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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0만 전생 배우-61화 (61/178)

Chapter27. 파리에서(3)

은서는 조금 귀찮았다.

같은 일정이니 서하준과 같은 호텔에 묵는 건 어쩔 수 없는 일. 약속 때문에 나가는 길에 우연히 맞닥뜨린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드라마를 본 팬이 다가와 커플 포즈를 잡아달라는 건?

피하고 싶은 일이었다.

“조금만 더 다정하게 부탁드릴게요. 제가 드라마를 너무 재밌게 봐서요.”

“하하. 팬분의 부탁이라면 당연히 들어 줘야죠.”

게다가 이 인간은 왜 이렇게 친절할까.

바짝 다가와 팔짱을 꼭 끼고 환하게 웃어 보이는 꼴이 잘난 맛에 사는 인간 같다.

팬은 또 그게 좋다고 꺅꺅거리고.

‘나가봐야 하는데.’

진호가 근처까지 왔을 텐데.

시간에 쫓기는 것이 괜히 초조했다.

“은서야, 어디 불편해? 표정이 안 좋은데.”

“아뇨. 괜찮아요. 조금 피곤해서 그래요.”

“그럼 들어가서 쉬지 그래?”

“아······그게 따로 일이 좀 있어서요.”

이제 좀 떼어놓고 싶은데 계속 말을 건다.

말이라도 좀 시건방지고 그러면 딱 잘라 낼 텐데 사람은 또 좋다.

“많이 바빠? 늦게 들어오는 거려나? 아니면 같이 호텔에서 스파라도 할까 했지.”

“에이, 괜찮아요. 전 나중에 따로 할게요.”

“그럼 있다가 라운지에서 와인 한 잔 어때? 가볍게 술 한 잔 하고 쉬는 게 회복에 더 도움이 된다고 하더라.”

“제가 술이 약해서요. 제안은 고맙지만 그냥 알아서 쉴게요. 오빤 피곤하면 먼저 들어가세요.”

연거푸 거절하니 살짝 미안한 마음까지 든다.

은서가 서하준을 밀어내며 몸을 돌리려 했다.

“은서야. 원래 그렇게 눈이 높은 거니?”

하지만 그런 그녀의 손을 서하준이 잡아챘다.

“오빠? 갑자기 무슨 소리에요?”

“너도 어린애가 아니니까 알 거잖아. 충분히 표현을 했다고 보는데. 내가 부족하니?”

“······무슨 표현인지 잘 모르겠네요. 오빠가 한 생각과 제 생각은 다른 거 같아요. 그냥 안 들은 셈 칠게요.”

분위기가 묘해지자 은서가 벗어나려 했다.

이런 식으로 엮이는 건 싫었다.

“드라마 하면서 우리 제법 통했다고 생각했는데. 나 혼자만의 착각이었니?”

“오빠. 드라마는 그냥 드라마죠. 죄송하지만 전 상대역과 썸타고 그럴 생각 없어요.”

“너랑 나 정도면 충분히 어울린다고 생각했는데. 내 어디가 부족하거······”

“은서야.”

조금 더 질척해지려는 순간.

어딘가 날 선 듯한 목소리와 함께 한 남자가 다가왔다.

모자를 깊게 눌러 썼지만 은서가 그 얼굴을 못 알아 볼 리는 없었다.

“진호 오빠? 와 있었어요?”

“그쪽 친구와 팔짱 끼고 사진 찍을 때.”

“아, 아니에요! 그건 그냥 드라마 배역 때문에 팬들이 포즈 취해달라고 한 거죠!”

“나도 알아. 아니까 그냥 보고만 있었던 거지.”

만약 팬이 있는 상황이 아니었으면 어땠을까.

진호도 자신의 다음 행동을 자신 할 수 없었다.

“그쪽이 서하준 씨? 은서랑 연기하는 거 잘 봤어요.”

“······아. 누군가 했더니 진호 씨군요. 영화 촬영차 프랑스로 왔다고 하더니. 근처에 있었나 봐요?”

“한 동안 파리에 눌러 앉아 있었죠. 은서가 스케줄 때문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얼굴이나 볼까 하고 나왔습니다.”

“아. 일이 있다는 게 진호 씨와?”

“네! 네! 오빠랑 만나기랑 했거든요.”

은서가 냉큼 진호의 뒤로 숨었다.

어색한 분위기를 떨쳐내기 위함이었지만 서하준의 눈에는 달리 보였다.

마치 자신에게서 도망쳐 진호에게 간 것처럼.

“그럼 두 분이? 아. 그래서 은서 씨가 거절을 한 거구나.”

“네? 네? 아, 아니에요! 뭐래요. 오빠랑 나는 그냥 친한 사이고 그러니······”

“좀 실망이네요.”

“네?”

“은서 씨 정도면 좀 더 어울릴 만 한 사람이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 분은 아니지 않나요? 썩 어울리는 느낌도 없고.”

서하준의 얼굴에서 친절함이 사라졌다.

말투는 여전히 공손했지만 눈빛이 달라져 있었다.

“난 은서에게 안 어울린다? 지금 초면에 그딴 식으로 입을 놀린 건가요?”

진호도 마찬가지였다.

같은 배우에 대한 예의나 초면인 입장에서의 격식보다 앞서는 것이 있었다.

아주 본능적인 감정.

“말마따나 그쪽이 은서 씨와 어울리는 얼굴은 아니잖아요. 작달만한 키에 얼굴은 평범하기 짝이 없고. 어떻게 운은 좋아 상은 탄 모양이지만.”

“키만 멀대같이 큰 허여멀건한 친구가 입은 마음껏 놀리시네. 그럼 그쪽은 그 겉모습 말고 뭘 가지고 있나요?”

“그쪽 보다야 많이 가지고 있죠. 많은 인기, 많은 팬, 더 나은 비전. 그리고 알지 모르겠지만 제 부친이 중앙건설 부회장입니다. 이 정도면 넘치는 거 같은데.”

“어이구야. 아버지까지 나오셨네. 근데 어쩌나. 그쪽이 말 한 것들은 내가 가진 것 하나만 못할 거 같은데.”

“하. 대체 뭐가 있기에 그렇게 잘났다는 겁니까?”

“연기, 새끼야.”

진호가 주머니에 양 손을 쑤셔 넣고는 서하준을 노려봤다.

현재 진호가 촬영 중인 영화의 배역은 갱.

그것도 밑바닥에서 기어 올라온 입지적인 인물이다.

본질적으로 포식자의 기질을 가지고 있었다.

“포, 폭력은 좋지 않습니다.”

서하준이 저도 모르게 움찔 거리며 물러났다.

자신보다 10cm는 더 넘게 작은 체구였지만 풍기는 아우라가 달랐다.

“내가 너 같은 아이한테 폭력이나 쓸 사람으로 보이냐? 허우대 하나 가지고 흔들거리는 바람 인형 같은 놈에게?”

“거, 거 말 좀 가려서 합시다.”

“이게 가려서 하는 거야. 어디서 마른 양파 같은 새끼가 튀어나와서 사람 견적을 재? 내가 그렇게 만만해 보이냐? 뭐? 은서 씨와는 안 어울려? 우리가 어딜 봐서 안 어울리는데?”

“······!”

진호가 손을 뻗어 은서를 팍 당겨왔다.

얼떨결에 품에 안긴 꼴이 된 은서는 눈만 동그랗게 뜬 채 굳어버렸다.

“내가 연기 시작할 때부터 함께 해 온 인연이야. 서로 부족 할 때면 도와주고 힘들 때면 지탱해준 사이라고. 네놈이 허우대와 몇 푼 안 되는 인기로 저울질하기에는 우리 사이가 깊다 이거야.”

“크, 크으음. 그럼 애초에 사귀는 사람이 있다고 말 하면 될 거 아닙니까?”

“하든 안 하든. 너 아니라고. 아니라는데 왜 이렇게 달라붙어? 눈치 없냐? 딱 보면 모르겠어?”

“아, 아니! 은서 씨! 솔직하게 말해주세요! 정말로 저 인간보다 제가 모자라다는 겁니까!?”

서하준이 발작적으로 물었다.

아무리 그래도 진호보다는 자신이 낫다고 생각했다.

외모로 보나 뭐로 보나.

“······”

하지만 답 없는 은서의 얼굴을 보자 되레 답이 나왔다. 섬 처녀 꽃 따다가 첫사랑 만난 얼굴로 볼만 발그레하게 붉히고 있는데 다른 답이 필요할까 싶었다.

이건 애초에 의미 없는 저울질이었다.

“드 가. 허우대만 큰 친구야.”

서하준은 토라진 소녀처럼 도망쳤다.

#

흥분이 가라앉자 정신이 돌아왔다.

무슨 짓을 벌인 건가.

진호는 자신이 선을 넘었음을 인지했다.

“······오빠. 이거 팔부터 좀.”

“아, 아. 미안. 너무 세게 당겼나?”

“아니야. 괜찮아.”

팔을 풀자 은서가 새색시마냥 벗어났다.

얼굴부터 목까지 전부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저기 그······상황 상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된 거 알지?”

“어, 어. 알아. 하준 오빠가 너무했지. 진호 오빠는 그냥 상황 모면해 주려고 한 거잖아.”

“그래. 나도 그럴 의도였어.”

진호가 딱 맞아 떨어지는 대화에 입을 닫았다.

은서는 여전히 얼굴만 붉히고 수줍어하는 중.

일은 이대로 해결 될 것 같은데 왠지 모르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저기 은서야.”

“응?”

“그럴 의도로 끝내도 되나? 아니 괜찮나?”

“무슨 소리야?”

“아니, 그게 말이야. 그냥 그럴 의도였다, 라고 넘겨도 괜찮냐고?”

“안 넘기면?”

“안 넘기면. 그래, 안 넘기면······안 넘기고 말지 뭐. 안 넘길 수도 있잖아.”

진호의 말에 은서의 고개가 조금 들렸다.

“오기 전에 빌과 대화를 한 게 있거든. 그가 말하더라고. 마냥 방치하다가는 남이 채 간다고. 난 뭐랄까, 내가 널 방해하는 것 같아서 물러나고 싶었거든. 시간을 두고 천천히 다가가는 쪽으로.”

“······근데?”

“그 키 큰 친구와 팔짱 낀 모습을 봤을 때. 내 정신이 아니었어. 팬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으면 나 그대로 달려갔을지 몰라.”

“왜? 오빠가 왜 달려오는데?”

“그야······내 사람에게 누가 치근덕거리면 화 날 수밖에 없잖아.”

진호는 뜨거운 불을 뱉은 기분이었다.

속은 시원해 졌지만 또 다른 열기가 치고 올라왔다.

그리고 그건 맞은편의 은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조금 놀란 듯 한 얼굴을 하고 있다가 이내 눈물을 글썽거렸다.

“가, 갑자기 왜 울어?”

“왜 울긴. 오빠가 그런 말을 이제야 하니까 울지. 말은 안 했지만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

“······그런 거야?”

“그럼. 적어도 오빠가 날 두고 미안함은 느끼지 않을 정도가 되려고 죽어라 노력했다고. 매일같이 연기 연습도 하고. 하루 두 시간도 겨우 잤다고.”

투정 아닌 투정에 진호는 말을 잇지 못했다.

이렇게까지 해 줬다는 것에 놀라고, 같은 마음이었다는 것에 기뻤다.

그리고 우는 은서의 얼굴이 사랑스러웠다.

“미안. 미안. 내가 마음고생 시킨 거 같네.”

“알긴 아네! 난 진짜 엘빈이 방한하고 프랑스 일간지에 오빠 소식이 실릴 때 마다 얼마나 철렁했는데. 이 양반이 밖에서 다른 여자한테 홀랑 넘어가지는 않을까 하고!”

“내가 그럴 사람은 아니잖아.”

“사람 속 어떻게 알아!? 확인해야지 알지······”

“그러게. 확인해야 아는 거네.”

진호가 은서의 팔을 잡아서 안으로 당겼다.

품 안으로 쏙 들어오는 여린 몸에 묘한 충족감을 느꼈다.

이건 연기로 느끼는 충족감과는 다른 종류였다.

“······이러다 사진 찍히면 스캔들이야.”

“알아. 그래도 괜찮아.”

“바보야. 나 회사에서 잘린다고.”

“잘리면 우리 회사로 와.”

“피, 말은.”

투덜거렸지만 은서도 떨어 질 생각은 없었다.

품에 꼭 안긴 채 ‘내 남자’라고 말 할 사람을 만끽했다.

이곳은 프랑스 파리의 한 거리.

연인의 포옹은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

[그래서 사귀기로 했다고?]

실실 웃는 얼굴은 감출 수 없었나 보다.

빌은 호텔 방까지 찾아와서는 진호를 심문했다.

그리고 결말을 알아냈다.

[분위기가 그래서 어쩔 수 없었지. 네 말대로 그냥 두면 다른 남자가 채 갈 거 같기도 하고]

[하하하. 잘 했다. 남자라면 그 정도 추진력은 있어야지. 무릇 용기 있는 자가 미인을 차지한다고 하지 않더냐. 잘 했어]

[끄응. 근데 다음이 걱정이야. 이거 비밀연애로 해야겠지?]

[하하. 그건 네 몫이지. 난 즐거우니 그걸로 됐다]

[아오, 남 일이라고]

빌에게 베개를 던지며 진호가 투덜거렸다.

하지만 그의 말대로 여기서부터는 그의 일이었다.

연애도, 사랑도, 일도 모두 일정 선 부터는 혼자서 안고 가야한다.

책임지는 것이 어른의 역할이니까.

[그보다 연기는 괜찮겠냐? 그렇게 물러진 얼굴로 배역에 집중이나 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

[걱정 마. 짐을 덜어서 인지 그 어느 때보다 컨디션이 좋아. 지금이라면 연기가 더 잘 나올 거 같다고]

[그래?]

[그럼. 한 번 볼 테냐?]

진호가 짧게 배역을 연기했다.

지금의 기분과 배역의 감정은 완전히 상이했지만 그런 건 전혀 방해가 되지 않았다.

되레 마음이 편해서인지 그런 변화가 쉬웠다.

[사랑의 힘이냐?]

[러브 이즈 파워. 하하하]

두 사람 모두 웃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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