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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0만 전생 배우-69화 (69/178)
  • Chapter31. 아역(3)

    진호는 돕고 싶었다.

    이래저래 소속사 식구고 형 아닌가.

    하윤이 마음을 다잡고 자신의 연기를 갈고 닦고 있다지만 조금은 편하게 해 주고 싶은 것이다.

    발에 신발을 신기고 손에는 지팡이를 쥐어주고.

    그 정도는 가능하지 않겠는가.

    “그걸 조금 더 잘 사용 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진호는 엘빈을 만나고 은서와 연기하면서 호흡에 대한 걸 깨우쳤다.

    혼자서 갇힌 채 연기를 하는 것이 아닌.

    타인과 연기 호흡을 맞추면서 상승효과를 불러일으키는 요령이었다.

    하지만 이건 어느 정도 수준이 맞아야 가능했다.

    하윤의 경우는 아직 이 호흡에 걸음을 맞출 수준이 되지 않았다.

    “눈높이를 맞춰서. 쉽게 풀 수 있는 사람이 없을까.”

    진호는 틈 날 때마다 명상을 하면서 도움이 될 만 한 전생을 살폈다.

    장군, 병사, 학자, 상인, 도인 등.

    수많은 인생이 스쳐갔지만 마땅하지 않았다.

    저마다 재능은 다들 가지고 있었지만 남에게 그걸 전달하는 데는 능하지 않았다.

    ‘보면 한가닥 하는 사람들이 주로 나온단 말이지.’

    농사꾼 A나 광부 B같은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전생도 나름대로 능력제였다.

    “조금 더 평범한 사람의 눈으로 봐야 하나?”

    진호가 생각을 반대로 했다.

    잘 가르치는 사람을 찾기보다는 평범한 사람의 입장에서 잘 배운 경우를 찾기로.

    전생에 대한 탐색은 더욱 깊은 곳으로 나아갔다.

    ‘······호오.’

    그러자 전에는 느끼지 못하던 무언가를 알게 되었다.

    ‘전생’이라 말하는 어떤 삶 주변의 배경.

    흐릿하지만 무언가로 연결되어 있고 그 대상은 또 다시 많은 선들로 연결되어 있었다.

    이건 거대한 실타래.

    아니면 별자리 같은 느낌이었다.

    반짝임이 강하여 손쉽게 손에 잡혔던 이들 말고도 수많은 전생들이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별을 타고 이동 할 수 있겠는데?”

    별이라 말하니 더욱 별자리 같이 느껴진다.

    반짝이는 전생을 강하게 인식한 뒤 그 주변으로 연결 된 다른 삶들을 살폈다.

    한 나라를 다스리던 장군 주변으로는 많은 병사와 많은 참모. 그리고 일생을 걸고 다투었던 수없이 많은 적들이 포진되어 있었다.

    ‘장군에서 참모로. 참모에서 마구간지기로. 마구간지기에서 일꾼으로.’

    슬라이드를 타는 것처럼 삶들이 휙휙 지나갔다.

    비극도 있었고 희극도 있었다.

    별 만큼의 삶이 존재해서 그 연결은 무한했다.

    “진호 오빠!”

    “······어?”

    순간.

    어깨를 흔드는 손길에 진호가 깨어났다.

    무겁게 뜨인 눈앞에는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은서의 얼굴이 자리하고 있었다.

    “괜찮아?”

    “어? 뭐가?”

    “피! 코피 나잖아!”

    손으로 코를 훔치던 진호가 깜짝 놀랐다.

    자신도 모르게 피가 흘러나와 턱까지 이어져 있었다.

    게다가 폰으로 살펴 본 안색은 창백했다.

    “내가 얼마나 이러고 있었지?”

    “잠깐 눈 좀 붙인다고 들어간 게 벌써 세 시간 전이야. 어디 아픈 거야?”

    “세 시간이라고?”

    “응. 소리가 없어서 자는 줄 알았지.”

    진호의 느낌으로는 잠깐 눈을 감았을 뿐이다.

    세 시간은 커녕 3분의 느낌도 아니었다.

    “오빠. 진짜 괜찮은 거지?”

    “괜찮아. 걱정 마. 그냥 피곤이 몰려서와 그랬나 봐.”

    걱정하는 은서를 다독이며 진호가 코를 꾹 눌렀다.

    피는 멈춰 있었지만 안색은 바로 돌아오지 않았다.

    ‘조심해서 다뤄야겠는데?’

    힘에 대가가 따라온다는 것.

    코믹스만의 전유물은 아닌 듯싶었다.

    #

    드라마 나팔꽃 촬영이 시작되었다.

    세미는 신나했고 하윤이는 긴장했다.

    결과는 그 기분을 그대로 반영해서 나왔다.

    세미의 연기력은 성인 연기자도 함부로 지적하지 못할 정도로 뛰어났다.

    반면 하윤이는 긴장으로 인해 실수가 연발이었다.

    “컷. 컷. 잠깐 쉬었다가 갑시다.”

    컷 사인에 하윤이 머리를 부여잡으며 주저앉았다.

    벌써 열 네 번째 NG였다.

    처음에는 그럴 수 있지, 라며 다독이던 선배 연기자들도 슬슬 짜증이 올라오는 분위기였다.

    “하윤, 오빠. 괜찮아?”

    “······”

    이럴 때는 옆에서 하는 말도 잘 들어오지 않는다.

    귀에서는 계속 이명이 울고 대사는 낱개로 쪼개져서 주변을 빙빙 돌았다.

    신인이 빠지기 쉬운 패닉 상태였다.

    딱—!

    “아!”

    “언제까지 멍하니 있을 거냐?”

    그건 딱 밤 하나에 깬 것은 진호였다.

    첫 촬영, 응원차 와 있었다.

    “죄, 죄송해요. 머리가 빙빙 돌아서 대사가 자꾸 새어나가요.”

    “거기 앉아. 심호흡 하고.”

    “네······”

    하윤이는 완전히 기가 팍 죽어 있었다.

    가뜩이나 세미와의 비교 때문에 군소리 많이 듣는 처지.

    처음부터 이리 실수를 해 버리니 악영향이 클 수밖에 없었다.

    “대, 대사부터 다시 해볼까요?”

    “됐어. 네가 대사를 며칠이나 외웠냐? 까먹은 게 아니라 머리가 굳어서 그래.”

    “······”

    “우중충하게 있지 말고. 어차피 신인 아니냐. 실수는 누구나 다 하는 거야. 기죽지 마. 그냥 마음 편히 먹고 가서 하면 돼.”

    진호가 하윤의 어깨를 주무르며 독려했다.

    첫 촬영에서 삐걱거리기 시작하면 후속 촬영도 기대하기 어렵다.

    게다가 상대역인 세미는 기대 이상으로 잘하고 있지 않은가.

    여차하면 분량을 뺏길 위험도 있다.

    “자. 준비 됐으면 다시 갑시다.”

    “긴장 풀고. 평소처럼 하면 돼.”

    “네, 네!”

    쉬는 시간은 길지 않다.

    신호에 하윤이 다시 촬영장으로 복귀했다.

    “쉽지 않겠는데.”

    여전히 굳어 있었다.

    #

    결국 하윤이는 제대로 촬영을 끝내지 못했다.

    끝까지 감독의 오케이 사인을 못 받았다.

    다른 씬 촬영이 우선되고 하윤이는 며칠 뒤로 촬영이 미뤄진 것이다.

    “쯧쯧쯧. 저렇게 굳어서야 연기를 하겠냐?”

    “같이 온 세미는 아주 날아다니던데. 같은 소속사라고 해도 재능 차이는 어쩌지 못하나 보네.”

    “시간만 버리고. 차라리 그 남자애 분량 잘라서 세미 쪽으로 주는 게 나아 보여.”

    “나도 같은 생각이라고.”

    스텝들의 볼멘소리가 상당했다.

    대놓고 말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눈빛만 봐도 대충 알 수 있다.

    하윤이도 이 바닥, 어릴 때부터 구른 몸 아닌가.

    귀로 전해듣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신경 꺼. 저거 다 연기라고는 쥐뿔도 모르는 사람들 얘기라고.”

    은서가 하윤이를 다독였다.

    그녀도 연기로 전형할 당시 지독한 발연기로 온갖 욕이란 욕은 다 먹은 경험이 있었다.

    남일 같지 않았다.

    “하윤아. 힘드냐?”

    진호도 은서를 거들었다.

    “······네.”

    “그럼 감독님한테 말해서 분량 좀 빼자고 할까? 아니면 세미랑 따로 찍어?”

    “아, 아뇨! 안 그래도 돼요.”

    “그럼 고개 들어. 실수 좀 했다고 안 죽는다.”

    방식은 조금 달랐지만.

    하윤이가 입술을 잘근 씹으며 고개를 들었다.

    눈물은 글썽거렸지만 울지는 않았다.

    “돌아가서 더 연습하자. 긴장감 같은 건 못 느낄 정도로 확실하게 단련시켜 줄게.”

    “······그래도 실수하면 어떻게 하죠? 감독님 마음에 안 들고 그러면.”

    “그럼 더 연습해야지.”

    “그것뿐인가요?”

    “묘수하도 있을 거 같냐? 안 되면 될 때 까지 하는 수밖에 없어. 내가 여기서 재능이니 뭐니 하고 말을 해 줄까? 그런 문제로 포기 할 생각이야?”

    하윤이 고개를 크게 흔들었다.

    그렇게 포기 할 거였으면 이미 오래전에 그만 두었을 것이다.

    “그래. 어차피 연기는 장거리 달리기야. 네가 포기하지 않으면 나도 널 포기하지 않아. 실패하면 다시 도전하면 그만인 거라고.”

    “······말하는 것도 닮았네요.”

    “응?”

    “아뇨. 아무것도 아니에요. 형 말대로 다시 준비 해 볼게요. 적어도 감독님한테 오케이 사인은 받아야 성이 찰 거 같아요.”

    “그래, 인마.”

    진호가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웃었다.

    열심히 연습한 아이에게 걸맞은 결과가 오기를.

    바라는 것은 작지만 큰 일이었다.

    #

    연습한 만큼의 연기는 하자.

    진호는 하윤을 돕기 위해서 머리를 굴리다가 한 가지 방법에 도달했다.

    가르침으로 무언가를 개변하기에는 시일이 부족하다.

    그렇다고 천재적인 재능이 있어서 한 두 가지로 전체를 바꾸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적어도 노력 한 것만큼은 보여 줄 수 있기를 바랐다.

    “다시!”

    “다시 한 번 더!”

    “힘 줘서! 시선 신경 쓰지 말고!”

    “집중해!”

    진호는 독하게 하윤이를 몰아붙였다.

    연습에, 연습에, 연습을 반복하면서 그를 단련시켰다.

    보다 못한 은서가 만류 할 정도.

    “허억······허억.”

    “포기 할 거냐?”

    “아직. 아직 더 할 수 있어요.”

    “그래. 그 정도 근성은 있어야지.”

    하지만 지독한 건 진호만이 아니었다.

    하윤이도 만만치 않았다.

    녹초가 되어서 눈썹이 파르르 떨림에도 끝까지 대사 한 마디를 더 하고 쓰러졌다.

    “진호, 선생님. 하윤 오빠 너무 괴롭히지 마요.”

    “괴롭히는 것처럼 보이냐?”

    “······네. 다 비슷한 연기인데 자꾸 계속 하잖아요.”

    보다 못해 세미까지 거들었다.

    “넌 태양이야. 그냥 둬도 알아서 잘 타고 밝게 빛나지. 하지만 하윤이는 달라. 젖은 장작이라고 해야 할까? 어지간히 부채질을 하지 않는 이상 잘 타지 않아.”

    “젖은 장작?”

    “응. 젖어서 불은 잘 붙지 않지만 그렇다고 잘 쪼개지는 것도 아니야. 힘들게 굴려도 버티고 끝끝내 버텨서 타오를 각오도 있지.”

    진호의 눈에는 그 빛이 보였다.

    별자리.

    그렇게 부르고 있는 삶의 연장선이다.

    활활 타오르는 세미와 비교하자면 초라하기 그지없지만 하윤이는 꺼지지 않았다.

    독하게 몰아 붙여도 끝까지 빛을 품고 있었다.

    그렇기에 가능한 연습이었다.

    하윤이니까 할 수 있는 방법인 것이다.

    “다음 촬영까지 하루 남았다. 쉬고 싶냐?”

    “더 할 수 있어요.”

    “그래. 그래야 내 제자지.”

    타오를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진호는 확신하고 있었다.

    #

    나팔꽃 촬영 감독은 평소처럼 포커스를 맞췄다.

    이번 촬영에서 누가 주인지는 굳이 말 하지 않아도 전부 알고 있었다.

    감독도, 작가도, 스텝들도 모두 한 사람만 봤다.

    “이야. 굉장하네.”

    “역시. 보통 재능이 아니야.”

    그 소녀는 기대를 충족시켰다.

    누구보다 어린 나이이지만 누구보다 훌륭한 연기를 선보였다.

    모두가 감탄하고 모두가 재능을 아껴 주었다.

    “다음 씬에 그 친구인가?”

    “오늘은 좀 잘 넘어갔으면 좋겠는데.”

    하지만 다음에 나올 친구는 아니었다.

    소녀와 비교하기에는 너무나 보잘것없었다.

    평범한 재능에 많은 시선에 주눅 들어버리는 작은 가슴.

    누구도 소년에게 만족하지 못했다.

    “······어?”

    “오. 오늘은 좀 다른데?”

    “이것 봐라?”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앞선 소녀만큼의 강렬함은 없었지만 단단했다.

    발성은 차분하고 표정은 적절하며 동작은 거슬림이 없었다.

    작가가 쓰고 감독이 그려낸 그림 그대로.

    게다가.

    “생동감이 있네.”

    “음. 전하고 달라. 연기에 확신이 붙었어.”

    “맞아. 같은 연기라도 이런 쪽이 더 맛이 있지.”

    연기에 붙기 시작한 생동감.

    느낌이 살자 그걸 지켜보는 이들도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케이—! 나이스!”

    그것은 가장 가까이 있는 감독이 누구보다 잘 알았다. 어느 때보다 우렁찬 오케이 사인에 소년이 양 손을 치켜 들며 만세를 불렀다.

    과한 감이 있었지만 아무도 뭐라 하지 않았다.

    배우에 대한 예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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