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20. 팬미팅. 그리고 애정전선(4)
진호는 뒤쪽 자리가 좀 소란스러웠지만 돌아보지는 않았다.
지금은 눈앞의 여자가 중요했다.
[엘빈. 장난이라도 그런 말 함부로 하면 안 돼요]
[장난 아니에요. 나 진호 마음에 들어요]
[아니, 그렇다고 해도 만나자마자 결혼이라니. 진지하게 하는 말은 아니죠?]
[하면 안 돼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되물어 보는 모습에 뭐라고 할까.
차라리 무슨 속셈이라도 있는 거면 대차게 받아 내 줄 텐데.
엘빈에게서는 그 어떤 속셈도 읽을 수 없었다.
[대체 엘빈이 뭐가 아쉬워서 날 보고 결혼을 하려는 건데요?]
[아쉽고 그런 건 없어요. 난 그냥 진호가 마음에 들어요. 나랑 꼭 닮은걸요]
[닮아요? 우리 둘이?]
[네! 진호는 나랑 많이 닮았어요!]
테이블을 짚고 앞으로 몸을 슥 내미는 엘빈.
조각 같은 얼굴이 눈앞에서 아른거리니 진호도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피했다.
[크흠. 흠. 어떤 점이 그렇게 닮았다는 건가요? 엘빈과 나는 일하는 분야도 다른데]
[하지만 진호도 들리잖아요. 안 그래요?]
[들려요?]
[네! 여러 가지 목소리들. 진호도 들리는 거 맞죠?]
진호는 입술을 달싹였다.
엘빈의 질문의 요지가 자신의 ‘전생 체험’에 대한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난 어릴 때부터 많은 목소리를 들었어요. 처음에는 그냥 망상인 줄 알았죠. 하지만 아니었어요. 세상의 멜로디가 내 귓가에서 지저귄 거였죠!]
[세상의 멜로디가······?]
[네. 진호도 그걸 들은 거죠? 그래서 내 노래를 듣고 떠오르는 걸 맞춘 거잖아요]
고목나무 아래의 아이들.
진호는 엘빈의 노래를 듣고 어떤 장면을 떠올렸다.
전생체험을 할 때 느끼던 일종의 플래시 백 같은 경험이었다.
[나도 알았어요. 진호의 연기를 보고 나와 같은 사람이라는 걸 대번에 알아차렸어요. 그래서 만나려고 많이 노력했어요]
[그래서 한국까지 찾아 온 건가요?]
[네! 진호라면 나와 같으니까!]
진호는 그제야 상황이 이해가 됐다.
엘빈은 ‘동질감’때문에 자신을 찾아온 거였다.
그녀의 능력이라는 것이 정말로 진호 자신의 것과 동류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믿기에 같은 걸 공유 할 사람을 간절히 원한 것이다.
진호도 과거, 전생 체험으로 고생 할 때는 누군가 이를 공유해지길 간절하게 기도했었다.
백분 이해가 됐다.
[엘빈. 엘빈의 말은 이해했어요. 나도 엘빈하고 비슷한 걸 경험했었기에 어떤 기분인지는 알아요]
[역시, 진호도 나와 같군요!]
[하지만 엘빈. 동질감 하나 가지고 결혼 할 수는 없어요. 비슷한 처지라고 사랑하는 건 아니잖아요?]
[왜요? 이 세상에서 진호와 나만 같은 종류인데?]
[동질감과 애정은 달라요. 나는 엘빈을 오늘 처음 봤잖아요]
엘빈은 납득을 못 하겠다는 듯 부루퉁한 표정을 지었다.
‘아이 같네.’
진호는 그 모습을 속으로 평했다.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는 모르나, 엘빈은 굉장히 순수한 상태로 성장을 했다.
자신과 같은 사람을 쫓고 단순하게 애정을 갈구하고 있었다.
— ······아이. 음악. 즐거움······우리. 부디······
“응?”
갑자기 어디선가 엘빈의 것이 아닌 목소리가 들려왔다.
진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주변을 훑었다.
뒷자리에서 부스럭 거리는 걸 제외하면 딱히 다른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 ······착. 아이. 부디······다치지. 부탁······
또 다시 들려오는 목소리.
하지만 이번에는 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알아차렸다.
고개를 갸웃거리는 엘빈의 머리 위.
희미한 안개 같은 것이 몽글거리며 그녀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진호, 뭐해요?]
[잠시만요]
— ······붉은. 오크 나무. 그네. 반 쪽 클로버······
목소리는 무언가를 전하고 싶어 했다.
이것은 전생 체험과는 다른 종류 접촉이었다.
전생체험이 몸에 꽂힌 USB라면 이건 서류였다.
아주 오래되어 헤진 서류.
[엘빈. 혹시 붉은 오크 나무를 알아요? 반 쪽 클로버와]
[······]
순간, 엘빈의 얼굴이 처음으로 굳었다.
[뭔가 알고 있어요?]
[그걸, 그걸 진호가 어떻게 알아요?]
[엘빈과 관계있는 것들인가요?]
[네. 네! 그건 전부 할머니와의 추억이에요. 우리 둘만이 알고 있는]
그런 거였나.
진호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엘빈의 머리위에 나타난 안개가 어떤 존재인지는 확실하게 이해를 했다.
‘이것도 일종의 전생체험.’
그 간격이 매우 짧았을 뿐이다.
[놀라지 말고 들어요]
결혼에서 귀신놀음으로.
대화의 폭이 참 넓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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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빈과 진호는 한 동안 돌아가신 조모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예상대로 엘빈이 가수가 된 거에는 조모의 영향이 컸다.
맞벌이로 바쁜 부모와 어릴 적부터 키워 준 조모.
전형적이라면 전형적일 스타의 성장 스토리였다.
[엘빈의 할머니가 계속 지켜봐 줬다고 생각해요]
[그럼 그 목소리들도?]
[어쩌면. 엘빈의 재능을 할머니가 키워 준 걸지 모르겠네요]
이렇게 표현하면 맞을지 모르겠지만, 엘빈의 능력은 진호의 열화판이었다.
전생 자체를 체험 할 수 있는 그와는 다르게 엘빈은 곁에 선 할머니의 목소리만을 희미하게 들어왔던 것이다.
그것이 경험을 쌓으며 실력이 된 것.
두 사람이 같은 장면을 떠올렸던 것도 이러한 맥락이었다.
[역시. 나는 진호와 결혼을 해야겠어요]
엘빈은 생각이 더욱 굳어졌다.
수많은 사람을 만나 봤지만 이렇게 자신을 깊이 들여다 본 인물은 없었다.
[엘빈. 앞에도 말했지만 동질감과 사랑을 착각하면 안 돼요]
[어째서요? 날 이해해 줄 수 있는 건 진호뿐인데?]
[그렇게 생각 할 뿐이에요. 앞으로 살다보면 엘빈을 이해 해 줄 사람들이 나타날 거예요. 내가 그랬거든요]
[진호를 이해해 주는 사람?]
[꼭 나와 같지 않아도 돼요. 달라도 그걸 이해하고 받아들여주는 사람. 곁에서 응원 해 줄 사람이 나타날 거라 믿어요]
엘빈은 진호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그리고 어딘가 복잡한 얼굴로 말했다.
[진호. 이미 좋아하는 사람이 있군요]
[그렇게 보이나요?]
[이제 보니 알겠어요. 진호가 왜 아무런 망설임 없이 결혼을 거부했는지. 말 해봐요. 누가 진호의 마음을 훔쳐 간 거죠?]
[글쎄요. 딱 잘라서 말하긴 어려운데]
진호가 머리를 긁적였다.
이런 쪽에서는 너무 서툴렀다.
사람 상대하는 것이 어렵고 마음을 표현하는 것은 더더욱 어려웠던 진호였기 때문에.
하지만 거짓말은 할 수 없었다.
엘빈 역시 모든 걸 드러냈으니까.
[그냥. 처음에는 동료였어요. 첫 인상은 썩 좋지도 않았죠. 약간 건방진? 그런 느낌이었어요]
[동료? 역시 가까운 곳에 있군요?]
[네. 그러다가 이런 저런 일 겪으면서 많이 의지했죠. 일적으로도 사적인 일로도. 치부도 많이 드러내고 서로 안 좋은 일도 경험했었죠]
[그렇게 사귀게 된 건가요? 누구죠?]
[하하······아직 사귀는 건 아니에요]
[어째서? 진심으로 생각하고 있는 거 아닌가요?]
[그건······]
달콤함만을 쫓기에는 진호가 너무 겁쟁이였다.
재는 것도 많고 표현에 두려움도 역력했다.
하지만 꼭 그것만이 이유인 건 아니었다.
[그 친구는 나와는 달라요. 어릴 때부터 이 바닥에서 성장하고 억척같이 올라왔어요. 끈질긴 잡초라고 하면 화를 내려나? 하여튼 그런 사람이에요. 근데······]
[근데?]
[나와 만나며 조금 물러졌어요. 자신의 일보다 내 일을 더 기뻐해요. 연기도 커리어도. 모든 일에 자신보다 날 위하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두려워요. 그 친구가 나 때문에 물러날까봐. 재능 있는 친구인데. 더 높이 올라 갈 친구인데. 내가 그 길을 막게 될까봐 걱정하게 되네요]
달그락.
뒤편에서 무언가 쏟아지는 소리가 들렸다.
신경 쓰였지만 굳이 돌아보지는 않았다.
[되게 바보 같아요]
[알아요. 바보 같죠. 하지만 어쩌겠어요. 나는 그 친구가 소중해요. 나만을 위해서 자신을 포기하라고 말 할 수는 없어요.]
[푸. 이해는 안 가지만 마음은 알 거 같네요. 그리고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엄청 부럽네요. 누군가에게 이렇게 애정을 받을 수 있다는 거. 진짜로 행복 할 거 같은데]
엘빈이 의자에 몸을 푹 묻으며 중얼거렸다.
더 이상 결혼을 주장하지는 않았다.
진호의 말을 들으며 자신이 품었던 마음은 뭔가 어설펐음을 깨닫고 있었다.
[그래도 진호가 좋은 건 같아요. 결혼 대신에 친구는 할 수 있는 거죠?]
[그 정도라면 얼마든지]
대신 친구부터.
두 사람은 악수를 나누었다.
그리고 모자를 깊이 눌러쓴 누군가가 가게를 황급히 빠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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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서는 인적이 드문 공원에 홀로 앉았다.
가쁜 숨을 간신히 정리하고 고개를 들었다.
캄캄한 밤하늘이 두 눈에 콕 들어와 박혔다.
‘바보 같아.’
눈물이 나올 거 같아서 눈가를 손으로 눌렀다.
어릴 적부터 연예계에 들어와 이제는 다 말라버린 눈물이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던 모양이다.
손끝이 축축했다.
“······난 그냥 매달렸구나.”
그렇게 엉켜버린 심장의 실타래가 어느 정도 풀렸을 때.
은서는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조급함.
그래, 조급함이었다.
진호의 뒤를 쫓고 그의 곁에 붙으며 철없는 아이처럼 날뛴 자신의 행동들.
모두 조급함에서 비롯되었던 것이다.
‘알고 있었던 거야.’
처음, 연기를 함께 해 봤을 때 부터였을 거다.
이 남자. 진호라는 사람은 평범하지 않다.
그의 앞길은 비범함만이 자리 잡고 장대한 서사곡이 들려올 것이다.
이를 알고 있었기에 초조 할 수밖에 없었다.
아직 자신은 밑바닥에서 발버둥치는 병아리에 불과했으니까.
“근데 진호 오빠는 날 제대로 보고 있었네.”
초조함에 길에서 벗어났었다.
그렇게 ‘연기, 연기’하던 것도 어느새 등져버린 채.
자신보다 진호의 앞길을 보고 그의 커리어에 매달려 버린 것이다.
자신 앞에 있는 언덕도 못 넘은 채, 저 먼 곳의 산을 향해 달려가는 멍청이처럼.
“나보다 데뷔도 훨씬 느렸으면서.”
걱정했단다.
자신 때문에 재능을 펼치지 못할까봐.
그것도 예쁘고 재주 좋은 여자를 앞에 두고.
무려 결혼하자고 말하는 할리우드 스타인데.
그 모든 걸 뒤로하고 자신부터 걱정했단 말이다.
“아아아아! 바보 오빠야!”
끓는 속을 토해내듯, 은서가 소리쳤다.
그리고 벤치를 잡고 푹 주저앉았다.
몸에서 힘이 빠져서 서 있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계속 그러고 있을 수도 없었다.
‘바보 오빠’가 메아리쳐서 돌아왔기 때문이다.
대체 누가 바보냐고 묻는 것처럼.
“이 씨.”
힘주어 딱 서서는 눈가를 소매로 훔쳤다.
그리고 꽉 영근 목소리로 소리쳤다.
“두고 봐! 그딴 걱정 못하게 해 줄 테니까! 반드시 같은 눈높이에서 보게 해 줄 거라고! 그리고. 그리고 그 때가 오면······”
입술을 콱 깨물었다.
쏟아내는 건 진심이었다.
“자빠뜨릴 테다!”
은서 나이, 프로필 상 스물 넷.
인생. 그리고 사랑의 목표가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