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만 전생 배우-80화 (80/178)

Chapter36. 고집(1)

며칠 뒤 정식대본이 나왔다.

크게 달라진 부분은 없고, 대사만 약간 수정되었다.

전체적인 장르는 액션 첩보물.

줄거리로 보자면 반전물에 가까웠다.

“이거 이대로 촬영해도 괜찮으려나.”

남북관계가 평화모드로 전화되고 있을 때 러시아 요원이 국정원에서 근무하던 주인공에게 접근한다.

내용인즉슨, 북한의 의도가 꺼림칙하다는 것.

이를 조사하던 주인공은 가능성이 충분하다 판단하고 정부에 의견을 제시하나 묵살당한다.

결국 스스로 해야 한다는 사명감에 북으로 침입.

고생 끝에 본래 목적을 파악하고 증거를 찾아서 북에서 탈출한다.

하지만 평화모드를 깨고 싶지 않았던 정부는 되레 주인공을 반역자로 몰아 처단하려 한다.

이에 환멸을 느낀 주인공은 기존의 음모를 이용하여 정부 측 요인들을 모조리 살해해 버린다.

이후, 러시아 요원을 받아서 망명.

주인공은 쫓기는 신세가 되는 것으로 영화는 막을 내린다.

“시나리오가 마음에 들었다면서?”

“요즘은 분위기가 또 다르니까.”

“괜찮아. 영화가 재미만 있으면 되지.”

조금 꺼림칙하기는 하지만 시나리오는 마음에 들었다.

특히, 주인공이 배신당한 뒤 어설픈 애국심으로 희생하지 않고 배신자들을 처단하는 모습이 좋았다.

영화 마지막에도 나오지 않는가.

정부 측 요인들이 대거 살해당했음에도 나라에는 문제가 없었다.

되레 정치적 카르텔의 고리가 끊어지고 신진 세력이 등장하면서 나름의 정화작업이 된 것이다.

“역시 걸리는 건 엔딩이려나.”

“러시아로 망명가는 거?”

“응. 도움 받아 떠나는 것 자체는 괜찮은데, 그 뒤로 이야기가 끊기잖아. 뭔가 더 있을 것 같은데.”

“그게 감독의 노림수 아닐까?”

“하지만 이건 시리즈물도 아니잖아.”

“난 여운이 남고 좋던데.”

은서와 진호는 엔딩에 대한 평가가 달랐다.

아니, 엔딩뿐이겠는가.

영화 전반에 걸쳐서 의견이 맞지 않는 곳은 셀 수 없이 많았다.

아무리 연인관계라 해도 영화적 취향은 분명 달랐다.

“있어 봐. 역시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그리고 이건 비단 은서와의 문제만이 아니었다.

#

본격적인 촬영이 시작되었다.

진호는 작중 배역인 ‘남태선’역할을 맡았다.

국정원 직원으로 다혈질에 막나가는 기질이 있어서 징계도 몇 번 받은 적 있는 인물이었다.

다만, 능력이 워낙 출중한 터라 국정원에서도 버리지 못하는 그런 케이스였다.

“아, 이건 아니죠. 지금 남북관계가 달달하다고 그게 언제까지 이어지겠습니까? 이럴 때야 말로 대비를 해야 합니다.”

“새끼야. 넌 좀 아가리 여물고 있으면 안 되냐? 안 그래도 요즘 우리 보는 눈이 좋은 편도 아닌데. 쓸데없이 설쳐서 욕먹지 말고 잠자코 있어.”

“아니, 공무원은 원래 욕먹는 집단입니다. 욕 처먹으면서 나라에 봉사하라고 내려 준 자리 아닙니까. 그게 무서우면 때려치우고 가서 치킨이나 튀기시던가.”

“아, 이 새끼가 진짜! 너 내 말이 장난 같아!? 어!? 헛소리 한 번만 더 해 봐. 아주 그냥 저 시골구석에 처박아 버틸 테니까.”

“에라이, 썅. 드러워서 내가 농사나 짓고 말지.”

“야! 야야! 남태선! 너 뭐라고 했어!?”

상급자와의 말싸움에서도 성격이 드러난다.

지나치게 막나가서 반감이 갈 수도 있는 캐릭터였다.

“컷. 잠시 만요. 진호 씨 제스쳐. 좀 더 완강하게 갑시다.”

“여기서 더 나가요?”

“네. 진짜로 한 대 칠 거 같은 느낌으로.”

“대사도 이미 강한데, 과하면 좀 그렇지 않으려나?”

“시나리오 상 살인자가 되는 인물입니다. 이 정도는 해야 후에 설득력을 가지죠.”

이건 대본 리딩에서도 한 번 쟁점이 됐던 부분이다.

주인공인 남태선이 어느 선까지 나가야 하는가.

또라이 기질을 가진 주인공은 많이 등장했었지만, 남태선은 그중에서도 선을 넘는 캐릭터였다.

영화 후반부에서 자신을 배신한 요인들을 한 곳에 몰아서 죽여 버리는 인물이니까.

선을 넘는 살인자지만 매력은 지녀야 하는.

매우 다루기 까다로운 캐릭터였다.

“다시 한 번 가 볼게요. 진호 씨. 이번에는 좀 더 과감하게 가 봅시다.”

“후우. 알겠습니다.”

그래도 일단은 감독의 말대로.

진호가 심호흡을 하면서 남태선의 캐릭터를 조절했다.

“워, 워. 진호 씨. 진짜로 치는 건 아니죠?”

아슬아슬한 선 위에서.

#

후속 촬영이 이어졌다.

조연과 단역들이 나와서 회의를 하는 씬이었다.

남과 북의 관계에 대한 심각한 이야기가 오고갔다.

“컷. 컷. 느낌이 안삽니다. 각자 배역에 맞는 분위기를 가져 주세요. 씬의 심각함이 후속 장면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어설픈 애들 연극 같으면 안 돼요.”

“애들 연극이라니······”

“지금 하는 연기가 딱 그 수준입니다. 더 타이트하게 붙으세요. 이를 꽉 물고. 당장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처럼 연기하란 겁니다.”

분위기가 순식간에 냉각됐다.

특히, 비중 있는 조연 역할의 윤창수가 그러했다.

나름대로 영화 바닥에서는 베테랑.

이렇다 할 히트작은 없지만 조연으로는 인정받는 인물이었다.

“아, 저기 감독님. 우리도 우리가 하는 연기가 뭔지는 알고 있습니다. 말 좀 순하게 가시죠.”

“그럼 실력으로 보이세요. 지금처럼 연기하면 난 절대로 오케이 못합니다.”

“······쯧.”

혀를 차는 모양새가 터지기 직전의 활화산이었다.

“윤 선배님. 잠깐 쉬고 갈까요?”

결국 대기실에서 곁눈질로 보던 진호가 나섰다.

“진호 씨. 아직 촬영 안 끝났습니다.”

“잠깐만 숨 고르고 가죠.”

“그걸 왜 진호 씨가 마음대로 정합니까?”

“완벽하게 찍고 싶다면서요. 이대로 촬영 억지로 굴리면 볼썽사나운 장면만 나올 겁니다.”

“······10분입니다.”

이무석을 설득하고 진호가 배우들 쪽으로 갔다.

다들 불만이 머리끝까지 올라와 있는 얼굴이었다.

“쯧. 진호야. 진짜로 저 감독 믿고 가도 되는 거냐?”

“윤 선배님. 그래도 감독인데 믿고 가야죠. 성격은 좀 괴팍해도 실력은 좋아요.”

“아니, 난 그것도 못 믿겠다. 우리 연기가 뭐가 어때서? 방금 장면 충분히 좋았던 거 같은데.”

“에이. 그래도 더 나은 장면을 찍어야죠.”

“야. 넌 누구 편이냐?”

“편이 어디 있습니까. 영화 제대로 만들려고 노력하는 거죠.”

진호는 최대한 부드럽게 나갔다.

실력이나 스타성 면에서 그가 남은 배우를 압도한다고 해도 영화는 혼자 찍는 게 아니다.

남은 이들과의 호흡이 중요했다.

“말은 청산유수네. 그렇게 말 잘 하면 저 감독한테 가서 우리 충분히 했다고 씬 넘어가라고 설득이나 해라.”

“선배님······”

“왜? 네가 보기에도 우리가 영 모자라냐?”

“솔직히요?”

“뭐? 솔직히? 허, 참. 그래. 솔직하게 말해 봐.”

“윤 선배님. 연기 할 때 힘 좀 주세요. 탁 풀어져서 표정만 그럴듯하게 지으면 뭐합니까. 몸에 힘이 안 들어가면 맥없어 보여요.”

“······뭐?”

“그리고 석 선배님. 발음 말이에요. 너무 흘리지 말아 주세요. 약간 건들건들 하는 건 좋은데 오디오에 잘 안 잡혀요.”

윤창수를 비롯한 배우들이 벙찐 표정을 지었다.

설마하니 진호가 이렇게 직설적으로 말 할 거라고는 예상 못한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한참 어린 후배니까.

“죄송해요. 하지만 이번 영화는 배우이며 동시에 제작자 느낌으로 참여했어요. 마냥 좋은 말만 할 수는 없습니다.”

“허······참. 그래. 그렇게 말만 하면 다 오케이? 하라고 하면 다 할 수 있고?”

“네. 하면 다 할 수 있죠. 선배님들이 연기력이 모자란 건 아니잖아요.”

“아주 선배들을 들었다 놨다 하네?”

“그게 싫으면 절 납득시켜 주세요.”

진호는 되레 강경하게 나섰다.

배우이면 배우 편을 들면 그만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확실하게 제작에도 손을 댔다.

마냥 어르기만 해서는 현장에서의 기강이 안 선다.

“와. 진짜. 요즘 애들은 위아래가 없네. 그렇게 말하면 내가 알았습니다, 라고 납득 할 거 같냐?”

“네. 선배님은 말 한 연기를 해 낼 수 있으니까요. 실력 없는 사람하고는 이렇게 밀고 당기지도 않습니다.”

“······새끼가.”

윤창수가 헛웃음을 지었다.

칭찬인지 욕인지 에매한 말도 그렇지만, 또렷하게 보는 진호의 눈빛이 참 뜨거웠다.

누가 자신한테 이렇게 직설적일 수 있을까.

“가서 감독이나 불러 와. 두 눈으로 납득하게 만들어 주지. 그리고 넌 촬영 끝나고 한 번 더 보자.”

“네, 선배님.”

배우의 고집은 나쁘게도 좋게도 작용하는 법.

윤창수가 콧김 내뿜으며 수긍하자 나머지도 이를 따라왔다.

저마다 두 팔 걷어 부치며 ‘본때를 보여주겠어.’라고 다짐을 하는 중.

“감독님 준비 끝났습니다.”

“대화는 잘 된 겁니까?”

“네. 다행히 도요. 그리고 죄송합니다. 제가 주제넘게 촬영에 간섭했죠.”

그렇게 한 쪽 마무리 한 뒤 진호는 이무석에게 다가가 크게 허리를 숙였다.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진호 씨?”

“감독은 한 명이니까요. 제가 실례했습니다.”

“······그럼 다음부터는 주의해 주세요.”

“네.”

촬영장에서는 감독의 권위가 중요하다.

진호는 허리를 숙임으로서 누가 더 위에 있는지를 모두에게 각인시켜 준 것이다.

“촬영 재개합니다.”

이무석의 얼굴도 한 결 풀려 있었다.

#

윤창수는 곱창에 소주를 곁들였다.

지글지글 익어가는 곱창 한 점에 소주 한 잔이면 하루의 피로는 거뜬했다.

“크으. 이거 아니었으면 일이나 했겠나.”

“크흐흐. 좋다고 달리지나 마쇼. 내일도 촬영이 있는데 오버하면 후달려서 안 됩니다.”

“자식이. 이 형님이 그렇게 체력이 없는 줄 아냐?”

“아이고야. 아침에 인사는 제대로 하시고? 몸 생각 좀 하쇼.”

영화에 출연중인 후배들이 함께 자리했다.

같은 업계에서 일하기를 10년이 넘은 처지라 형 아우를 말하는데 격식이 없었다.

“야야. 형님이 달리고 싶으면 달리는 거지. 오늘도 생고생을 하다가 왔지 않냐. 이럴 땐 속을 소주로 촉촉하게 적셔야 한다고.”

“어이구. 우리 만수가 철이 들었네?”

“흐흐. 그럼 오늘 3차까지 가는 겁니까?”

개 중 가장 나이가 어린 만수가 기름칠을 했다.

선배들과 어울려서 술 한 잔 받아먹는 것이 낙이니 이런 날은 거를 수 없었다.

“아이고 3차? 좋기야 하다만······”

“아, 왜요? 한 번 탄력 받았으면 쭉 달려야죠.”

“야야. 창수 형 내일도 씬이 여러 개야. 괜히 피로해서 실수해서 그러면 그 어린 놈 웃는 꼴을 또 봐야 하잖아.”

“크흠.”

윤창수가 못하는 말을 후배가 대신했다.

만수는 입술을 비틀며 코웃음을 쳤다.

“아이, 그깟 놈. 까마득한 후배에 불과한데 뭘 그렇게 신경 쓰고 그래요?”

“누가 그딴 후배 놈을 신경 쓴다고 그래?”

“그렇죠? 형님이 이 바닥 짬밥이 몇 년인데. 하여튼 한 번에 뜬 놈들은 그게 문제라니까. 자기가 잘해서 뜬 줄 알아요.”

이죽거리는 소리에 윤창수는 입술을 달싹였다.

“만수야. 조용히 해라. 넌 꼭 그렇게 말을 두 번씩 해서 형들 짜증나게 하냐.”

“아니, 내가 뭐?”

“어휴. 그러니까 연기가 안 늘지. 창수 형님이 그냥 뭐 눈치 봐서 그 후배 놈 말 들어주는 줄 아냐?”

“······아니야?”

“넌 진짜 한참 굴러야겠다. 그렇게 해서 언제 조연 따고 주연 딸래?”

윤창수의 후배가 젓가락으로 만수를 가리켰다.

그러자 ‘내가 뭐요?’ 라고 만수가 윤창수에게 지원사격을 요청했다. 하지만 윤창수는 지원사격 대신 머쓱한 얼굴만 했을 뿐이다.

“둘 다 그만하고 술이나 쳐 마셔. 술 마시러 와서 무슨 말들이 그렇게 많아?”

그리고 되레 역정을 냈다.

만수의 말을 거들기에는 오늘 있었던 촬영에서 느낀 점이 달랐다.

진호의 조언대로 연기를 달리했을 때 더 나은 결과가 나왔음을 자신이 더 잘 알았기 때문.

하지만 그렇다고 후배 놈의 말을 받기에는 자존심이 걸렸다.

아무리 그래도 진호는 까마득한 후배 아닌가.

후배 말대로 꼬박꼬박 하는 것도 창피한 일이었다.

‘에이 씨.’

술 한 잔에 곱창 두 점을 우겨넣었다.

“내일 연기 똑바로 해!”

할 수 있는 말은 이것뿐이었다.

후배들에게도 자신에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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