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21. 기인이사(2)
빌 고튼이 일어난 건 해가 떨어지고 난 뒤였다.
그는 배를 긁적이며 침대에서 일어나서는 자연스럽게 화장실로 직행.
졸졸졸 시냇물을 흘린 뒤 냉장고에서 콜라를 꺼내먹었다.
[······일어났습니까?]
[어? 어이구. 여기 진호 씨 집이었습니까?]
[그럼 어딘 줄 알았습니까?]
[하하. 그러네요. 딱히 다른 곳 일리가 없네요]
멋쩍게 웃는 얼굴에 그나마 양심이 엿보였다.
진호가 나직이 한숨 쉬고는 미리 끓여 둔 북엇국을 내밀었다.
그는 ‘이게 뭡니까?’라고 호기심을 내보이더니 홀짝 홀짝 마시기 시작했다.
‘크어! 크어!’ 속 풀이를 하는 걸 보니 입에 맞는 모양이었다.
[하하. 이거 실례했습니다. 간만에 대화가 통하는 사람을 만나다 보니 과음을 했네요]
[아침에 제 매니저가 왔던 것도 기억 안 나세요?]
[아, 그랬습니까?]
[네. 그럼요. 호텔 잡았다고 가자는 걸 여기가 마음에 든다고 칭얼거렸잖아요]
덕분에 송학만 헛걸음을 하고 돌아갔다.
스타만 아니었어도 엉덩이를 걷어차 줬을 거라고 씩씩거리면서.
[이거, 민망하네요. 그 매니저 분께 죄송하다고 좀 전해 주세요. 한 번 잠들면 잘 일어나지 않는 타입이라. 하하하]
[하, 거 참. 원래 그런 성격입니까? 처음 보는 사람하고도 격 없이 지내고?]
[설마요. 진호가 편해서 그랬습니다. 편해서]
곰돌이 잠옷을 입고 북엇국을 홀짝이는 모습을 보건데 편하기는 정말 편한 모양이다.
[그럼 일어났으니 호텔 잡으러 가시죠?]
[음. 그래야 합니까?]
[네?]
[이 집. 굉장히 마음에 드는데. 며칠만 머물다 가면 안 됩니까?]
[······진심이세요?]
이젠 슬슬 화가 올라오는 기분이다.
진호가 눈을 가늘게 뜨고 빌 고튼을 노려봤다.
[하하. 연기는 호흡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파트너와 살 부대끼며 지내다 보면 없던 호흡도 생길 거 같아서 말입니다]
[연기 때문이라는 겁니까?]
[싫다면 그것도 괜찮습니다]
까딱까딱 움직이는 빌 고튼.
진호가 가만히 그 모습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불청객에게 사생활을 내어주는 것은 물론 반가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의 말에 솔깃 하는 것도 사실.
‘파트너와의 호흡이라.’
미친놈처럼 보이지만 오스카상을 수상한 명배우 아닌가.
이딴 말도 설득력이 있었다.
[제 집에는 제 규칙이 있습니다]
[하하. 물론이죠.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는 법. 진호를 시저처럼 따르겠습니다]
[결국 배신당해서 죽지 않습니까?]
[그랬나요? 하하]
지금이라도 철회할까.
진호가 한 박자 늦게 후회를 해 봤다.
#
회사 근처 커피숍.
진호는 일주일 만에 은서를 만났다.
팬미팅 끝나고 얼굴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좀 달라진 거 같다?”
화장이 달라진 건가 싶었지만 그건 아니었다.
조금 더 당당한, 생기 있는 표정이었을 따름이다.
“이번에 드라마 하나 새로 들어가거든. 김고은 작가님 작품이야.”
“김고은 작가님? 이야기가 어렵기로 소문 난 분이잖아. 부담되지 않겠어?”
“도전하는 거지. 나도 더 높은 단계로 올라가고 싶거든.”
“음. 너라면 충분히 잘 해낼 거야.”
“피. 말만 그렇게 하는 거지?”
“하하. 처음 봤을 때 너라면. 하지만 지금은 진심이야. 충분히 잘 할 수 있다고 믿어.”
은서의 볼이 살짝 붉어졌다.
손끝으로 빨대를 쿡쿡 누르고는 화재를 전환했다.
“그보다 오빠. 빌 고튼하고 만났다면서?”
“어. 송학이 형이 말하주디?”
“응. 아주 하소연을 하던데? 그런 인간이 어디 있냐고.”
“하하. 형도 시달렸지. 밤을 꼴딱 새고.”
“그래서 어때? 그 사람?”
진호가 손사래를 치며 전날의 일을 얘기해줬다.
뜬금없이 찾아와서는 4차까지 달린 할리우드 스타.
곰돌이 잠옷에 북엇국을 마시고 만난 지 하루 된 사람 집에서 들러붙어버린 성격까지.
“와. 진짜 특이한 사람이네. 그쪽 회사는 관리 안 하나?”
“듣자하니, 회사에서는 거의 손을 놨더라고. 3년 동안 잠적 할 때 거의 계약 파기까지 갔던 걸 그쪽 대표가 겨우 잡았다나? 하여튼 별난 사람인 건 맞아.”
“오빠가 고생이 많네.”
“영화를 위해서니까. 참고 가는 거지.”
“영화? 아. 그럼 혹시 그 소문이 맞는 건가?”
은서가 손뼉을 치고는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소문?”
“빌 고튼이 잠적하기 전에 돌던 소문이 하나 있어. 영화 호흡을 맞춘다고 상대역을 병원에 입원시켰다는 얘기야.”
“입원이라고? 진짜야?”
“글쎄. 당시 우리나라 언론에서는 크게 안 다뤄서 자세하게는 몰라. 토픽란에서 짧게 불화설 정도로 봤던 게 전부야. 소문이야 뭐 다양하게 부풀어 올랐고.”
진호가 빌 고튼의 모습을 떠올려 봤다.
확실히 괴짜고 기이한 면모가 있는 사람이지만 누군가를 헤칠 것 같은 느낌은 아니었다.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조심해. 다른 건 다 부차해도 빌 고튼이라는 사람이 보통이 아닌 건 확실하니까. 잠적하기 전에서는 연기에 대한 집착이 너무 강해서 광증을 보였다고도 하거든.”
“광증이라니······”
“연기를 위해 물불을 안 가렸다나. 생선을 날것으로 씹거나 고철로 얼굴을 그어버리는. 소문에 불과하겠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잖아.”
열정과 광기 사이 어딘가.
진호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
은서와 헤어지고 집으로 돌아가던 진호는 송학에게서 짧은 문자를 받았다.
‘빌 고든이 회사에 와 있다.’라는 내용.
그대로 핸들을 돌려서 회사로 이동했다.
[그 정도밖에는 안 되는 겁니까!? 더 감정을 쥐어짜세요! 당장 죽을 것처럼. 내일이 없는 것처럼 하란 말입니다!]
1층을 지나 계단을 오르자 소란이 감지됐다.
회의실로 사용하는 큰 방에서 들려온 목소리였다.
강렬한 영어 발음은 누구의 것인지 분명했다.
[더! 더! 쥐어짜세요!]
문을 열고 들어가서 본 장면은 가관이었다.
회사 동료인 박근우, 오동찬, 안수미.
셋이 빌 고튼 앞에서 절절매고 있었다.
특히, 안수미는 아예 펑펑 우는 중이었다.
[고튼. 이게 무슨 일입니까?]
[오. 진호. 마침 잘 왔습니다]
[잘 와요? 대체 뭘 하고 있었던 건가요?]
[하하. 연기입니다. 연기. 우리가 하는 게 그것밖에 더 있을까요?]
짧게 웃으며 빌 고튼이 진호 앞으로 다가왔다.
그의 얼굴은 뭘 어떻게 했는지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누군가에게 맞은 것처럼.
“지, 진호야. 조심해라. 그 인간 좀 머리가 이상한 거 같아.”
그러자 그 옆을 박근우가 막았다.
“······사고라도 친 겁니까?”
“회사에 와서 대표님하고 얘기를 하더니 대뜸 연기 연습을 해 보자는 거 아니냐. 우리야 뭐 슈퍼스타니까 좋다고 했지. 말은 안 통해도 뭔가 있을까 싶어서.”
“연습? 연습을 하다가 이렇게 된 건가요?”
“야야. 말도 마라. 그걸 연습이라고 할 수 있나? 아주 그냥 사람 혼을 쏙 빼 놓아서는. 나중에는 자기 뺨 막 치면서 뭐라고 소리치는데 하나도 못 알아듣겠어.”
뺨이 달아오른 이유는 밝혀졌다.
진호가 고개를 돌려서 빌 고튼을 바라봤다.
그는 웃는 듯 화가 난 듯 굉장히 기묘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광기······’
다른 건 몰라도 하나는 확실했다.
빌 고튼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형은 잠깐 물러나 있어 봐요.”
진호가 박근우를 밀어내고 빌 고튼과 대치했다.
그의 표정은 여전히 기묘하여 감정을 제대로 읽을 수가 없었다.
‘읽을 수 없다면 읽을 수 있게 해야지.’
손을 들어 그의 눈을 가렸다.
입가로 늘어선 주름과 씰룩이는 피부가 손 아래로 엿보였다.
그것은 웃음이었다.
[웃고 있지만······]
가리고 있던 손을 치웠다.
기괴해 보이는 눈동자가 다시 나타났다.
웃음과는 어울리지 않는 색을 담고 있었다.
이 감정은 무엇일까.
‘뜨거움.’
‘아니, 날카로움.’
‘아니, 아니. 그것보다는······부끄러움’
손끝에, 피부에, 혓바닥에.
감정이 불씨처럼 타올라 톡톡 튀었다.
그것은 엘빈에게서 읽은 ‘영혼’의 울림과도 비슷했다.
[괜찮다]
진호는 손을 뻗어 빌 고튼의 머리에 얹었다.
어른이 아이에게 하듯이.
부모가 자식에게 하듯이.
천천히, 그리고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빌 고튼의 눈동자가 크게 뜨이고 감정이 변화했다.
[하지 마—!]
그 감정은 가라앉았다 번개처럼 튀어 올랐다.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손짓으로 진호의 손을 쳐냈다.
짝 소리에 주변 세 사람은 놀랐지만 진호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알고 있었으니까.
[괜찮아]
되레 한 걸음 걸어가 빌 고튼을 품에 안았다.
한 뼘은 더 큰 체구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양 손으로 감싸고 등을 쓸어내렸다.
빌 고튼은 움찔하며 잘게 반응했지만 앞서처럼 밀어내지는 않았다.
대신, 소리 내어 흐느꼈다.
[흐윽······흑. 흑]
그 흐느낌이 얼마나 처절했는지 박근우 등의 눈시울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말은 한 마디 안했어도 ‘이 눈물에는 사연이 있겠구나.’싶은 그런 흐느낌이었다.
[이 정도로 하죠?]
흐느낌이 멎은 건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
진호가 덤덤하게 손을 풀고 물러났을 때다.
[하하. 이거, 이거. 놀랍군. 놀라워]
신기하게도 빌 고튼 역시 언제 울었냐는 듯 당연하게 반응했다.
훌쩍이던 나머지 셋만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을 뿐이다.
[절 시험해 본 겁니까?]
[궁금했으니까]
[그래서 만족했나요?]
빌 고튼은 답 대신이 엄지손가락을 내밀었다.
그는 확실히 제정신이 아니었다.
#
시계는 이미 1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저녁을 지나 새벽으로 달려가는 시점.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막 일어나 활동을 할 때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그게 연기였다 이거지?”
회사 근처 곱창 집.
진호는 빌 고튼의 기행을 회사 동료들에게 대신 사과하고 곱창으로 입막음을 하러 왔다.
다행히 셋 다 연기에 꿈을 둔 사람이다 보니 화를 내기보다는 놀라워했다.
“엄청나게 극단적인 연기에요. 그냥 멋모르고 휘둘리면 제대로 대응을 하기가 어렵죠.”
“어. 그래, 그래. 말은 안 통해도 그 감정은 확실히 보이더라. 뭔가 좀 받아치고 싶은데 쉽지 않은. 음. 근데 진호 넌 쉽게 받아쳤잖아.”
“그래도 하루 먼저 봤잖아요. 어떤 사람인지 좀 아니까 낫죠.”
제가 더 낫습니다, 라고는 말하지 않았다.
곱창을 슥슥 뒤집으며 에둘러 변명했다.
“그래도 덕분에 좋은 거 봤다. 마지막에 두 사람이 포옹하는 장면은 영화의 클라이맥스 같았다니까.”
“응. 응. 완전 감동적. 막 뭐라고 할까. 오랫동안 헤어졌던 형제의 재회?”
“난 부자간의 화해 같았어요.”
차례대로 감상평을 늘어놓았다.
어차피 배경지식이 없으니 내용은 동일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세 사람이 받은 느낌은 동일했다.
해후.
진호가 빌 고튼쪽으로 물었다.
[벨로스가 엔딩을 알려 준 거죠?]
[받아내지 못하면 바꾸려 했습니다]
[그 양반도 독하네]
[하하하. 정확하게 봤네요]
감독이나 배우나.
어딘가 특별한 위치에 오른 이들은 제정신이 아닌 면모가 있었다.
잘 포장하자면 그런 것.
나쁘게 말하자면 하나같이 변태였다.
[할 거면 제대로 합시다. 곱창 다 먹고 따라와요]
그리고 그건 진호도 마찬가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