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만 전생 배우-53화 (53/178)
  • Chapter23. 진흙에서 보물을(2)

    붉은 진흙으로 빚어 놓은 듯 한 얼굴.

    진호는 남자를 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코와 눈 주변이 붉게 달아올라 있고 몸에서는 술 냄새가 강하게 풍겼다.

    전형적인 주정뱅이였다.

    “이 쥐 알 만 한 년이! 집에 가만히 있으라고 했지!”

    “아, 아아! 죄송해요! 죄송해요!”

    남자는 성큼성큼 걸어와서는 세미의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고통으로 일그러지는 얼굴에 장난은 없었다.

    진호가 반사적으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이봐요, 뭐하는 겁니까!?”

    “뭐여. 그쪽은 신경 끄슈. 우리 가족 일이니까.”

    “가족이고 뭐고 애 머리카락이나 좀 놔 봐요!”

    “신경 끄라니까. 어디서 어린놈의 새끼가 사사건건 어른 일에 끼어들어?”

    남자는 안하무인이었다.

    진호를 무시하고 그대로 세미의 머리를 잡아서 밖으로 당겼다.

    ‘아야! 아파! 아파!’ 라고 외치는 소리는 무시했다.

    “어린놈의 새끼라도 해도 될 일과 아닌 일은 분간합니다.”

    화가 난 진호는 그대로 남자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꽉, 쥐어짜는 힘에 남자의 손이 풀렸다.

    “아아아! 너, 새끼 뭐하는 거야!?”

    “눈앞에서 애가 해코지 당하는데 그걸 그냥 봅니까? 술 꽤나 자신 거 같은데 사고치지 말고 물러나시죠.”

    “사고? 이 새끼가 아주 그냥 어른 알기를 쥐똥으로 아네?”

    “쥐똥 같은 인간이라면.”

    남자가 진호의 멱살을 움켜쥐었지만 미동도 없었다.

    ‘익! 익!’거리며 용을 써도 마찬가지였다.

    발이 땅에 붙기라도 한 듯 그의 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너, 이 새끼. 내가 이년 애비야. 애비라고! 이딴 식으로 하면, 그 뭐시기냐. 법에 위반된다고. 알어? 어?”

    “누가 그러던데. 부모에도 자격이 필요하다고. 당신 같은 인간이라면 면접까지도 못 올라 올 거 같은데 말이지. 따지고 싶으면 술이라도 깨고 오던가.”

    “이······이이! 너, 이거 후회 할 거다. 어?”

    남자는 혼자서 씩씩대며 삿대질을 했다.

    하지만 진호가 미동도 않고 노려보자 크게 콧방귀를 끼며 왔던 길로 돌아갔다.

    ‘네년은 돌아와도 밥 없을 줄 알아!’라며 세미 쪽으로 으름장 놓는 걸 잊지 않으며.

    “괜찮은 거냐?”

    진호가 세미를 돌아 본 건 남자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진 후였다.

    #

    전형적이라면 전형적일까.

    남자는 세미의 부친이었다.

    몇 년 전 부인을 잃고 술독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며 제대로 된 부양을 하지 못하는 아버지.

    그나마 하던 일마저 지금은 때려치우고 집에서 술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에휴. 고생이 많다.”

    “괜찮아요. 울 아빠 술 마실 때만 저래요. 자고 일어나면 또 멀쩡한 걸.”“······멀쩡하면 저렇게 술을 마시겠냐. 쯧쯧.”

    저런 아버지 밑에서 밝게 자라는 세미가 신기할 지경이었다.

    “이런 일이 자주 있었습니까?”

    주변에 있던 스쿨 직원에서 물었다.

    “가끔. 저 꼬맹이 주변에서 맴도는 건 다들 알고 있었으니까요. 주정뱅이 부친하고도 부딪친 애들도 제법 있을 겁니다.”

    “그랬군요.”

    왜 돕지 않았냐고 따지지는 않았다.

    이들이 도와봐야 뭘 어떻게 어디까지 돕겠는가.

    평생 끼면서 부양해줄 것도 아니고.

    그냥 너나 할 것 없이 짜증나는 상황일 따름이다.

    “진호 아저씨! 난 이제 이거 할 수 있어요. 한 번 봐 주세요!”

    “응?”

    그렇게 근심에 빠져있는 진호와는 다르게 세미는 상쾌하게 걸었다.

    몇 걸음 앞 공터에 자리를 하고는 익숙하게 슥슥 움직였다.

    전에, 다리 아래에서 보던 그 동작과 비슷했다.

    ‘이것 봐라?’

    하지만 그보다 훨씬 난이도가 높았다.

    “이걸 너 혼자서 연습 한 거냐?”

    “응! 네! 그 날 아저씨가 알려준 거. 굉장히 도움이 많이 됐어요. 나, 이제 요령 알아서 더 어려운 것도 할 수 있어요.”

    “대단하네. 많이 늘었어.”

    “그쵸? 히히. 역시 많이 연습한 보람이 있다!”

    주먹까지 불끈 쥐고 외치는 모양새에 그늘은 없었다.

    ‘그늘이 없다고? 그럴 수 있나?’

    하지만 진호는 그런 모습이 납득가지 않았다.

    아무리 천성이 밝은 아이라고 해도 저런 부친 아래에서 그늘 없이 자랄 수 있을까?

    그것도 방금 전에 머리카락을 잡혔는데.

    “세미야.”

    “네?”

    “너. 괜찮은 거냐? 네 아버지 말이야.”

    “헤헤. 괜찮아요. 아빠 푹 자고나면 멀쩡해져요. 그냥 술에 취해서 잠깐 저런 거예요.”

    “······너. 다시 한 번 말해 봐.”

    진호가 싱글싱글 웃는 세미의 말을 되짚었다.

    “진짜라니까요? 아빠 멀쩡해요. 그냥 술 먹고 그럴 때면 잠깐 그런 거뿐이에요. 걱정 안 해도 된다니까요?”

    “술 안 마실 때는 괜찮다?”

    “네! 맞아요! 우리 아빠 좋은 사람이에요!”

    “너······거짓말 하는구나.”

    세미의 얼굴에 살짝 금이 갔다.

    그것은 너무 미세해서 알아보기 힘든 그런 금이었다.

    “왜 그런 말을 해요, 배우 아저씨. 나 그냥 아저씨한테 저번에 배운 거 칭찬받고 싶을 뿐인데.”

    “그건 잘 했어. 좋은 일이야. 근데 세미야. 네 아버지에 대한 일도 무시 할 수는 없잖아. 안 그러니?”

    “아니, 무시 안 했어요. 아빠 괜찮다니까요?”

    금은 조금씩 벌어졌다.

    세미의 천진한 얼굴 아래로 어딘가 음울한 그림자가 투영되었다.

    진호는 그 이중적인 모습에 깜짝 놀랐다.

    그 빌 고튼의 심리연기조차 꿰뚫어 본 진호 아니던가.

    눈앞의 작은 소녀의 마음을 간파하지 못했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세미야. 이 아저씨 앞에서는 굳이 연기하지 않아도 돼.”

    “······아, 아니 나는 연기 한 적 없어요.”

    “괜찮아. 아저씨는 배우잖아. 세상에 있는 일, 없는 일 모두 겪어보는 게 배우야. 그러니까 세미가 어떤 말을 해도 아저씨는 멀쩡해.”

    흔들림에서 엿보인 세미의 마음은 불안함이었다.

    그녀는 불안하기에 천진하고 밝은 세미를 연기했던 것이다.

    그것이 그녀에게는 위안을 주는 가면이었고 타인에게는 배척받지 않을 도구였다.

    말하자면 자연적인 위장.

    생존을 위한 선택이었다.

    “하, 하지만 선생님은 나한테 그렇게 말을 했는데요. 세미가 우울하고 어두우면 다들 싫어한다고. 가서 웃으라고. 울지 말라고.”

    “······그래. 그랬구나. 근데, 세미야. 슬픈 것도 세미고, 우울한 것도 세미고, 즐거운 것도 세미잖아. 한 가지 세미만 있으면 공허하지 않을까?”

    “아저씨도 그런 느낌 알아요?”

    “그럼. 배우니까.”

    “와. 역시 배우는 대단하구나. 난 그걸 어떻게 해야 할 지 몰라서 꽁꽁 숨겨만 두고 있었는데.”

    세미가 가슴 부근을 꾹 누르며 눈을 감았다.

    표정 변화조차 없는데 순식간에 분위기가 달라졌다.

    이건 일종의 아우라였다.

    ‘타고난 배우다.’

    진호는 진흙 속의 보물이 무엇인지를 깨달았다.

    “그럼 세미가 슬퍼서 울어도 아저씨는 미워하지 않아요? 너 때문에 엄마가 죽었다고 때리지도 않아요? 나가서 죽어버리라고 욕하지도 않아요?”

    “······응. 괜찮아. 어떤 세미가 나와도 아저씨는 모두 괜찮아. 배우니까.”

    “음. 응. 그럼 좀 울게요. 나······나······”

    훌쩍거림이 순식간에 눈물로 번졌다.

    그간의 즐거움이 모두 거짓이라는 듯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세미가 눈물을 쏟아냈다.

    진호는 조용히 세미를 품에 안아 다독였다.

    ‘나와 닮았구나.’

    미치광이가 싫어 평범함 속에 스며들려 했던 과거의 자신과.

    눈물은 데일 듯 뜨거웠다.

    #

    진호는 책임감의 무게를 알고 있다.

    말은 함부로 뱉으면 안 되고 약속은 남발해서는 안 된다.

    단순한 동정심에 한 아이를 흔들어 놓는 것도 안 될 말이다.

    그렇기에 신중하게 생각했다.

    할 수 있는 일, 하고 싶은 일.

    뜨거운 가슴과는 다르게 머리는 최대한 차갑게 하려고 노력했다.

    “서포트를 하고 싶다고?”

    “가능할까요?”

    “원하는 선에 따라서 다르지. 환경도 고려해야 하고. 결정적으로 부모가 문제야.”

    최현석에게 조언을 구했다.

    그는 오랫동안 연극판에 있었고 배곯는 지망생들을 많이 알고 있었다.

    몇 몇은 세미와 비슷한 경우였다.

    “부모는 제가 직접 설득을 해 보고 싶어요. 보기로는 엉망인 사람이지만 세미 이야기를 들어보자면 이해가는 부분도 있어요. 이야기를 해 보면 설득이 될지도 모르고.”

    “······쉽지는 않을 거다. 한 번 술독이 빠진 사람은 쉬이 헤어 나오지를 못해. 나온다고 해도 금방 빠지고.”

    “그래도 해 보긴 해야죠. 적어도 세미가 부모를 선택 할 수 있을 때 까지는.”

    “너, 정말 길게 보는구나.”

    짧은 동정으로 지원해 주는 건 쉽다.

    대충 연극판 누군가와 세미를 연결해주고 살림에 도움이 되라고 돈 몇 푼 쥐어주면 된다.

    사람들은 그것으로도 충분하다고 말 할 것이다.

    하지만 진호에게는 아니었다.

    “이왕 하는 거라면 끝까지 제대로 해야죠. 그리고 세미 그 아이. 억만금을 주고 키워도 아깝지 않을 재목이에요.”

    “호오. 네가 그렇게까지 말 하는 거냐?”

    “보면 깜짝 놀랄 겁니다. 어린 나이부터 얼굴에 가면을 척척 바꿔 쓸 만큼 연기에 능해요. 액션에 대한 재능도 있고. 좀 더 자라봐야 알겠지만 외모도 출중해요. 잘 키우면 톱 자리에 오를 재목이라고 장담합니다.”

    “이거 배팅 비율이 상당히 높은데?”

    “어때요? 한 번 걸어보실래요?”

    최현석이 진호의 얼굴을 슥 훑은 뒤 책상을 탕 쳤다.

    진호 마크가 달린 상품이라면 그걸로 충분했다.

    “올 인 이다.”

    목소리가 그럴듯했다.

    #

    오래 묵은 사람은 쉬이 변하지 않는다.

    세미의 부친도 그러했다.

    그는 진호의 말이라고는 일언반구 믿지 않았다.

    “내가 네놈들 속셈을 모를까봐? 그딴 소리로 꼬드긴 다음에 돈 긁어 낼 생각이지? 이 사기꾼들!”

    “아니야, 아빠! 진호 아저씨가 나 도와준다고 했어! 나 연기 배울 수 있게 선생님도 붙여주고 먹고 자는 것도······”

    “시끄러워! 쥐똥만한 계집애가 어디서 떠들어!”

    버럭 외치는 소리에 세미가 움찔거렸다.

    가면을 벗어던지고 난 뒤라 반응이 컸다.

    되레 소리치던 그녀의 부친이 더 놀랐다.

    “너, 너 뭐냐. 왜 그려?”

    “놀라서 그런 거 아닙니까. 아버지가 화내는데 멀쩡한 자식이 어디 있습니까?”

    “댁이 뭐 했지? 우리 딸년은 저런 적 없다고.”

    “저런 적이 없는 게 아니라 없는 척 한 것뿐이죠. 그쪽이 더 화를 낼까봐. 아니, 싫어할까봐.”

    “뭐? 뭔 소리를 하는 거여!?”

    진호는 역정 내는 세미의 부친을 정면에 두었다.

    어차피 이런 건 감언이설로 될 문제가 아니었다.

    “엄마가 너 때문에 죽었다. 나가서 죽어버려라. 쏟아낸 독이 어디 밑구멍으로 새어나갈 거라 본 겁니까?”

    “······어디서 그딴 소리를 들은 거야?”

    “아이가 말이 없다고 못 들었다고 생각합니까? 웃는다고 즐겁다고 생각했나요? 언급하지 않는다고 당신의 말들을 모두 흘려들었다고 믿습니까?”

    “그, 그만해! 넌 하나도 모르잖아! 왜 삼자 따위가 와서 헛소리를 하는 거야!?”

    “그럼 왜 당신은 삼자도 아는 걸 모르는 겁니까!”

    와락 쏟아낸 감정에 세미 부친이 깜짝 놀랐다.

    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입술은 바짝 말라갔다.

    어릴 적, 부모에게 혼나는 아이가 된 기분이었다.

    “세미는 슬퍼했습니다. 괴로워했습니다. 아파했습니다. 근데, 그걸 아버지인 당신이 알게 되면 자신을 싫어 할 거라 생각해서 숨겼습니다. 가면으로. 천진한 소녀의 가면으로 말입니다.”

    “그, 그럴 리 없어. 말이 안 되잖아. 세미가 왜? 나한테 왜 그런 짓을 하는데?”

    “그건······”

    순간, 움찔하고 진호의 손끝이 떨렸다.

    그는 눈을 깜빡이며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구석 찬장을 뒤져서 낡은 다기 하나를 꺼냈다.

    [나빠요. 우리 딸. 소중히. 벚꽃 나무 아래. 약속]

    진호는 그 위로 먼지를 긁으며 글을 썼다.

    처음에는 무슨 짓인가 싶어서 바라보던 세미의 부친은 글이 완성되자 눈을 크게 뜨며 놀라워했다.

    그에게는 의미가 있는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다, 당신이 이걸 어떻게 알아?”

    “글쎄요. 누군가 당신 꼴을 보면서 한 마디 거들고 싶었는지도 모르죠.”

    “······지, 진짜야? 진짜로 그런 거라고?”

    “궁금하면 세미에게 직접 물어봐요.”

    진호는 세미를 앞으로 내밀었다.

    그녀는 걱정과 불안. 온갖 근심으로 물들어 있는 얼굴로 아버지를 바라봤다.

    숨길 수 있는 건 전혀 없었다.

    “내,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그제야 세미의 부친도 알아차렸다.

    자신의 행동도 세미의 반응도 그저 맞물린 톱니바퀴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그 어디에도 진실은 없었다.

    서로 괴로움에 눈 돌리고 버둥거렸을 뿐이다.

    [우리 딸. 복숭아. 부탁]

    그리고 진호는 다기 위로 글자를 더 새겼다.

    그 글을 본 아버지는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세미를 꽉 끌어안으며.

    — 고마워요.

    진호는 굳이 답하지 않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