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만 전생 배우-83화 (83/178)

Chapter37. 영화에 미치다(2)

스케줄이 끝나고 한적해진 어느 날.

은서는 지인들을 불러 모았다.

준비할 일이 있었던 것이다.

“끼니를 잘 못 때운다고 하니까. 식사하고 한꺼번에 가려고.”

“직접 요리를 하게?”

“씬이 딜레이되고 그럴 수도 있잖아. 기다리다가 시간 날 때 요리가 가능하면 좋을 거 같아.”

매니저인 소윤과 학교 후배인 아영.

그리고 진호의 소속사 후배인 세미와 하윤이 포함되어 있었다.

“너, 요리는 할 줄 아냐?”

“아니. 못하는데.”

“근데 뭔 요리를 하겠다는 거야?”

“배우면 되지 않을까? 요즘은 다 세팅돼서 나온다고 하던데.”

영화 촬영장으로 보내는 일종의 커피차.

이번에는 끼니를 때울 도시락과 음료까지 한 번에 가져갈 생각이었다.

조금 과한 감이 있긴 하지만 같이 드라마를 찍기도 했으니, 핑계는 충분했다.

“언니! 제가 칼 좀 만질 줄 알아요!”

“세미야, 네가?”

“네! 저 엄마가 죽고 집안 살림을 혼자서 다 했거든요! 요리도 좀 해요!”

“그, 그러냐. 그럼 같이 좀 부탁할게.”

슬픈 이야기는 흘려 들으며 세미를 보조 쉐프로 채용했다.

“그럼 제가 음료를 담당할게요. 커피랑 과일 주스 정도면 될까요?”

“할 줄 알아?”

“학교 그만두고 연기 학원 수강료 때문에 알바를 많이 뛰었죠. 기계만 있으면 커피 내리고 과일주스 만드는 건 어렵지 않아요.”

“그래. 둘 다 장하다.”

하윤이도 만만치 않았다.

은서가 괜히 감동해서 둘을 꼭 안아주고는 팀원으로 채용했다.

“그럼 소윤 언니랑 제가 접객할게요. 식기랑 이런 것도 관리해야 하니까, 사람이 있는 쪽이 낫죠.”

“응. 부탁할게. 소윤 언니도 괜찮지?”

“아이고. 우리 은서 배우님 부탁인데 내가 어떻게 거절하겠냐.”

“히히. 역시 언니가 최고야.”

회사에 한 마디 언질도 없이 수긍해 주는 것만 해도 고맙다.

이렇게 은서를 포함해서 총원 다섯.

촬영에 고생하는 진호를 위한 팀이 구성되었다.

“그럼 나는 물주인가.”

역할 분담도 완벽했다.

#

촬영장은 파주 외곽지역이었다.

은서는 이른 아침부터 출발해서 일행을 하나씩 태웠다.

재료는 이미 전날 구입해서 싹 다 실어 둔 상태.

만전이었다.

“흐아암. 우리 은서가 언제부터 이렇게 부지런했지?”

“뭐래. 나 원래 부지런했다고.”

“스케줄 갈 때는 그렇게 미적거리는 것이. 아주 그냥 낭군님 보러 갈 때만 부지런하지?”

“히히. 그건 어쩔 수 없잖아?”

은서가 실실거리며 웃었다.

새벽부터 일어난 통에 몸은 피곤했지만 마음은 들떴다.

커피차를 끌고 갔을 때 진호가 얼마나 놀랄지.

그게 궁금하고 즐거웠다.

“언니, 언니. 뒤에 큰 박스는 뭐에요?”

“아, 그거. 스텝분들에게 돌릴 선물. 홍삼 진액이야.”

“헤에. 홍삼도 샀어요?”

“응. 진호 오빠 잘 부탁한다고 돌리게. 보통 촬영이 이 정도 진행되면 다들 피곤하거든. 날카롭기도 하고. 이럴 때 원기 보충해야지.”

“이야. 아주 그냥 현모양처 나셨어.”

“에헴. 내가 한다하면 이 정도라고.”

홍삼도 괜찮은 거 고른다고 날밤을 샜다.

숫자가 부족하면 괜히 불편해지니까 넉넉하게 수를 챙기냐고 돈도 꽤 나갔다.

예전 같았으면 남자한테 무슨 돈, 이라고 말 텐데 지금은 하나도 아깝지가 않았다.

“너, 지금 가는 거 진호한테 얘기 안 했지?”

“응. 몰래가서 놀래켜 주려고.”

“갔다가 촬영 스케줄 때문에 시간 안 나고 그러면 어쩌려고 이렇게 준비를 했냐.”

“에이. 그냥 잠깐이라도 얼굴 보고 오는 거지.”

말은 그렇게 했지만 이미 조사를 해 두었다.

금일 촬영은 한 씬 뿐.

그것도 일찍이 시작하기 때문에 도착하면 끝나 있거나 끝나 갈 시점일 것이다.

냉큼 식사와 음료 돌리고 짬 내어 이야기 나눌 시간은 충분하리라 봤다.

“아이고, 계집애. 아주 그냥 소문을 내시는구나.”

“흐흐. 소문나도 괜찮을 텐데.”

“아서라. 너 그러다가 대표님한테 또 혼나.”

“흥. 흥. 대표님 아니었으면 내가 스캔들 냈을 걸?”

“······야. 그렇게 좋냐?”

“응. 엄청 좋아.”

“와. 대놓고 말하네? 이 계집애가 부끄러움은 어디에다가 던져뒀대?”

몸서리치는 소윤을 보며 은서가 낄낄거렸다.

이젠 감출 일도 아니었다.

“아, 촬영장 보인다.”

눈앞의 촬영장처럼 뚜렷했으니까.

#

촬영장에 도착하니 이미 촬영이 한창이었다.

스텝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감독과 배우들의 목소리가 멀리서도 들렸다.

“진호 오빠 촬영중인가보다.”

그 중에서도 진호의 목소리가 가장 뚜렷했다.

“가서 좀 볼까?”

“어······아니야. 일단 여기 준비부터 하자.”

가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이번에는 서프라이즈였다.

고개를 휘휘 젓고는 트럭을 펼쳤다.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푸드 트럭보다 1.5배 정도 큰 사이즈였다.

천막을 열고 의자를 꺼내자 그럴싸한 식당이 구비되었다.

“언니는 가서 푸드 트럭 왔다고 말 좀 전해줘. 내 이름은 빼고.”

“오케이. 준비하고 있어 봐.”

역할을 분배 한 뒤 음식 준비를 시작했다.

새벽부터 일어나 잘라 둔 양파, 무, 당근, 배추 등을 꺼내고 어렵게 구한 양념장까지 대기시켰다.

같이 예능에 출연했던 쉐프에게 사정사정을 해서 간신히 얻어낸 비장의 무기였다.

“세미야 이거 다 넣고 조리면 되지?”

“아뇨. 일단 야채부터. 조리는 제가 할 테니까 언니는 플레이팅 해 줘요.”

“그래. 그게 낫겠다. 내가 요리는 못해도 미적 감각은 좀 좋아.”

“그럼 전 옆에서 음료수 만들게요. 커피는 뜨거운거랑 아이스랑 나눠서 하면 되겠죠?”

“둘 다 되겠어?”

“거뜬하죠.”

세미와 하윤이 일을 거들자 순식간에 준비가 끝나갔다.

은서는 그 옆에 쪼그려 서서 음식을 열심히 나눠 담았다.

“오오. 좋은 냄새.”

“여기야? 푸트 트럭 왔다는 거?”

“안 그래도 배고팠는데 잘 됐네. 누가 보낸 거야?”

“몰라. 일단 와서 먹으라잖아. 먹고 생각하자고.”

그리고 얼마 안지나 사람들이 몰려왔다.

촬영까지 시간이 남은 사람, 스텝, 매니저, 코디 등.

그 숫자가 얼핏 봐도 스물은 거뜬하게 넘었다.

“어? 은서 씨?”

“뭐야. 진짜네? 은서 씨다.”

“와. 여기까지 무슨 일로 오셨어요?”

배우들은 바로 은서를 알아봤다.

“진호 오빠 응원하러 왔죠. 다들 출출하실 거 같아서 음식이랑 음료 준비해 왔어요.”

“오. 대박. 진호 씨 부럽네.”

“그러게. 나도 은서 씨가 응원해주러 오면 완전 힘 날 거 같은데.”

“헤헤. 다들 앉아서 드세요. 아, 그리고 진호 오빠한테는 저 왔다는 소리 하지 말아 주세요. 오면 놀라게 해 주게요.”

“오케이, 접수.”

삼삼오오 몰려온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앉았다.

때 아닌 푸드 트력에 다들 즐거워하는 얼굴이었다.

여느 촬영이 다 그렇듯, 나와서 찍기 시작하면 제대로 먹기 힘들다.

끼니 거르는 건 일상이고 먹어도 입에 안 맞는 경우가 태반이다.

푸드 트럭으로 제대로 한 끼 차려먹는데 기분이 안 좋을 리 없었다.

“어우, 잘 먹었다. 은서 씨. 맛있어요.”

“잘 드셨다니 다행이네요.”

“어······근데 진호는 아직 촬영인가? 가서 불러올까요?”

“에이, 금방 오겠죠. 촬영에 방해하고 싶지 않아요.”

우르르 몰려왔던 사람들이 하나 둘 배를 채우고 떠났다.

그때까지만 해도 은서는 곧 진호가 올 거라 여겼다.

이른 촬영이었으까.

끝나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진호 오빠는 아직인가?”

하지만 재고를 다 털어내고 더 먹을 사람도 없을 시간이 됐는데도 진호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커피 한 잔에 두런두런 말 하던 사람들도 각자의 위치로 돌아갔다.

“저기 은서 씨.”

“아, 네.”

“진호 말이에요. 보니까 촬영이 길어지는 거 같던데. 그냥 가서 은서 씨 왔다고 말할게요. 은서 씨도 바쁜데 언제까지 여기 있을 수는 없을테고······”

보다 못한 동료 배우가 은근히 제안했다.

어차피 한 씬이니 잠깐 끊어가도 괜찮을 거라 여겼다.

“괜찮아요. 그냥 촬영에 집중하게 두세요. 오늘은 쉬는 날이라 시간 많아요. 여기서 기다릴게요.”

“아니, 뭐 은서 씨가 괜찮다면 다행이지만.”

“가서 일 보세요. 아니면 커피 한 잔 더 할래요?”

“아뇨, 아뇨. 저도 일이 있어서. 그럼 먼저 가 볼게요.”

그렇게 남은 사람도 다 떠나고, 은서 일행만 덩그러니 남았다.

“언니, 언니.”

“응? 왜, 세미야.”

“가서 진호 오빠 어떻게 하고 있는지 보고 와. 준비는 우리가 하고 있을게.”

“에이. 그래도 어떻게 너네만 남기냐?”

“뭔 얘네만 남겨. 나도 있고 아영이도 있잖아. 가서 낭군님 하는 거나 좀 보고 와. 여기는 우리가 지킬 테니까.”

그 꼴이 꽤 이상했든지 나머지가 은서를 떠밀었다.

은서도 처음에는 거절했지만 태도가 워낙 완강했던 터라 어쩔 수 없이 움직였다.

“여기인가?”

촬영은 아직도 한창이었다.

#

은서는 구석에 자리 잡고 물끄러미 바라봤다.

진호는 전 동료와 감정싸움하는 장면을 찍고 있었다.

배신을 알고 음모를 이용하려는 진호를 동료가 막자 언쟁이 붙은 것이다.

“날 막지 마! 놈들이 무슨 짓을 했는지 알고 있잖아!”

“남태선! 그렇다고 동료들을 모조리 사지로 몰아넣으려는 거냐!?”

“동료? 개소리 하지 마. 이번 일에 움직이는 놈들은 모두 정보가 닿은 작자들이야. 즉, 내가 반역자로 몰리고 있음을 알면서 무시한 것들이지. 내가 그런 놈들을 봐줘야 할 이유가 있나?”

“하지만······”

“그만!”

쏟아내는 감정이 뜨거웠다.

진호의 두 눈은 붉게 충혈 되어 있고 움켜 쥔 손을 부들부들 떨렸다.

극에 달한 배신감과 분노가 쏟아져 나왔다.

“난! 으. 후우. 죄송합니다. 한 번만 더 갈게요.”

하지만 진호는 무언가 마음에 안 드는 듯 멈췄다.

숨을 고르고 바닥을 툭툭 쳤다.

입술도 몇 번이나 씹었다.

“마지막 대사전에 한 호흡 고르죠.”

“역시 그편이 나은 겁니까?”

“너무 쏟아내면 갈라지는 느낌이 나요. 한 움큼 안으로 삼키는. 절제되어 오히려 무서운 느낌으로 가는 게 좋아 보입니다.”

“절제. 음. 다시 한 번 갈게요.”

이런 진호를 움직이는 건 감독인 이무석이었다.

그의 제안을 따라 진호는 연기를 달리했다.

같은 대사 같은 얼굴이었지만 느낌이 달랐다.

게다가 변화는 한 번이 아니었다.

두 번, 세 번, 네 번······

두 사람은 만족한 결과가 나올 때 까지 같은 장면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찍었다.

목소리가 갈라지고 스텝들이 되레 지쳐서 헉헉 됨에도 멈추지 않았다.

마치 이 상황에 목숨을 걸고 있는 것처럼.

두 사람은 장면에 완전히 몰입했다.

“어. 은서 씨. 언제 오셨어요?”

그런 몰입의 현장에서 스텝 중 하나가 은서를 발견했다. 툭 치는 손길에 다른 사람들의 시선도 은근히 모였다.

“쉿. 쉿. 지금은 보기만 할게요.”

하지만 은서는 그런 이들에게 손짓으로 대화했다.

자신이 이곳에 등장했다는 사실은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지금은 그저 이 장면을 완성하는 것이 중요했다.

불을 토하듯 격렬하게 충돌하는 이무석과 진호의 모습을 그저 지켜보고 싶었다.

‘연기에 미친 남자.’

아마 처음 반하게 된 것도 이런 모습 때문일 것이다.

동아리 방 작은 공간에서 보여 주었던 연기.

전문적으로 배운 것도 없는 사람이 방 안의 모두를 압도하고 새로운 지평을 열었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진호는 한 번의 흔들림도 없이 달렸다.

몇 번이나 위기가 있었음에도 연기에 대한 마음은 바뀌지 않았다.

그러니 어떻게 방해 할 수 있을까.

“너무 멋있잖아.”

이 남자의 연기를.

새삼 반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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