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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0만 전생 배우-77화 (77/178)
  • Chapter34. 오디션(3)

    힘을 취하는 것보다 버리는 것이 배는 어렵다.

    진호는 이것을 몸소 체득했다.

    어떤 연기를 하든 자연스럽게 전생이 따라왔다.

    순수하게 자신의 연기를 할 수가 없었다.

    억지로 능력을 무시하고 연기를 하려 하면 손발이 꼬이고 감정선이 난잡해졌다.

    무거운 추를 달고 뛰어가는 기분이었다.

    “······생각보다 어렵네.”

    갈피를 잡았으니 대오각성은 코앞이다.

    흔한 소년 만화의 클리셰처럼 쉬이 풀릴 거라 생각했지만 결과는 보다시피.

    힘을 놓고 자신과 목도하는 건 쉽지 않았다.

    ‘게다가 시간이 얼마 없어.’

    약속한 기간은 일주일.

    한정된 시간은 난이도를 더욱 높여 주었다.

    “다시 해 보자.”

    고작 오디션 한 번이지만 진호는 가볍지 않았다.

    인생의 전환점은 불쑥 다가오는 법.

    매사에 최선을 다해야만 전환점에서 이로움을 가져 갈 수 있는 것이다.

    거울 앞에 서서 다시금 연기를 시작했다.

    손발이 어색하고 대사가 꼬였지만 계속해서 시도했다.

    덜어내기 위해서.

    온전한 자신의 연기를 마주보기 위해서.

    #

    은서는 걱정이 됐다.

    아무리 응원하겠다, 라고 말을 해 두었어도 마음이 쓰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녀는 예술가들이 슬럼프에 빠져서 망가지는 경우를 많이 알고 있었다.

    위대한 재능은 그만큼의 위험성도 내포하는 법.

    자칫 진호가 자신의 재능에 갇혀서 방황하게 될까봐 걱정이 되었다.

    “걱정하는 이유는 알지만 우리가 어떻게 할 방법이 마땅치 않잖아.”

    “그래도요. 뭔가 오빠한테 도움이 될 만 한 일을 찾아 봐야죠.”

    “벨로스 감독이나 빌 고튼 배우라면 뭐라도 조언을 할 수 있겠지만······”

    당장 두 사람은 별도의 스케줄로 움직이는 중이다.

    그렇다고 다른 사람을 덜컥 불러오는 것도 못할 짓.

    마땅히 손 쓸 방법이 없었다.

    “그러니까 진호 형이 뭐 때문에 고생하고 있다고요?”

    가만히 듣고 있던 하윤이 물었다.

    수업 차 올라왔다가 얼떨결에 한 자리 차지한 상태였다.

    “자기 말로는 덜어내기? 본연의 연기를 찾기 위해서 무슨 뭐 이입했던 대상들을 덜어낸다고 하던가?”

    “······그게 대체 뭐래요?”

    “나도 모르지. 진호 연기가 어디 뭐 보통의 것이냐. 범인은 생각도 못하는 특별함이 있는 거지.”

    “진호 오빠는 연기에 필요한 대상을 임의로 구축해서 거기에 몰입하거든. 만약 장군이 필요하면 삼국시대의 조운 같은 용장의 삶을 끌어오는 거야.”

    은서가 설명을 더했다.

    “그런 게 가능해요?”

    “오빠는 가능하대. 조운, 조조, 잭더리퍼, 제갈량, 주왕, 악공 등등. 배역에 맞는 인물을 상정해서 그 특성을 잡아오는 거지.”

    “거의 초능력 수준이네요. 근데 이번엔 그런 능력을 완전히 배제하겠다, 이거에요?”

    “그렇지. 자신의 강점을 버리겠다는 거야. 나는 이해를 못하겠지만, 오빠는 그것이 옳다고 생각하니.”

    “······보통 사람은 평생에 걸쳐서 얻을 수 있는 걸 포기하려는 거네요.”

    하윤이 복잡미묘한 감정을 느꼈다.

    하나의 캐릭터에 완전하게 몰입한다는 것.

    배우가 평생에 걸쳐서 열망하는 능력 아니겠는가.

    되레 그걸 버리고자 하는 진호가 대단하기도 부럽기도 했다.

    “하여튼 걱정이야. 괜히 이러다가 어중간하게 막혀 버리는 것 아닐까 해서.”

    “슬럼프 말이군요.”

    “응. 예술을 하는 사람들은 예민하잖아. 오빠도 은근히 그런 구석이 있어. 어중간하게 타협을 못 해. 이번에 만약 시일을 놓쳐서 오디션에 떨어지면 타격이 클 거 같아.”

    은서, 최현석, 하윤.

    세 사람의 얼굴이 비슷하게 그늘졌다.

    방향은 달라도 세 사람 모두 진호를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었다.

    “······잠깐만요.”

    그러다 문득 하윤이 입을 열었다.

    “응? 왜?”

    “진호 형은 지금 자신에 대한 연기를 찾는 거죠?”

    “그렇지. 근데 왜?”

    “그런 쪽이면 비슷한 경우가 있지 않아요?”

    “비슷한 경우라고? 누가?”

    “세미요. 진호 형이 세미야말로 날것과 같이 연기한다고 말했거든요. 지금 상태라면 세미가 선배 아닐까요?”

    최현석과 은서의 시선이 맞물렸다.

    생각해보니 일리가 있었다.

    “세미한테 전화 걸어 봐. 빨리.”

    목소리가 다급했다.

    #

    세미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나타났다.

    전화로 대충 이야기는 들었지만 영 상쾌하지 않았다.

    말인즉슨, 자신이 진호의 스승이 되어 주라는 내용.

    아무리 그래도 그건 좀 아니지 않을까.

    진호를 우상처럼 여기는 세미 입장에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말이었다.

    “너밖에 부탁할 사람이 없다.”

    그래도 뭐 어쩌겠는가.

    소속사 사장님이 부탁이라는 말까지 쓰고 있는데.

    꼬물꼬물 기어가서 진호의 연습실을 엿봤다.

    큰 거울을 앞두고 혼자서 연습 삼매경에 빠져 있는 진호의 모습이 보였다.

    ‘헤에······’

    뭐라고 말을 해야 할까.

    엉망진창? 난잡함? 복잡함?

    딱 잘라서 어떤 연기라고 표현하기 어려웠다.

    투박하다 못해서 막 쪼개서 들고 온 돌멩이 같은 느낌이었다.

    그리고 왜 자신을 불렀는지도 이해했다.

    “진호, 선생님!”

    문을 발칵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어? 세미야, 네가 여기는 무슨 일이야?”

    “헤헤. 비밀병기로 왔어요.”

    “비밀병기?”

    “네. 대표님이 선생님 좀 보고 오라고 해서요.”

    세미가 진호 옆에 나란히 섰다.

    거울에 두 사람이 비쳐 보였다.

    “와서 보니까 왜 불렀는지 알 거 같아요.”

    “알 거 같다고?”

    “네. 진호 선생님 나랑 완전히 같은 걸요.”

    세미는 말 대신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조금 전, 진호가 하던 연기를 따라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투박하고 난잡하기 그지없었지만 한 가지가 달랐다.

    “이건······네 연기구나.”

    “네. 전 제 입장에서 이 연기를 했어요.”

    “하지만 난 여전히 내 입장을 못 찾고 있어. 그 말이지?”

    “헤헤. 역시 선생님. 한 번에 꿰뚫어 보시네요?”

    차이는 단순했다.

    개성. 아이덴티티. 자아 등등.

    진호는 캐릭터에서 ‘전생’을 덜어내며 난잡한 연기를 했지만, 세미는 세미 자체가 난잡한 연기를 했다.

    둘 다 난잡한 건 같았지만 개성에 차이가 존재했다.

    연기를 보고 ‘이건 누구의 연기.’라고 말 할 수 있는 특징의 유무.

    “나는 밖에서 안으로 왔지만 넌 안에서 밖으로 가는구나. 그래서 덜어내는 것이 힘들었어.”

    “세미가 도움이 됐죠!?”

    “응. 아주 훌륭한 선생님이었다.”

    “세미 선생님?”

    “그래. 오늘 만큼은 네가 내 선생이다.”

    진호가 세미의 머리를 마음껏 헝클여 주었다.

    신이 난 세미는 깔깔 거리며 웃었다.

    “더 해 보자. 아니, 더 해 봅시다, 세미 선생님.”

    “에헴. 잘 따라오세요, 진호 학생.”

    연습실은 밤이 늦도록 불이 꺼지지 않았다.

    #

    박종찬과 안민석은 이무석을 달달 볶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진호를 가지고 두 번의 오디션이나 보는 건 과한 짓이었다.

    연기력을 떠나서 감독 커리어에서도 위험한 행보였다.

    “이번에 오면 확실하게 잡아. 또 이상한 말 하면서 퇴짜 놓지 말고.”

    “그래. 박 감독님 말 들어. 너 요즘 인터넷에서 보통 까이는 게 아니라고. 아주 가루가 되고 있어. 여기서 또 퇴짜 놓으면 감독으로 재기하기 어려울 걸?”

    감독의 고집이야 개인의 사유물이니 그렇다고 쳐도 투자자들은 어찌 할 건가.

    여론이 나쁘면 투자를 하기 어렵다.

    감독의 악명은 결국 커리어의 단절과 이어지는 것이다.

    “둘 다 그만해요. 내키지 않으면 탈락시킬 뿐입니다. 제가 원하는 배우가 아니면 영화는 안 만들어요.”

    “아이고. 그 고집으로 감독을 어떻게 하려고 그러냐? 그래도 예전에는 억지로 만들고 그랬잖아.”

    “흥. 그 때문에 나온 작품들을 보세요. 쓰레기도 이런 쓰레기가 없습니다. 그런 걸 다시 만드느니 때려치우고 맙니다.”

    외골수도 이런 외골수가 없다.

    박종찬과 안민석은 혀를 내둘렀다.

    “들어가도 될까요?”

    그렇게 쳇바퀴 같은 대화가 이어지기를 잠시.

    예정 시간에 맞춰서 진호가 도착했다.

    문을 슥 밀고 들어오는 얼굴이 꽤나 퀭하고 말라 있었다.

    “왔습니까. 주제는 전과 같고, 기회는 한 번 뿐입니다.”

    하지만 이무석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전과 같은 태도로 같은 말을 반복했을 뿐이다.

    “네. 저도 두 번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진호 역시 이런 반응을 개의치 않았다.

    겉옷을 잘 개어 의자에 걸쳐 놓고는 방의 중심에 섰다.

    “시작하겠습니다.”

    별 다른 말도 없었다.

    진호는 이무석을 한 번 바라보고는 그대로 연기를 시작했다.

    ‘저게 무슨 연기지?’

    박종찬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일주일의 준비 과정에서 진호가 무언가 대단한 걸 준비해 왔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선보이는 진호의 연기는 그런 종류가 아니었다.

    걷고, 서고, 거울에 얼굴을 비쳐 보고, 밥을 먹고, 양치하고······

    그냥 평범한 생활 속의 모습이었을 뿐이다.

    어떤 강렬함이나 뛰어난 묘사는 없었다.

    보고 있자면 길거리 마임이나 다를 바 없었다.

    “······”

    반면, 이무석의 반응은 또 달랐다.

    그는 등받이에 몸을 떼고 진호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눈은 활화산처럼 타오르고 입은 살짝 벌어졌다.

    이런 모습을 한 번도 본 적 없는 박종찬과 안민석이 되레 더 놀랄 지경이었다.

    “잠깐. 웃는 연기 한 번 봅시다.”

    한 술 더 떠서, 오디션에 추가 주문을 던졌다.

    그러자 진호가 걸음을 멈추고는 고개를 들어 웃었다.

    너무 자연스러워 이무석의 말에 웃은 걸로 보였을 정도.

    그제야 박종찬은 자신이 보고 있는 게 어떤 연기인지를 알아차렸다.

    ‘······맙소사. 자기 자신을 연기하고 있잖아?’

    소름이 돋았다.

    평상시의 행동은 말 그대로 무의식의 영역.

    그걸 자의적으로 끄집어내어 한 톨의 위화감도 없이 그려낸다는 건 인간의 영역이 아니었다.

    “화, 화내는 걸 한 번 볼 수 있을까요?”

    이무석은 이미 그것을 느끼고 있었다.

    말까지 더듬으며 추가 주문을 또 다시 던졌다.

    조금 전까지 웃던 진호의 얼굴이 일그러지며 짜증 섞인 반응이 나왔다.

    마치, 물을 마시기 위해서 뚜껑을 열었는데 그 뚜껑이 손안에서 헛 돌아 바닥에 떨어진 것 같은.

    너무나 평범하게 화가 나는 그런 상황에서의 반응이었다.

    실제로 진호가 평상시에 화가 나면 저런 얼굴이 나올 것이다, 라는 확신까지 들었다.

    “광기. 광기를 보일 수도 있습니까?”

    요구 난이도가 더 올라갔다.

    광기는 평상시와는 동떨어진 주제.

    이건 무리가 아닐까, 박종찬은 걱정스럽게 바라봤다.

    “······!!”

    하지만 아니었다.

    짜증스럽게 바라보던 진호가 입 꼬리를 내리며 가만히 고개를 숙였을 때.

    박종찬은 그 시선 끝에서 시체를 보았다.

    무신경한, 무감각한 살인자의 눈빛.

    조용한 광기라는 것이 이럴 거라는 확신이었다.

    마른 침이 넘어가고 의자를 쥔 손에 힘이 확 들어갔다.

    당장이라도 진호가 달려와 자신의 목을 벨 것 같다는 두려움까지 들었다.

    “······합격. 합격입니다.”

    그 두려움은 이무석의 합격 선언과 함께 끝났다.

    광기로 물든 살인자는 사라지고 평범한 진호가 다시 나타났기 때문이다.

    박종찬은 식은땀을 씻어내며 숨을 골랐다.

    “정말로 저게 연기인 겁니까?”

    그리고 그 옆에서 창백하게 질려있는 안민석을 봤다.

    그 역시 두려움에 한 바탕 시달린 행색이었다.

    과연 누가 그러지 않을까.

    ‘한 걸음 더 나아가는구나.’

    박종찬은 놀라움을 넘어서 경외감을 느꼈다.

    대체 저 배우의 한계는 어디일까.

    어떤 경지를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일까.

    “자네가 부럽구만.”

    이무석이 부러울 지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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