택은 해야 했다.

진호는 차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안녕하세요, 은서 어머님. 진호라고 합니다.”

“어머······진호 씨? 전에 드라마 같이 했던?”

“네. 어쩌다보니 이렇게 만나게 되네요.”

진호는 최대한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아, 네. 전에 영화도 잘 봤어요.”

“감사합니다.”

“근데······우리 은서랑은 여기까지 무슨 일이에요? 제가 알기로 두 사람은 소속사도 다른데?”

“그건······”

하지만 질문은 피해 갈 수 없었다.

진호와 은서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물리고 생각이 어지러이 오고갔다.

둘 다 선뜻 말을 꺼내지 못했다.

“갑작스러운 얘기지만 저희 둘 사귀고 있습니다.”

그래도 선택을 해야 한다면 진호가.

망설임을 삼키고 한 걸음 나섰다.

깜짝 놀란 건 어머니와 은서, 둘 다였다.

“사, 사귀고 있다고? 그러니까 지금 연애중이라 이건가요? 진호 씨랑. 우리 은서가?”

“네. 그렇게 됐습니다.”

“은서야. 이게 진짜니? 정말이야?”

“······응. 나 진호 오빠랑 사귀는 중이야.”

“언제부터?”

“벌써 반년도 넘었어.”

은서의 어머니가 이마를 손으로 짚었다.

믿을 수 없다는, 믿고 싶지 않다는 얼굴이었다.

“아니. 아니 어떻게 반년이나 지난 걸 엄마한테 감쪽같이 속이고 있니? 어?”

“엄마, 엄마. 속인 게 아니야. 그냥······말 안 한거지.”

“그게 그거지! 어떻게 네가 나한테 이래? 엄마가 뭐 그렇게 간섭을 했니? 아니면 하지 말라고 막기라도 했어? 반년이 지나도록 한 마디도 안하고!”

은서의 목이 조금씩 짧아졌다.

“은서 어머님. 은서도 나름대로 고충이 있었을 겁니다. 아무래도······”

“저기. 그쪽은 좀 조용히 해 봐요.”

“······네.”

지원하려던 진호는 찌그러졌다.

지금의 입장에서는 발언권이 먼지만큼도 안 됐다.

“엄마가 너 연예인 한다고 했을 때 말했지? 이 바닥 힘들다고. 한 번 삐끗하면 나락으로 떨어진다고. 그러니까 네가 뭐라 했어? 성공 할 때 까지 일에만 전념한다고 했지?”

“아, 엄마. 그게 언제 적 이야기인데. 나, 이제 연기도 자리 잡혔고 연애 좀 해도 괜찮잖아.”

“괜찮기는! 이제 겨우 주연 언저리에서 빙빙 도는 주제에! 이러다가 스캔들 한 번에 훅 가는 사람 어디 한 두 명이야? 게다가 넌 여자잖아! 여배우가 이런 쪽으로 더 취약한 거, 알아 몰라!?”

“아니, 그래도······”

은서도 어머니는 이기지 못했다.

따박따박 쏘아 붙이는 말에 목은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그리고 그쪽. 진호 씨.”

“네, 네.”

“저번에도 우리 애랑 스캔들 났었죠?”

“네······”

“그 스캔들 났을 때. 우리 애 욕먹는 거 봤어요, 안 봤어요?”

“봤습니다.”

“근데 또 이래요? 이번에 또 터지면 어쩌려고. 그때보다 더 성공하셨으니까 욕은 배로 먹겠네? 우리 애 아주 그냥 난도질당하는 거 보고 싶었나 봐?”

숱한 전생을 기억하고 있는 진호지만 이번만큼은 도움이 되지 않았다.

“후우. 안 되겠다. 우리 들어가서 얘기 좀 해봐요.”

“지금······말입니까?”

“네. 왜요? 아, 바쁘신가? 일이 너무 바빠서 이런 일에 시간을 쓸 수 없다?”

“어, 엄마! 오빠 지금 촬영 중이라고!”

“어머나 세상에. 누가 보면 진호 씨만 촬영이 있고 우리 애는 일도 없는 줄 알겠네?”

“쿨럭! 제, 제가 시간을 조정해 보겠습니다.”

“그래요, 그럼.”

단 한 번도 촬영을 미루거나 한 적 없는 진호다.

몸이 아파도 촬영은 했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촬영을 조금 미뤄야 할 것 같다.

일과 사랑 중에 한 쪽이 박살나게 생겼으니까.

#

두 시간을 넘게 설교를 들었다.

미동도 안하고 무릎을 꿇고 앉아있던 터라 다리에 쥐가 날 정도였다.

그래도 꾹 참았다.

여기서 진호는 철저하게 을이었다.

“후우. 내 말 알아들었죠?”

“네. 명심하겠습니다.”

“내가 진호 씨를 미워하는 건 아니에요. 개인적으로 연기하는 거 잘 보고 있어요.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죠. 딸 가진 엄마 입장에서 얼마나 황당하겠어요. 안 그래요?”

“당연하죠. 이해합니다.”

무조건 숙이고 들어갔다.

그래도 열 받아서 따박따박 쏘아대는 것치고는 험한 말은 나오지 않았다.

“엄마아. 진호 오빠도 이제 다 알아들었을 거야. 이제 그만 편하게 앉으라 그러자. 안 그래도 촬영 때문에 많이 피로한 사람인데, 저러다가 탈 나. 응?”

“어이구야. 딸년 키워봐야 헛고생이라더니. 이 마당에 넌 그런 게 눈에 들어오니?”

“응. 헤헤헤.”

분위기도 살짝 풀린 것 같자 은서가 애교를 부렸다.

금이야 옥이야 키운 딸이다.

은서 어머니도 못 이긴 척 넘어가 주었다.

“······그래요. 일단 뭐. 편하게 앉아 봐요.”

“크흐흠. 감사합니다.”

저린 발을 주무르며 진호가 편하게 앉았다.

그래도 함부로 움직이거나 그러진 않았다.

아직 이 전쟁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그럼 이제 들어보죠.”

“네?”

“앞으로 어떻게 할 건가요?”

“아. 앞으로 말입니까. 은서와 꾸준하게 교제를 하면서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쪽으로······”

“그런 거 말고. 둘 관계가 들통 났을 때를 묻는 겁니다. 비밀연애가 무슨 마법도 아니고 언제까지 지켜 질 거라 믿는 건 아니겠죠?”

사실 지금껏 안 들킨 것이 이상할 정도다.

붙어 다니기도 많이 붙어 다녔고 엄청나게 은밀하게 행동하지도 않았다.

한 번 스캔들이 엎어지고 난 뒤 ‘그냥 친구인가.’싶은 시선 덕에 가려졌을 뿐.

말마따나 들키는 건 시간문제였다.

“전······”

진호가 슬쩍 은서의 눈치를 살폈다.

그녀도 마침 자신을 보고 있었다.

몇 가지 생각이 스쳐가고 머뭇거리던 말을 이어갔다.

“은서와의 관계가 드러나게 된다면 공개적으로 인정하고 싶습니다.”

“우리 은서 커리어는 신경도 안 쓰고?”

“아닙니다. 절대 그런 거 아닙니다. 은서가 만약 남자 팬층만 이끌고 있는 아이돌이었다면 저도 판단을 보류했을 겁니다. 하지만 은서는 이제 어엿한 배우입니다. 자기 연기에 확신이 있고 입지를 탄탄하게 가져가고 있어요. 지금이라면 괜찮을 거란 확신이 있습니다.”

진호는 그렇기에 그녀와의 관계를 망설였었다.

자신이 커리어에 방해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하지만 그녀는 애가 아니다.

자신의 길을 개척하고 걸어 갈 만큼 성숙한 사람이었다.

잠깐의 흔들림이 있을지언정 가라앉지 않으리란 확신이 있었다.

“응. 엄마. 오빠 말대로 난 이제 배우잖아. 우리 관계가 대중에게 드러난다 해도 괜찮을 거야. 잠깐 흔들리기는 하겠지. 그래도 내 나이에 나만큼 연기하는 사람도 드물다? 그러니까 걱정 안 해도 돼.”

“아이고, 이 답답아. 너도 알잖아. 뜬다 싶은 배우들이 서로 연애하고 그러면 누가 타격이 크니? 남자 배우? 아니면 여자 배우?”

“그런 건 신경 안 써. 난 이제 아이돌이 아니잖아. 내가 가려는 건 배우니까 그런 일로 떨어지는 팬이라면 앞으로 언젠가는 사라질 팬이야.”

“그러다가 악플 보면서 또 울 거면서.”

“에이. 이제 안 울어. 내가 뭐 언제까지 꼬맹이인가.”

은서가 어머니에게 어리광부렸다.

걱정은 이해하지만 아이돌을 그만 둘 때부터 각오했던 일이다.

“······화상아. 그렇게 좋냐?”

“응. 응. 엄마도 오빠 연기하는 거 좋다면서? 내가 또 엄마 닮아서 보는 눈이 비슷하잖아. 홀딱 반했지 뭐야.”

“뭐래. 이 엄마는 저기 어디냐. 프랑스 배우들 좋아했다고.”

“오빠가 불어 끝내주게 잘하는데.”

한 마디 안지는 딸에 어머니가 픽 웃고 말았다.

아무리 뭐라 해도 딸을 이기기는 힘들었다.

“그래. 어디 불어나 한 번 들어 봅시다.”

물론 딸만.

딸의 남자친구는 여전히 고까웠다.

#

한 바탕 일이 휘몰아치고 지나갔다.

진호는 뒤늦게 촬영에 합류하여 일정을 소화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모든 일이 깔끔하게 마무리 된 것 같았다.

“큰일 났다.”

하지만 아니었다.

진호는 셜록 홈즈의 관찰력으로 은서 어머니의 눈빛을 간판해냈다.

마지못해서 인정하기는 했지만 그 눈빛은 그리 달가운 것이 아니었다.

꼬투리 하나만 잡혀도 냉큼 물고 늘어질 포식자의 눈빛이었다.

“형. 여자 친구네 부모님하고 만나 봤어?”

“어. 당연하지. 이미 상견례도 다 했다는 거 아니냐.”

“벌써?”

“야. 형이 나이가 있잖아. 꾸물거리고 있을 수는 없지.”

“그런가. 그럼 형. 나, 노하우 좀 가르쳐 줘.”

진호가 노트까지 꺼내들고 진지하게 물었다.

“노하우라니?”

“어떻게 하면 잘 보일 수 있을까?”

“여자 친구네 부모님? 은서? 너 뭐야. 설마 은서네 부모님하고 만났어?”

“······어. 어제.”

송학이 깜작 놀라서 소리칠 뻔 한 걸 겨우 참았다.

비밀연애가 왜 비밀연애겠는가.

가까운 사람한테도 비밀로 하기 때문이다.

“야, 인마. 너 어쩌려고 그래? 소문나면?”

“에이, 안 그럴 거야. 은서네 부모님도 이런 소문에 민감하시던데. 우리보다 먼저 소문낼 일은 없을 거야.”

“아. 하긴 그쪽도 딸을 아이돌부터 키웠으니 이런 일에는 도가 텄겠네.”

“그러니까 알려줘. 어떻게 하면 점수 딸 수 있을까?”

“왜? 너 마음에 안 든데?”

“살짝?”

“허. 야, 네가 뭐 어때서? 돈 잘 벌지, 연기 죽이지, 이미지 괜찮지. 뭐가 아쉬워서 그러냐?”

괜히 송학이 발끈했다.

“실없는 소리는 그만 하고. 방법이나 좀 알려 줘.”

“특별한 방법이 있겠냐. 그냥 틈틈이 안부 전화 넣고 선물 때려 박고 자주 찾아가고. 뭐 그런 거지.”

“그렇게 하면 되는 거야?”

“어. 사람이 다 똑같다고. 싹싹하게 굴면서 얼굴 자주 비추면 돼. 선물 바리바리 싸가지고 가면 다 좋아 보이는 거야.”

진호가 어느 때보다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제대로 연애를 해 보는 것도 이번이 처음이고 애인의 부모와 맞닥뜨린 것도 처음이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생소했다.

“형. 그럼 선물은 뭐가 좋을까? 나 영화에 투자금 때려 박아서 돈도 얼마 없는데.”

“하아, 진짜. 거기 노트 쫙 펴고 받아 적어.”

“응. 준비됐어.”

“우선 마, 장인 어르신은 술. 장보님은 보석.”

“어, 어.”

“두 분 공통적으로는 여행권. 그리고······”

끄적끄적.

노트는 금세 빼곡한 손 글씨로 채워졌다.

제아무리 유명한 스타라 해도 연애는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뱀술도?”

노력은 필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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