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만 전생 배우-42화 (42/178)
  • Chapter19. 뿌리 깊은 나무(1)

    은서는 화보 촬영을 마치고 휴식 시간을 가졌다.

    찬 물에 속이 씻겨 나가니 좀 살 것 같았다.

    손부채를 팔랑거리며 땀을 식혔다.

    “은서, 언니. 많이 힘드시죠?”

    그 옆으로 같은 화보, 다른 모델이 다가왔다.

    이제 겨우 스물이 된 아이로 모델과 연기 생활을 병행하고 있었다.

    “나야 뭐 이골이 났지. 넌 괜찮아?”

    “처음이라 많이 긴장되긴 하는데, 참을 만 해요.”

    “그래, 그래. 처음이 제일 어려운 법이니까.”

    적당히 덕담을 건네주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어린 연예인이 등장하는 이 바닥에서 은서 정도면 고참이었다.

    “근데, 언니. 그 얘기 들었어요?”

    “응? 무슨 얘기?”

    “진호 배우님이요.”

    “아. 진호 오빠? 그러고 보니 이제 곧 돌아 올 때가 됐네. 오면 아주 난리가 나겠는데? 영화제 초대받은 걸로 모자라서 상까지 덜컥 받았으니까.”

    은서가 히죽히죽 웃었다.

    자기 일이 아닌데도 즐거웠다.

    “아뇨, 그거 말고. 인터넷에서 도는 이야기인데. 못 들어 봤어요?”

    “인터넷? 뭐, 또 이상한 찌라시냐?”

    “그렇긴 한데 이번엔 꽤 넓게 퍼지는 거 같아요. 듣기로는 가십지에서도 달라붙는다고 하던데.”

    “그래? 뭔데?”

    대충 흘려듣는 얘기와는 좀 다르다.

    은서가 관심을 보이며 고개를 기울였다.

    “진호 배우님이 정신병 이력이 있다나 봐요. 그래서 상담의를 두고 오랫동안 치료를 받았다던데.”

    “······찌라시에 그렇게 떴다고?”

    “네. 언니 혹시 알고 계셨어요?”

    은서는 입술을 잘근 씹었다.

    이건 답하기도 뭐하고 안 하기도 뭐한 질문이었다.

    “사람들 반응은 어떠냐? 믿어?”

    “반신반의하죠. 근데 워낙 많이 퍼져있는 상황이라서······한국 돌아오면 꽤 곤란하겠어요.”

    “하여튼 남 잘 되는 꼴은 못 본다니까. 지금 그게 중요하냐? 사람이 상을 받고 돌아오는 길인데.”

    “음. 하지만 이런 내용도 중요하죠. 아무리 연기를 잘해도 사람이 정신병력 있다고 하면 좀 그렇잖아요.”

    “뭐?”

    “언니는 안 그래요? 옆에 미친 사람이 있다고 하면 나 같으면 못 어울릴 거 같은데.”

    이년이 무슨 소리인가.

    은서가 후배를 바라보자 그녀는 샐쭉이 웃기만 했다.

    어딘가 비웃는 듯 한 느낌이기도 했다.

    “야. 너, 소속사가 어디라고 그랬지?”

    “저 TM이요.”

    “하, 시발. 그래서 그런 거냐? 회사에서 시키든? 가서 좀 물어보라고?”

    “언니. 갑자기 욕하고 그러면 무서워요. 언니도 설마 옆에 있는 사람 따라서 머리에 문제가 생기고 그런 건 아니죠?”

    “이······”

    성질 따라 발끈하려던 은서가 겨우 참았다.

    주변에 보는 사람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승질대로 해 봐야 좋을 건 전혀 없었다.

    ‘뺨 한 대만 칠까?’

    그것도 고개를 흔들었다.

    “그냥 전 언니가 걱정돼서 그래요. 회사도 다르고 그런데 괜히 어울리다가 피해보고 그러면 곤란하잖아요. 연예계에서 살아남으려면 사람 잘 사귀어야 하는 거잖아요.”

    “그래서 뭐? 나보고 거리라도 두라는 거냐? 고작 이딴 찌라시 때문에?”

    “에이. 찌라시면 언니가 답을 못했을까.”

    “아, 썅. 너 나랑 단둘이 좀 보자. 여자 대 여자로 앙칼지게 대화 좀 하자고.”

    “후배를 때리게요?”

    “와, 나. 진짜 요즘 것들은······”

    얼굴까지 들이미는 후배에 은서가 혀를 찼다.

    TM소속 연예인이 몇 명이나 될까.

    대충 ‘이런 일 저런 일’해주면 잘 봐준다고 하면 득달같이 달려들 사람만 한 트럭이다.

    눈앞의 여우같은 계집도 마찬가지.

    어차피 자기 성공을 위해서 불 바닥 걸어가는 처지일 따름이었다.

    “야. 내가 충고 하나 하자.”

    “언니가 저한테요?”

    “그래, 이 모자란 년아. 너, 지금 뭐 좋다고 웃지? 근데 그딴 식으로 얼마나 성공 할 거 같냐? 남 팔아서? 남 흉보고? 자기는 쥐뿔도 안 가꾸면서 남 깎아내리는 식으로 해 봐야 오래 못 가.”

    “제가 언니보다는 오래 갈 거 같은데요?”

    “내기 할래? 너랑 나 중에 더 누가 오래 가는지.”

    후배는 살짝 움찔했다.

    은서의 태도가 워낙 당당했기 때문이다.

    “소문? 찌라시? 내가 아는 진호 오빠라면 겨우 이런 거에 안 흔들려. 남들이 아무리 떠들어도 자기가 뭘 해야 하는지는 아는 사람이거든. 너 같은 모자란 년하고는 다르게.”

    “흥. 퍽이나 그러겠네요. 소문 하나에 훅 가는 게 우리 연예계 삶인데.”

    “그러니까 네가 모자라다는 거다. 지금 이 시기에 그 정도 소문? 흠집 잡기는 될 수 있지만 정말로 뿌리까지 뽑을 수 있을 거 같아? 영화제에서 상까지 받고 온 사람을?”

    후배가 우물쭈물 말을 잇지 못했다.

    듣고 보니 은서의 말에 설득력이 있었다.

    “이제야 좀 알겠다는 얼굴이네. 그래. 넌 그냥 대충 쓰는 말이었던 거야. 촬영 있으니까 가서 한 마디라도 붙여 보라고. 근데 너 혼자 생각했지? 이렇게 하면 회사에 도움이 될 거라고.”

    “······”

    “그딴 식으로 생각하니까 말이 그렇게 나오지. 나중에 봐. 이 일이 문제가 됐을 때 회사에서 너를 보호 해 줄지. 난 아니다에 한 표 건다.”

    물론, 지금 이 상황이 문제가 될 확률은 낮다.

    하지만 아는 것이 중요했다.

    후배의 예쁘장한 얼굴이 근심으로 물들었다.

    “똑바로 해, 이년아. 남 뜯어먹고 올라 갈 생각하지 말고. 찌라시 같은 거에 흔들리지도 말고. 회사의 개같은 수작에 놀아나지도 말고.”

    “······”

    “하긴. 그런 거 알아 처먹을 년이었으면 그딴 소리도 안 했겠지.”

    여전히 우물쭈물하는 후배를 두고 은서가 자리를 박찼다.

    애초에 신경 쓸 문제도 아니었다.

    “감독님. 저 통화 좀 하고 올게요.”

    지금은 그보다 진호가 걱정이었다.

    #

    진호 일행이 공항에 도착했다.

    대기하고 있던 취재진들이 몰려들었다.

    플래시가 폭죽마냥 터지고 비명인지 환호인지 모를 소리가 쏟아졌다.

    “여기 한 번만 봐 주세요!”

    “박 감독님! 홍 배우님! 이쪽입니다!!”

    “이쪽 보고 웃어주세요!!”

    진호 일행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채 움직였다.

    손을 흔들고 사진 각 나오게 포즈도 잡아 주었다.

    짧은 질문에도 답 해 주기도 했다.

    공식 인터뷰는 따로 있기 때문에 여기서 길게 시간을 소비 할 이유는 없었다.

    “잠깐만요, 홍 배우님! 홍 배우님!”

    그렇게 부드러운 흐름으로 지나 갈 때.

    누군가 무리에서 튀어나와 진호의 소매를 잡았다.

    워낙 인파가 많았던 터라 경호원도 제때 제지를 하지 못했다.

    “소문이 사실입니까!? 정말로 정신 병력이 있습니까!? 사실대로 말씀해 주세요!”

    그리고는 대뜸 하는 질문이 이것이었다.

    주변에서 복작거리던 다른 기자마저 황망하게 쳐다봤다.

    이런 자리에서 할 질문이 아니었다.

    찌라시에 대해서 알고 있다고 해도.

    “답 해 주세요! 리옹에서 이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알면서 이 상을 준 건가요!?”

    질문은 멈출 줄 몰랐다.

    플래시가 멈추고 사람들의 시선이 진호에게 쏠렸다.

    그는 소매를 움켜 쥔 기자의 손을 가볍게 떼어내고는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어디서 나왔습니까?”

    “시민매거진입니다. 답변 하실 건가요?”

    “지금은 상을 받고 돌아온 우리 모두에 대한 시간입니다. 제 신변잡기에 대해서 논할 때가 아닌 거 같군요.”

    “답을 회피하시는 겁니까!?”

    “적당한 시기에 적당한 장소라면 답 할 겁니다. 하지만 그 자리에 그쪽 분은 없을 거 같군요. 앞으로 시민매거진에 대한 모든 인터뷰는 거절하겠습니다.”

    가볍게 웃어 주는 것으로 마무리.

    진호는 뭐라 소리치는 기자를 뒤로 한 채 일행과 함께 걸음을 서둘렀다.

    남은 기자들조차 ‘잘했다.’며 속삭였다.

    #

    상황이 통제 된 것인지 추후 인터뷰에서는 같은 질문이 나오지 않았다.

    영화제에 대한 감상과 수상 소감.

    그리고 추후 있을 활동에 대한 질문이 주를 이루었다.

    진호를 포함한 일행들은 성심성의껏 인터뷰에 응했다.

    “이거 난리가 났네.”

    하지만 인터넷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귀국 일정을 모두 마치고 돌아왔을 때.

    진호는 최현석과 독대 자리를 마련해야 했다.

    쉬고 싶어도 쉬기에는 소문이 너무 크게 퍼져 있었다.

    “진호야. 어떻게 할래? 수수방관하기에는 퍼지는 속도가 보통이 아닌데.”

    “여론이 나빠요?”

    “완전히 나쁘다고는 보기 어려워. 하지만 그래도 알잖아. 우리나라 사람들이 정신병을 보는 시선이 어떤 건지.”

    영화제에서 상을 받고 온 젊은 배우.

    당연히 여론은 우호적이었다.

    하지만 정신병력에 대한 시선이 곱지 않은 것도 사실.

    그런 사람이 한국을 대표해서 상을 받았다는 것이 못마땅하다는 의견도 상당했다.

    애초에 그런 의미의 상이 아니었음에도.

    “게다가 소문이 소문을 낳는다고 하잖아. 악성 찌라시까지 같이 돌고 있어.”

    “저도 들었어요. 제가 맛탱이가 가서 누구를 팼다고 하던가? 전에 라스베가스 갔을 때 술에 마약까지 한 걸 봤다는 사람까지 있더라고요.”

    “그냥 두면 더한 것도 나올 거다.”

    하나를 믿으면 다른 것도 믿기 쉽다.

    한 번 퍼지기 시작한 소문은 뜬금없는 것들까지 끌고 들어와 독처럼 번졌다.

    폭행, 마약, 일진설, 조폭설 등.

    온갖 것들이 다 달라붙어서 무엇이 진실인지를 알 수 없게 만들었다.

    “그. 서훈 형이 말 한 프로그램 있죠?”

    “다큐멘터리. 어, 있지. 본래는 리옹에서 시작하려고 했는데, 네가 일단 스톱시켰잖아.”

    “그거로 가죠. 어중간하게 인터뷰 하느니, 날것으로 보여주는 편이 나을 거 같아요.”

    “날것으로? 어디부터?”

    “고향부터 가죠. 전학 다닌 학교 전부 다 털려면 한 20곳은 가야 할 텐데.”

    “괜찮은 거냐? 그러면 네 치부를 모든 사람이 다 알게 되는 건데.”

    “전 괜찮아요. 다만, 부모님께 죄송할 따름이죠.”

    이제 흔들리지 않을 자신이 있다.

    하지만 부모님은 어떨까?

    자식의 치부가 낱낱이 파헤쳐지는 걸 좋아 할 부모는 없다.

    “미안하다. 내가. 우리 회사가 더 힘이 있었다면 이런 찌라시 따위는 막아 주었을 텐데.”

    “괜찮아요. 힘은 같이 키우면 되죠. 그저 같은 목표로 같이 걸어 가주시면 돼요.”

    “자식이. 네가 나보다 더 낫다.”

    “이제 알았어요?”

    “흐흐.”

    최현석이 슥 웃더니 이내 진지한 얼굴로 돌아갔다.

    웃으며 얘기하지만 이런 찌라시 하나가 연예인 하나 박살내는 건 일도 아님을 안다.

    그렇기에 지금부터 할 일이 중요한 것이다.

    “일단 우리 편부터 골라보자.”

    줄타기 하는 이들은 넘치고 넘쳤다.

    #

    큰 돈 굴리는 사람은 이성적이다.

    이해타산이 빠르고 모든 걸 냉철하게 판단한다.

    아마 많은 사람이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의외로 대기업, 그것도 유명한 대기업조차 수뇌부의 감정으로 사업이 굴러가곤 한다.

    “그래? 잘 먹히는 거 같다고?”

    TM의 대표.

    송학수가 그 대표적인 인물.

    사업적인 수완은 좋은 편이나 상당히 감정적이다.

    소속 연예인을 구타한 일로 구설수에 오르고 공식 석상에서 욕설한 건으로 1면지를 도배 한 전적이 있다.

    향간에서는 조폭과 관계가 있지 않느냐.

    그런 이야기를 들을 만큼 행보가 과격한 인사다.

    “네, 대표님. 상 받았다고 우쭐하는 건 잠깐이고, 지금은 두문불출하고 있다고 합니다.”

    “흐흐. 그래야지. 감히 우리 애를 건드려? 이 바닥이 얼마나 무서운지 똑바로 알려 주라고.”

    “맡겨만 주시기를. 선호 건으로 받은 손해는 그대로 갚아 줄 겁니다.”

    시작은 사소했다.

    컴백으로 예능이 필요했던 박선호.

    그리고 적당한 자리에 경쟁구도로 놓여 있던 진호다.

    영화 홍보라고는 하지만 고작 드라마 하나 했을 뿐인 배우.

    그냥 곁다리로 조금 떠들다가 나가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주와 객이 바뀌지 않았는가.

    박선호는 그날 녹화분이 방영되고 난 뒤로 이미지에 상당한 타격을 받아야 했다.

    반명 진호는 이미지에 아주 날개를 달았다.

    “요즘 것들은 상도의가 없어. 우리가 누구냐? 이 바닥 아무것도 없을 때부터 아주 그냥 맨손으로 일군 사람들이잖아. 그럼 선배에 대한 예우로, 자기가 좀 잘났어도 길 줄도 알아야지. 아주 그냥 잘난 맛에 날뛸 줄만 알아.”

    “맞는 말씀입니다.”

    “드라마 하나 좀 떴다고 아주 보이는 게 없어. 배우라서 그런가? 하여튼 그쪽 인간들은 좀 오만해. 안 그러냐? 가수나 예능 쪽 우습게보고 말이야.”

    “저희도 배우를 키우고 있지만······대표님 말씀이 옳습니다.”

    송학수가 담배에 불을 붙이고 물었다.

    예전에는 단순했다.

    PD나 방송국 사람 술집 끌고 가서 거하게 한상 차리고 나면 프로그램에 애들 심는 건 일도 아니었다.

    그런데 요즘은 뭐가 그리도 복잡해 졌는지 살펴야 할 게 넘쳐났다.

    ‘마음 같아서는 콕 집어서 솎아내라고 하고 싶지만.’

    그건 곤란하다는 직원들 말에 참고 있을 뿐이다.

    “하여튼 일 마무리 잘 하고. 우리가 흘린 얘기라는 건 아무도 모르지?”

    “네. 뒷조사를 시킨 사람들도 몇 번에 거쳐서 돌려서 고용한 겁니다. 꼬투리 잡힐 일은 없을 겁니다.”

    “크으. 내가 이래서 박 팀장을 좋아한다니까. 일처리가 참 깔끔해. 이번 일 마무리 되면 나랑 같이 좋은 곳 한 번 가자고.”

    “기다하겠습니다, 대표님.”

    박 팀장이 허리 숙여 답했다.

    송학수는 좋다는 듯 그의 뒷머리를 툭툭 두드리며 사무실을 벗어났다.

    대표님 소리 들으러 회사 순방하러 가는 것이다.

    “······하.”

    그리고 얼마 안지나.

    송학수의 모습이 안 보이자 박팀장이 허리를 폈다.

    공손했던 목소리는 더 이상 없었다.

    “건달이었던 새끼가 누구한테 이래라 저래라야? 자기가 자기 실력으로 성공했는지 아나? 퉷.”

    돈 때문에 남아 있을 뿐이다.

    소리 나게 두어 번 침을 더 뱉고는 한 뭉텅이의 서류를 집어 들었다.

    ‘밟아주어야 할 사람’ 목록에 들어가 있는 진호의 자료였다.

    “쯧쯧. 어쩌다 저 건달새끼한테 찍혀서는.”

    서류 사이로 보이는 진호 사진을 보며 혀를 찼다.

    송학수에게 걸려서 잘 나가던 연예계 생명이 끊긴 이들이 한 트럭은 될 것이다.

    영화제에서 상을 받은 이 젊은 배우도 마찬가지.

    “날 원망하지 말라고.”

    사진을 서류 틈으로 밀어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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