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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0만 전생 배우-47화 (47/178)
  • Chapter20. 팬미팅. 그리고 애정전선(4)

    진호는 뒤쪽 자리가 좀 소란스러웠지만 돌아보지는 않았다.

    지금은 눈앞의 여자가 중요했다.

    [엘빈. 장난이라도 그런 말 함부로 하면 안 돼요]

    [장난 아니에요. 나 진호 마음에 들어요]

    [아니, 그렇다고 해도 만나자마자 결혼이라니. 진지하게 하는 말은 아니죠?]

    [하면 안 돼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되물어 보는 모습에 뭐라고 할까.

    차라리 무슨 속셈이라도 있는 거면 대차게 받아 내 줄 텐데.

    엘빈에게서는 그 어떤 속셈도 읽을 수 없었다.

    [대체 엘빈이 뭐가 아쉬워서 날 보고 결혼을 하려는 건데요?]

    [아쉽고 그런 건 없어요. 난 그냥 진호가 마음에 들어요. 나랑 꼭 닮은걸요]

    [닮아요? 우리 둘이?]

    [네! 진호는 나랑 많이 닮았어요!]

    테이블을 짚고 앞으로 몸을 슥 내미는 엘빈.

    조각 같은 얼굴이 눈앞에서 아른거리니 진호도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피했다.

    [크흠. 흠. 어떤 점이 그렇게 닮았다는 건가요? 엘빈과 나는 일하는 분야도 다른데]

    [하지만 진호도 들리잖아요. 안 그래요?]

    [들려요?]

    [네! 여러 가지 목소리들. 진호도 들리는 거 맞죠?]

    진호는 입술을 달싹였다.

    엘빈의 질문의 요지가 자신의 ‘전생 체험’에 대한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난 어릴 때부터 많은 목소리를 들었어요. 처음에는 그냥 망상인 줄 알았죠. 하지만 아니었어요. 세상의 멜로디가 내 귓가에서 지저귄 거였죠!]

    [세상의 멜로디가······?]

    [네. 진호도 그걸 들은 거죠? 그래서 내 노래를 듣고 떠오르는 걸 맞춘 거잖아요]

    고목나무 아래의 아이들.

    진호는 엘빈의 노래를 듣고 어떤 장면을 떠올렸다.

    전생체험을 할 때 느끼던 일종의 플래시 백 같은 경험이었다.

    [나도 알았어요. 진호의 연기를 보고 나와 같은 사람이라는 걸 대번에 알아차렸어요. 그래서 만나려고 많이 노력했어요]

    [그래서 한국까지 찾아 온 건가요?]

    [네! 진호라면 나와 같으니까!]

    진호는 그제야 상황이 이해가 됐다.

    엘빈은 ‘동질감’때문에 자신을 찾아온 거였다.

    그녀의 능력이라는 것이 정말로 진호 자신의 것과 동류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믿기에 같은 걸 공유 할 사람을 간절히 원한 것이다.

    진호도 과거, 전생 체험으로 고생 할 때는 누군가 이를 공유해지길 간절하게 기도했었다.

    백분 이해가 됐다.

    [엘빈. 엘빈의 말은 이해했어요. 나도 엘빈하고 비슷한 걸 경험했었기에 어떤 기분인지는 알아요]

    [역시, 진호도 나와 같군요!]

    [하지만 엘빈. 동질감 하나 가지고 결혼 할 수는 없어요. 비슷한 처지라고 사랑하는 건 아니잖아요?]

    [왜요? 이 세상에서 진호와 나만 같은 종류인데?]

    [동질감과 애정은 달라요. 나는 엘빈을 오늘 처음 봤잖아요]

    엘빈은 납득을 못 하겠다는 듯 부루퉁한 표정을 지었다.

    ‘아이 같네.’

    진호는 그 모습을 속으로 평했다.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는 모르나, 엘빈은 굉장히 순수한 상태로 성장을 했다.

    자신과 같은 사람을 쫓고 단순하게 애정을 갈구하고 있었다.

    — ······아이. 음악. 즐거움······우리. 부디······

    “응?”

    갑자기 어디선가 엘빈의 것이 아닌 목소리가 들려왔다.

    진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주변을 훑었다.

    뒷자리에서 부스럭 거리는 걸 제외하면 딱히 다른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 ······착. 아이. 부디······다치지. 부탁······

    또 다시 들려오는 목소리.

    하지만 이번에는 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알아차렸다.

    고개를 갸웃거리는 엘빈의 머리 위.

    희미한 안개 같은 것이 몽글거리며 그녀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진호, 뭐해요?]

    [잠시만요]

    — ······붉은. 오크 나무. 그네. 반 쪽 클로버······

    목소리는 무언가를 전하고 싶어 했다.

    이것은 전생 체험과는 다른 종류 접촉이었다.

    전생체험이 몸에 꽂힌 USB라면 이건 서류였다.

    아주 오래되어 헤진 서류.

    [엘빈. 혹시 붉은 오크 나무를 알아요? 반 쪽 클로버와]

    [······]

    순간, 엘빈의 얼굴이 처음으로 굳었다.

    [뭔가 알고 있어요?]

    [그걸, 그걸 진호가 어떻게 알아요?]

    [엘빈과 관계있는 것들인가요?]

    [네. 네! 그건 전부 할머니와의 추억이에요. 우리 둘만이 알고 있는]

    그런 거였나.

    진호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엘빈의 머리위에 나타난 안개가 어떤 존재인지는 확실하게 이해를 했다.

    ‘이것도 일종의 전생체험.’

    그 간격이 매우 짧았을 뿐이다.

    [놀라지 말고 들어요]

    결혼에서 귀신놀음으로.

    대화의 폭이 참 넓었다.

    #

    엘빈과 진호는 한 동안 돌아가신 조모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예상대로 엘빈이 가수가 된 거에는 조모의 영향이 컸다.

    맞벌이로 바쁜 부모와 어릴 적부터 키워 준 조모.

    전형적이라면 전형적일 스타의 성장 스토리였다.

    [엘빈의 할머니가 계속 지켜봐 줬다고 생각해요]

    [그럼 그 목소리들도?]

    [어쩌면. 엘빈의 재능을 할머니가 키워 준 걸지 모르겠네요]

    이렇게 표현하면 맞을지 모르겠지만, 엘빈의 능력은 진호의 열화판이었다.

    전생 자체를 체험 할 수 있는 그와는 다르게 엘빈은 곁에 선 할머니의 목소리만을 희미하게 들어왔던 것이다.

    그것이 경험을 쌓으며 실력이 된 것.

    두 사람이 같은 장면을 떠올렸던 것도 이러한 맥락이었다.

    [역시. 나는 진호와 결혼을 해야겠어요]

    엘빈은 생각이 더욱 굳어졌다.

    수많은 사람을 만나 봤지만 이렇게 자신을 깊이 들여다 본 인물은 없었다.

    [엘빈. 앞에도 말했지만 동질감과 사랑을 착각하면 안 돼요]

    [어째서요? 날 이해해 줄 수 있는 건 진호뿐인데?]

    [그렇게 생각 할 뿐이에요. 앞으로 살다보면 엘빈을 이해 해 줄 사람들이 나타날 거예요. 내가 그랬거든요]

    [진호를 이해해 주는 사람?]

    [꼭 나와 같지 않아도 돼요. 달라도 그걸 이해하고 받아들여주는 사람. 곁에서 응원 해 줄 사람이 나타날 거라 믿어요]

    엘빈은 진호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그리고 어딘가 복잡한 얼굴로 말했다.

    [진호. 이미 좋아하는 사람이 있군요]

    [그렇게 보이나요?]

    [이제 보니 알겠어요. 진호가 왜 아무런 망설임 없이 결혼을 거부했는지. 말 해봐요. 누가 진호의 마음을 훔쳐 간 거죠?]

    [글쎄요. 딱 잘라서 말하긴 어려운데]

    진호가 머리를 긁적였다.

    이런 쪽에서는 너무 서툴렀다.

    사람 상대하는 것이 어렵고 마음을 표현하는 것은 더더욱 어려웠던 진호였기 때문에.

    하지만 거짓말은 할 수 없었다.

    엘빈 역시 모든 걸 드러냈으니까.

    [그냥. 처음에는 동료였어요. 첫 인상은 썩 좋지도 않았죠. 약간 건방진? 그런 느낌이었어요]

    [동료? 역시 가까운 곳에 있군요?]

    [네. 그러다가 이런 저런 일 겪으면서 많이 의지했죠. 일적으로도 사적인 일로도. 치부도 많이 드러내고 서로 안 좋은 일도 경험했었죠]

    [그렇게 사귀게 된 건가요? 누구죠?]

    [하하······아직 사귀는 건 아니에요]

    [어째서? 진심으로 생각하고 있는 거 아닌가요?]

    [그건······]

    달콤함만을 쫓기에는 진호가 너무 겁쟁이였다.

    재는 것도 많고 표현에 두려움도 역력했다.

    하지만 꼭 그것만이 이유인 건 아니었다.

    [그 친구는 나와는 달라요. 어릴 때부터 이 바닥에서 성장하고 억척같이 올라왔어요. 끈질긴 잡초라고 하면 화를 내려나? 하여튼 그런 사람이에요. 근데······]

    [근데?]

    [나와 만나며 조금 물러졌어요. 자신의 일보다 내 일을 더 기뻐해요. 연기도 커리어도. 모든 일에 자신보다 날 위하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두려워요. 그 친구가 나 때문에 물러날까봐. 재능 있는 친구인데. 더 높이 올라 갈 친구인데. 내가 그 길을 막게 될까봐 걱정하게 되네요]

    달그락.

    뒤편에서 무언가 쏟아지는 소리가 들렸다.

    신경 쓰였지만 굳이 돌아보지는 않았다.

    [되게 바보 같아요]

    [알아요. 바보 같죠. 하지만 어쩌겠어요. 나는 그 친구가 소중해요. 나만을 위해서 자신을 포기하라고 말 할 수는 없어요.]

    [푸. 이해는 안 가지만 마음은 알 거 같네요. 그리고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엄청 부럽네요. 누군가에게 이렇게 애정을 받을 수 있다는 거. 진짜로 행복 할 거 같은데]

    엘빈이 의자에 몸을 푹 묻으며 중얼거렸다.

    더 이상 결혼을 주장하지는 않았다.

    진호의 말을 들으며 자신이 품었던 마음은 뭔가 어설펐음을 깨닫고 있었다.

    [그래도 진호가 좋은 건 같아요. 결혼 대신에 친구는 할 수 있는 거죠?]

    [그 정도라면 얼마든지]

    대신 친구부터.

    두 사람은 악수를 나누었다.

    그리고 모자를 깊이 눌러쓴 누군가가 가게를 황급히 빠져나갔다.

    #

    은서는 인적이 드문 공원에 홀로 앉았다.

    가쁜 숨을 간신히 정리하고 고개를 들었다.

    캄캄한 밤하늘이 두 눈에 콕 들어와 박혔다.

    ‘바보 같아.’

    눈물이 나올 거 같아서 눈가를 손으로 눌렀다.

    어릴 적부터 연예계에 들어와 이제는 다 말라버린 눈물이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던 모양이다.

    손끝이 축축했다.

    “······난 그냥 매달렸구나.”

    그렇게 엉켜버린 심장의 실타래가 어느 정도 풀렸을 때.

    은서는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조급함.

    그래, 조급함이었다.

    진호의 뒤를 쫓고 그의 곁에 붙으며 철없는 아이처럼 날뛴 자신의 행동들.

    모두 조급함에서 비롯되었던 것이다.

    ‘알고 있었던 거야.’

    처음, 연기를 함께 해 봤을 때 부터였을 거다.

    이 남자. 진호라는 사람은 평범하지 않다.

    그의 앞길은 비범함만이 자리 잡고 장대한 서사곡이 들려올 것이다.

    이를 알고 있었기에 초조 할 수밖에 없었다.

    아직 자신은 밑바닥에서 발버둥치는 병아리에 불과했으니까.

    “근데 진호 오빠는 날 제대로 보고 있었네.”

    초조함에 길에서 벗어났었다.

    그렇게 ‘연기, 연기’하던 것도 어느새 등져버린 채.

    자신보다 진호의 앞길을 보고 그의 커리어에 매달려 버린 것이다.

    자신 앞에 있는 언덕도 못 넘은 채, 저 먼 곳의 산을 향해 달려가는 멍청이처럼.

    “나보다 데뷔도 훨씬 느렸으면서.”

    걱정했단다.

    자신 때문에 재능을 펼치지 못할까봐.

    그것도 예쁘고 재주 좋은 여자를 앞에 두고.

    무려 결혼하자고 말하는 할리우드 스타인데.

    그 모든 걸 뒤로하고 자신부터 걱정했단 말이다.

    “아아아아! 바보 오빠야!”

    끓는 속을 토해내듯, 은서가 소리쳤다.

    그리고 벤치를 잡고 푹 주저앉았다.

    몸에서 힘이 빠져서 서 있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계속 그러고 있을 수도 없었다.

    ‘바보 오빠’가 메아리쳐서 돌아왔기 때문이다.

    대체 누가 바보냐고 묻는 것처럼.

    “이 씨.”

    힘주어 딱 서서는 눈가를 소매로 훔쳤다.

    그리고 꽉 영근 목소리로 소리쳤다.

    “두고 봐! 그딴 걱정 못하게 해 줄 테니까! 반드시 같은 눈높이에서 보게 해 줄 거라고! 그리고. 그리고 그 때가 오면······”

    입술을 콱 깨물었다.

    쏟아내는 건 진심이었다.

    “자빠뜨릴 테다!”

    은서 나이, 프로필 상 스물 넷.

    인생. 그리고 사랑의 목표가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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