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22. 상생의 법(1)
빌 고튼은 재정신이 아니었고 진호도 멀쩡하지는 않았다.
두 사람은 곱창을 먹고 술기운에 즉흥연기를 했다.
처음에는 뭔 구경인가 싶던 나머지 셋도 끊이지 않는 연기 합에 두 손 두 발 다 들고 항복했다.
결국 회사 연습실로 자리를 옮겨 해가 뜰 때 까지 이 미친 연기 대결은 끝을 모르고 이어졌다.
최현석이 출근해서 연습실에서 확인하기로 오후 2시가 마지막이었다.
“세상에 저런 인간도 있구나.”
“대표님은 어제 못 봐서 그래요. 장난 아니었다니까요. 술병 잡고 상황극하는데, 이게 진짜인지 아닌지 헷갈려서.”
“술집에서? 본 사람은 없어?”
“딱히 젊은 애들이 오는 술집은 아닌 터라. 다행히 촬영하고 그런 사람은 없었어요.”
“끄응.”
빌 고튼은 말 그대로 슈퍼스타.
최현석이라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사람이다.
게다가 성질이 나빠서 사고 친 것도 아니고, 술기운에 연기를 했다니.
이걸 뭐라고 따져야 할지도 난감했다.
“어휴. 그건 됐고. 가서 두 사람 뭐하나 좀 보고 와라. 아까 보니까 일어나긴 했던데.”
“그거 수미가 보러 갔어요. 이제······아 저기 오네요.”
때마침 안수미가 계단을 타고 올라왔다.
“대표님, 대표님. 가서 좀 말려 봐요.”
“어? 왜? 무슨 일이라도 있냐?”
“밑에 두 사람 미친 거 같아요. 라면 하나 끓여먹더니 갑자기 저들끼리 낄낄대면서 웃어요.”
“······뭐 다른 일은 없고?”
“네. 대화를 영어로 하는 터라 무슨 말을 나누는지는 모르겠어요.”
최현석이 잠시 고민했다.
“그냥 둬라.”
하지만 이내 개입하려는 생각은 그만 두었다.
“나도 이해는 못하겠지만, 그 정도 수준의 연기자들끼리 통하는 뭔가가 있나 보네. 괜히 들어가서 분위기 망치지 말고······거, 뭐냐 숙취 음료나 좀 사와.”
“뭐래요, 그게. 외계인인가?”
“무림 고수지, 무림 고수.”
“그래. 근우 말대로 무림고수. 신경 끄고 우리 일이나 잘 하자고.”
안수미가 머리를 긁적이다 그냥 납득하고 말았다.
무림 고수니, 인정이니 썩 와 닿지는 않았지만 다시 연습실에 내려가고 싶지는 않았다.
두 사람이 라면 두고 낄낄 거리는 모습.
썩 보기 좋은 광경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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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호는 후련함을 느꼈다.
전에 영화 촬영을 마무리 지으며 느꼈던 아쉬움과는 완전히 정 반대되는 감각이었다.
모든 걸 다 털어내었을 때 밀려들어오는 후련함.
가진 걸 전부 부딪쳤을 때 깔끔하게 산화되는 기분 좋음이었다.
[역시 한국에 와 보길 잘 했군]
[술이 입에 맞는 거냐?]
[하하하. 술도 좋고, 음식도 좋고. 마음껏 재주부릴 상대도 있으니 여기가 고향같다]
진호와 빌 고튼은 거하게 부딪친 이후로는 말을 편하게 했다.
나이 차이는 상당한 둘이지만 이미 친구였다.
날 것처럼 자신의 모든 걸 부딪친 이후였기 때문에.
[촬영은 언제부터 들어가는 거냐?]
[케스팅 작업이 마무리 되면 프로덕션 쪽과 이야기가 진행되겠지]
[투자금이 많은 건가?]
[그다지. 블록버스터는 아니니까. 그래도 벨로스 그 영감이 워낙 로케를 좋아해서. 이래저래 돈은 꽤 깨질 거다. 그 문제로 한 동안 싸우겠지]
벨로스 이름값 하나로 투자자는 넘친다.
하지만 그렇다고 땅에서 물 푸듯이 돈을 뽑아 올릴 수는 없지 않겠는가.
이래저래 조율은 필요했다.
[한 달? 아마 그 정도 후면 촬영에 들어 갈 거다]
[생각보다 긴 건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지. 조만간 정식으로 대본이 나올 텐데, 연습이나 많이 해 두라고]
[돌아가는 거냐?]
[3년이나 박혀 있었으니까. 내 고민을 해결 해 줄 사람이 있다는 것도 확인했고. 할 일은 해야지]
3년이면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다.
빌 고튼의 소속사에서도 작품 활동을 앞두고 여러 가지 일을 계획하고 있을 터.
쉴 시간은 더 이상 없었다.
[다시 봤을 때는 더 나은 연기자가 돼 있어라]
이튿날 아침.
빌 고튼은 들어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바람같이 사라졌다.
[한국#굉장한 친구#천재]
라는 SNS 태그를 남기며.
#
빌 고튼이 출국하고 나서 뒤늦게 그가 만난 사람이 진호라는 사실이 알려졌다.
벨로스 감독의 영화에 동반으로 출연한다는 사실 역시.
덕분에 취재 요청이 쏟아졌지만 회사는 싹 무시했다.
이럴 때는 그냥 가만히 있는 편이 더 있어 보였다.
“그래서 이쪽으로 도망 온 거야?”
동아리방에 숨어있는 진호를 보며 은서가 물었다.
그녀도 작품 들어가기 전에 짬 내어 들린 참이었다.
“얼마나 달라붙는지. 한 숨 돌릴까 하고.”
“아주 보면 이 학교 출신인줄 알겠어.”
“반 쯤 그렇게 생각하는 중이지.”
진호가 가볍게 웃으며 한 쪽을 가리켰다.
오는 길에 산 치킨과 피자가 한 가득 쌓여 있었다.
동아리 후배들 입막음 용.
재학생은 아니지만 이 정도면 명예 회원 정도는 하고도 남을 정도다.
“그보다 넌 어때? 드라마 들어간다고 바쁘지 않아?”
“바쁘다마다. 김고은 작가님 작품이 왜 어렵다고 하는지 알겠더라. 대본 합 맞추는데도 얼마나 빡빡한지 모르겠어.”
“무슨 내용인데?”
“복수극. 아버지가 바람펴서 어머니가 자살하고 난 뒤 딸이 복수한다는 내용이야.”
“흐응. 단독주연?”
“응. 러브라인 없이.”
마지막 말을 하며 은서가 힐끔 진호 눈치를 살폈다.
살짝 움찔하다 안심하는 모양새가 마음에 들었다.
“감정선이 어려운 거야?”
“복합적이라서. 아버지는 복수해야 할 대상인데, 재혼 상대와 그 집 딸이 굉장히 착해. 말하자면 복수를 위해 화목한 가정을 박살내야 하는 입장이지.”
“오. 상충하는 상황이라. 쉽지 않네.”
“응. 너무 복수에 목매면 감정이 없어 보이고, 그렇다고 흔들리기만 하면 줏대 없어 보이니까.”
당연한 말이지만 단독 주연 영화는 주인공의 캐릭터가 인기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작가님은 뭐라는데?”
“최종화 전까지 복합적인 상태를 유지해 달래. 고민하고 괴로워하고 갈등하는 모습으로.”
“괜찮겠어? 시청자들은 복잡한 거 싫어하잖아.”
“매니악하게 가는 거지. 그래서 연기가 더 어려워.”
차라리 시청률 공식을 따르면 쉽다.
깔끔한 복수로 통쾌함을 주거나 용서로 훈훈함을 주거나.
둘 사이에 끼어서 연기를 하자면 난이도가 높다.
“잠깐 봐 줄까? 합 맞출 사람이 필요하면.”
“그래줄래? 바쁘지 않아?”
“한 두 시간 정도는 괜찮아. 나도 숨은 돌려야지.”
“······응. 그럼 좀 부탁할게.”
은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드라마에 대한 이유도 이유였지만 그에게 보여주고 깊었다.
자신이 얼마나 연기를 진지하게 여기고 있는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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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서의 연기는 확실하게 늘었다.
예전, 연극무대에서 합을 맞출 때와는 완전히 달랐다.
호흡, 눈빛, 발성 등.
모든 면에서 한 꺼풀 벗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뭐라고 해야 할까.
진호는 부족함을 느꼈다.
“잠깐만. 여기서 한 호흡 쉬자.”
“이상해?”
“그런 건 아닌데. 흠. 방금 어떤 생각으로 감정을 잡았어?”
“억울함. 어머니는 죽었는데 저 인간은 멀쩡하게 살아서 화목한 가족이라고 웃고 있잖아. 억울해서 죽을 것 같은 감정으로 했지.”
표면적으로는 이것이 옳다.
그것을 드러내는 연기에서도 부족함은 없었다.
하지만 역시 모자란 느낌이었다.
“좀 더 깊이 보자. 본래의 네 가족은 어땠지?”
“매일 싸우고 다투고. 당시에는 아버지 사업이 어려워 감정이 날카로운 상태였지.”
“그렇지. 근데, 처음부터 그랬던 건가?”
“처음에? 글쎄. 그렇게까지 디테일한 설정은 없는데.”
“그럼 상상을 해 보자고.”
진호가 손가락을 탁탁 튕기며 배경을 늘어놓았다.
전반적인 대본의 흐름과 작가가 의도하는 캐릭터의 성정.
종합적인 내용에서 떠오른 상상이었다.
“처음부터 싫어서 결혼하는 사람은 없지. 아마도 처음에는 화목했을 거야.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너. 세 식구가 모두.”
“일리가 있네. 짧게 그런 대사가 지나가기도 했고.”
“응. 그럼 봐. 화목한 가정에서 살던 사람이 그런 일을 겪은 거야. 어떤 생각이 들까?”
“······복수심.”
“그리고?”
“아. 부러움이라 이거구나.”
은서가 맥락을 짚었다.
단순한 아버지에 대한 복수심만이 아니라 화목한 가정에 대한 부러움이 섞여 있는 것이다.
자신도 한 때 그러했으니.
“그래. 그걸 가지고 다시 해보자.”
진호가 다시 호흡을 끌어 올렸다.
은서와 대사를 주고받고 감정을 전달했다.
그는 어머니를 버린 쓰레기 같은 아버지, 은서는 그를 복잡하게 바라보는 딸이었다.
“아버지, 왜 그러셨어요?”
“······이제 와서 무슨 말을 하는 거냐? 다 지난 일인데.”
“다 지난 일이라고요? 정말 그렇게 말하는 건가요?”
“그때는 상황이 안 좋았을 뿐이다. 네가 안 좋은 일을 겪었다고 하니 미안하기는 하지만······”
“그만!! 그만 말 하세요!”
팍, 하고 감정을 터뜨리는 은서.
그 순간에 진호는 어떤 흔들림 같은 걸 느꼈다.
기운? 기세?
사람이 무언가를 발산 할 때 내뿜는 그런 느낌이었다.
‘조금 더. 더 뽑아 올릴 수 있어.’
대사는 이것으로 끝이지만 진호는 부족했다.
“나는 이미 가족이 있어. 사랑하는 가족이라고. 넌 그만 나타나 주었으면 한다.”
“······어, 어떻게?”
흔들림이 물감처럼 번졌다.
복잡한 색은 뒤엉킨 마음을 대변하고 있었다.
진호는 은서의 색이 조금씩 뚜렷해지고 있음을 간파했다.
그녀 역시 더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내가 무얼 해주면 될까? 돈이라면 주마. 내 가족을 더 이상 괴롭히지 말아 다오.”
“닥쳐!! 닥쳐요! 어머니를. 우리 가족을 그렇게 망가뜨려 놓고서는 이제 와서 착한 척을 하는 겁니까!?”
“내가 다 잘못했다. 미안하게 됐어.”
“위선자!”
콱, 은서가 진호의 가슴팍을 움켜쥐었다.
절절한 감정이 손끝의 떨림으로 전달되었다.
이미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넘쳐 바닥으로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완전히 피어냈어.’
진호는 그 모습에 감탄했다.
뒤엉키던 색들이 완전히 자리를 잡아서 제대로 반짝이고 있었다.
“어? 언니, 울어요?”
은영이 문을 들어온 건 그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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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놈이 은서 언니를 울린 것이냐.
라고, 달려드는 은영에게 설명을 한 것이 10분 전.
은서는 눈물을 다 씻고 동아리 방으로 돌아왔다.
눈가는 붉었지만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밝았다.
“어때?”
“하. 오빠, 한 번만 안아보자.”
“야, 야. 사람들 있는데.”
“부끄러워 하기는. 일루 와 봐.”
갑자기 박력이 생긴 건지 은서가 진호를 확 당겨서 품에 안았다.
그리고 툭툭 등을 두드렸다.
은영을 비롯한 후배들은 뭔 일인가 싶어서 눈만 동그랗게 뜨고 바라봤다.
“오빠 덕에 뭔가 팍 하고 온 거 같아.”
“감 잡은 거냐?”
“응. 확실하게 잡았어. 지금 막 가슴에서 그 감정이 부글부글 끓고 있는 게 느껴져.”
“잘 됐네. 그 느낌을 계속 유지 할 수 있다면 좋은 드라마가 될 거다.”
은서는 그 어느 때보다 밝게 웃었다.
아이돌을 그만두고 연기에 뛰어들어 온갖 혹평 속에서 허우적거리던 지난 시절이 싹 씻겨 나가는 기분이었다.
인정받은 기분.
드디어 자신이 무언가 이룰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긴 것이다.
“앞으로 배우, 박은서라고 불러 줘.”
“물론이지. 배우 님.”
이제는 그 이름이 부끄럽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