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만 전생 배우-59화 (59/178)

Chapter27. 파리에서(1)

진호는 왕호순에 대한 참고인으로 경찰서를 몇 번 오고갔다.

취재진이 따라붙고 인터뷰 시도가 쇄도했다.

하지만 진호는 일절 응하지 않았다.

조사는 빠르게 마무리 지었다.

“결국 제대로 알아낸 게 없네.”

경찰 수사 결과는 간단했다.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던 왕호순이 여은수라는 인물에 대한 집착으로 진호를 습격했다는 것.

경찰도 언론을 부담스러워 했고, 진호 쪽도 촬영 때문에 더 이상은 시간을 소모 할 수 없었다.

일은 그렇게 마무리가 되었다.

“뭔가 불안하다 이거지?”

“네. 그러니까 형이 좀 알아봐 줘요.”

황급히 촬영을 마무리 짓고 프랑스로 출국 전.

진호는 서훈을 따로 만났다.

“짚이는 구석이라도 있는 거냐?”

“왕호순, 그 사람이 제 정보를 어디서 얻었는지 알고 싶어요. 언론에 공개되지 않은 것들까지 알고 있었거든요.”

“해킹된 자료를 가지고 있었다 이거지?”

“네. 어디서, 어떻게 구했는지가 가장 궁금해요. 그냥 우연일 수도 있지만······”

공교롭게도 그 사람이 촬영 스텝이었다?

진호는 이 찝찝함을 그냥 두기 싫었다.

“저번 다큐멘터리로 신세 진 것도 있고. 열과 성을 다해서 알아봐 주마.”

“부탁할게요.”

“그래. 넌 촬영이나 잘 하고. 가뜩이나 일정이 연기되어서 다들 불안해하더라. 가서 확실하게 눈도장 찍어주고 와.”

“걱정 마요. 그런 건 제 전문이거든요.”

진호가 호언장담을 했다.

지금은 그저 마음 편히 연기를 하고 싶을 뿐이었다.

#

진호는 회복이 빨랐다.

다친 손도 다리도 거의 회복이 되었다.

한국에서의 촬영을 마치고 프랑스로 넘어갔을 때는 연기에 불편함이 없을 정도였다.

“불안하다니?”

문제는 다른 곳에서 불거져 나왔다.

“소문이긴 한데, 투자자들 사이에서 철회 얘기가 나오고 있어.”

“무슨 소리야, 그게?”

“촬영이 계속 딜레이되고 사고가 발생하잖아. 투자자들 입장에서는 이게 불안하다 이거야. 벨로스 이름 믿고 투자를 했는데 영화가 망할까봐서.”

“아. 근데 이렇게 중간에 투자금을 회수 할 수도 있어?”

“그건 나도 모르지. 근데 투자자들이 모여서 반발하면 아무래도 힘들긴 할 거야.”

파리에 위치한 호텔.

짐을 풀고 여독을 해소하던 중에 송학이 물어온 소식이었다.

그냥 쵤영이구나, 하고 내버려 두지 않고 그도 열심히 움직이고 있었다.

“심각한 건가?”

“우리나라보다 프랑스 쪽이 더 관심가지고 보도했을 걸? 이쪽 신문이나 뉴스를 보면 자세하게 나올 텐데.”

“뉴스라, 뉴스.”

진호가 침대 위를 굴러서 타뷸렛 PC를 확인했다.

검색어 몇 개를 집어넣고 돌리니 주르륵 나왔다.

송학의 말대로 촬영에 대한 관심이 지대했다.

숫자나 반응만 봐도 한국보다 월등했다.

‘확실히 프랑스에서의 벨로스 위상은 남다르니까.’

국내에서야 상 탄 배우가 촬영한다니까 관심 가진 정도.

프랑스의 열광적인 반응과는 온도 차이가 있었다.

“흐응. 확실히 여기서도 말들이 많네.”

“뭐라는데?”

“촬영 중 사고에 대한 언급도 많고 불안해하는 반응도 여럿이야. 이러다가 영화가 엎어지는 것이 아닐까 싶은 기사도 보이네.”

“아이고. 이러니 투자 철회 같은 소문이 돌지.”

송학이 손톱을 까득까득 씹었다.

이번 영화는 진호 커리어나 회사 비전을 생각해서라도 굉장히 중요한 포인트였다.

외국계 감독과 처음으로 하는 일.

해외 진출을 위한 교두보였다.

“뭔가 분위기를 반전시킬 무기가 필요하겠네.”

무엇이 있을까.

진호는 침대 끝으로 구르며 생각해 봤다.

#

부상이 회복되지 않은 진호의 컨디션을 고려해서 다른 사람의 분량부터 촬영이 시작되었다.

오랜만에 영화로 컴백하는 빌을 보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역시 대단하네. 좋은 연기야]

[3년간의 공백이 안 보이네]

[여전히 박력이 넘쳐. 연기 하나 가지고는 뭐라 할 수 없는 인간이니까]

빌의 연기는 발군이었다.

나름대로 이름 꽤나 있는 배우들이 운집해 있었지만 그의 에너지를 따라 올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에게는 혼자서 씬을 끌어가는 힘이 있었다.

[좋네. 좋아. 역시 빌은 훌륭한 연기자야!]

[괜히 걱정을 했던 것 같군. 역시 그가 나오는 장면은 문제가 없어]

[이러면 역시 그 인간인가?]

[애초에 어울리지 않았다고. 영화가 난항을 겪는 것도 결국 그 탓이라 이거지]

그런 웅성거림 속에서 진호는 낯선 대화를 발견했다.

어딘가 일반 관중과는 다른, 묘한 기색의 사람들이었다.

‘관계자들인가?’

주변을 곁눈질로 살폈지만 그들을 알아보는 사람은 없었다.

“형. 형.”

“응? 왜?”

“저기, 뒤쪽에 있는 사람들 말이야. 우리 쪽 관계자인가?”

“글쎄. 그냥 촬영 구경 온 사람들 아니려나?”

“형도 모른다 이거지?”

“내가 알아봐야 얼마나 알겠냐. 다른 스텝들에게 물어보고 올까?”

“아니야. 됐어.”

말은 이렇게 했지만 송학은 주변 인물들에 대해서 빠삭했다.

그가 모른다면 관계가 없거나 접촉해 본 적 없는 사람들이란 의미였다.

‘뭐하는 사람들이지?’

자꾸 눈에 밟혔다.

[오케이! 모두 수고했습니다]

그 무렵 해서 씬이 끝났다.

다음 씬을 준비하기 위해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이제 그 인간이 나올 차례인가?]

[제대로 봐 둬. 돌아가서 설명을 해야 하니까]

[흥. 의미가 있을까? 어차피 그분들도 우리와 생각이 같잖아]

관중 사이에 섞인 이들의 대화는 끊이지 않았다.

진호는 촬영을 준비하기 위해서 움직이며 그들을 곁눈질로 계속 살폈다.

‘불편한데 말이지.’

썩 좋은 시선은 아니었다.

#

진호는 배역을 깊이 파고들었다.

캐릭터의 성장 배경을 알고 성격과 말투를 이해해야 온전한 연기가 나올 수 있다.

작중 캐릭터는 어릴 적 고아원에서 자라, 독불장군 식으로 자신의 입지를 다졌다.

남을 믿지 않고 행동이 거칠지만 내면에서는 외로움을 가지고 있는 그런 인물.

이를 구성하기 위해서 많은 전생이 동원되었다.

‘주왕의 성격과 조조의 치밀함. 내면적으로는 악공의 외로움도 담았어.’

각각의 인물을 잘 조합해서 극중 캐릭터를 빚어냈다.

[좀 더 세게 들어와 주세요. 받아치는 장면에서 얼굴이 드러나도록]

캐릭터 연구는 그것에서 멈추지 않았다.

한 사람을 빚어냈다면 그 사람이 극중에서 어떻게 표현될지를 연구해야 한다.

대사의 방식, 행동의 범위 등.

이건 혼자서 전부 감당 할 수 없는 일이기에 동료들의 도움이 필요했다.

[이렇게? 얼굴 옆쪽으로 손이 나가는 편이 나을까?]

[그게 더 커 보이지 않을까요? 손을 딱 뻗은 뒤에 대사를 깔면 제가 바로 받아치는 걸로]

[음. 좋네. 그걸로 한 번 가보자]

감독이 극을 전부 총괄하지만 세밀한 부분은 배우끼리의 합의로 변경하곤 한다.

지금이 딱 그랬다.

[허. 저놈 하는 꼴을 좀 보라고]

[건방지군. 감독이 버젓이 있는데, 나서서 설치는 꼴이라니]

[이래서 안 됐어. 애초에 동양인 따위를 섭외하니까 영화가 산으로 가는 거라고. 벨로스 감독 정도라면 충분히 다른 배우를 섭외 할 수 있잖아? 어째서 이러는 거야?]

[흥. 뻔 한 거지. 거장 벨로스와 상을 탄 동양인. 보기 좋은 조합이라고. 속물적인 놈들이 영화를 다 망치고 있어]

하지만 그것이 누군가에는 좋지 않게 보였던 모양이다.

속삭임에 그치던 목소리들이 조금씩 커졌다.

[이런. 눈들이 온 모양이군]

[눈? 빌. 저 사람들이 누구인지 아는 거야?]

[알지. 영화판 돌다보면 흔하게 보는 군상들이니까]

그 소리가 빌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진호 옆으로 걸어와 혀를 차는 모양새가 썩 반기는 얼굴은 아니었다.

[프랑스 영화인들은 꽤나 고루한 면이 있어. 일종의 순혈주의지. 자국 영화에 자국 배우가 나와야 한다고 보는 거야]

[그런 느낌은 전혀 못 받았는데?]

[지금은 많이 사라졌으니까. 하지만 영화판에서 돈 굴리는 고루한 인간들은 여전히 남아 있거든. 저기 저 스파이 같은 인간들도 그런 놈들이 부리는 족속들이지. 촬영장을 기웃거리며 분위기를 살피는 거야]

일종의 문화적 국수주의.

시장은 개방되어 있으나 아직 문화적 시선은 자국의 것에 갇혀 있었다.

실제로 진호 역시 영화제에서 많은 시선을 받지 않았는가.

상당수는 편견과 불신으로 가득 차 있는 시선이었다.

[빌어먹을 원숭이 놈. 감히 우리 빌 옆에서 뭐라고 속삭이는 거야!?]

[마음에 안 드는군. 다른 좋은 배우가 얼마나 많은데 저런 인간을 써서 영화를 말아먹는 거지?]

[우리가 움직여서 배우를 교체해야 한다고]

속삭임은 끊이지 않았다.

빌은 혀를 차고 진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시선의 의미를 확실하게 이해 할 수 있었다.

[영화가 잡음에 흔들리니까 날 제물로 삼고 싶어 하는군]

[대신 사과하지. 모든 영화인들이 저런 건 아니야. 저들은 그저 자기들이 잘났으면 싶은 머저리니까]

[하하. 걱정 마, 빌. 나도 모든 사람이 저렇지 않다는 건 알고 있어. 하지만 저런 시선도 무시 할 수는 없지. 내가 이곳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편견이라는 것은 쉬이 극복 할 수 없는 일이다.

동양 배우가 서구권에서 연기를 하면 그 자체로 많은 짐을 짊어지고 있는 격.

진호가 상을 받았든 얼마나 커리어를 쌓았든 변하지 않는다.

이 모든 걸 안고 나아가는 것이 배우의 업.

[빌. 만약 배우가 자신을 싫어하는 사람조차 감복시킬 수 있다면. 그 배우에게는 무슨 상을 주어야 할까?]

진호가 옷소매를 걷으며 한 걸음 나아갔다.

카메라 세팅이 끝나고 벨로스가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하하. 그런 배우가 있다면 오스카라도 부족하지. 인류 평화를 위해서 노벨상이라도 주는 게 어때?]

[괜찮네. 노벨상을 탄 배우]

진호가 수십, 수백의 시선 가운데에 섰다.

감탄, 애정, 질투, 분노, 경멸.

온갖 시선이 뒤섞여 있었다.

‘배우니까.’

이 모든 걸 안고 자신의 길을 걸어야 한다.

진호가 심호흡을 했다.

[액션!]

동양인이 아닌 배우가 그곳에 있었다.

#

사업가, 뒤셸은 친구의 말에 화를 냈다.

며칠 전만 해도 자신과 뜻을 같이하던 친구였는데 오늘은 영 딴판이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제작사를 압박해서 배우를 교체해야 한다니까!]

[뒤셸, 이 친구야. 내 말 따라서 한 번 보라고. 직접 보고나면 생각이 확 바뀔 거라니까?]

[흥! 가서 돈이라도 받았나?]

[아, 이 고약한 인간. 내가 돈 몇 푼에 생각을 바꿀 사람인가?]

친구의 반응에 듀셸의 미간이 구겨졌다.

고집스러운 걸로 치자면 친구가 자신보다 배는 더할 것이다.

그렇기에 더 이해가 가지 않았다.

분명 며칠 전만 해도 영화의 방향성을 걱정하면서 배우 교체를 부르짖었다.

[이봐. 영화에 사고가 많다는 건 좋은 징조가 아니야. 이건 다 촬영의 불협화음이 문제라고. 동양인 배우 하나만 교체하면 되는 일인데 왜 아니라는 거야?]

[봤으니까 그렇지. 우리 생각이 잘못 돼 있었다고]

[우리 생각이 잘못 돼 있었다고?]

[그래. 그러니까 날 믿고 한 번 보러 가자고. 그 어느 때보다 훌륭한 영화가 나올 테니까]

[······그렇게 확신을 하는 건가?]

친구의 지지한 목소리에 듀셸도 한 풀 꺾였다.

[확실해. 돈이 걸린 일이니 만큼 그 어느 때보다 확신을 가지고 있어]

[허 참. 투자자의 시선으로도 그런 거냐?]

[돈이 있다면 죄다 여기에 투자 할 거네. 하하하]

이렇게까지 말 하는데 듀셸도 더 이상 버틸 수는 없었다.

친구와 나란히 투자하고 있는 ‘상품’을 확인하러 갔다.

그리고 이해했다.

왜 친구가 이렇게 난리를 쳤는지.

[혹시 그 친구 가계에 프랑스인은 없었나?]

국경과 인종을 넘어서는 힘이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