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25. 태클이 들어 올 때면(2)
발끈해서 난리치는 벨로스를 말리는 건 진호의 몫이었다.
다 늙은 양반이 왜 이리 힘이 센 건지.
겨우 말려서 자리에 앉힐 수 있었다.
“시장님. 이건 곤란합니다. 촬영지는 그렇게 손바닥 뒤집듯이 바꿀 문제가 아니에요.”
“허어. 이거 영화만 찍다 오신 분들이라서 그런지 얘기가 잘 안 통하네. 이게 반목할 일입니까? 서로 협조해서 좋은 결과를 만들자 이겁니다.”
“······아니, 일방적으로 금지를 해 놓고서 협조라는 말이 나옵니까?”
“쯧. 거, 홍 배우님. 왜 이렇게 물정 모를 얘기를 하실까. 진지한 얘기는 어른들끼리 하도록 좀 빠져 있도록 하시죠?”
시장이 손짓으로 진호를 밀어내고 다른 관계자들과 말을 텄다.
시 지원금이 어떻고, 협조가 어떻고.
진호와 벨로스에게는 먹히지 않을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추가 촬영에 대해서도 말입니까?”
“시의 모습이 조금 더 선명하게 나갈 수 있다면 지원이 아까울 문제는 아니겠죠. 어떻습니까? 서로 득이 되는 거래 아닙니까?”
“흐음. 생각을 좀 해보겠습니다.”
하지만 제작사 쪽에서는 관심을 보였다.
아무래도 그들은 순수하게 영화만 보는 벨로스나 진호와는 입장이 달랐다.
투자한, 투자 받은 돈을 최대한의 수익을 내어 돌려 줄 의무가 있었다.
시의 지원을 받는다면 이득이 상당했다.
“진호 씨. 시장님의 제안이 완전히 허황된 건 아닙니다. 벨로스 감독님에게 재대로 좀 전달해 주시겠어요?”
“······영화에 대놓고 광고를 넣으라는 거죠?”
“속물적으로 보인다는 건 압니다. 하지만 제작에 도움이 되는 거라면 고려해 봐도 좋지 않을까요?”
“에휴. 무슨 입장인지는 이해했어요. 하지만 감독님에게는 씨알도 안 먹힐 겁니다. 저도 마찬가지고.”
어디까지나 입장차이가 분명했다.
돈을 벌기 위한 상품과 예술의 차이.
아무리 이해한다고 해도 제작사는 감독과 배우의 입장이 될 수 없었다.
“어느 부모가 자기 자식을 돈 몇 푼에 팔까요. 접근이 잘못 되었습니다, 접근이.”
차라리 영화 촬영 전에 협조를 구했다면 어땠을까.
[가자! 더 이상은 못 있겠군!]
그랬다면 적어도 벨로스도 이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회담은 답을 내지 못한 채 흐지부지 끝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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촬영이 미뤄질수록 손해는 기하급수적으로 쌓인다.
장비에 대한 대여료, 인건비, 채류 기간에 따른 부대비용 등.
수익을 고려해야 하는 제작사 쪽에서는 최대한 피하고 싶은 일이다.
[나쁜 제안은 아닙니다. 시간을 바꾸기 어렵다면 좀 더 밝은 조명을 쓰고 거리가 잘 보이는 쪽으로 이동을 합시다. 이왕이면 서울의 상징물인······]
[그만! 이미 촬영 장소는 정해 놓았습니다. 어설프게 다른 장소를 살피면 그 모양새가 망가진다는 걸 어째서 모릅니까!?]
[하지만 감독님. 이대로 차일피일 촬영이 미뤄지면 손해가 막심합니다. 촬영이 확정되지 않으니 빌도 들어오지 못하고 있지 않습니까? 파리 촬영도 기한이 정해져 있는데. 계속 이러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감독인 벨로스와 제작사 측의 줄다리기가 시작됐다.
제작사 측은 한 발 양보해서 시의 협조를 받자고 했지만 벨로스는 한사코 거부했다.
“후우. 진호 씨. 진호 씨가 감독님을 좀 설득해 주세요. 이대로 가다가는 영화 제작 전체가 난항에 빠지고 말 겁니다.”
“제가 말한다고 들을 분이 아니에요. 게다가 저도 이런 식으로 생각을 굽히는 건 내키지가 않네요. 드라마도 아니고 PPL을 박아 넣을 생각입니까?”
“저도 내키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해결책은 내야죠. 계속 차일피일 미루기만 할 겁니까? 제작을 못하면 결국 저희만 손해에요.”
말마따나 시에서는 영화 제작을 막는다고 손해 볼 건 없다.
홍보하면 좋고 아니면 말고, 라는 방식.
“에효. 저도 마음 같아서는 그냥 다 때려치우고 다른 곳에서 촬영을 하고 싶죠. 근데, 그게 어디 쉽습니까? 감독님이 원하는 장소를 딱딱 고르는 것도 일이고.”
“다른 곳에서······”
“마음 같아서는 그렇다는 거죠. 그냥 확 서울이고 뭐고 다른 곳에서 찍으면 좋잖아요. 근데, 그게 현실적으로는 어려우니까. 감독님 마음 바꿔서 살짝 수정하는 쪽으로 가는 게 어떨까 싶죠.”
— 대한민국 팔도에 내가 모르는 곳이 있을까.
“응?”
“그렇죠? 내 말대로 현실적인 한계가 있는 거니까.”
— 두 다리로 걷고 두 눈으로 담으니, 이제 팔도를 한 장에 담아 낼 수 있겠구나.
“팔도? 대동여지도?”
“네? 갑자기 웬 지도요?”
“아뇨. 잠깐만요. 혹시 저 컴퓨터 써도 되는 겁니까?”
“네, 네. 써도 되긴 하는데. 갑자기 왜요?”
“전에는 지도를 만들기 위해서 두 다리로 걸었잖아요. 그럼 요즘은 어떻게 할까요?”
“글쎄요? 위성으로?”
진호가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그렸다.
신구의 조합을 시도 해 볼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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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의 업무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시민들의 안전과 생활수준을 향상시키는 것이 기본.
부차적으로는 시 자체의 이미지를 향상시키는 것도 업무라고 할 수 있다.
대회의 개최, 유명인사의 방문, 공공기관의 평가 1위 등.
대외적인 평판은 업무 성과로 직결되고 이는 정치적인 커리어로 쌓인다.
그렇기에 지자체에서 각종 행사에 목매는 것이다.
“슬슬 항복 할 때가 됐겠지?”
그런 의미에서 시장은 꽤 수완가였다.
가만히 두어도 ‘촬영지’라는 메리트가 생기는 일에 손을 뻗어서 판을 더 키웠다.
누가 봐도 ‘서울’이라고 판단 할 수 있는 장면으로.
세계적인 거장이 만들고 영화제 수상자가 출연하는 영화 속에 서울이 뚜렷하게 나온다면 그보다 좋은 홍보도 없었다.
“조만간 연락이 올 겁니다. 애초에 자본을 쏟아 부어서 만드는 영화도 아니니까요. 이미 찍어 둔 장면을 전부 폐기시킬 수는 없겠죠.”
“흐흐. 그러니까 처음에 제안 할 때 들어주면 얼마나 좋아. 이래서 예술 한다고 설치는 인간들이 답답해. 현실을 볼 줄 모른단 말이야.”
“시장님 같은 고견은 많이 없죠.”
“그래, 그래.”
이런 작은 욕심이 쌓여서 커리어를 만드는 것이다.
훌륭한 서울 시장에서 대권 도전자로.
모험 없이 성취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시장님. 전화 왔습니다.”
“오, 드디어?”
기다리고 있던 연락이 온 모양이다.
기쁜 마음으로 비서에게 손을 뻗었다.
“······뭐?”
하지만 전화 내용은 기쁨과 거리가 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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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 드시나요?]
진호가 언덕 너머 광경을 손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놀랍군. 놀라워. 내가 구상하던 장면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장소야. 이런 곳을 어떻게 찾았습니까?]
벨로스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놀라워했다.
지금 눈앞에 펼쳐진 장소는 그의 구상과 정확하게 맞아 떨어졌다.
몇 번 양보해 골랐던 지난 장소와는 완전히 격이 달랐다.
[발품 좀 팔았죠. 여기라면 새로 촬영에 들어가도 금방 끝낼 것 같습니다]
[전부 재촬영을 하자는 거죠?]
[네. 시장과 알력 싸움을 하면서 시간을 버리느니 이편이 낫습니다. 게다가 이쪽은 완성도 면에서도 이득이 있을 것 같고. 안 그렇습니까?]
[음. 확실히. 작품 퀄리티를 올린다는 이유라면 제작사 측에서도 뭐라고 하지 못할 겁니다]
대안이 없었기에 지지부진 했을 뿐.
벨로스가 ‘더 높은 퀄리티’라며 재촬영을 요구하면 제작사도 손을 들어 줄 수밖에 없다.
애초에 서울에 목매는 입장도 아니고.
[하하. 덕분에 그 말 같지도 않은 요구는 걷어 차 버릴 수 있게 됐군요]
[어중간하게 굽히고 들어갔으면 연기 할 맛도 안 났을 겁니다. 새롭게, 깔끔하게 가죠]
[물론입니다. 아, 근데 이 장소는 어떻게 협조를 받은 건가요?]
[정치적인 견제라고 할까요?]
서울 시장과 정치적으로 경쟁구도에 있는 사람이 있다.
부산 시장이다.
장소를 알아내고 넌지시 운을 띄웠더니 덥석 물었다.
촬영 전반에 대한 지원과 협조를 확실하게 약속 받았다.
굳이 홍보에 목 맬 필요도 없었다.
남의 것을 빼앗아 오는 것 만해도 몇 곱절의 이득을 얻는 거니까.
서울에서 부산으로.
촬영지 변경에 대한 이야기만 흘리면 되는 거였다.
[참. 알다가도 모를 사람이군요. 이런 수단은 어디서 배운 겁니까?]
[그냥 경험일 뿐이죠. 아, 제가 주제넘게 나선 거라면 죄송하게 됐습니다. 워낙 일을 급하게 처리하다보니 먼저 저지르고 말았네요]
[후후. 혹여나 제가 고민할까 걱정되어 일단 저지르고 본 것은 아니고요?]
[감독님 보다는 아무래도 저쪽이 조금 걸려서요]
[음. 그렇군요. 그래도 다음부터는 미리 언질을 주세요. 혼자서 부담 지기보다는 두 사람이 낫지 않습니까]
속내를 읽고 벨로스가 넌지시 말을 건넸다.
유명세를 탔다고는 하지만 아직 진호는 신인 배우.
제작사와 알력이 붙어 버리면 곤란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럼 다시 시작해 봅시다. 준비는 다 됐겠죠?]
[신문에서 기사 한 줄 보고나면 될 거 같네요]
[하하하. 그 기사는 나중에 제게도 보여 주시길]
며칠 후, 짤막하게 기사 한 줄이 나갔다.
[영화 촬영지 변경. 서울에서 부산으로? 그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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쾅. 쾅.
거칠게 부딪친 전화기가 완전히 박살났다.
서울 시장 관저.
뭇 사람을 부리는 시장의 손아귀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언론 새끼들은 이게 문제라고! 뭐만 벌어지면 일을 부풀리고 난리야!”
씩씩거리는 호흡 사이로 거친 말이 터져 나왔다.
언론에서 취재라는 명목으로 연락을 해 온 게 벌써 몇 번 째인지 모를 지경이다.
“시장님. 진정하시죠. 큰일은 아닙니다.”
“큰일이 아니긴! 서울에서 부산으로! 제목을 보라고! 이래서 내 얼굴이 뭐가 되겠어?”
“제가 따로 손을 쓸까요?”
“······쯧. 그만 둬. 이제 와서 그래봐야 무슨 의미가 있다고. 밖에서 떠들고 있는 언론이나 어떻게 해 봐. 그냥 제작사 쪽에서 촬영 배경을 바꾼 거라고. 우리와는 아무런 마찰이 없었다고.”
시장은 넥타이를 풀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손에 쥔 물고기라 생각했는데 순식간에 빠져나가고 말았다.
설마하니 전부 재촬영을 할 거라고 어떻게 알았겠는가.
그것도 경쟁 상대가 있는 부산에서.
심지어 적절한 장소를 찾아가면서.
티끌만큼도 걱정해 본 적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그래도 그냥 풀어 두는 건 조금 그렇지 않을까요?”
“됐다고. 그만 둬. 안 그래도 찝찝한 말을 듣고 왔는데, 괜히 손대서 일 벌리기는 싫어.”
“찝찝한 말이요?”
“삼천동 그 집.”
“······아. 점집 말이군요.”
간단하게 말해서 점집.
용한 무당이니, 무슨 신이니 정치인들이 많이 찾는 곳이 있다.
비서는 그런 걸 한 푼도 신용하지 않지만 시장은 큰일이 있을 때면 종종 찾곤 했다.
“쯧. 미리 찾아 갈 걸 그랬어. 그랬으면 괜히 건드리는 게 아닌데.”
“안 좋은 말이 나온 겁니까?”
“그 사람 말이야. 홍 진호. 건드리지 말라고 경고 하더라.”
시장이 담배를 입에 물고는 다리를 탈탈 털었다.
점집에서 들은 내용.
아니, 무당이 말을 하며 지은 표정이 잊히지가 않았다.
“백귀야행이라고 아나?”
“네. 일본의 전설 아닙니까? 귀신들이 몰려다니는.”
“그래. 그거. 그 진호라는 인간이 딱 그 꼴이라고 하더군. 온갖 귀들이 몰려서 이미 죽었어야 할 팔자라는 거야.”
“······죽었어야 할?”
“그래. 무당도 도통 모르겠다고 하더군. 죽었어야 할 인간이 버젓이 살아 있다고.”
“그게 말이 되는 겁니까?”
“모르지. 무당도 영문을 모르겠다는데, 누가 알겠어? 하여튼 불길한 인간이니까 괜히 건드리지 말라는 거야.”
시장이 어깨를 잡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얘기를 하다 보니 괜히 몸이 으슬으슬 떨리는 것 같았다.
“에이, 됐어. 가서 삼계탕이나 먹자고.”
몸보신이 필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