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만 전생 배우-55화 (55/178)
  • Chapter25. 태클이 들어 올 때면(1)

    마음에 짐이 없으니 나아감에 머뭇거림이 없다.

    진호는 그 어느 때보다 컨디션이 좋았다.

    연기를 함에 있어서 최고의 집중력을 발휘하고 대사 하나하나에 혼이 실렸다.

    그 에너지가 얼마나 대단한지 스텝들이 다 손사래를 칠 정도였다.

    “내가 오랫동안 이 바닥에서 일을 해 왔지만 저런 친구는 또 처음이야.”

    “가끔은 귀기까지 느껴지니까. 신들린 연기라고 하잖아. 딱 저런 모양새지.”

    “저 나이에 저런 연기라니. 나중에는 뭘 할 지 두려울 지경이라고.”

    다른 배우들조차 그러했다.

    나름대로 연극판 구를 만큼 구를 베테랑조차 진호가 집중하고 있을 때는 말을 걸지 못했다.

    극에 대한 몰입도가 얼마나 대단한지 주변에 무슨 벽 같은 게 있다고 느낄 정도였다.

    “그나마 저 양반이 감독이니까 진호 저 아이를 다루는 거지. 보통 사람 같았으면 이니 나가떨어졌어.”

    “어련하겠어? 완벽하다 싶은 장면도 몇 번이나 돌려서 찍고 있잖아. 체력도 체력인데 집념이 무시무시해.”

    “거 참. 난 이 나이 먹도록 대체 뭘 한 건지. 저 아이 연기하는 걸 보고 있자면 부끄러울 지경이야.”

    “크흠. 자네도 그랬나?”

    그리고 이런 열기는 다른 배우들에게도 번져갔다.

    오랫동안 경력을 쌓으며 무뎌진 연기 열정에 불꽃이 튄 것이다.

    저마다 한 자리씩 잡고 연습에 매진했다.

    고작 한 장면에 불과할 지라도 최선을 다하기 위해서 노력했다.

    [멋져. 마치 등대 같잖아?]

    이를 두고 엘빈은 이리 평가했다.

    새카만 밤하늘을 밝혀 주는 등대 같다고.

    #

    세미는 조심스럽게 불을 켰다.

    조명이 깜빡거리며 건물 내를 밝혀 주었다.

    은은한 하늘색 도배지에 창을 타고 넘어 들어오는 채광이 반짝거렸다.

    “마음에 드냐?”

    “네! 너무 너무 마음에 들어요!”

    회사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집을 마련했다.

    내장을 새로 하고 가구도 교체했다.

    오래된 건물이기는 하지만 그럭저럭 사람이 살 모양새는 갖추었다.

    “여, 여기요?”

    비죽거리며 세미의 부친이 들어왔다.

    그는 산발이던 머리카락도 자르고 수염도 다 밀었다.

    주독으로 얼굴은 여전히 엉망이었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깔끔해진 인상이었다.

    “응! 응! 앞으로 우리 여기서 살 수 있데!”

    “······이거 면목이 없어서. 이런 걸 받아도 될지 모르겠네요.”

    “이건 다 투자입니다. 세미가 후에 좋은 연기자가 되어서 갚아야 할 것들이죠. 공짜가 아니니까 너무 고마워하지도 말고 굳이 부담 가질 필요도 없습니다.”

    “감사합니다.”

    허리 굽혀 인사하는 세미 부친의 모습은 전과 같은 점을 찾기 어려울 정도였다.

    한 꺼풀 벗었다고 해야 할까.

    술도 끊고 운동도 꾸준하게 하면서 세미 뒷바라지하는 걸 소홀하게 하지 않았다.

    “세미 출퇴근은 확실하게 책임져야 합니다.”

    “네, 네. 물론입니다. 세미 일정은 제가 확실하게 책임질게요.”

    임시직으로 세미의 매니저 역할을 맡겼다.

    회사 규모 상 세미에게 전담시킬 매니저가 따로 없었다.

    뽑으려면 뽑을 수 있었지만 여러 가지를 고려해서 진호가 내린 결정이었다.

    “세미야.”

    “네! 네!”

    “이제 여기서 머무르면서 여러 가지 배우게 될 거야. 연기도 배우고, 운동도 배우고. 사회생활 하는 법도 배우게 될 거야. 할 수 있겠어?”

    “할 수 있어요!”

    세미가 힘차게 답했다.

    그녀에게 있어서 근래에 벌어진 일들은 꿈같았다.

    절대로 깨고 싶지 않은 꿈.

    할 수 없다는 선택지는 없었다.

    “그래. 아직은 제대로 된 게 하나도 없지만 이걸로 네가 첫 번째다.”

    “첫 번째요?”

    “응. 연기 스쿨? 재능 학교? 하여튼 대충 그런 거. 네가 첫 번째 학생이 된 거야.”

    “헤······좋아요! 첫 번째가 무조건 좋아요!”

    구상이 좋다고 일이 한 번에 해결되지는 않는다.

    엘빈이 노래를 만들고 빌이 요트를 팔아도 그건 마찬가지다.

    꿈을 꾸되 그것을 이루는 것은 현실이어야 했다.

    “한 명 채웠으니까 절반은 했네.”

    시작이 반이라고 하지 않던가.

    진호는 차근차근 움직였다.

    #

    국내 촬영이 거의 마무리됐다.

    진호 혼자서 찍을 장면은 끝내고 이제 빌 고튼과 함께 찍는 장면만 남았다.

    장소는 한강 고수부지.

    박살난 차에서 진호가 내린 뒤 빌 고튼과 대치하는 장면이었다.

    “촬영 불가요?”

    근데, 촬영 직전에 난감한 소식이 들려왔다.

    “서울시와 의견 충돌이 있었나 봐. 조금 전에 제작사 쪽에서 연락이 왔는데, 해결 될 때 까지는 촬영이 연기 될 거 같다고 하네.”

    “이미 조율 끝난 거 아니었어요?”

    “그렇지. 장소 대여 끝내고 주변 통제하는 시간까지 다 허락을 받았었잖아. 갑자기 뭔 일인지 모르겠네.”

    최현석도 백방으로 상황을 알아봤다.

    인맥을 동원해서 여기저기에 전화도 넣었다.

    하지만 제대로 상황을 알려주는 사람이 없었다.

    제작사 쪽에서도 조율 중이라는 말만을 반복 할 뿐.

    “잠깐 있어 봐요. 감독님하고 일단 통화 좀 해 볼게요.”

    그나마 알아 볼 사람이라면 벨로스 정도.

    진호가 곧바로 연락을 넣어서 상황을 물었다.

    [······네. 그래서 스톱시켰다는 건가요? 어이가 없네]

    다행히 벨로스는 조금 더 알고 있었다.

    그 역시 갑작스러운 통보를 받고 제작사 측과 강경하게 연락한 끝에 알아낸 내용이라고 했다.

    아무리 제작사라고 해도 벨로스를 무시 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시에서 촬영이 위험하다고 판단했다네요.”

    “위험하다고? 이미 주변 통제까지 전부 허가를 받았잖아. 갑자기 무슨 소리래?”

    “그게······벨로스가 제작사 쪽에서 들은 얘기로는 고의성이 느껴진다고 하네요.”

    “고의성?”

    “네. 이미 허가받은 촬영을 굳이 핑계대면서 스톱시킬 이유가 없다는 거죠. 뭔가 원하는 게 있다면 모를까.”

    최현석이 혀를 찼다.

    이 정도까지 말했으면 그도 알아차릴 수밖에 없었다.

    지자체에서 영화에 바랄만 한 거라면 하나밖에 없었다.

    “홍보?”

    “네. 그런 거 같아요.”

    이미 영화가 국내에서 촬영 중이라는 소식인 제법 알려져 있다.

    하지만 블록버스터도 아니고 촬영 규모도 매우 작았다.

    입소문은 미미했을 뿐이다.

    “설마 장소를 바꾸자는 건 아니겠지?”

    “홍보가 목적이라면 보다 직접적인 곳으로 옮기려고 하겠죠. 한강 고수부지 촬영은 아무래도 밤이다 보니 잘 보이지도 않고.”

    “하지만 그 장소는 벨로스 감독님이 직접 선택한 거잖아. 그 양반이 쉬이 장소를 바꾸려 할 것 같지는 않은데?”

    “절대 안 바꿀 걸요? 마지막 장면을 위해서 장소 선택을 얼마나 신중하게 했는데. 한강 고수부지도 절충하고 절충해서 나온 장소에요.”

    그냥 장소일 뿐이지 않은가, 라고 물을 수도 있다.

    하지만 감독은 예민한 동물이다.

    자신이 그려놓은 그림에서 한 부분을 쭉 찢어서 다르게 이어 붙이는데 그걸 허락 할 수 있을까?

    불을 뒤집어써도 벨로스가 양보 할 거 같지는 않다.

    “······아이고.”

    “왜요?”

    그리고 그 불안함을 대변하는 듯.

    최현석이 반짝거리는 폰을 보며 앓는 소리를 냈다.

    “시장이 관계자들을 초대했단다.”

    영화가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

    제작사 쪽 관계자 두 명과 벨로스.

    그리고 진호가 시장 관저로 초대되었다.

    명목은 영화산업을 위한 친목, 정도였지만 분위기는 영 딴판이었다.

    [내 영화에 작당질을 해!?]

    특히, 벨로스가 문제였다.

    그는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와서는 연신 씩씩거렸다.

    애초에 에고가 강한 사람인데다가 자기 작품에 다른 사람이 손대는 걸 극도로 싫어했다.

    지자체에서 태클 들어왔으니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아이고, 웰컴. 잘 오셨습니다.”

    그런 분위기를 못 읽는 건지 시장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일행을 반겼다.

    티비에서도 몇 번 얼굴을 내민 적 있는 인물이기에 진호도 그가 시장임을 단번에 알아봤다.

    “미스터 벨로스. 그리고 이쪽이 우리 대한민국의 자랑. 국민배우 진호 씨 아닌가.”

    “······국민배우라니요. 과찬입니다.”

    “하하하. 외국에서 상 받고 오면 국민배우지. 뭐 다를 게 있습니까? 자자. 여기서 이러지 말고 들어갑시다. 안에 잔뜩 차려 두었습니다.”

    시장은 동작이 크고 목소리도 컸다.

    대신 눈치는 없는 건지 잔뜩 구겨진 벨로스의 표정을 보고도 웃음을 지우지 않았다.

    아니면 애초에 관심이 없든지.

    “시장님. 이렇게 초대해 주신 건 감사하지만, 저흰 마냥 웃고 있기가 힘듭니다. 영화 촬영을 스톱시킨 이유를 알 수 있을까요?”

    그렇기에 진호가 자리가 잡히기도 전에 선수를 쳤다.

    벨로스가 꼭지 돌아서 난리치면 이래저래 곤란했다.

    “아이고. 젊은 사람이라 그런지 급하네요. 일단 천천히 먹으면서 얘기를 해 봅시다. 우리 홍 배우님의 이야기도 듣고 싶고.”

    “······죄송합니다. 지금 다들 촬영이 스톱 된 일로 민감해져 있는 터라. 밥을 먹어도 제대로 넘길 수나 있을지 모르겠네요.”

    “에잉. 쯧쯧. 왜 그렇게 민감하실까. 그냥 촬영이 하루 이틀 미뤄진 것뿐인데.”

    그 하루 이틀의 소중함을 모르는 것이 비 관계자의 한계일 것이다.

    진호는 손짓으로 통역하지 말라고 통역사를 만류했다.

    “아무래도 영화 제작에는 기일이 정해져 있으니까요. 하루 이틀 차질이 벌어지면 다른 촬영에도 문제가 생깁니다.”

    “하하. 그래서 이렇게 초대 한 거 아닙니까. 흉금을 터놓고 얘기를 하면서 문제를 해결하자는 거죠.”

    “그 문제라는 게 대체 뭡니까? 허가는 받은 걸로 아는데.”

    “그건 식사를 마치고 얘기하도록 합시다.”

    진호는 더 얘기하려 했지만 시장은 이미 돌아선 후였다. 게다가 통역사를 끼고 온 제작사 쪽 직원들이 끼어들기 시작한 후라 더 이상은 관여하기 어려웠다.

    화가 잔뜩 난 벨로스 옆자리에 앉은 채, 맛있지만 맛없는 음식을 깨작깨작 먹을 수밖에 없었다.

    “와인 하실 분?”

    식사는 지독하게도 길었다.

    #

    거북하고 어색한 식사가 끝났다.

    와인이 돌면서 적당히 기름칠을 했지만 별 다른 효과는 보이지 않았다.

    벨로스는 여전히 화가 나 있고 시장은 유들유들했다.

    [대체 이 무의미한 자리를 언제까지 이어 갈 겁니까? 촬영 금지를 당장 풀어 주시죠!]

    결국 후식이 나올 무렵 벨로스가 입을 열었다.

    'fuck'나 ‘Shit’같은 단어가 없었을 뿐 억양 자체는 매우 강했다.

    “하하. 나름 분위기 좀 풀어볼까 했는데 마음에 안 드셨나 보네요.”

    “길게 끌어봐야 마찬가지 일 겁니다. 시장님, 그냥 속 편히 말씀해 주시죠? 어떻게 해야 촬영 금지를 풀어주실 겁니까?”

    벨로스를 대신해서 진호가 물었다.

    “후. 촬영 말이죠. 위험 때문에 금지를 시키기는 했지만 사실 저도 좋은 건 아닙니다. 훌륭한 감독님과 배우 분들께서 좋은 영화를 만들면, 그게 다 시의 자랑이고 자산이지 않겠습니까?”

    “그런데요?”

    “근데, 이게······화면이라고 해야 할까. 촬영 계획을 보니까 너무 어둡고 서울 같지 않게 나오는 거 같아서요. 장소를 좀 바꾸는 것이 어떨까 싶은데.”

    예상했던 대로였다.

    진호의 미간이 짜증으로 일그러졌다.

    좋은 영화에 먹물이 한 방울 떨어진 느낌이었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이제 와서 갑자기 촬영지를 바꾸라니!]

    통역을 들은 벨로스도 결국 폭발했다.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에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자자. 화는 가라앉히시고. 고작 촬영지 하나 바꾸는데 이렇게 화 낼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시의 입장을 반영해서 장소를 옮겨주시면 저희도 나름의 배려를 해 드리겠습니다.”

    “저기 시장님······”

    “그리고 솔직하게 말해서. 이미 서울 배경으로 영화를 다 찍어 두었는데, 갑자기 다른 지역으로 옮겨 갈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서로간의 이해를 딱 합치해서 우리 장소를 골라 봅시다.”

    진호는 그제야 왜 시장이라는 인간이 이렇게도 여유있었는지를 이해 할 수 있었다.

    그건 단순함이었다.

    그는 영화 촬영에서의 장소 변경을 단순한 A에서 B따위로 여기고 있었다.

    그리고 이미 촬영해 놓은 장면들을 두고 옮겨가지 못할 담보 정도로 여겼다.

    그렇기에 자신을 따를 수밖에 없다, 라는 여유가 나온 것이다.

    ‘정치인이란.’

    진호는 고개를 흔들었다.

    [헛소리!!!]

    벨로스의 반응은 예상대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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