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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0만 전생 배우-51화 (51/178)
  • Chapter22. 상생의 법(2)

    연기는 호흡.

    항상 하던 말이다.

    하지만 지금처럼 뚜렷하게 느껴 본 적은 없었다.

    “이건 뭐라고 불러야 하려나.”

    전생의 삶에서 희로애락을 느끼는 것과는 조금 다른.

    지금 이 순간에서 맞받아치는 격랑과 같았다.

    파도에서 몰아치면 철썩이는 소리와 함께 포말이 일어나는 것처럼.

    손을 휘둘렀을 대 맞은 편 손이 와 닿아 박수가 되는 이치였다.

    ‘전에도 이런 호흡이 없던 건 아니지만.’

    선명함에서 달랐다.

    “이건 단순하게 나 하나에 국한되는 게 아니란 말이지.”

    은서와 연기 할 때 분명히 느꼈다.

    조금 더 나아 갈 수 있다는 확신.

    그녀가 더 많은 걸 뽑아내고 소화 할 수 있다는 분명한 비전이었다.

    이건 연기를 잘하고 못하고의 개념이 아니었다.

    ‘나’를 중심으로 다른 이의 연기조차 끌어 올릴 수 있는 힘.

    “그리하여 나 또한 최선의 연기를 할 수 있으니. 이건 혼자만의 것이 아닌, 상생의 법이구나.”

    진호는 납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이 또 다른 무언가에 도달했다는 사실을.

    #

    박근우는 나름대로 연극판에서 뼈가 굵었다.

    어린 나이부터 연기를 시작해서 안 해 본 연기라고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거쳐 간 배우도 많고 그만큼 봐 온 것도 많았다.

    “어때요?”

    “······이야. 이건 뭐라고 말하기가 어렵네.”

    하지만 그런 그에게도 이런 광경은 낯설었다.

    예고하지 않았던 폭죽이 밤하늘에서 갑자기 펑펑 터지는 기분?

    “한번 더 해 볼게요. 이번에는 호흡을 짧게 해서 감정을 최소화 해 보죠.”

    “호흡을 짧게······”

    “괜찮겠죠?”

    “어, 어. 가능 할 거 같아.”

    대본을 받은 진호가 상대역을 해 달라고 부탁해서 내려온 연습실.

    이미 몇 번이고 했던 일이기에 가볍게 승낙을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전과 전혀 다른 이야기로 흘러갔다.

    어릴 때 부모 손을 잡고 춤을 춰 본 적이 있는가?

    큰 손에 잡혀서 아직은 추지 못할 춤을 뒤뚱뒤뚱 추어 본 경험.

    “한 번만 더 해보자.”

    지금이 딱 그렇다.

    몇 마디 안 되는 대사를 주고받는 씬이었을 뿐인데, 지금껏 연극판을 구르며 했던 그 어떤 연기보다 좋았다.

    그건 다른 누구보다 자신이 잘 알았다.

    직접 뱉고 숨 쉬고 느끼는 연기였으니까.

    “조금 천천히 가요. 급하게 할 필요는 없어요.”

    “그래, 그래. 숨 좀 고르고.”

    “힘도 너무 들어갔어요. 먼저 대사를 칠 테니까 호흡을 느리게 하면서 따라오세요.”

    “오케이.”

    신세계 같았다.

    원하는 순간에 아이컨텍이 이루어지고 필요한 시점에 호흡이 이어졌다.

    손끝, 눈동자, 짧은 숨.

    감정을 잡기 위한 작은 도구들이 끊임없이 쏟아져 나와 할 수 없던 걸 하게 해 주었다.

    딱, 하고 싶었던 연기였다.

    “으······으아아! 우와! 방금 어땠어?”

    “좋아요. 눈빛을 절제해서 감정이 넘치지 않게 조절했네요. 담백하면서도 뭔가 묵직한 느낌.”

    “그래. 바로 그거야. 내가 하고 싶었던 연기.”

    박근우는 방방 뛰었다.

    나이도 잊은 채 기쁨을 드러내는데 망설임이 없었다.

    그만큼 기쁜 것이다.

    자신이 원하던 연기를 해 낼 수 있다는 사실이.

    “진호야. 이거, 어떻게 한 거냐? 나 혼자서는 절대 안 되던 연기야. 방법이 뭐야?”

    “연기는 호흡이죠.”

    “호흡. 그렇게 간단하다고?”

    “한 번 감 잡았으면 계속 연습해서 자기 것으로 만들어 봐요. 나도 형 연기에 맞춰서 나름대로 형태를 바꿔 볼 테니까요.”

    “그래. 그래. 다른 게 뭐가 중요하냐. 할 수 있다는 게 중요하지.”

    박근우는 의심 따위는 때려치웠다.

    말마따나 이런 연기를 계속 할 수 있다면 진호가 악마라도 상관없었다.

    “해 보자.”

    시작은 박근우.

    그리고 회사 모든 이들에게 전파된 일이었다.

    #

    “은서 누나. 그 얘기 진짜에요?”

    촬영 중간, 쉬는 시간.

    아이스커피 홀짝이며 늘어져 있던 은서 옆으로 누군가 다가왔다.

    단역으로 캐스팅 된 하윤이었다.

    “하윤 어린이. 누나 쉬는 거 안 보이니?”

    “감독님들이 물어보고 오래요. 안 그러면 조명 구리게 쏴 준다고.”

    “으, 진짜. 이 아저씨들 애 가지고 못하는 말이 없어요.”

    은서가 일어나 앉으며 슬쩍슬쩍 눈치를 살피던 사람들을 째려봤다.

    후다닥 고개 돌리는 사람 숫자가 상당했다.

    “뭐? 뭐가 그렇게 궁금하다냐?”

    “소문이요. 듣기로 진호 형네 회사에 연기 도사가 산다고 하던데. 그거 진짜에요?”

    “뭐래니, 진짜. 연기 도사? 시트콤이야?”

    “신기하니까 그렇죠. 근우 삼촌도 그렇고, 다들 갑자기 연기력이 늘었다고 호평이던데.”

    “내 얘기는 없고?”

    “누나가 일번이죠. 감독님도 지나가는 말투로 은서 씨가 이럴 리 없는데, 라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니까요?”

    “감독님은 나중에 따로 한 번 봐야겠다.”

    은서가 얼음을 오독오독 씹으며 척결 리스트를 정리했다.

    “그래서 뭐에요? 진짜 도사님 있어요?”

    “야이, 꼬맹이야. 도사가 있겠니?”

    “그럼 다들 갑자기 무슨 수로 실력이 늘었대요?”

    “무슨 수가 있겠니. 그냥 열심히 하면 실력이 느는 거지. 세상일에 왕도란 없단다.”

    “피. 그렇게 원인과 결과가 공평하면 세상사 다툼도 없게요?”

    “이야. 우리 하윤이가 다 컸구나?”

    “아이, 참! 저도 이제 곧 어른이라고요.”

    머리를 헝클어뜨리는 은서의 손길에 하윤이 반항했다.

    그래봐야 얼마 안 가 잡혔지만.

    “그래. 좋다. 우리 하윤이가 남도 아니고. 특별히 너한테만 말 해 줄 테니까 다른 데 가서는 얘기하지 마.”

    “뭔데요?”

    하윤이 귀를 쫑긋거리며 은서에게 다가섰다.

    “진호 오빠가 마법사야. 마법으로 우리 연기력을 올려 준 거라고.”

    “······”

    “안 믿냐?”

    “나중에 아이스커피 타오라 그러면 뜨거운 걸로 타 올 거예요.”

    “으히히. 우리 하윤이 사춘기 왔구나!”

    “아, 진짜! 그게 뭐에요!? 그런 걸 어떻게 믿어요!?”

    “하지만 하윤아. 세상에는 믿기 어려운 일투성이란다. 진호 오빠는 정말로 마법사야. 연기 마법사.”

    도사나 마법사나.

    하윤이는 은서가 농담을 한다고 생각했다.

    입술을 비죽거리며 ‘마법사래요!’라고 심부름 시킨 사람들에게로 돌아갔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은서의 말은 구 할이 진심이었는데.

    #

    촬영 날짜와 장소가 정해졌다.

    파리, 모로코, 한국 등 이동 거리만 해도 상당했다.

    스케일 자체가 큰 영화는 아니었지만 벨로스는 현지 분위기를 굉장히 중요시했다.

    이를 위한 로케이션이었다.

    “현지 촬영이 우선이군요.”

    “과거 회상씬하고 후에 빌 고튼하고 대적하는 장면을 한국에서 찍기로 했어.”

    “하나는 인천이고 다른 하나는 부산이네요.”

    “지자체에서 꽤나 좋아했겠어.”

    “시간만 잘 지키면 말이죠.”

    영화 촬영 기간은 꽤나 길게 잡혀 있다.

    진호는 우선 한국에서 분량을 소화하고 파리로 넘어가서 빌 고튼과 촬영을 한다.

    중간 중간 일이 생기면 스케줄은 계속해서 변경된다.

    하루가 이틀이 될 수도 한 달이 될 수도 있다.

    지역 단체와의 마찰은 흔한 일이다.

    “흠. 액션씬이 추가됐네요.”

    “어. 나도 확인했다. 마지막에 두 사람이 대치하는 순간에 짧은 액션이 들어 갈 거야.”

    “의외네요. 벨로스 감독님은 액션과는 거리가 먼 걸로 아는데.”

    “네가 나오는 예능을 보고 마음을 바꿨다고 하더라.”

    “예능을요? 그건 또 어떻게 보셨대요?”

    “촬영 팀에 한국 사람이 꽤 있잖아.”

    영상이나 음향 등.

    한국인들은 세계 각지에서 활동하고 있다.

    프랑스 현지 촬영 팀에도 세 명이 포함되어 있다.

    “중간에 이 장면. 스턴트로 처리되나요?”

    “아마도? 위험한 건 아무래도 스턴트를 쓰겠지.”

    “흐음. 이 정도까지는 제가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대본을 훑던 진호가 몇 장면을 손으로 짚었다.

    꽤나 위험하지만, 할 수 있을 것 같은 장면들이었다.

    “위험해. 그러다가 다치면 너만 손해다.”

    “그 정도는 감수하고 연기해야죠. 그냥 실루엣만 나오는 장면이면 넘어갈까 싶지만 이건 꽤 타이트해요. 제가 직접 해야 장면이 살 거 같은데.”

    “아, 위험한데. 꼭 직접 해야겠냐?”

    “할 수 있는 거라면 직접 하고 싶어요. 정 걱정된다 싶으면 미리 테스트를 해 보고 결정하죠.”

    “그래. 괜히 무리하다가 다치고 그러면 촬영이 어떻게 되겠냐. 액션 스쿨 쪽에 연락을 해 둘 테니까 미리 연습해 보고 정하자.”

    “네.”

    진호의 머릿속에서는 이미 수많은 곡예가 펼쳐지고 있었다.

    #

    한국에는 전문적으로 액션을 가르치는 곳이 많지는 않다.

    그나마 최근 들어서야 전문적으로 교습 및 인재를 양성하는 곳이 생겨났을 정도.

    제대로 스쿨이라 이름 붙일 수 있는 곳은 몇 없다.

    “잘 오셨습니다.”

    이곳, 정사웅 사범이 운영하는 액션 스쿨은 몇 없는 예외적인 곳이라 할 수 있다.

    전직 태권도 국가대표 출신에 액션 배우 경력.

    다년간의 외국 유학 경험까지.

    대한민국에 액션 들어가는 영화, 드라마 치고 이곳을 안 거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잘 부탁드립니다. 홍 진호라고 합니다.”

    “하하. 알다마다요. 저도 영화 봤습니다. 개인적으로 팬이라 기대를 많이 하고 있었습니다.”

    “저야말로 팬입니다. 정 사범님이라면 연기 시작하기도 전부터 듣던 이름인데요.”

    그렇게 그루밍해주는 시간이 끝나고 본격적으로 영화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사전에 대본으로 고지 받은 장면을 그와 상의하면서 직접 연기 할 수 있는지에 대한 평가를 받았다.

    정사웅은 진지한 얼굴로 반응했다.

    “이거 꽤 난이도가 있겠는데요. CG를 쓰는 장면은 아닌 거죠?”

    “네. 직접 차를 끌면서 레일로 촬영 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쉽지 않은데. 타이밍 안 맞고 그러면 레일에 치일 수도 있고. 자칫하면 카메라와 엉킬 수도 있네요.”

    “가능하면 스턴트를 안 쓰고 싶은데. 어려울까요?”

    정사웅은 의욕 넘치는 배우라면 차고 넘치게 상대를 해 봤다.

    몸 좀 쓴다싶은 배우 중에는 ‘이 정도는 나도 할 수 있는데.’라고 쉽게 생각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

    하지만 보는 것과 하는 건 엄연히 다르다.

    스턴트는 직업의 영역.

    가볍게 생각하고 도전하면 다치기 십상이다.

    “흐음. 일단 좀 봅시다. 저도 홍 배우님의 상태를 알아야 그에 맞게 트레이닝을 도와 줄 테니까요.”

    “그럴까요? 여기서 하나요?”

    “안쪽에 따로 연습실이 있습니다.”

    정사웅이 진호를 건물 안쪽으로 안내했다.

    드라마 세트처럼 꾸며진 공간에 꽤 많은 사람들이 연습을 하고 있었다.

    뛰고, 기고, 차고.

    박력이 넘쳤다.

    “형우야. 근수야. 이쪽으로 와 봐라.”

    정사웅은 그 사람 중 둘을 불렀다.

    한 명은 날렵했고 다른 한 명은 굉장한 근육질이었다.

    “여기 장애물 3번 세트 있지? 시범 좀 보이고 여기 홍 배우님이 가능한지 한 번 봐 드려라.”

    “제가 직접 말입니까?”

    “어. 직접 해라. 괜히 아래애들 맡겨서 다치거나 그러면 어쩔 거냐. 눈 크게 뜨고 잘 보라고.”

    “쯧.”

    썩 환영하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특히 근육질의 남자가 그랬는데, 진호를 흘겨보는 눈길이 탐탁지 않았다.

    ‘내가 못할 거라 생각하는구나.’

    이해 못 할 것도 없다.

    겉으로 보기에는 딱히 근육의 근자도 보이지 않는 사람이니까.

    하지만 이렇게 진호를 본 사람 치고 끝까지 그 눈을 유지한 경우는 없었다.

    — 상산의······

    “가죠. 어디입니까?”

    굳이 조운까지 필요할까.

    진호가 성큼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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