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만 전생 배우-48화 (48/178)

Chapter21. 기인이사(1)

팬미팅이 끝나고 며칠이 지났다.

후기 글이 속속들이 올라오며 잠깐 이슈가 됐었다.

엘빈과 은서.

그리고 진호로 엮여가는 3각 관계였다.

하지만 소문은 크게 번지지 않았다.

엘빈이 출국을 하고 은서 역시 ‘이벤트’라고 못 박으며 일단락 된 것이다.

“벨로스에게서 연락이 왔다.”

그리고 그 즈음해서 벨로스 감독의 연락이 닿았다.

“캐스팅 작업이 거의 끝나가는 모양이야.”

“생각보다 일찍 끝났네요.”

“아무래도 거장이니까. 그의 부름을 거절 할 사람이 얼마 없다는 거지.”

“리스트 있어요?”

최현석이 메일로 확인한 캐스팅 보드를 보여 주었다.

확정 된 것과 예정 된 것으로 나뉘어 있었다.

확실히 거장의 손길이 닿아서인지 면면이 화려했다.

“벤 존스에 케리 머쉬까지. 예산이 그리 넉넉한 편은 아니라고 들었는데. 용케 이런 분들을 모셨네요.”

“프랑스 계열 배우들에게 벨로스는 신적인 존재지. 돈을 떠나서 출연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여럿이야.”

“그런 영화에 제가 출연하는 거군요.”

진호는 두 명의 주연 중 하나를 맡았다.

어린 나이에 프랑스 길바닥에 버려져 있던 걸 갱 두목이 거두어 키워준 인물이다.

아시아인이 프랑스 갱단을 통솔 할 만큼 카리스마가 있고 잔혹한 캐릭터.

비중만큼 다루기 어려운 존재였다.

“응? 근데, 저랑 짝을 맞출 배우 역할은 아직 미정으로 돼 있네요?”

눈으로 캐스팅 목록을 쭉 읽던 진호가 물었다.

가장 중요한 배역 하나가 비어 있었다.

“아. 그건 따로 메일을 첨부 했더라. 죄다 프랑스어라서 그런데. 네가 좀 해석해 줄래?”

“한 번 볼게요.”

최현석이 다른 메일을 열었다.

프랑스어로 장문의 편지가 첨부되어 있었다.

이건 벨로스가 직접 작성한 내용이었다.

“빌 고튼?”

편지 말미에 적힌 이름 하나.

“설마, 오스카 2관왕의 그 빌 고튼?”

최현석이 먼저 깜짝 놀라며 반응했다.

영화 좀 봤다 싶은 사람 중에 빌 고튼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상대역을 직접 보고 결정하고 싶대요. 그래서 한국으로 날아온다고······”

“누가? 빌 고튼이?”

“네.”

RRRR—!

그 순간.

기다렸다는 듯 울리는 전화기.

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맞물렸다.

#

빌 고튼의 방한 소식은 금세 알려졌다.

누군가 얘기를 흘린 것이 아니라 자기가 직접 SNS에 방한 소식을 떡하니 올린 것이다.

한 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빌 고튼이 방한한다고 하니 기자들이 그냥 있을까.

공항에 한껏 몰려왔다.

그 숫자가 수십이었다.

[빌 고튼! 이번 방한 목적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까요?]

[이쪽 보고 한 말씀만 해 주세요! 빌 고튼!!]

[한국의 음식 중 무엇이 가장 좋나요?]

[혹시 박정수 선수나 윤홍빈 감독을 알고 있나요!?]

복작복작 모여든 기자들이 저마다 질문을 쏟아냈다.

한 마디 한 샷이라도 제대로 딸 수 있으면 그게 그들에게는 성과였다.

빌 고튼은 손을 흔들며 여유롭게 반응했다.

[제가 한국에 온 이유는······]

그러다 걸음을 딱 멈추며 입을 열었다.

플래시가 사방에서 터지고 기자들의 마이크가 창검처럼 날아들었다.

[한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 입니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 나온 건 짧은 한 문장 뿐.

그마저도 어딘가 애매해서 오해의 소지가 다분했다.

[빌 고튼의 애인이 한국에!?]

[빌 고튼. 은밀한 밀회?]

[사람을 찾습니다. 빌 고튼]

떡밥을 문 물고기처럼.

기자들은 상상력을 동원하기 시작했다.

#

빌 고튼의 이력을 되짚어 가면 시작은 아역이었다.

데뷔 나이가 6세.

아역으로 시작을 해서 커리어를 쌓았다.

그는 프랑스 혈통의 이민자 출신이었다.

그렇기에 어린 나이부터 돈을 벌어야 했고, 연기는 그에게 좋은 돈벌이가 되어 주었다.

부랑자, 살인자, 역겨운 변태.

심지어 강간당하는 어린 남자 역할까지.

빌 고튼은 종류를 가리지 않고 영화를 찍었다.

개중에는 쓰레기 같은 영화도 상당히 많았지만 숨길 수 없는 그의 재능은 결국 그 안에서도 꽃을 피웠다.

황혼의 거리, 불같은 질주, 복수자 등.

수많은 명작에 이름을 남기고 세기도 힘들 정도의 상을 쓸어 담았다.

[빌 고튼 잠적!]

[사라진 천재의 이야기]

[빌 고튼의 기행. 그는 어디로?]

하지만 그건 3년 전까지의 이야기.

그는 3년 전 돌연 영화계에서 잠적.

영화를 비롯해 모든 방송에서 모습을 감추고 사라져 버렸다.

암 투병이다, 우울증이다, 투기를 하다가 파산했다 등 말은 많았지만 확인 된 건 없었다.

대체 어디에서 무얼 하고 있는 걸까.

모두가 궁금해 하고 있을 때.

그가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아시아, 한국에서.

그리고 작은 삼겹살집으로.

[오, 굿. 굿. 굉장히 맛있네요]

[하하. 입에 맞는다니 다행이네요]

모자를 푹 눌러쓴 빌 고튼이 연신 삼겹살을 입 안으로 우겨 넣었다.

젓가락질은 서툴러 포크로 쿡쿡 찍어 먹는데 한 번에 3개씩 찍는 일도 허다했다.

[음. 역시 다른 나라에 가면 소울 푸드를 먹어야 해요. 그래야 문화의 바탕을 제대로 이해 할 수 있죠]

[삼겹살에서 말이죠?]

[식문화도 문화입니다. 어떤 도구를 쓰는가, 어떻게 먹는가, 반주는 무엇인가. 나라마다 지역마다 모두 다르죠. 이걸 이해해야 그 나라의 밑바탕을 볼 수 있는 겁니다]

빌 고튼은 갑자기 나타났다.

공항을 벗어났다고, 한 번 보자는 전화 통화를 한 후에.

그것도 회사 사무실도 아닌 이런 고기 집에서.

‘뭐 이런 사람이 다 있지?’

온갖 것들을 다 경험해 본 진호조차 빌 고튼의 기행에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진호는 더 안 먹는 겁니까? 배우는 많이 먹어야 합니다. 그래야 에너지를 쏟죠]

[고기 좀 더 시킬까요?]

[하하. 역시 말이 통하는군요]

삼겹살 3인분 더.

반주로는 소주를 시켜서 잔에 나눠 담았다.

‘오우 쉿!’이라며 첫 모금에 질겁하던 빌 고튼은 이제 넙죽넙죽 잘 받아 마셨다.

신기하기로는 거의 기인이사였다.

[이렇게 불쑥 나타나서 놀랐습니까?]

[아니라고 말 하기는 힘들 거 같네요. 벨로스가 보낸 메일이 아니었으면 전화도 장난으로 알았을 겁니다]

[하하. 다행입니다. 진호를 만나지 못했으면 어디로 가야 할 지 난감했을 테니까요]

[원래 이런 거 좋아하나요?]

쌈까지 싸서 오물오물 씹어 넘긴 빌 고튼이 고개를 들었다.

깊은 주름 사이로 박힌 그의 눈동자는 천진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이런 눈빛, 진호는 최근에도 느껴 본 적 있다.

‘엘빈.’

어째 비슷한 사람들이 꼬이는 기분이었다.

[전 3년 전에 한 가지 생각에 빠졌습니다]

[한 가지 생각?]

[과연 연기란 무엇일까, 라는 거창한 질문이죠]

[말 그대로 거창하네요. 답은 찾았습니까?]

[하하. 무리입니다. 3년간 오지에 박힌 채 고민을 계속해 봤지만 실마리조차 보이지 않더군요]

[오지에서······그렇게까지 하는 겁니까?]

[네. 그래야 합니다. 전 지금까지 성공과 돈을 위해서 연기를 했으니까요]

포크로 삼겹살을 쿡 찍으며 빌 고튼이 답했다.

그의 눈빛은 불덩이 같이 타오르고 있었다.

[성공, 성공, 성공. 오직 돈과 성공을 위해서 연기를 하다 보니 어느새 나이가 마흔을 넘었더군요. 500평 대저택에 수십 대의 스포츠카. 제 이름으로 된 요트까지. 시간과 바꾼 물건들이었습니다]

[그런 삶에 회의라도 든 겁니까?]

[본질적인 회의죠. 과연 난 무엇을 위해서 연기를 하고 있었는가. 아니, 연기란 무엇인가. 참, 답을 찾기 어려운 질문에 빠진 거죠]

다시 한 번 설명하지만 빌 고튼은 수상경력이 화려한 연기파 배우다.

그런 사람이 마흔을 넘어서 연기의 본질을 고찰한다는 건 상당히 이례적인 모습이었다.

아니, 현실과 동떨어진 모습이었다.

[그러다 우연히 당신의 연기를 봤습니다. 가다듬어지지는 않았지만 날 것 같은 생기가 있었죠]

[제 연기를 말입니까?]

[그때 문뜩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쩌면 해답은 타인이 쥐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나와 비슷한. 나보다 나은 사람이라면 해답을 알려 줄지도 모른다고 결론을 내린 겁니다]

[그래서 절 만나러 왔다는 겁니까?]

[네. 벨로스의 연락을 받았을 때 이것이 운명이라 생각했습니다. 당신이라면 제 고민에 대한 해답을 줄지도 모르니까요]

거창하고 거창하다.

연기를 진지하게 대하고 있는 진호지만 이런 철학적인 의문을 품어 본 적은 없다.

주변에서도 그렇게 깊이 파고 드는 사람이 없고.

‘살짝 머리가 이상해진 건가?’

그렇게 보이는 것도 사실이었다.

[후우. 잘 먹었습니다. 한국에는 2차라는 것이 있다던데. 우리는 다음에 어디로 가는 겁니까?]

진호는 진지하게 생각해 봤다.

#

삼겹살에 소주.

그 다음은 곱창에 매화주.

잠깐 쉬고는 양꼬치에 칭타오.

진호는 빌 고튼과 어울려서 3차까지 소화했다.

거창한 철학답게 주량은 얼마나 센지 몇 병을 마셔도 끄떡없었다.

가라앉았던 해가 슬금슬금 떠 올 즈음이 돼서야 백기를 휘날리며 집으로 돌아왔다.

빌 고튼과 함께.

“별 일이 다 있네.”

놀랍게도 빌 고튼은 아직 숙소도 안 잡은 상태였다.

술에 거나하게 취해서 ‘4차! 4차!’외치는 인간을 잠재우려면 집으로 끌고 오는 수밖에 없었다.

호텔까지 압송하기에는 걸리는 시선이 너무 많았다.

[오빠, 괜찮은 거야? 최 대표님이 그러던데. 빌 고튼하고 만났다고?]

[송학이 보냈다. 일단 숙소부터 잡아 봐]

[진호야 전화 좀 받아 봐. 어디냐?]

뒤늦게 폰을 확인하니 부재중 통화가 수십 건이었다.

진호도 휘말리냐고 제대로 확인을 못한 터였다.

황급히 밀린 톡에 메시지를 남겼다.

“집에서 재웠다고?”

이른 시간에 연락을 받은 건 매니저 송학이었다.

그는 새벽부터 연락이 안 되어 전전긍긍하면서 잠을 못자고 있었다.

“죄송해요, 형. 걱정 많이 했죠?”

“어휴. 말도 마라. 대표님도 발을 동동 구르고. 중간에 전화라도 한 통 하지 그랬냐?”

“이 사람. 휴. 빌 고튼 씨 말이에요. 말술에 말은 또 얼마나 많은지. 정신을 쏙 빼놓고 부어라 마시다 하다 보니 저도 깜빡하고 말았지 뭐에요.”

“할리우드 스타도 그런 거냐? 옆에서 자고 있어?”

“네. 곰돌이 잠옷으로 갈아입히고 재워 놨어요.”

할리우드 슈퍼스타.

말마따나 500평 대저택에 수십 대의 스포츠카를 지닌 유명인물이 5천 원짜리 곰돌이 잠옷을 입고 그렁거리고 있는 중이다.

“네가 고생이 많다. 일단 좀 쉬고, 일어나면 숙소부터 잡아. 아니다. 그냥 내가 그쪽으로 갈게.”

“이 아침에요? 형도 잠 못 잤을 텐데.”

“야. 지금 잠이 오냐? 하여튼 넌 씻고 쉬어. 내가 열고 들어 갈 테니까.”

“네. 번호는 그대로에요.”

짧게 통화를 마치고 터덜터덜 거실로 나왔다.

침대에 누워서 그렁거리는 빌 고튼의 모습이 두 눈 가득 박혔다.

저 인간이 슈퍼스타라니.

참 안 믿기는 일이었다.

‘그래도.’

뭔가 와 닿는 부분은 있었다.

슈퍼 카 수십 대 굴리는 스타조차 연기에 대한 본질을 고민하고 있다는 점.

“나는 그런 고민을 해 본 적이 있을까?”

자신을 표현하는 것에 몰두했었다.

캐릭터를 빚고 그 캐릭터가 어떻게 그려지는지를 고민했었다.

많은 박수와 많은 칭찬.

수많은 사람들의 환호가 뒤따르는 그런 생각이었다.

하지만 연기란 무엇인가.

이런 철학적인 고찰은 해 본 적이 없다.

“내 연기란 무엇일까······”

밤을 꼴딱 샜는데도 잠이 안 온다.

냉장고에 남은 맥주 한 캔을 들고 홀짝였다.

진호 나이 스물여덟.

아니, 아홉으로 넘어 갈 무렵.

연기에 대해서 깊이 고찰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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