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만 전생 배우-57화 (57/178)

Chapter26. 사고(1)

국내 촬영이 거의 마무리 되었다.

재촬영으로 가라앉았던 분위기도 후반에는 다시 살아났다.

찍는 사람이 더 잘 아는 법.

장소를 옮겨서 재촬영을 한 것이 더 낫다는 걸 알아차린 것이다.

“스탠바이!”

“세게 조여! 중간에 풀리면 다친다고!”

이제 남은 건 차량 탈주 씬.

부서진 차에서 진호가 뛰어내리며 강변으로 도망치는 장면이었다.

극의 긴장감이 최고조로 오르는 씬이었기에 굉장히 중요했다.

“진호야, 준비 다 됐지?”

“연습은 충분히 해 뒀으니까요.”

괜히 매니저인 송학이 더 긴장했다.

촬영 전 리허설로 액션 감독의 지도를 충분히 받아 두었지만 씬 자체가 거칠었다.

자칫 잘못하다가 다치기라도 하면 어쩌란 말인가.

초조함에 앉지도 못했다.

“더블 체크 해! 안전장치 확실한지 다시 봐!”

“더블 체크 하겠습니다!”

“확인 했습니다. 안전합니다.”

현장도 그만큼 긴장감이 흘렀다.

몇 번 실수해도 괜찮은 일반 연기와는 상황이 달랐다.

까딱하면 사람이 다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스텝들의 신경이 날카로웠다.

[후후. 내가 다 떨리는군]

[네 연기나 집중하라고, 빌]

[터지는 차에서 뛰어내리는 건 내가 아니야. 실수해서 다치고 그러면 내 상대역이 사라져 버린다고]

[악담을 해라]

빌이 농담으로 진호의 긴장을 풀어주려 했다.

연습은 충분히 해 두었지만 진호도 이런 연기는 처음.

긴장이 안 된다면 거짓말이었다.

“준비 끝났습니다!”

짧게 호흡을 정리하고 준비된 세트로 걸음을 옮겼다.

주변은 조용했다.

#

올 스탠바이 상태.

세팅 된 기기들이 자리를 잡고 감독의 신호만 기다렸다.

“액션!”

짧고 간결한 신호.

스텝이 장치를 작동하자 고정되어 있던 차체가 횡으로 거칠게 흔들렸다.

프레임이 삐걱거리고 특수 제작된 유리 파편이 떨어졌다.

‘지금······!’

진호는 프레임을 손으로 잡으며 차체 밖으로 몸을 기울였다.

장치 자체가 프레임 절반가량을 무너뜨리며 가라앉기 때문에 빨리 나가는 것이 중요했다.

콰득.

‘콰득?’

하지만 그 순간.

진호가 예상하지 못하던 상황이 발생했다.

전체 프레임 중 절반.

그러니까 안전 상태로 유지되어야 할 부분이 금이 쫙 가며 무너지기 시작한 것이다.

순식간에 차체가 내려앉았다.

“······!”

다급함에 진호가 붙잡은 건 창문틀이었다.

특수 제작된 유리가 파편으로 달라붙어 있는 그 창문.

손끝으로 아픔이 전해졌지만 지금은 아픔보다 상황이 더 급했다.

힘을 주어 몸을 당기며 밖으로 굴렀다.

콰콰쾅.

밖으로 몸이 나오는 것과 동시에 차가 무너졌다.

프레임이 토막 나 바닥에 박히고 두꺼운 철판이 통으로 무너졌다.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면?

단순히 부상 정도로 끝나지 않을 일이었다.

“컷! 컷! 안전반!!”

“뭐하는 거야!? 스텝!”

“의료팀 어디 있어!? 당장 뛰어와!”

삽시간에 난리가 났다.

공들여서 준비한 세트기 때문에 스텝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차체가 이런 식으로 내려앉으면 안 됐다.

절반만 무너지며 안전한 곳에서 진호가 빠져나오는 것이 정상.

“진호야, 다친 곳은 없냐?”

“봐봐! 상처는? 깔리진 않았어?”

“뭐하고 있어!? 구급상자 가지고 와!!”

매니저 송학을 포함해서 스텝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손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는 걸 보고 대경했다.

발을 동동 구르고 소리치고 난리도 아니었다.

“이거 세트 마지막에 점검한 거 누구야!?”

“이, 이상한데. 마지막에 다 확인하고 나왔어요.”

“확인 했는데 안쪽 프레임이 왜 무너져!? 너 지금 누구 하나 죽이려고 작정 한 거냐!?”

세트를 총괄하는 스텝이 불같이 화를 냈다.

멱살잡이 하려는 걸 주변 사람들이 겨우 말렸을 정도.

사고가 발생 했을 때의 책임은 그들에게 있었다.

예민할 수밖에 없었다.

[진호. 괜찮은 겁니까?]

[전 괜찮아요. 그보다 감독님. 장면은 어떻게 나왔나요?]

[그것부터 묻는 겁니까?]

[못 쓰는 건가요?]

[아뇨. 안전부위까지 전부 무너진 덕분에 장면은 더 생동감 있게 나왔습니다]

[휴. 다행이네요]

그제야 진호가 한숨을 내쉬었다.

사고는 사고고 촬영은 촬영이었다.

“아이고 멍청아! 촬영은 둘째 치고 몸부터 살펴야지! 일단 병원부터 가자. 너 손 이래서야 오늘 촬영은 끝이야.”

“송학 형. 나, 뒤에 촬영 분이······”

“야! 일단 병원부터 가자고! 너, 형 화내는 거 보고 싶어!?”

“······알았어요. 병원부터 갈게요.”

얼굴까지 시뻘겋게 변해서 소리치는 송학을 보고는 진호도 고집을 접었다.

[감독님 저······]

[일단 병원부터 가세요]

다행히 벨로스도 이 문제에 대해서는 송학과 의견이 같았다.

그대로 대기 중이던 의료팀 차에 올라탔다.

촬영은 올 스톱되었다.

#

다행히 상처는 깊지 않았다.

특수 제작된 소품이었기 때문에 날카로운 재질이 아니었다.

베인 피부를 소독하고 찢어진 상처를 꿰맸다.

“그나마 다행이다. 난 큰일 난 줄 알고 얼마나 놀랐는지.”

“형도 참. 무사하게 나온 거 봤으면서.”

“야. 옆에서 보는데 소리가 얼마나 컸는지 아냐? 중간에 뚝 부러지는 소리 나더니 통째로 무너졌잖아.”

“부러지는 소리가 났어?”

“그렇다니까. 듣는 순간 알았지. 이건 뭔가 잘못됐구나, 하고.”

송학만이 아니라 주변 스텝들 모두였다.

중간에 끊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순간 모두가 잘못 돼 가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좀 이상하네. 안에 있던 난 그런 소리를 못 들었는데 말이지.”

“못 들었다고? 꽤나 크게 들렸는데.”

“흐음. 난 못 들었는데 밖에서는 들었다. 안쪽 프레임이 문제가 아니었던 건가?”

“뭔 소리야?”

“사고 전에 스텝들이 안쪽은 다 살폈잖아. 혹시 몰라서. 근데, 그때는 문제가 없었다고.”

괜히 더블 체크를 하는 게 아니다.

만약의 사고를 대비하기 위해서 몇 번이고 세트를 점검했었다.

“그럼 바깥 쪽 프레임에 문제가 생겼다는 건데.”

“그쪽은 그냥 일체형이잖아. 문제가 생길 건덕지가 없을 텐데?”

“그러니까. 그게 의아해. 주문 받은 통짜 제품인데 사고가 생길 이유가 없단 말이야.”

차량의 외부 프레임은 완성품이다.

기존의 차체와 다를 바 없다.

그렇기에 어지간한 무게에는 무너지지 않는다.

안쪽에 장비를 좀 달았다고 통째로 붕괴하는 건 있을 수 없다.

‘업체에서 불량품을 제공한 건가?’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낮다.

벨로스가 영화 작업에 들어가면서 직접 손을 댄 업체 중 하나였다.

소품의 질에 대해서는 그가 보증했었다.

“그냥 우연한 사고인가?”

“왜? 아니라고 봐?”

“아니야. 그냥 사고일거야. 물건이 낡아서 무너졌나보지. 내가 재수 없게 걸린 모양이다.”

진호가 더 이상 깊게 말하진 않았다.

이제 겨우 촬영 초반 부.

괜한 의심으로 주변 사람들을 걱정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도 알아는 봐야지.’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의심병 깊은 한 분이 진호와 함께 하고 있지 않은가.

눈이 예리하게 번뜩였다.

#

손에 부상을 입기는 했지만 촬영에는 무리가 없었다.

차 탈출 씬이 끝나고 난 뒤에는 빌 고튼과 대치하는 장면 정도만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손의 상처는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오케이! 컷!]

촬영은 순조롭게 지나갔다.

빌과 진호의 호흡은 그야말로 찰떡이었다.

대사를 치고받는데 망설임이 없었다.

적의를 뿜어 낼 때는 원수 같고 반대로 호흡을 맞출 때는 형제 같았다.

[이제 여기서 찍을 건 식당이 마지막인가?]

[마무리 짓고 파리로 넘어가니까. 생각보다 촬영이 많이 딜레이 된 터라 다들 걱정이 많아]

[흐흐. 걱정은 무슨. 일하다 보면 이 정도 딜레이는 일상다반사라고]

[베테랑이라 부럽구만]

빌이 낄낄거리며 커피를 홀짝였다.

한국산 캔 커피에 푹 빠져서는 촬영 하나에 열 캔은 마셔댔다.

[그보다. 그 사고 경위는 봤어?]

[대충은. 납품 물건의 불량. 그렇게 결론을 내린 거 같더라고]

[흐응. 뭔가 이상하지 않아?]

[이상하다니?]

[그 납품업체 말이야. 벨로스가 직접 선정한 곳이야. 영화 제작을 하면서 오랫동안 거래를 해 왔지. 이제 와서 갑자기 불량품을 납품하다니. 이상하단 말이지.]

[실수를 한 걸지도. 아니면 갑자기 돈이 궁해졌다든지]

[뭐, 그럴 가능성도 충분하지. 그래도 영 찝찝하단 말이야. 벨로스 저 영감이 통화하는 걸 들었는데 그쪽에선 굉장히 억울해 하는 눈치였어]

진호는 딱히 자신의 의구심을 빌과 공유하지 않았다.

지금 빌이 드러내는 의혹은 순전히 그 자신의 것이었다.

[그럼 누가 물건을 바꿔치기라도 했단 거야?]

[그렇지. 소품관리가 빡빡하다고는 말하기 어렵잖아. 누가 마음먹고 손을 쓴다면 충분히 가능하지]

[하지만 왜? 굳이 그렇게 할 이유가 있나?]

[······글쎄? 영화를 망치려고? 널 다치게 하려고?]

[누가?]

[그건 나도 잘 모르지]

결국 돌아서 이런 결론이다.

진호도 벨로스도 살면서 척 진 사람이라면 여럿 있다.

하지만 그들 중에서 이 정도의 일을 할 사람?

‘짚이는 사람이 없는 건 아니지만······’

Tm의 대표가 있지만 그쪽은 지금도 조사 받느냐고 바쁘다.

진호에게 신경 쓸 여력은 없다.

“슛 들어갑니다. 준비해 주세요.”

그리고 진호도 더 이상 길게 생각 할 여유가 없었다.

촬영 스탠바이 신호에 빌과 함께 카메라 앞에 자리를 잡았다.

긴 식당 테이블에 나란히 앉아서 서로의 의견을 떠 보는 그런 자리였다.

[프랑스 촌놈이 여기가 어디라고 와 있는 거냐?]

스산한 진호의 목소리.

사람 하나 둘 정도는 씹어 먹고도 남을 만큼 무게감이 있었다.

[얼굴이나 좀 볼까 해서. 설마하니 꽁무니를 뺀 건 아니겠지?]

[······하. 건방진 새끼. 하루 이틀 놀아 주었다고 내가 네 친구라도 된 것 같으냐?]

[글쎄. 서로 목숨을 맡긴 적이 있으니 적어도 전우 정도는 되지 않을까?]

빌과 진호는 프랑스에서 서로의 등을 맡겼다.

그것이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발생한 일이라고는 하지만 나름의 친밀감이 생긴 건 사실이었다.

빌은 그 점을 이용하고 싶어 했고, 진호는 자신이 그렇다는 사실이 불쾌했다.

[건방진 놈. 주제를 알아야. 너 따위는······]

그렇기에 진호는 보여주려 했다.

힘의 차이. 자신이 가진 강맹함을 직접적인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소품인 유리잔을 손으로 깨뜨리면서.

챙—!

“······!”

다치지 않은 왼손이다.

잔은 입으로 씹어 먹어도 괜찮은 설탕 공예 작품.

가볍게 힘을 주면 바스러져야 정상이다.

헌데, 아니었다.

힘을 주는 순간 진호는 알아차렸다.

이건 설탕을 만든 공예품이 아닌, 진짜였다.

잔이 깨어지는 순간에 전해지는 고통이나 와인과 섞여서 흘러내리는 핏물.

‘또 사고냐?’

하지만 여기서 멈출 수는 없었다.

지금 이 순간에 이 사실을 알아차린 건 자신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바스러뜨릴 수 있어]

와인과 섞인 핏물을 혀끝으로 핥으며.

진호는 끝까지 대사를 전달했다.

“오케이! 컷!”

“큭!”

고통에 손을 잡고 무너진 건.

오케이 사인이 터진 후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