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만 전생 배우-63화 (63/178)
  • Chapter28. 당신들 말고(2)

    진호는 잠이 덜 깬 채로 부산에 도착했다.

    조금 찬 새벽바람에 얼굴을 씻고 가볍게 스트레칭 하는 걸로 잠을 씻어냈다.

    일정이 변경되었음에도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있었다.

    취재진들도 한 가득이고 초대된 유명인사도 더러 보였다.

    “어이쿠, 드디어 오셨군요. 수고 많았습니다.”

    행사 책임자인 윤길학이 일행을 반겼다.

    허리를 꾸벅꾸벅 숙여 인사를 하고는 일행을 안쪽 대기실로 안내했다.

    질 좋은 소파와 간단하게 먹을 음식이 구비되어 있었다.

    “후우. 이제 좀 살 거 같네.”

    “너무 먹지는 마. 10분 정도 있으면 시작 할 테니까.”

    “와, 이젠 먹는 것도 통제한다.”

    “군소리 말고. 스타일리스트 불러 올 테니까 기다려.”

    바삐 온 터라 행색이 썩 좋지는 않았다.

    빌과 벨로스도 마찬가지.

    국내 프로모션은 진호 혼자서 진행해도 충분했지만 굳이 함께하겠다고 지원했다가 이런 꼴이 됐다.

    “하아암. 졸려 죽겠네.”

    “움직이지 마세요. 화장 흐트러지잖아요.”

    “······네.”

    스타일리스트의 한소리를 들으며 진호가 부동자세를 취했다.

    대신 눈알만 데굴데굴 굴리며 주변을 살폈다.

    살짝 열린 문 저편으로 사람들이 바삐 오가는 것이 보였다.

    ‘그러고 보니 고아원 애들이 온다고 했지?’

    어쩌면 저 너머에 옹기종기 모여 있을 지도 모르겠다.

    메이크업이 끝나기를 기다린 후 진호가 밖으로 나갔다.

    “응?”

    “오. 오오. 이거 홍 배우님 아닙니까?”

    하지만 문밖에서 서성거리던 사람은 아이가 아니었다.

    나이 꽤나 있는 중년인들이었다.

    저마다 양복을 쫙 빼입고 있었다.

    “이야. 이거 화면에서 보던 것보다 훨씬 얼굴이 좋네요. 하하하.”

    “그러게요. 역시 상을 탄 배우라 이건가? 때깔이 남달라요.”

    “음음. 그렇고말고. 이런 배우가 우리나라에서 나온 게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다고.”

    그리고 저들끼리 말을 쏟아내는데 속사포 같았다.

    진호는 잠시 벙쪄 있다가 겨우 끼어 들었다.

    “저기, 행사 관계자 분들인가요?”

    “아이고. 이거 소개가 늦었네. 전 여기 부산 씨에통 사장입니다.”

    “전 맥스 필름 대표인 김갑환이라고 합니다.”

    “전 유한 컬러의······”

    저마다 명함을 쑥쑥 뽑아댔다.

    전부 부산 출신의 이름 꽤나 있는 사람이었다.

    ‘행사에 지역 유지들을 초대 한 건가?’

    썩 어울리는 모습은 아니었지만 이해 못 할 것도 아니었다.

    명함을 받고 악수를 하는 걸로 대화를 마쳤다.

    “진호야, 행사 시작한다.”

    행사에 올라 갈 시간이었다.

    #

    행사는 전형적으로 진행되었다.

    사회자가 영화를 소개하고 출연자 인터뷰 및 참가자 질문을 받았다.

    그리고 예의 초대 인원들이 가볍게 악수하고 사진 찍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이걸로 끝이라고?”

    진호는 그것이 의아했다.

    “어. 이게 끝이라는데? 어떻게, 바로 호텔로 가서 쉴래?”

    “아니, 잠깐만요. 분명 고아원 쪽 아이들도 초대받았다고 하지 않았어요?”

    전날 들은 것과 진행이 달랐다.

    “아. 맞다. 그러고 보니 애들이 안 보이네. 어제 행사가 딜레이 돼서 그냥 돌아갔나?”

    “하루를 꼬박 기다리고 돌아가요?”

    “내가 한 번 물어볼까?”

    “네, 형. 부탁할게요.”

    진호는 대기실로 돌아가고 송학이 움직였다.

    그 사이 빌과 벨로스는 여독을 풀러 호텔로 돌아가고 진호만 혼자 남게 됐다.

    [오빠. 오늘 볼 수 있는 거야?]

    그리고 폰에 찍힌 톡.

    진호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바로 답을 하지 못했다.

    “어, 야. 진호야. 그 애들 돌아갔다고 하더라.”

    오래지 않아 송학이 돌아왔다.

    “돌아갔어요? 어제?”

    “아니. 들어보니까 오늘, 행사가 시작하기 조금 전에 돌아갔다고 하더라.”

    “오늘요? 아니, 왜요?”

    “다른 참가들이 오면서 뒤로 밀렸나 봐. 너 마지막에 사진 찍은 사람들 있지? 행사 주관하는 쪽에서 그렇게 결정했다는 거 같아.”

    “······아니 애들을 하루 꼬박 기다리게 해 놓고서 새벽에 그냥 그렇게 보냈다는 겁니까?”

    진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해 할 수 없는 처사였다.

    “아하하. 여기 계셨군요. 오늘 수고 많으셨습니다.”

    그리고 때 맞춰 윤길학이 들어왔다.

    무대 마무리를 하고 정리하던 중에 진호가 아직 남아 있다는 얘기를 듣고 찾아온 참이다.

    “아. 윤길학 대표님. 맞죠?”

    “오. 이름을 기억해 주시는군요. 맞습니다. 늘 구름의 대표 윤길학입니다.”

    “그럼 몇 가지만 물어봐도 될까요? 제가 전해 듣기로는 고아원 아이들이 참여하는 걸로 알았는데, 오늘 모습이 안 보여서 말이죠.”

    “아······그 애들 말이군요. 그게 뭐 원래는 그렇게 기획을 했는데, 갑자기 손님들이 와서 말이죠. 부산 지역 영화 관계자 분들이라 자리를 어떻게든 마련해야 하다 보니 일정을 조절하게 됐습니다.”

    윤길학은 대수롭지 않게 답을 했다.

    일하다 보면 흔하게 있는 일이었다.

    “아니, 그렇다고 해도 아이들을 그냥 돌려보내면 어떻게 합니까. 한참을 기다렸을 텐데.”

    “하하. 아쉽지만 어쩌겠습니까.”

    “아니, 아쉽다는 말로······”

    진호는 혀끝을 씹으며 말을 멈췄다.

    눈앞의 남자의 표정에서 모든 걸 읽을 수 있었다.

    애초에 1그람도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불려온 고아원 애들은 그냥 기회 되면 갈아 치울 수 있는 도구 정도.

    아이들 개개인을 대상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짜증나는군.’

    태연한 얼굴이 속을 울렁거리게 만들었다.

    “그 아이들. 그러니까 고아원. 위치가 어디인지 압니까?”

    “글쎄요. 저는 잘······”

    “아니. 그럼 섭외는 누가 했습니까? 그 사람 연락처라도 좀 알려 주세요.”

    “알려주는 건 어렵지 않습니다만. 무슨 일로 고아원 위치는 알려고 하시는 건지?”

    “이봐요. 그 아이들이 무슨 마음으로 왔겠습니까. 절 알까요? 그냥 연예인 온다 싶으니까 쪼르륵 달려왔던 거 아닙니까. 근데 하루를 꼬박 기다리고 본다는 연예인도 못보고 돌아간 거 아닙니까? 그게 신경도 안 쓰여요?”

    “아니 뭐······그래봐야 고아원 애들인데.”

    “이봐요!”

    콱, 소리치고 튀어나가는 진호를 송학이 겨우 말렸다.

    윤길학은 움찔하고 물러나서는 ‘뭐 이런 놈 있나’싶은 얼굴로 바라봤다.

    그 얼굴이, 눈빛이 더 짜증나는 진호였다.

    “됐습니다. 번호나 알려주고 가세요.”

    “······거, 꽤나 유별납니다.”

    “이게 유별난 거면 그냥 유별난 인간으로 살고 싶네요. 이런 걸 뻔 하게 흘려보내는 게 정상이라면 그런 정상 따위는 그쪽이나 가지세요.”

    진호는 연락처를 넘겨받은 뒤 인사도 없이 돌아섰다.

    한시도 이런 인간과는 같이 있고 싶지 않았다.

    #

    “응. 응. 나도 그쪽으로 갈게.”

    은서는 이른 시간에 전화 한 통을 받았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전화였다.

    “누구? 진호?”

    “응. 행사 끝났다고 연락 왔어.”

    “헤에. 그럼 드디어 만나러 가는 거야?”

    매니저 소윤이 짓궂게 웃으며 물었다.

    이미 두 사람이 사귀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만나긴 만나는데, 계획대로는 안 될 거 같아.”

    “응? 왜? 레스토랑이랑 다 예약해 두지 않았어?”

    “오지랖이라고 해야 할까? 일에 휘말렸거든.”

    은서가 진호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행사에 초대 받았지만 마냥 기다리기만 하고 헛걸음을 해야 했던 고아원 아이들의 이야기.

    “야. 그건 나쁘다. 애들을 그냥 돌려 보내냐?”

    “응. 그래서 진호 오빠가 고아원에 직접 방문하자고 그러네.”

    “······어. 근데 한국에 몇 시간 안 있지 않아? 부모님은?”

    “얘기를 전했더니 그쪽으로 오신다고 해.”

    “이거 참. 좋은 일이긴 한데, 넌 괜찮냐?”

    소윤이 은서의 얼굴을 살피며 물었다.

    촬영 때문에 얼굴도 못 본지 한참이나 됐다.

    겨우 시간 내어서 만날까 싶었는데 일이 이렇게 돼 버리면 연인 입장에서는 썩 달갑지 않을 것이다.

    “응? 난 괜찮아. 진호 오빠가 그냥 넘겼으면 되레 화가 났을걸?”

    “진짜냐? 우리 은서가 그렇게 천사표는 아닐 텐데?”

    “뭐래. 오빠랑 따로 시간을 못 가지는 건 아쉽지만 애들이잖아. 오빠가 애들 얼마나 생각하는지 알고 있는 걸.”

    “그랬어?”

    “응. 그리고 언니. 이럴 때 망설임 없이 움직이는 남자. 멋있지 않아?”

    “······어이구 콩깍지.”

    자기가 좋다는데 뭐라 할까.

    소윤은 눈을 반짝이는 은서를 향해 손사래를 치고 말았다.

    ‘계집애. 부럽게.’

    속마음은 숨겨 둔 채.

    #

    햇빛 고아원 원장은 갑자기 찾아온 손님이 깜짝 놀랐다.

    “어, 어어? 홍 진호. 배우님 아닙니까?”

    “갑자기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연락을 못 받으셨나요?”

    “아요. 아뇨. 행사 건으로 누가 온다고는 했는데 그게 배우님일 줄은 몰랐죠.”

    원장은 황망한 표정으로 진호를 맞이했다.

    행사 건으로 초대를 받고 찾아갔다가 일정 변경으로 쫓겨나다시피 했을 때는 기분이 더러웠었다.

    그래서 이번에 또 누가 찾아온다는 얘기에 한 마디 꼭 해주겠다고 생각했었다.

    근데 그 사람이 진호라니?

    이건 상상해 본 적 없는 일이었다.

    “아이들은 지금 어디에 있나요?”

    “안에 있습니다. 불러올까요?”

    “제가 가죠. 그리고 사람 몇 분만 빌릴 수 있을까요? 선물을 가져왔는데 양이 좀 많아서요.”

    진호가 벤 안쪽의 큰 보따리를 가리켰다.

    행사 전날 산 물건들에 오면서 몇 개를 더 구입했다.

    옷도 있고, 장난감도 있고, 먹을 것도 있었다.

    “어휴. 뭘 또 이렇게 왕창 사 오셨대요. 야, 명수야! 석천아! 와서 좀 도와드려라!”

    고아원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한 손 거들어 짐들을 옮겼다.

    네 사람이 낑낑거리고 들어도 짐이 남을 만큼 양이 많았다.

    “이쪽입니다. 이쪽에 모여 있어요.”

    그리고 아이들이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아이들은 전부 골아 떨어져 있었다.

    전날 좁은 행사장에서 어영부영 기다리다가 제대로 잠도 못 잔 탓이었다.

    “으, 응? 어? 티비에서 보던 형아다.”

    어찌 할까.

    진호가 망설이고 있는 사이에 선 잠에 끔뻑거리던 아이 한 명이 그를 발견했다.

    “으응? 어? 진짜다! 티비에서 보던 형이다!”

    “나 알아! 알아! 뭐더라? 하여튼 연예인이다!”

    “바보야, 배우라고! 배우.”

    “그게 그거 아니야?”

    “아닐 걸? 맞나? 나도 모르겠다.”

    한 명이 깨자 도미노처럼 우수수 깨어났다.

    꼬물꼬물 진호 쪽으로 몰려와서는 왁, 하고 떠들어댔다.

    원장이 ‘이것들아 조용히 해야지.’라며 말리려고 했지만 진호가 손짓으로 제지했다.

    그냥 떠드는 모습이 더 보기 좋았다.

    “다들 어제 힘들었지? 형 보러 왔다가 그냥 갔다는 얘기를 들었거든. 미안해서 형이 이렇게 선물 가지고 왔어.”

    “······와! 와와! 장난감이다!”

    “새 옷도 있어! 원피스야!”

    “난 여자인데 형이에요?”

    선물을 풀자 아이들이 더 시끄럽게 달려들었다.

    연예인이라고 놀란 건 잠깐이었고 금세 동네 형처럼 대했다.

    ‘목마 태워줘요!’, ‘연예인이면 달리기 빨라요?’ 라며 주변을 빙빙 돌기도 했다.

    아이들 목소리가 그렇듯, 꽤나 쨍쨍 울렸지만 진호는 한 번을 안 찡그리고 전부 하나하나 답을 해 주었다.

    “근데, 형. 형. 어제는 왜 우리 못 본 거예요?”

    “음. 이상한 아저씨가 형을 못 가게 잡아서.”

    “오늘 아침에는요?”

    “배불뚝이 아저씨들이 새치기해서.”

    “새치기 나쁜 건데!”

    “그러니까. 그래서 형이 이렇게 왔잖아. 날 만나기로 했던 건 너희인데. 안 그래?”

    “맞아요! 와! 와!”

    “오빠지만 특별하게 형이라고 불러줄게요!”

    두서없는 이야기에도 진호는 구김 없이 대해주었다.

    조금 떨어져 빙빙 돌던 아이들도 하나 둘 경계를 풀고 거리를 좁혔다.

    “우리 아들. 결혼 할 때가 됐나?”

    “어머나, 어머님.”

    진호네 부모님과 은서가 고아원을 방문 한 건 조금 뒤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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