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만 전생 배우-60화 (60/178)

Chapter27. 파리에서(2)

촬영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투자자들의 투자 철회 움직임도 사라지고 좋은 입소문이 그 위치를 대신했다.

빌 고튼의 상대역이 아시아인이라는 사실에 불편해 하던 사람들도 조금씩 줄어들었다.

영화 관계자 평론가.

혹은 각종 방송국 사람들까지 꽤 넓은 폭으로 촬영장을 공개해서 의견을 수렴한 덕분이었다.

“응. 촬영이 끝나면 아무 하루 이틀 정도 쉬지 않을까? 넌 드라마 어때?”

여유가 생기자 한국으로 연락하는 빈도가 늘었다.

프랑스 파리가 꿈의 도시라고는 하나 어디까지나 타국.

이국만리에서 생활을 하다보면 고향이 생각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벌써 촬영이 끝난 거야? 생각보다 일찍 끝났네.”

은서는 드라마를 하나 끝내고 휴식에 들어가던 차였다. CF와 각종 예능 섭외가 쌓여 있는 터라 그 휴식도 매우 짧았지만.

“광고? 파리로?”

그러다 은서가 툭 던진 말에 진호가 반색했다.

드라마 종영 이후로 파리 컬렉션에 초대되어 광고 촬영과 병행한다는 소식이었다.

일 때문에 오는 터라 여유가 많진 않았지만 그래도 잠깐 얼굴은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런 기대감이 있었다.

“16일이면······다음 주네? 촬영 스케줄을 확인해 봐야겠지만 잠깐 짬은 낼 수 있을 거야.”

날짜를 확인하고 핸드폰에 체크를 해 두었다.

시간이 없으면 억지로라도 만들어 낼 심산이었다.

프랑스로 넘어와서 벌써 두 달.

고향 사람이 그리운 진호였다.

#

[오케이! 컷!]

벨로스의 컷 사인으로 촬영이 종료되었다.

잔뜩 몰입해 있던 진호가 심호흡으로 배역에서 빠져나왔다.

[오늘따라 연기가 더 좋은데? 좋은 일이라도 있는 건가요?]

[하하. 그래 보이나요? 고향에서 친구가 오기로 했거든요]

[오. 친구. 좋지요. 연기에 몰입하는 것도 좋지만 가끔은 환기를 하면서 정신을 맑게 할 필요도 있어요]

벨로스는 밸런스를 중시하는 인물이었다.

배역에 몰입하기 위해서 세상과 단절하는 배우들이 많은데, 그는 이런 방식을 선호하지 않았다.

현실과 배역을 잘 구분하며 밸런스를 유지하는 사람을 더 선호했다.

[오, 진호. 그때 그 아리따운 여성분인가?]

[빌. 은서라고 기억해? 드라마 끝내고 화보 촬영 차 프랑스에 온다고 했어]

[하하. 귀여운 커플이군]

[아직 커플은 아니야. 은서 앞에서 말조심해 달라고]

[커플이 아니라고? 어째서? 너처럼 활기 넘치는 남자가 아리따운 여자 분을 혼자 두는 거야?]

[서로 일 때문에 바쁘니까. 아직은 친구사이야]

[오, 진호. 진호. 이 멍청한 남자야. 사람 일은 모르는 거라고. 네가 이렇게 넋 놓고 있을 시간에 그 아리따운 여자 곁에는 날 파리가 꼬이고 있을 거라고]

[에이 설마······]

진호는 바로 부인했지만 표정은 감추지 못했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은서는 미인이다.

그것도 최근 들어서 인기를 구가하는 여자 스타.

그런 그녀에게 구애하는 다른 남자가 없다는 건 말이 안 된다.

[하하. 이 둔한 남자 같으니. 그걸 이제야 안 거냐? 연기도 좋지만 사랑을 놓치면 인생이 피곤해 진다고. 기회가 있을 때 확 잡아채]

[끄응. 빌, 너와 얘기를 하고 있으면 나까지 이상해 질 거 같아. 우리 사이는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까 신경 꺼]

[쯧쯧. 나중에 후회나 하지 말라고]

손가락을 좌우로 흔들며 혀를 차는 빌.

진호는 살짝 울컥했지만 더 이상은 반박하지 않았다.

하면 할수록 불리한 것은 자신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아니겠지······?’

몽글몽글 피어오르는 건 불안감이었다.

#

촬영을 끝내고 진호는 은서의 출연작을 살폈다.

드라마는 아직 방송하지 않았지만 클립으로 꽤 많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이 남자가 상대역인가?’

이름은 서하준.

188CM의 큰 기에 서구적인 외모를 지닌 미남이었다.

슬쩍 프로필을 양 쪽으로 띄워놓고 보니 외모적으로는 진호가 견줄 상대가 아니었다.

“······의외로 로맨스도 좀 있네?”

은서 단독 주연이라 없을 줄 알았는데 상대역인 서하준과의 로멘스가 상당했다.

둘 모두 외모가 출중한터라 시청자 반응도 좋았다.

서하준의 서와 은서의 서를 합쳐서 서서커플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호호 커플은 벌써 잊은 거냐?’

보고 있자니 조금씩 더워지는 진호였다.

“뭐야. 열애설도 있었네?”

프랑스에서의 촬영이 한창일 때.

은서와 서하준의 열애설이 보도 된 적 있었다.

양 측 회사 모두 부정을 하였기에 금세 사그라졌지만 증거라고 모아 둔 사진들이 상당했다.

이것만 죽 늘어놓고 보자면 분명 연인이었다.

“잠깐. 뭐야?”

그렇게 자료를 쭉 훑던 진호가 멈칫했다.

드라마 촬영 끝나고 더 이상은 볼 일 없겠지, 라고 생각하던 남자의 이름이 또 다시 나왔다.

그것도 프랑스 파리, 화보 촬영이었다.

은서의 화보 촬영은 단독이 아니었다.

서하준과의 커플 화보였던 것이다.

‘이런 얘기는 한 마디도 없었는데.’

진호가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서 화면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왠지 가슴이 답답하고 몸에서 열이 났다.

“이게 잘못은 아니지. 음. 아니야.”

일적으로 드라마 찍었고 화보는 컨셉따라 바뀔 뿐이다.

게다가 그런 문제가 아니더라도 은서와 자신은 특별한 사이가 아니다.

그녀가 촬영 중에 눈 맞아서 다른 남자를 만난다고 해도 뭐라 할 입장이 아니라는 것.

‘엘빈에게는 그리 말했지만······’

어디까지나 그건 진호의 입장.

은서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는 알 길이 없다.

“······아이고. 이 양반들은 도움이 안 되네.”

전생의 속삭임들은 그냥 무시해 버렸다.

그나마 도움 되는 카사노바는 너무 질척거리는 느낌.

나머지는 처첩을 두던 시대의 사람들이다.

조조는 두 말 할 필요도 없고.

현대의 썸과 밀당을 담론할 전생은 없었다.

‘하긴. 이쪽은 연기가 아닌 진심이니까.’

연기가 아닌 문제에 대해서는 쑥맥인 진호였다.

침대를 데굴데굴 구르다 끝으로 떨어졌다.

#

며칠 뒤.

은서가 파리에 도착했다.

그녀는 호텔에 짐을 풀고 곧바로 패션쇼에 참석했다.

[나 파리에 도착했어]

[숙소는? 자리는 잡은 거야?]

[응. xx호텔에 짐 풀었어. 지금은 패션쇼 참가 때문에 이동 중이야. 끝나고 연락 줄게]

이동하는 길에 열심히 진호에게 연락을 남겼다.

제대로 잠도 못자서 피곤이 턱밑까지 올라왔는데도 폰은 손에서 놓지 않았다.

‘좀 자라, 자라.’ 보다 못한 매니저가 한 소리 했지만 끝까지 손에 쥐고 있었다.

일도 일이지만 지금은 이쪽이 더 중요했다.

‘초조해서 잠을 잘 수 있어야지!’

도착하기 전, 비행기에서 봤던 신문이다.

프랑스 지역지에서 발간한 건데 유명 여배우가 진호를 이상형으로 꼽은 것을 꽤 크게 다루고 있었다.

국제 커플? 이런 타이틀까지 달아서 물고 뜯고 씹기를 반복했다.

“어머, 어머. 은서? 전보다 훨씬 예뻐졌다.”

“······은서야? 뭐해? 인사해야지.”

“아, 아! 죄송해요. 오랜만이에요 윤 선생님.”

그건 패션쇼 자리에 도착한 후로도 마찬가지였다.

파리까지 초대를 해 준 디자이너 선생과 인사를 하면서도 머리에는 그 일이 가득이었다.

“아이고. 우리 은서. 많이 피곤한가보네. 드라마 촬영 끝내고 바로 넘어온 거지? 내가 너무 급하게 불렀나?”

“아뇨. 아뇨. 선생님 덕분에 파리까지 오고. 좋은 경험하고 있는데요.”

“그래. 드라마 상대역이었던 친구랑 느낌이 너무 좋아서 한 번 우리 쇼에 새워보고 싶었거든.”

“······어? 저 오늘 무대에 서요? 그런 얘기는 못 들었는데.”

“응. 응. 그냥 이벤트 성으로. 부담가지지 말고 그냥 가볍게 한 번 걷고 와.”

은서는 ‘아뇨, 사양할게요!’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차마 입 밖으로 뱉을 수는 없었다.

이런 무대에 서는 것도 이력이었다.

“그보다 그 친구는? 둘이 서있는 모습 보고 싶은데.”

“오고 있을 거예요.”

“어. 은서, 너. 그 친구한테 관심 없니? 반응이 영 떨떠름한데?”

“누구요? 하준 오빠? 에이, 그냥 친한 오빠에요.”

“흐응. 난 하도 주변에서 두 사람 잘 어울린다고 하기에 몰래 만나는 줄 알았지.”

“안 만나요. 관심도 없고.”

은서는 대수롭지 않게 답을 했다.

분명 잘 생기고 멋진 오빠인 건 맞지만 그에게서는 남다름 설렘을 느낄 수가 없었다.

이건 확실히 취향의 문제였다.

“헤에. 꽤 칼같이 답하네. 따로 마음에 둔 사람이도 있어?”

“글······쎄요. 그보다 요즘 파리는 어때요? 재미있는 뉴스라도 있어요?”

“어머, 어머. 마침 잘 말했다. 너, 진호라고 알지? 한국에서 같이 연기도 했다고 하던데.”

“진호 오빠요? 알죠. 근데 왜요?”

“세상에. 저번에 공개 촬영이 있어서 가 봤거든. 사람이 어쩜 연기를 그렇게 잘하니? 빌 고튼하고 딱 마주서서 연기하는데 하나도 꿀리는 게 없는 거야. 그 프랑스어 억양하고는. 섹시하더라.”

“섹······쿨럭. 쿨럭.”

은서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다른 사람 입에서 이런 이야기를 들으니 어쩐지 기분이 묘했다.

“요즘 우리 애들도 그 남자한테 푹 빠졌다는 거 아니니. 얼굴은 그냥 건조한 타입인데, 느낌이라고 할까? 우수에 찬 눈동자에 마른 입술. 보듬어서 키워주고 싶은 남자라니까.”

“하······하하. 인기가 많은가 보네요?”

“그럼. 일전에는 지역지 인기투표에서 1등도 했어. 동양인이 이 바닥에서 그러기 쉽지 않은 거 알지? 다들 프랑스 발음이 섹시하다고 하더라. 묘하게 귀여운 구석도 있고.”

은서의 얼굴이 미묘해졌다.

칭찬이니 좋아해야 할 일인데 썩 그럴 마음이 들지 않았다.

“은서 넌 어떠니? 그런 남자?”

“네?”

“아하하. 아니겠지? 우리 은서가 얼굴을 얼마나 보는데.”

“하하하하.”

어색하게 웃는 사이에 준비가 끝난 모양이다.

매니저가 다시 돌아와 자리를 안내했다.

‘그럼 끝나고 뵐게요.’ 라며 은서는 물러났다.

“이 양반이 밖에서 뭐하고 돌아다니는 거야?”

뿌득.

구겨지는 브로슈어에 매니저가 움찔했다.

#

제법 밤이 깊어진 시각.

진호는 매니저인 송학과 함께 파리 도로를 가로질렀다.

스케줄을 끝낸 은서에게서 만나자는 연락을 받은 차였다.

“형. 그래도 오랜만에 보는 건데 선물이라도 사가는 게 낫지 않을까요?”

“선물? 너 의외로 그런 거 챙기는 타입이었냐?”

“타입은 뭔 타입이에요. 그냥 오랜만에 보니까 뭐라도 하나 건네주자 이거죠. 근처에 꽃집 같은 거 안보이죠?”

차창을 두리번거리는 진호의 모습을 보며 송학이 슬며시 웃었다.

“호텔 들어가기 전에 본 거 같다. 들러서 꽃이라도 한 송이 사서 가든가.”

“······꽃. 괜찮죠? 이상하게 보이거나 그러진 않죠?”

“방금은 사자며. 뭐가 또 이상하다고 그래?”

“좀 부담스럽다거나.”

“흐흐. 자식이 소심하기는. 꽃 받아서 싫어할 여자는 없다. 부담이고 뭐고 일단 사.”

“그래요?”

“그래, 인마. 형이 여자 마음은 꿰뚫고 있거든.”

“형, 솔로잖아요.”

“······”

마지막에 송학이 살짝 울컥하긴 했지만 핸들을 돌리거나 그러진 않았다.

가던 길 그대로 달려서 꽃집 앞에 차를 세웠다.

목적지인 호텔 바로 옆이라 이대로 내려서 걸어가도 충분했다.

“저거랑, 저거. 장미도 좀 섞어 주세요.”

꽃은 잘 모르지만 장미는 안다.

가장 예뻐 보이는 장미를 섞어서 한 단을 꾸렸다.

화사하게 퍼지는 꽃향기에 진호의 얼굴에도 절로 웃음이 피었다.

[연인에게 주려나 봐요?]

[아······하하. 그런 건 아직 모르겠고, 그냥 소중한 사람을 오랜만에 봐서요. 이정도면 충분하겠죠?]

[네. 아주 마음에 들어 할 겁니다]

가게 주인의 짧은 확언까지 담은 채 약속장소로 걸어갔다.

어둑해진 파리 밤거리.

주변으로 보이는 젊은 연인들이 왠지 모르게 발걸음을 더욱 가볍게 만들어 주었다.

“아! 은서······”

그렇게 한 블록을 걸어 내려가 약속 장소를 목전에 두었을 때.

진호는 호텔 로비를 가로질러 나오는 은서를 발견했다.

반가운 마음에 소리까지 높이며 부르려 했다.

“저건 누구야?”

하지만 은서는 혼자가 아니었다.

은서 옆에 딱 붙어서 팔짱을 낀 채 웃고 있는 한 남자.

훤칠한 키에 멀리서 봐도 뚜렷한 이목구비.

인터넷으로 확인했던 은서의 상대역 서하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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