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만 전생 배우-66화 (66/178)
  • Chapter30. 쓰는 법(2)

    진호는 말없이 돌아왔다.

    그리고 침묵과 난감함 사이에서 고심했다.

    어른인 최현석이 있고 조언자인 송학이 있었지만 결정은 그의 것이었다.

    “장단점을 놓고 따져보죠.”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 진호가 입을 열었다.

    “왕호룽의 제안을 받아들였을 때.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이득은 무엇이 있을까요?”

    “음. 성공을 가정한다면 중국에서의 영화 개봉이 있겠지. 그리고 왕호룽의 신임.”

    “그렇다면 단점은?”

    “반대파의 앙심. 실패했을 때는 장점은 없고 단점만 남는 상황이 될 거다. 어쩌면 왕호룽과 같이 한 곳에 묶여서 위험에 처할지도 모르고.”

    “송학 형도 같아요?”

    “난 아무리 생각해도 득보다 실이 많을 거 같아. 중국 개봉 문제는 굳이 우리가 나설 일이 아니야. 그쪽 당파 싸움도 마찬가지고. 너랑 짧게 인연이 있는 거 같지만 우리가 목 맬 상대는 아니잖아?”

    진호가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이럴 때는 공명의 침착함이 참 많은 도움을 주었다.

    몸에서 열이 올라왔지만 머리만큼은 차가웠다.

    ‘얼핏 과실이 달콤해 보이지만 리스크에 비할 바가 아니야.’

    혼자서 한 나라를 움직이는 건 불가능하다.

    왕호룽의 생각이 설사 성공 가능성이 있다고 한들, 그 후폭풍도 만만치 않을 터.

    이건 백 번 양보해도 나서지 않는 것이 옳다.

    “그렇다면 거절 후를 생각해 보죠.”

    “거절 후?”

    “네. 왕호룽의 제안의 가치는 둘째 치고 그와의 대화에서 꽤 많은 정보를 얻었습니다. 중국 내부의 상황도 그렇고 결정권자의 마음도 얼핏 엿볼 수 있었죠.”

    “영화를 보긴 봤다는 거 말이냐?”

    “지금의 문화적 스탠스는 결국 대외적인 경제 경쟁으로 인한 반사효과에 가깝습니다. 우리 영화가 최고다, 다른 거 보지 마라. 대충 이런 거죠.”

    “흐음. 확실히. 무역제제를 받은 이후로 태도가 돌변한 거니까.”

    사람으로 치자면 움츠려 든 거다.

    “이런 상황이면 대외적인 환경이 변하기 전까지는 개봉 금지가 안 풀릴 겁니다. 왕호룽의 제안을 거절하면 더더욱 그렇겠죠.”

    “하지만 할 일은 있다 이거지?”

    “네. 저 하나 나선다고 해 봐야 미미한 일이겠지만 그래도 뭐라도 하긴 해야죠.”

    “어쩔 생각이냐?”

    “간단합니다. 중국이 경제적으로 견제하는 대상. 유일하게 신경 쓰는 쪽에 붙는 겁니다.”

    “미국? 할리우드?”

    진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거창하지만 의외로 가장 쉽게 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토크쇼, 인터뷰. 의견을 피력 할 수 있는 거라면 좋습니다. 최대한 규모가 큰 쪽으로 스케줄을 잡아 주세요.”

    아직은 흥행 끝자락의 힘이 남아 있다.

    중국이 문을 꼭꼭 잠그고 그 안에서 소꿉놀이를 하고 싶다면 한 마디 정도는 해 주고 싶다.

    그러면 너 말고 다른 친구 랑만 논다고.

    #

    왕호룽은 당황했다.

    자신의 제안이 이렇게 단칼에 거부당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가 생각한 진호는 이렇게 냉정한 인물이 아니었다.

    비록 예전에도 제안을 거부 한 적이 있긴 하지만 그 기준에 강철 같다는 느낌은 아니었다.

    이 정도의 설득이면 먹힐 거라 여겼다.

    실제로 이해에 부합하는 면이 있기도 하고.

    “죄송합니다.”

    “진지하게 생각해 본 거겠지?”

    “네. 많이 생각하고 대화를 해 본 결과입니다. 형님의 제안이 나쁘다고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낮은 가능성에 도박을 걸기에는 저도 짊어진 식구들이 많아서요.”

    “도전하지 않으면 얻지 못하는 것도 있다.”

    “전쟁터를 고르는 것도 장수의 역할입니다.”

    하지만 보다시피 흔들림 없이 거절하고 있다.

    그때 보았던 그 청년과 같은 사람일까.

    왕호룽은 자신이 너무 옛 기억으로 사람을 판단했음을 깨달았다.

    ‘변했구나.’

    괄목상대라 하던가.

    호화로운 파티에 휘청거리던 청년은 더 이상 없었다.

    “······좋다. 네 선택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포기하시는 겁니까?”

    “강요하지는 않는다. 전에도 그렇고 이번에도. 난 몽상가이지 폭군이 아니다.”

    “그런 점은 존경하고 있습니다.”

    셈은 어떨지 몰라도 확실히 왕호룽은 자신만의 신념이 뚜렷한 인물이었다.

    진호도 그 부분은 인정하고 있었다.

    “한 동안은 몸을 숨겨야겠구나. 폭풍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것도 어쩌면 내 여정의 한 부분일지도.”

    “그 전에······제게 한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가능성은 둘째 치더라도 왕 형님의 의견은 듣고 싶군요.”

    “비책이 있다?”

    “그 정도까지는 아닙니다.”

    진호가 품고 있던 생각을 풀어냈다.

    곰곰이 이야기를 듣던 왕호룽의 표정이 꽤 다양하게 변화했다.

    “얕군. 얕아. 돌멩이 하나로 산을 어쩔 수는 없다.”

    “압니다. 그래도 차선 중에는 상책 아닐까요?”

    “······음. 확실히. 중국 내에서도 불만이 없는 건 아니다. 영화나 게임. 문화에 대한 소요는 항상 있어왔던 일. 갑자기 그걸 자국의 그것으로 틀어막아 버리니 불만이 안 나올 리 없지.”

    실질적인 일당 독재라 하여도 진짜로 하나인 건 아니다.

    인구 숫자만큼의 생각이 존재 할 수밖에 없다.

    “흠. 그럼 이렇게 하지. 넌 네가 할 일을 해라. 난 네가 피워낸 불씨를 키워보도록 하지.”

    “위험한 거 아닙니까?”

    “난 왕호룽이다.”

    확실히 멋있는 구석이 있는 남자다.

    “좋습니다. 그럼 제가 적벽의 공명처럼 동남풍을 불러오도록 하죠.”

    “난 주유인가? 죽어가는 꼴은 닮았군.”

    “하하. 잘 생긴 얼굴은 닮았습니다.”

    “그 입으로 동오의 제장들을 설득했던 모양이구나.”

    가벼운 농으로 한 차례 웃고.

    두 사람은 그대로 헤어졌다.

    #

    진호는 미국의 유명 토크쇼에 출연했다.

    연예인들, 특히 배우를 초대해서 이야기를 뽑아내는 것으로 유명한 토크쇼다.

    기본적으로 트렌드에 부합하는 유명인들이 나오기 때문에 시청률이 잘 나오는 편.

    하지만 이 토크쇼의 강점은 다른 것에 있다.

    [오. 그러니까 어릴적부터 정신병이 있었다는 거죠?]

    발언 수위가 상당히 높다는 점이다.

    게다가 녹화방송임에도 불구하고 편집을 상당히 노골적으로 한다.

    적당히 잘라내도 될 만 한 발언도 그대로 내보낸다는 말.

    이 점이 시청률의 요인이기도 하지만 까딱 잘못하면 낙인이 찍히기도 쉽다.

    [어릴 때는 반쯤 미쳐있었죠. 연기를 만나지 못했다면 아직도 그랬을 겁니다]

    [오호호. 연기가 배출구가 된 거군요?]

    [네. 연기로도 충분히 미친 사람이 될 수 있는데 평상시에 그럴 이유가 없는 거죠. 제 안의 재능? 이렇게 표현하면 좋을까요? 그런 걸 제어하는 법을 알게 된 거죠]

    [이야. 자신감. 좋네요]

    진호는 그 줄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잡았다.

    쏟아지는 카메라와 먹이를 노리는 듯 한 진행자의 시선 속에서도 여유를 잃지 않았다.

    [그럼, 이번 영화 얘기를 해 봅시다. 흥행이 대단하던데요. 지금 누적 스코어가 어떻게 되죠?]

    [제가 마지막으로 들은 건 월드와이드 2억 달러를 넘어섰다는 거네요. 더 늘었으면 늘었지 줄진 않았겠죠?]

    [하하하. 만약 줄었다면 지인을 의심하세요. 당신의 돈을 훔쳐가고 있을 겁니다]

    [에이. 많이 벌었는데 좀 가져가라고 해요]

    [하하하하. 이거 벌써부터 스타의 기질이 보이는군요]

    자극적인 발언에 지휘자가 목젖을 드러내며 웃었다.

    [제가 알기로 그전까지는 그렇게 큰 수익이 없었다고 하던데. 맞나요? 어때요? 돈이 그만큼 들어오면 느낌도 다를 텐데.]

    [맞아요. 연기를 시작하고 이렇게 큰돈을 버는 건 처음이에요. 계약 덕을 많이 봤죠]

    [아. 그러고 보니 러닝개런티로 계약을 했었죠? 이거 제작사 쪽에서는 배 좀 아팠겠습니다?]

    [뭐, 이렇게까지 성공 할 거라고는 생각을 못했던 거겠죠. 조금 배가 아프기야 하겠지만, 다음에 또 같이 작업해서 메우면 되죠]

    [오. 벌써 후기작이?]

    [하하. 말이 그렇다는 겁니다. 지금은 그냥 쉬고 싶죠. 통장에 돈이 차곡차곡 쌓이는 거 구경하면서요]

    진호가 통장을 보는 시늉을 하자 사회자가 배를 두드리며 웃었다.

    굳어있고 점잔 빼는 사람보다야 이런 쪽이 시청률에 도움이 된다.

    [아, 그러고 보니 아직 중국에서는 개봉을 안 한 거죠?]

    이건 사전에 설정해 둔 질문.

    출연에 대한 조건이었다.

    [심의로 묶여있다고는 하는데. 이거 언제 개봉할지 저도 감을 못 잡겠네요. 중국에서도 영화를 보고 싶은 사람들이 꽤 많은 걸로 아는데 말이죠]

    [이거, 안타깝네요. 그 좋은 영화를 못 보고]

    [시간이 지나면 풀어주겠죠?]

    [하하. 글쎄요. 다른 곳도 아니고 중국이니까요]

    어깨를 으쓱하는 진행자에 웃음소리가 섞여들었다.

    굳이 표현하지 않아도 의미는 다들 알고 있었다.

    [전 솔직히 걱정이네요. 영화가 이런 식으로 묶이고 그러면 앞으로 누가 일을 할까요?]

    [오. 위험한 발언 아닙니까?]

    [하하. 정치적인 견해는 아닙니다. 그냥 배우의 한 사람으로서, 소비되어야 할 장소가 줄어드는 것이 아까워서 그렇죠. 이렇게 영화판에서 고립되면 제대로 소비 못하는 국민들만 손해 보는 거 아닙니까]

    [그건 그렇죠. 좋은 배우들도 진출을 꺼려 할 테고]

    [그러니까요. 나름대로 무대 인사 겸해서 중국어도 공부했는데 말이죠]

    진호가 짧게 중국어로 자기소개를 했다.

    발음과 성조가 상당히 좋은 터라 진행자가 놀란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이야. 이거 차기작도 노렸던 거 아닙니까?]

    [하하. 그냥 연습만 한 셈 됐네요]

    이정도면 충분하게 전했다.

    [사실 제가 액션 영화에도······]

    진호는 능숙하게 화제를 전환했다.

    진행자도 손발을 맞추어 더 이상 중국 쪽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방송은 녹화 후 일주일 후에 방영되었다.

    #

    왕호룽은 본국 내의 사람들을 움직였다.

    고위직에 입김을 넣고 사람들을 선동했다.

    안 그래도 불만이 많던 사람들이 하나 둘 낚여서 숙덕거리기 시작했다.

    재미있는 건 하위계층이 아닌, 상류층에서 그 움직임이 더했다는 사실이다.

    “결국 당론에 따라 움직이지만 누리고 싶은 건 전혀 달랐다는 얘기네.”

    훌륭한 영화가 버젓이 있는데 애국 팔이 하는 싸구려 자위 영화를 좋아하겠는가.

    눈치만 슬금슬금 보면서 숙덕거림에 동조했다.

    [그래서 어쩌자는 건가! 이제 와서 당의 방침을 바꾸자는 건가!?]

    [동요가 심하오! 굳이 이런 식의 숨통 조이기를 해서 우리에게 득이 될 게 없다 이겁니다!]

    [자네! 나라의 이득부터 살펴야 할 것 아닌가!]

    [그래서 지금 득이 됐습니까? 그 토크쇼도 못 본 겁니까? 나라에 득이 될 사람조차 내쫓게 됐는데, 어딜 봐서 이득이라 말하는 거요?]

    당 회의에서도 이건 명백하게 드러났다.

    애초에 통일되지 않았던 의견인 만큼 논쟁이 뜨거웠다.

    ‘신기할 정도로 효과가 좋군.’

    게다가 진호가 출연했던 토크쇼.

    겨우 한 사람, 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효과가 좋았다.

    특히 중국어로 자기소개를 한 점이 주효했다.

    저런 배우가 자국에서 연기를 했을 수도 있다는 점이 크게 다가온 것이다.

    이건 토크쇼 이후로 나온 다른 배우들의 발언으로 힘을 더 받았다.

    빌 고튼이 그러했고 다른 유명한 배우들도 진호의 의견에 힘을 실어 주었다.

    문화는 국가 경쟁과는 다른 접근이 필요하다는 내용이었다.

    이건 헤쉬테그를 달고 응원하는 문화로 번졌다.

    “이 정도까지 목소리가 커지면 당에서도 묵인하기 어려워. 주석님의 생각도 바뀔 테고, 반대파에서도 움츠려 들겠지.”

    왕호룽은 일련의 상황을 전부 지켜봤다.

    극단적인 상황까지 상정하고 움직였던 것에 비해 결과는 매우 순조롭게 풀렸다.

    마치 마법과도 같이.

    ‘이러면 더욱 더 포기하기 힘들어지는군.’

    한 사람이 가질 수 있는 힘.

    이미 그가 주장하던 바 아니던가.

    진호가 이번에 그것을 확실하게 보여주었다.

    “귀화만 해 준다면 억만금이 아깝지 않을 텐데.”

    아쉬움에 마른 입술만 손으로 훑었다.

    지울 수 없는 갈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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