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31. 아역(1)
중국 개봉일이 결정되었다.
그 동안 심의로 묶여있던 다른 영화들도 덩달아 개봉 날짜가 잡혔다.
중국 사람들도, 다른 나라 사람들도 쌍수 들고 환영했다.
“······이거 관 숫자가 제대로 나온 거죠?”
“중국의 배급을 담당하고 있는 회사에서 직접 보내온 소식이야.”
“30% 이상이라니.”
배정 단계의 비율로 놓고 보자면 대충 그렇다.
많지 않다, 라고 생각 할 수 있지만 중국에서 개봉하고 있는 중국의 영화를 고려하면 그렇지 않다.
실제로 절반 이상을 점유한 중국 영화를 제외하면 7~80%를 먹고 있다고 봐도 족하다.
사전 계약했던 배급사의 역량을 고려 할 때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왕 형님이 손을 쓴 모양이군요.”
“음.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나름의 보답이라는 거겠지.”
“말이라도 하시지. 이 정도면 돈으로 따져도······”
셈이 잘 나오지 않는다.
중국을 제외한 모든 나라의 수익을 다 합치면 비슷할까?
말하자면 2배 찬스가 열린 격이다.
“조만간 중국에서 간담회도 있고 하니 준비해 두고.”
“네. 그거야 이미 하고 있죠.”
“대륙이 워낙 넓다보니 거의 월드 투어 수준이다. 이번에도 일정이 꽤나 빡빡하니까 쉴 거면 지금 푹 쉬어둬.”
“그럼 자잘한 스케줄은 싹 빼주세요.”
“메일로 보내 줄 테니까 보고 네가 결정해.”
개봉하고 시일이 꽤 지난 터라 전처럼 언론에서 달달볶지는 않는다.
진호가 직접 선택하고 나갈 만큼의 여유가 생겼다는 말.
“아, 맞다. 이거 말해주는 거 깜빡했네. 세미, 이번에 아역으로 배역 하나 땄다.”
“오! 진짜요?”
“그래. 하윤이랑 나란히.”
하윤도 진호를 따라서 회사와 계약했다.
세미와 마찬가지로 연습생 계열로 구상하고 있는 ‘학교’에 소속되어 있다.
“응원하러 한 번 가봐야겠네요.”
“좋아 할 거다. 너 언제 오냐고 다들 눈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거든.”
“크. 인기인은 항상 바쁘네요.”
“가. 가, 인마.”
장난스러운 축객령에 진호가 사무실 밖으로 걸음을 돌렸다.
연습실은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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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케이. 컷. 수고하셨습니다.”
짧은 사인에 촬영이 끝났다.
은서가 고개를 꾸벅꾸벅 숙이며 대기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은서 씨. 요즘 얼굴 좋아요. 기쁜 일이라도 있나 봐요?”
“어머나. 감독님. 저 원래부터 예뻤거든요?”
“으하하. 그거야 알죠. 근데 요즘은 얼굴에 빛이 반짝이는 느낌이라서. 최근에 CF 선호도 상위에 랭크 된거 알죠?”
“헤헤. 그야 감독님들이 잘 찍어 주셔서 그런 거죠. 다음에 기회 되면 또 같이 작품 하나 만들어 봐요.”
“좋죠. 은서 씨 같은 마스크면 열이면 열, 쌍수 들고 환영 할 겁니다.”
낯부끄러운 칭찬까지 차곡차곡 접어 넣은 채 대기실에 도착했다.
매니저 소윤이 한 박자 늦게 들어와서 마실 물을 건넸다.
“벌써 촬영 끝났구나.”
“응. 언니 일 있었어?”
“회사. 드라마 들어온 거 메일로 보냈다고 확인하래.”
“주말?”
“응. 주말 황금 시간에 주연.”
얍, 짧은 환호성을 내며 은서가 주먹을 쥐었다.
주말 황금시간대 주연이라면 확실히 인정을 받았다는 의미다.
내로라하는 배우들이 노리는 자리니까.
“작가님 누구야?”
“김소을 작가님.”
“윽. 김소을 작가님이라면 나 예전에 드라마 할 때 메인 작가님이잖아.”
“그때 호되게 혼났지.”
막 아이돌을 그만두고 배우로 전향 할 때.
발성도 연기도 전부 엉망이라서 제대로 박살이 난 경험이 있다.
팬덤 들고 뻗대기에는 김소을 또한 드라마 쪽 주류였다.
찍소리 못하고 혼날 수밖에 없었다.
“잘 됐네. 연기가 얼마나 늘었는지도 확인 할 수 있겠고. 시나리오 확인 할 수 있어?”
“대표님이 메일로 쐈어. 보고 갈래?”
“아니야. 이동하면서 볼게. 오늘 오빠랑 약속 있어서.”
“기집애. 일과 사랑을 한 번에 쥐겠다?”
“후후. 야망 있는 여자니까.”
농담에 서로 깔깔거렸다.
만사가 잘 풀리고 있으니 구김살이 없는 두 사람이었다.
#
세미의 임시 거처에서 걸어서 10분 거리.
블루 아이 간판이 달린 건물이 하나 있다.
일종의 제2 사옥 개념으로 건물 하나를 임대해서 사용하고 있는 중이다.
아직은 제대로 설비를 갖추지 못했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있을 건 다 있다.
1층과 지하 1층에 위치한 네 개의 연습실.
먹고 쉬고 잘 수 있는 휴게실과 곡 작업이 가능한 별도의 공간까지.
겉만 그럴 듯 한 건 아니었다.
“진호 선생님!!”
오랜만에 진호가 그 건물을 찾았다.
연습실에서 연습이 한창이던 세미가 그를 발견하자 마자 들 고양이마냥 달려가서 안겼다.
“어이쿠. 다 큰 숙녀가 이러면 못써. 연습하고 있었어?”
“네! 네! 아주아주 열심히 연습했어요! 연기 선생님도 많이 늘었다고 했어요!”
“그래? 선생님은 어디 계셔?”
“아이고 이 나이에 저 젊은 것을 어떻게 따라가. 라고 하시며 몸져 누웠어요!”
“그, 그러냐?”
세미에게는 전담 선생이 따로 붙어 있다.
벨로스가 소개해준 연극계 인물과 최현석이 초대한 사람들.
시간과 여력이 되는대로 사람을 붙여서 그녀의 재능을 최대한 살리려고 노력하고 있다.
“아. 하윤이는?”
“지하에서 연습하고 있어요.”
“열심이네. 많이 늘은 거 같아?”
“네. 하윤 오빠도 많이 늘었어요! 연기하다가 자꾸 몰입이 깨져서 혼나곤 하지만요!”
“하하. 그 정도면 충분해.”
애초에 세미 같은 규격 외의 재능과 비교하면 안 된다. 하윤이는 나름의 방법으로 착실하게 자신의 길을 걷고 있다.
“선생님, 선생님! 나 이번에 아역으로 배역 딴 거 들었어요?”
“어, 어. 대표님이 알려줬어. 주말 드라마라고 하던데. 맞아?”
“네! 대표님 따라서 오디션 봤는데 그 날 그대로 뽑혔어요!”
“오. 그래? 오디션에서 무슨 연기를 했는지 한 번 볼 수 있을까?”
“네!”
세미가 냉큼 돌아서서는 자세를 잡았다.
살짝 웅크린, 어딘가 부자연스러워 보이는 형태였다.
‘장애가 있는 캐릭터인가?’
진호가 그렇게 생각하는 찰나.
세미가 웅크린 몸을 쭉 펴면서 허공을 향해서 손을 뻗었다.
“······”
그건 무성 연기였다.
세미는 한 마디도 하지 않은 채 몸으로 무언가를 표현해냈다.
‘굉장하네. 놀라운 표현력이야.’
동작이나 표정에서 의미가 단번에 전달되었다.
이 캐릭터가 얼마나 다급한지, 어떤 절실함을 가지고 있는지.
말 한 마디가 없어도 전부 이해되었다.
“어때요? 괜찮아요?”
“좋네. 표현도 강렬하고. 근데, 약간 아쉬워.”
“아쉬워요? 어디가요?”
“굴곡이 더 있으면 감정 전달이 좋지 않을까?”
“굴곡?”
“그러니까, 이런 거.”
진호가 세미의 무성연기를 흉내 냈다.
하지만 속도가 다르고 표정과 동작의 강약에 차이가 있었다.
이건 말 그대로 완급조절.
낼 때 내고 숙일 때 숙이는.
표현에 대해 완벽하게 제어 할 수 있을 때야 가능한 기교였다.
“······와!”
“이해했어?”
“네! 역시 선생님은 대단해요!”
“배우면 세미도 할 수 있을 거야.”
진호가 세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칭찬을 바라는 강아지마냥 폴폴 뛰는 세미를 그냥 두기는 힘들었다.
“남친 씨. 바람?”
그때, 뒤에서 들려온 스산한 목소리.
“······어? 은서야. 여기는 웬일이야?”
“이래저래 일이 있어서. 우리 남친씨가 어린 여자 취향인줄은 내 미처 몰랐네.”
“들켰으니 살려 둘 순 없겠네. 세미야 가서 물어라.”
“앙?”
“으! 진호, 오빠. 세미가 혼란스러워 하잖아.”
고개를 갸웃거리는 세미의 모습에 진호가 배를 잡고 웃었다.
“요즘 들어서 장난끼가 늘었어.”
“어딘가의 누구 씨 덕분에 마음이 훈훈해서.”
“피. 말은 또 잘해요.”
진호가 가볍게 웃으며 은서의 손을 잡았다.
사귀고 벌써 몇 달이나 지났지만 바쁜 스케줄 덕분에 진도는 이 정도가 한계였다.
‘헤······’ 입 벌리고 두근두근 바라보는 세미에게는 그조차도 대단한 일이었지만.
“가. 들어가서 얘기해. 세미 너도 따라오고.”
“진짜 무슨 일인데? 나 보려고 온 거 아니었어?”
“아닌데? 약속 시간까지 한 시간이나 남았잖아. 일 보고 돌아가는 길에 만나려고 했지.”
“뭐야. 그럼 진짜 다른 일 있나 보네?”
“응.”
은서가 출력해온 종이 뭉텅이를 들고 흔들었다.
“세미가 내 아역이야.”
“······아.”
확실히 일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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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서가 캐스팅된 주말 드라마의 제목은 나팔꽃.
어려운 어린 시절을 극복한 여주인공이 건방진 재벌 2세 도련님을 교화시켜서 성공한다는 내용이었다.
흔한 신데렐라 스토리를 살짝 꼬아서 만든 각본이었다.
“드라마 여주인공이 은서 너고, 그 어린 시절을 세미가 맡게 됐다 이거지?”
“응. 세미 분량은 1화 반절 정도 나오고 회상 씬에서 조금. 아역인거 고려하면 제법 많은 편이지.”
“열심히 할 거예요!”
“그래, 그래.”
세미가 주먹을 쥐며 파이팅했다.
연기를 시작하고 첫 배역인 만큼 의욕이 남달랐다.
“하윤이 배역은 어떻게 돼?”
“어. 하윤이는 내 오빠 역으로 나오는 캐릭터의 아역. 조금 철없고 속없는 인물로 나와.”
“흐음. 쉽진 않겠네.”
진호는 세미 쪽보다는 하윤을 걱정했다.
애정을 200%정도 더해서 설명한다고 쳐도 하윤은 한참 부족했다.
그건 진호가 아닌 세미를 기준으로 해도 마찬가지.
첫 연기인만큼 자신감을 잃지 않은 수준에서 경험했으면 했다.
“어? 진호 형. 은서 누나.”
때맞춰 하윤이 올라왔다.
못 보던 사이에 꽤나 커서 코밑에 거뭇한 수염도 제법 잘 어울렸다.
“캐스팅 된 거 축하한다.”
“하하. 대표님한테 들었어요? 어쩌다 보니 세미랑 같이 나가게 됐네요.”
“오빠랑 동생 사이지?”
“네. 대충 설정이랑 흐름은 익혀 두었어요.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고민하던 차였죠.”
하윤이 꽤나 열의 넘치는 모습을 설명했다.
손에 쥔 노트에도 빼곡하게 무언가가 적혀 있었다.
따로 캐릭터에 대해서 연구를 한 것이다.
“열심이네.”
“흐흐. 열심히 해야죠. 같이 출연하는 세미가 어디 뭐 보통 아인가요? 화면에서 잡아먹히지 않으려면 나름대로 노력은 해야죠.”
“나, 하윤 오빠 안 잡아먹어!”
“하하. 농담이야, 농담.”
하윤은 웃으며 답했다.
그 태도만 보자면 어른스럽고 철이든 태도.
하지만 진호의 눈에는 그보다 많은 것이 보였다.
‘무리하고 있구나.’
어떤 마음인지도 알 것 같았다.
“그럼 이렇게 할까? 스케줄 때문에 길게는 무리지만 하루에 한 두 시간 정도 내가 연기를 봐 줄게. 이곳에서, 둘 다. 어때?”
“어? 진호 오빠, 나는?”
“에헤이. 성인 배우께서 어딜.”
“아, 치사하게.”
“알았어. 알았어. 너도 틈나면 같이 봐 줄게.”
매달려오는 은서까지 전부 셋.
진호가 모두를 손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눈은 하윤 쪽으로 고정 한 채.
“······형한테 폐 끼치고 싶지 않은데.”
“야. 회사 식구가 왜 좋겠냐. 이럴 때 서로 돕고 돕는 거지.”
“그래. 오빠 몸값 더 오르기 전에 배워 둬. 나중엔 돈 내고도 어려울 테니까.”
“응! 응! 하윤 오빠도 같이 배우자! 재미있을 거 같아!”
큰 목소리의 세미까지.
“아······알았어요, 그럼. 여기서 하는 거죠?”
“그래. 여기서. 연습 빡세게 한 번 해보자.”
머쓱한 얼굴의 하윤을 쓰다듬었다.
많은 걸 받았으니 이젠 베풀고 살 때.
진호는 어린 동생부터 시작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