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34. 오디션(2)
진호는 오디션 날까지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붕 뜨고 산만한 기분으로 닿지 않는 무언가를 계속 헤집기만 했다.
‘할 수 있는 걸 해 봐.’라는 최현석의 조언의 몇 가지를 구상해 보기는 했지만 마땅치 않았다.
온전하게 마음에 드는 건 찾을 수 없었다.
“오늘이 오디션인데 괜찮은 거냐?”
“모르겠어요. 준비해 두기는 했는데, 썩 마음에 들진 않아요. 이걸로 오디션에 합격할지도 미지수고.”
“편하게 해라. 굳이 이 작품 아니더라도 기회는 많으니까.”
다독이는 말은 썩 다가오지 않았다.
진호는 가볍게 심호흡 하며 오디션장으로 들어갔다.
따로 참가한 사람은 없는지 사람은 진호뿐이었다.
“이무석이라고 합니다.”
그 안에서 대뜸 손을 내미는 사람을 만났다.
보통 키에 어딘가 음울해 보이는 인상.
이 사람이 이무석이었다.
진호가 손을 마주잡고 가볍게 흔들었다.
“심사는 제가 합니다. 여기 두 분은 그냥 관람하고 싶다 해서 참여 한 거니 신경 쓰지 마세요.”
이무석 말고 두 사람이 더 있었다.
한 명은 진호도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박 감독님.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하하. 이 친구가 작품 시나리오를 보냈다고 해서, 구경이나 한 번 해볼까 해서 왔지.”
“친분이 있었던 겁니까?”
“친분이랄 것도 없지. 그냥 데면데면한 사이야.”
박종찬 감독이었다.
장난스럽게 말하는 투로 봐서는 이무석과 꽤 친한 듯 보였다.
“전 안민석이라고 합니다. 처음 뵙네요.”
“······아. 설마 일곱 고개에 나왔던 그 안민석 배우님?”
“하하. 절 알아봐 주시는 겁니까?”
“그럼요. 개인적으로 팬입니다.”
이름을 듣자 그제야 얼굴이 식별되었다.
빼어난 연기로 한 때 인기를 끌다가 세간에서 잠적해 버린 배우, 안민석이었다.
“소개 끝났으면 자리로 가세요.”
“아이. 이 친구야. 인사 좀 나누자는데.”
“오디션 자리야. 친목회라면 끝나고 나서 하든지.”
“쯧쯧. 이 꽉 막힌 인간 같으니. 홍 배우님, 이야기는 나중에 하겠습니다. 이 친구가 보다시피 고지식해서.”
이야기는 이무석의 제제에 중단되었다.
가볍게 고겨 숙여 응대를 하고는 방 가운데에 섰다.
좌우에 카메라 한 대씩.
단조롭기 짝이 없는 형태였다.
“주제는 자유입니다. 원하는 대로 연기해 보세요.”
그 앞에서 이무석의 말이 떨어졌다.
진호는 잠시 생각하다 준비했던 것 중 하나를 꺼내들었다.
전장을 달리는 장수였다.
허리춤에는 잘 벼린 검이 있고 손에는 날카로운 창이 들렸다.
순식간에 진호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이걸로 되는 걸까? 아니, 일단 지금은 여기에 집중하자.’
머리에서 적을 그려냈다.
피 칠갑을 한 적병이 만도를 들고 달려왔다.
어금니를 물고 창으로 적병을 찔러 넘겼다.
피 내음이 코를 스치고 거친 전장의 기운이 몸에서 피어올랐다.
“후우.”
숨이 가쁘게 달아올랐다.
치열한 전장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모든 걸 쏟아내야 했다.
이를 악물고 적을 베고 고통은 인내로 견뎌냈다.
얼굴은 일그러졌지만 뻗은 손은 거두지 않았다.
천근만근 몸이 무거웠지만 창은 적을 향해 있었다.
전장에서 선 장수란 이런 존재였으니까.
“그만. 거기까지 하죠.”
순간, 이무석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진호는 탈력감에 손을 내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숨이 가쁘게 올라와서 쉬이 정리되지 않았다.
“이야. 역시 대단하네. 그 짧은 시간에 이런 연기를 해 내다니. 장수였나? 치열하게 보이던데.”
“네. 저도 장수로 보였어요. 피로와 고통에 찌들었지만 포기하지 않는 불굴의 장수. 대단한 연기력이네요. 한 순간에 몰입해 들어가는 모습이 압도적이었어요.”
박종찬과 안민석은 감탄을 망설이지 않았다.
전체 시간은 3분 정도나 되었을까?
아주 짧은 시간임에도 진호는 극도로 몰입해 들어가서 한 장면을 뽑아냈다.
이 정도로 순도 높은 몰입연기는 쉬이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진호 씨. 중간에 잠깐 딴생각 하셨죠?”
하지만 이무석의 표정은 여전히 냉담했다.
“시작 부근에 잠시. 티가 났던 겁니까?”
“그때부터 끝날 때까지. 망설임이 계속 유지됐습니다. 무슨 생각을 했던 겁니까?”
“연기에 대한 고찰이었습니다. 최선의 것을 들고 나왔는지에 대한 의구심.”
“그래서 최선의 것이었습니까?”
질문은 날카로웠다.
진호가 마른 입술을 혀로 훑으며 쉽게 답을 하지 못했다.
“아니, 이 친구야. 방금 그 연기가 못마땅하기라도 한 건가?”
“그러게. 아무리 봐도 최고의 연기였다고.”
“심사는 제가 합니다. 참관 자격으로만 하기로 했죠? 조용해 주세요.”
다른 두 사람의 말에도 이무석은 흔들림이 없었다.
말 못하는 진호만 응시한 채 답을 기다렸다.
“잘 모르겠네요. 자유연기라 해서 최고의 것을 보여드리고 싶었는데, 끝까지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진호 씨는 오디션에서 불합격 하셨습니다.”
“······불합격?”
“네. 어중간한 사람을 제 작품에 쓰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이 말을 끝으로 이무석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되레 양옆의 두 사람이 당황해서 그를 만류할 지경이었다.
“이거 놔 주세요. 오디션은 끝났습니다.”
“뭐하는 건가? 이 바닥 어디를 뒤져도 진호만큼 훌륭한 배우를 찾기는 힘들어.”
“그래. 내가 봐도 최고의 연기였다고. 자네, 작품 할 생각은 있는 건가”
“최고가 필요 한 게 아닙니다. 전 오로지 이 작품에 집중 할 사람을 원하는 거죠. 저렇게 어중간한 마음으로 전념은 불가능합니다.”
씨알도 안 먹혔다.
이무석의 평가는 냉정했고 판단은 더 차가웠다.
“잠깐만요, 감독님.”
진호가 다급하게 일어났다.
“뭔가요? 뭐라 말해도 생각은 변하지 않습니다.”
“아니, 그런 건 아닙니다. 저도 감독님 생각하고 같아요. 이런 마음으로는 연기에 집중하기 힘들겠죠. 하지만 그렇게 만든 것도 감독님 생각 아닌가요?”
“제가 말입니까?”
“네. 시나리오를 제게 보낼 정도면 전작은 이미 봤겠죠. 그럼 제 연기의 특성도 꿰차고 있을 터. 굳이 자유연기를 쥐어 준 것은 이런 상황을 유도 한 것 아닌가요?”
“······”
이무석이 말없이 진호를 바라봤다.
어딘가 사람을 평가하는 듯 한 눈빛이었다.
“머리는 좋은 편이군요. 하지만 그렇다 한들 연기가 갈피를 못 잡고 있는 건 변하지 않습니다.”
“시간을 주세요. 다시 한 번 오디션을 보겠습니다.”
“제가 그 말을 들어 줄 것 같습니까?”
“들어줘야 할 겁니다. 제가 아니면 감독님을 만족시킬 배우는 없을 거니까요.”
“오만한 발언입니다.”
“절 손바닥 위에 놓고 재단하는 감독님도 오만하기로는 마찬가지입니다.”
두 사람의 눈빛이 팽팽하게 맞섰다.
“······후. 좋습니다. 그럼 일주일 후 같은 장소. 여전히 주제는 자유입니다.”
먼저 물러난 건 이무석이었다.
“네. 그때는 다른 연기를 보여 드리겠습니다.”
“기대하죠.”
첫 오디션은 그렇게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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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촬영을 끝내고 돌아온 은서가 웃었다.
재미있어서가 아니라 어이가 없어서였다.
“아니, 그 양반 뭔데? 뭔데, 오빠 연기보고 마음에 안 든다는 거야?”
대한민국 사람들 탈탈 털어도 비교할 대상이 없다.
적어도 은서의 입장에서 진호한테 연기 지적하는 건 어이없는 일이었다.
“내가 헤맨 건 사실이니까.”
“그래도 그렇지. 현장에 있던 두 사람은 감탄했다면서.”
“중요한 건 감독이잖아. 그리고 그 양반이 일부러 날 헤매게 할 목적도 있었던 거 같아.”
“일부러? 왜?”
“글쎄. 그것까지는 모르겠는데, 자유 주제를 주고 내 연기를 꿰뚫어 본 것만 해도 가능한 이야기야.”
아주 짧게 고민했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다른 둘도 이상함은 느꼈을 터.
그걸 간파하고 고민을 짚어낸 것만 봐도 실력이 있는 사람임은 분명했다.
“그래서 다음 주에 오디션을 또 본다고?”
“봐야지. 한 번 시작한 일인데 중간에 빠지기는 뭐하잖아.”
“아이 참. 무명감독이 뭐라고. 시나리오가 그렇게 마음에 들었어?”
“지금은 그 감독에 대한 호기심이 더 생겼지.”
벨로스 때와는 다르다.
잘 포장된 기성품과 야생해서 해먹는 자연식의 차이?
실력의 고하를 떠나서 색다른 매력이 있었다.
“그럼, 뭐 준비는 됐어? 이왕 하는 거면 콧대를 콱 눌러줘야 하잖아.”
“그렇지. 그래야지. 근데, 아직도 영 실마리가 안 잡힌단 말이야.”
“내가 도와 줄 건 없어?”
“마음은 고마운데, 이건 나 혼자서 해야 하는 일이야.”
타인과의 호흡으로 해결 할 문제가 아니었다.
어떤 연기가 최선인가.
스스로에 대한 질문은 스스로가 내야 한다.
“피. 그렇게 말하면 어쩔 수 없지. 하지만 오빠. 힘들 때면 내가 옆에 있다는 건 알아 둬.”
“백만 응원단이 안 부럽네.”
“당연하지!”
오디션까지는 일주일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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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이야기가 흘러 나갔는지 오디션 소식이 인터넷에서 떠돌았다.
진호가 무명 감독의 오디션을 봤다가 탈락했다는 내용.
반응은 전반적으로 흉흉했다.
감히, 무명감독 따위가 진호를 탈락시킬 수 있냐는 반응이었다.
눈뜨고 보기 힘들 정도의 욕설도 더러 있었다.
조금 걱정된 진호가 둘러서 상황을 물어보니 이무석의 반응은 단순했다.
‘무지한 자들의 반응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다.’
토씨 하나 안 틀리고 발언의 전문이었다.
그냥 뻗대려고 말 한 것이 아니라 진심이 저것이었다.
에고가 차고 넘쳐서 폭발하는 인간이었다.
“어찌 보면 답답한 유형이지만······”
그런 에고는 부럽기까지 하다.
사람이라면 쉬이 휘둘리고 주변을 신경 쓰지 않을 수 없다.
자기가 원하는 일만을 일직선으로 달려가는 사람이 몇이나 있겠는가.
이무석 같은 사람은 천재로 성공하거나 고집불통으로 망하거나, 둘 중 하나였다.
“만약 그가 내 입장이었다면.”
진호가 문득 생각을 해 봤다.
이무석이 자신의 입장이었다면 어떻게 했을까?
타협 없이 자기 길을 걷는 사람이니 아마 신경도 안 쓰고 자신의 연기를 했을 것이다.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그걸로 그만.
꺾이고 돌아갈 인물이 절대 아니었다.
‘자아의 부족인가.’
진호는 타인을 모방하는 것으로 연기를 시작했다.
다만, 이것은 ‘나’라는 뿌리를 중심으로 타인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었다.
‘나’가 타인 자체가 되는 행위.
캐릭터를 조형하며 자신의 뿌리를 깊게 두려 했지만 연기의 본질 자체는 부정 할 수 없었다.
“내 연기가 필요해.”
타인이 되지 않은, 자신의 연기.
완전히 날것 상태에서 능력을 사용하지 않은 연기.
순수하게 진호라는 사람이 보일 수 있는 연기가 필요했다.
그 동안이 ‘전생 체험’으로 경험을 쌓는 과정이었다면 이건 되레 그 힘을 버리는 과정.
몸에 쌓인 것들을 털어내고 알몸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다.
“이러다가 해탈하는 건 아니겠지.”
마음을 먹었으니 바로 실행으로 들어갔다.
가부좌를 한 채 ‘나’와 ‘전생’을 구분하기 시작했다.
관조의 자세.
흡사 구도자와 닮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