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만 전생 배우-54화 (54/178)

Chapter24. 어쩌다보니(1)

국내 촬영을 위해서 벨로스가 입국했다.

몰려든 취재진들과 짧은 인터뷰를 하고 곧바로 진호의 회사로 이동했다.

벨로스? 벨로스? 라며 기웃거리는 연예인이 이미 한 트럭은 족히 되었다.

“반갑슴니다. 베로스 라고 함니다.”

어색한 한국말로 벨로스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

세계적인 거장 방문에 굳어있던 최현석이 그제야 긴장을 풀었다.

짧게 대화를 나누고 관계자들을 불러 모았다.

[호오.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무리한 부탁임은 알지만 한 번 봐 주셨으면 합니다]

굳이 벨로스가 촬영장보다 앞서서 회사를 찾은 것에는 따로 이유가 있었다.

진호의 요청 때문이었다.

[이 아이가 진호가 찾은 보물이라는 겁니까?]

[네. 확신은 있지만 그래도 거장의 눈으로 확인을 받고 싶어서요]

[확실히 진호는 독특하군요]

[요즘 들어 그런 얘기를 많이 듣는 거 같네요]

배우에도 여러 가지 종류가 있다.

순수하게 배역에만 몰입하는 사람, 감독의 역할도 겸하는 사람.

진호는 둘 다이며 둘 다와는 또 무언가 달랐다.

“아, 안녕하세요. 세미라고 합니다.”

허리를 꾸벅 숙이며 인사를 건넨 세미.

미리 진호가 말 해 두었던 연기를 선보였다.

그녀는 연기를 따로 배운 적이 없다.

하지만 능숙하게 쓰고 다녔던 가면은 연습과 상관이 없는 영역의 일이었다.

[이건······]

처음에는 벨로스 감독도 이해하지 못했다.

애초에 낯선 언어에 생소한 아이의 연기였을 뿐이니까.

하지만 이내 이해 할 수 있었다.

한 사람에서 다른 사람으로. 또 다시 다른 사람으로.

순식간에 가면을 바꿔가는 세미의 연기는 언어를 상관하지 않을 정도로 뛰어났다.

아니, 강렬했다.

[타고났군요]

[네. 배우의 재능으로 치자면 세미가 저보다 나을 겁니다]

[하하. 그건 달리 봐야 할 문제이지만······진호. 진호도 알고 있겠죠? 저런 재능은 위험합니다]

[네. 누구보다 제가 잘 알고 있어요]

벨로스는 단번에 진호의 걱정을 꿰뚫어봤다.

극한으로 타고난 재능에는 그만큼의 리스크가 있다.

여러 가면을 다룰 수 있다는 건 정신분열증의 한 갈래로 봐도 무방하기 때문이다.

[벨로스 감독님도 예전에 연기 학교를 운영했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예전 일입니다. 열정이 넘치던 때였죠]

[지혜를 빌리고 싶습니다. 이 아이에게 어울릴 만 한 선생님이 있을까요?]

[흐음. 떠오르는 사람이 있긴 하지만······간단하진 않을 겁니다. 몸값도 비싸고 꽤 까다로운 인물이라]

[그래도 괜찮습니다. 일단 소개부터 시켜 주세요]

벨로스는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 진호에게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

[진호. 진호의 생각과 행동은 응원합니다. 하지만 촬영을 앞둔 지금 상황에 다른 곳에 마음이 가 있으면 곤란해요]

[이해합니다, 벨로스.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연기에 대해서라면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 자신이 넘쳐요]

[호오. 그렇습니까?]

[마음을 쓰는 것에 거리낌이 없다면 무엇도 족쇄가 될 수 없다. 제가 지금 그렇습니다. 앞으로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그 어느 때보다 확신을 가지게 된 것 같아요]

벨로스는 거창한 말에 진호를 다시금 봤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수십 년의 인생에서 이렇게 빛나는 눈을 가진 사람은 몇 번 본 적 없다.

그리고 이런 눈을 가진 사람은 항상 거대한 업적을 이루곤 했다.

과거에 자신도 저런 눈을 하고 있었으니까.

[저도 돕겠습니다, 진호]

녹슨 가슴조차 두근거리게 하는 눈이었다.

#

세미의 일도 일이지만 본업은 어디까지나 영화 촬영이었다.

벨로스에게 사람을 추천받고 하루 뒤.

본격적인 촬영이 시작되었다.

“분위기 있네.”

청주 외곽 지역에 위치한 분지.

오래된 오두막 하나가 갓길에 맞물려서 오도카니 서 있다.

진호의 작중 캐릭터가 나고 자란 고아원이다.

회상 씬에 들어갈 장면을 이곳에서 촬영하는 것이다.

“아이고, 홍 배우님.”

“아. 선배님들. 오늘 잘 부탁드립니다.”

“우리가 더 잘 부탁하지. 흐흐. 이럴 때 아니면 언제 또 저런 양반하고 연기를 해 보겠어.”

미리 준비하고 있던 배우들과 돌아가며 인사했다.

고아원 원장, 직원, 도움을 주는 이웃 사람 등.

짧은 장면임에도 투입되는 인력이 많았다.

[진호. 어때요? 장소가 마음에 드나요?]

벨로스도 이미 도착해 있었다.

[네. 마음에 드네요. 이곳이라면 몰입하기에도 좋을 거 같습니다]

[비슷한 장소를 찾기 위해서 애 좀 썼습니다. 캐릭터의 시작점이 되는 장소이니 허술하게 할 수는 없죠]

[시작점. 그런 느낌이군요]

[후후. 벌써 몰입하는 겁니까? 좋네요. 그럼 준비해 주세요. 곧 촬영에 들어 갈 테니까]

길게 이야기를 나누지는 않았다.

이미 사전에 기획해 둔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저 장면을 눈에 담고 천천히 구상하면 되는 일.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 속에서 진호만이 고요했다.

“슛 들어갑니다. 준비해 주세요.”

그리고 이내 스텝의 사인이 들어오고 진호가 움직였다.

과거에 투영된 진호가 오두막을 바라보는 것이 시작.

주변은 회색으로 반전 될 것이고 바라보는 시선에는 현재와 과거의 감정을 모두 담아야 했다.

“오.”

“순식간에 몰입했다.”

“굉장하네.”

멀리서 보던 다른 배우들이 짧게 감탄했다.

그들도 배우의 업을 지고 있는 사람들이니 이런 몰입이 쉽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컷. 컷. 다시 한 번 갈게요]

하지만 벨로스는 만족하지 않았다.

고개를 흔들며 컷 사인을 보내고, 몇 가지를 추가 적으로 주문했다.

진호는 별 다른 말없이 다시 몰입해 들어갔다.

[컷]

[컷. 컷. 한 번 더요]

[컷. 너무 과거로 들어가면 안 돼요. 어디까지나 과거를 투영하는 장면이니 현재를 더 드러내야 합니다]

몇 번이나 시도했을까.

벨로스는 가차 없었다.

곁에서 지켜보던 다른 배우들이 ‘좋은데?’, ‘충분한데?’라며 감탄하던 장면조차 모두 걷어냈다.

작은 호흡, 눈썹의 움직임, 미세한 감정.

빡빡하다 못해서 말라비틀어질 정도로 집착했다.

“과하지 않나? 된 거 같은데 말이야.”

“그러게. 이거 한 2초 나가나? 그냥 지나가지 않아?”

“저, 프랑스 양반 꽤나 빡빡하네.”

주변 배우들 사이에서 이런 얘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고작 2초 정도 되는 장면에 벌써 2시간가량을 쏟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 번 더 가죠. 이제 감 잡은 거 같아요]

하지만 진호는 한 술 더 떴다.

벨로스가 애매하게 반응할 때는 자신이 나서서 재촬영을 요구했다.

같은 자세 같은 표정으로 두 시간째인데.

처음과 다를 바 없는 얼굴로 또 다시 촬영에 들어가는 것이다.

[베스트. 이번이 베스트네]

“응? 이 처자는 또 누구여?”

그렇게 완성된 한 장면.

오케이 사인에 스텝들이 일제히 박수를 쳤다.

그리고 그 사람들 사이, 금발의 미인이 감탄 섞인 탄성을 쏟아냈다.

다른 출연자인가 싶어서 사람들이 웅성거리자 그녀를 알아 본 누군가 대신 답을 했다.

“엘빈이잖아?”

그녀는 긍정의 의미로 브이자를 그려보였다.

#

촬영을 마치고 진호도 엘빈이 와 있음을 알아차렸다.

그녀는 이번에도 매니저 없이 혼자 와 있었다.

[엘빈. 언제 또 들어왔어요?]

[영화 촬영을 시작한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직접 보고 싶어서 왔죠]

[그 행동력은 여전하네요]

팬미팅 이후로 만나는 건 처음이었지만 의외로 둘 사이에 어색함은 없었다.

[듣던 것보다 더 대단했어요. 그저 바라만 보기만 해도 감정이 읽히는 느낌? 왜 사람들이 진호를 대단하다고 말하는지 알 것 같아요]

[좋게 봐 줘서 고마워요. 엘빈에게 들으니까 기분이 두 배는 더 좋네요]

[아하하. 아부 할 줄도 아는군요!]

다음 촬영까지는 시간이 제법 있었다.

진호는 엘빈과 마주 앉아서 근황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앨범이나 투어.

곡 작업에 대한 음악적인 내용도 섞여 있었다.

[좋은 생각이에요!]

그러다 이야기가 세미에게까지 닿았다.

그녀는 세미의 사연을 듣고 한참을 슬퍼하다 진호의 계획을 듣고는 양 손을 치며 환영했다.

[나도 언젠가는 하고 싶었던 일이에요. 재능은 있지만 환경이 안 되는 친구들을 잔뜩 모아서 학교를 만드는 거예요. 다들 모여서 노래 부르고 춤추고. 너무 멋지지 않아요?]

[엘빈이라면 충분히 하고도 남죠]

[역시 진호와 나는 통하는 면이 있어요. 내가 꿈꾸고 있던 걸 먼저 하다니. 그 세미라는 아이는 분명 멋진 재능이 있는 거겠죠?]

[네. 저보다 나은 배우가 될 거예요]

엘빈은 양 손을 움켜쥐며 즐거워했다.

그러다 무언가 깨달은 듯 머리를 탁 치더니 진호 앞으로 돌격했다.

[나도 같이해요!]

어쩌면 예상 가능한.

그런 반응이었다.

#

엘빈은 신나서 움직였다.

그녀는 즉흥적이고 기분파였다.

말 나온 김에 뿌리를 뽑듯이 곧바로 회사로 연락을 해서는 한참을 싸웠다.

회사 입장에서는 황당했을 것이다.

말도 없이 출국해서 한국을 찾아간 것도 그런데, 그곳에 있는 얼굴도 모르는 소녀를 지원하겠다고 하니.

기행도 이런 기행이 없었다.

[흥! 흥! 좋아, 좋아]

하지만 결국 이기는 건 그녀였다.

그녀가 아무리 기행을 저지르고 일을 황당하게 벌여도 회사는 그녀를 포기 할 수 없었다.

간단하게 말해서 그녀가 천재이기 때문.

한껏 흥이 돋은 그녀는 혼자서 펜 하나를 물고는 곡을 뚝딱 만들어 버렸다.

‘많은 사람들이 도와주면 좋잖아요!’ 라며 기부를 위한 음원을 뽑았다는 것이다.

놀랍게도 그 노래는 훌륭했다.

5분? 10분? 그 짧은 시간에 뚝딱 만들어냈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의 퀄리티였다.

회사가 ‘저작권!!!’이라며 발악을 한 덕분에 바로 음원을 풀어버리지는 않았지만, 결국 이런 면이 회사를 질질 끌고 가는 그녀의 힘이었다.

[진호! 진호! 이렇게 된 거 조금 더 크게 해요]

그리고 이 추진력은 진호마저 끌고 갔다.

[더 많은 아이들을 받죠. 다 같이 모여서 놀 수 있는 공간이 있으면 좋을 거 같아요. 맛있는 밥도 먹고!]

[엘빈?]

[진호가 교장선생님을 하는 거예요! 난 음악 선생님! 벨로스는 연기 선생님?]

[하······하하]

천진하게 그려내는 구상들은 듣기만 해도 기분 좋은 것들이었다.

하지만 그만큼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기도 했다.

학교가 한 두 푼으로 굴러가는 것도 아니고 덜컥 추진할 일은 분명 아니었다.

[그래. 재미있는 진행 중이라고?]

[빌. 갑자기 무슨 일로 연락했어요?]

[감독님이 넌지시 말하잖아. 네가 재미있는 일을 벌이고 있다고. 내가 빠질 수야 없지]

근데 그 현실이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냥 어쩌다 보니까.

어딘가 이상한 사람들이 한 팔씩 거들면서.

[내기 한 번 할까? 그 아이가 만족 할 만큼 재능을 지니고 있다면 나도 요트를 팔아서 투자해 주지. 어때? 해 볼 생각 있나?]

기묘하지만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이제 와서 ‘어째서?’라고 묻는 건 의미가 없었다.

하고 안 하고.

나아가고 머무르고.

선택지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잃고 징징거리는 건 없다?]

[하하. 재미있겠군!]

그리고 진호에게는.

나아감만이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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