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만 전생 배우-40화 (40/178)
  • Chapter18. 영화제(2)

    영화제 하루 전.

    참가자들은 미리 짐을 꾸려서 한국을 떴다.

    어떻게 소식을 알고 몰려들었는지 공항에는 취재진이 한 가득이었다.

    “좋은 결과 있기를 기원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초청 자체에 의의가 있는 것이니 앞으로 많은 응원 부탁드립니다.”

    박종찬의 짧고 간결한 인터뷰를 끝으로 모두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와. 퍼스트 클래스.”

    “시설 좋네.”

    영화제 측에서 전달한 퍼스트 클래스 좌석에 다들 환호했다.

    아래 단계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시설이 좋았다.

    “······좋네.”

    진호를 제외하고.

    그는 초호화 전용기도 타 본 몸 아니겠는가.

    퍼스트 클래스라고는 하지만 비교 될 수준이 아니었다.

    그냥 심드렁히 반응하고는 자리에 몸을 실었다.

    “우리 홍 배우님. 준비는 다 되셨나?”

    그 옆으로 박종찬 감독이 앉았다.

    “딱히 뭐 준비 할 게 있나요. 차분하려고 노력중이에요.”

    “흐흐. 그것도 필요하지. 가면 지금껏 받았던 스포트라이트의 몇 배나 되는 걸 받을 테니까.”

    “그 정도에요?”

    “관심도가 워낙 높은 영화제니까. 저명한 인사들도 많이 오고. 지나다니면서 하나씩 인사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야.”

    유명인이라고 하니 라스베가스 파티가 떠올랐다.

    당시에도 수많은 유명인들이 참가했었다.

    ‘그때는 어색함에 인사도 제대로 못했지만.’

    이번에는 당당하지 않은가.

    많은 사람들을 알아가고 싶었다.

    “아, 그리고. AMB에서 널 취재한다고 하던데.”

    “대표님한테 들었어요. 영화제 끝나고 짧게 주연 배우들 인터뷰 한다고 해요. 10분? 그냥 짤막하게 대화만 나누는 거라 크게 준비 할 건 없다고 하던데.”

    “그렇긴 한데······가능하면 영어나 불어를 써서 인터뷰 하면 어떨까 싶어.”

    “영어나 불어로요?”

    “나중에 보면 알겠지만 영화제로 부각되는 시간은 매우 짧아. 특히 아시아권 배우는 더더욱 그렇지. 만약 네게 더 큰 비전이 있다면 여기에서 인상을 주는 편이 낫지.”

    박종찬은 넌지시 암시했다.

    수많은 배우를 만나보고 작업해본 그이기에 알 수 있는 부분이 있었다.

    배우가 연기로 세계의 장벽을 넘어 설 수 있는 가능성.

    아직 어린 이 배우에게 그런 가능성이 보였다.

    “사실 준비해둔 게 있긴 해요.”

    “오? 그래?”

    “아직 모자란 거 같아서 남들 앞에서는 해 본 적이 없긴 한데. 한 번 들어보실래요?”

    “좋지. 역시 준비하는 배우네.”

    진호가 뒷머리를 긁적거리며 준비해둔 대사를 떠올렸다.

    그의 장점은 누가 뭐라 해도 전생 체험.

    대금을 불고 조운의 창술을 사용한 것도 그 능력 덕분이다.

    그럼 언어라고 다를까.

    왕호룽과 함께 세계 여행을 하면서 ‘언어’의 필요성을 이미 깨우친 바 있었다.

    “······we deserve to be in the Cannon of any in the center of any narrative······”

    연기에 대한 소신.

    어떤 이야기든지 중심에 있을 수 있는 자격이 있다는 내용이었다.

    별 볼일 없던 인생에서 영화 주연까지.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이야기였다.

    “워. 언제부터 준비를 한 거야?”

    박종찬이 깜짝 놀라서 물었다.

    “전부터 조금씩 준비를 하긴 했어요. 발음 괜찮아요? 어디 틀린 문법이라도 있었나요?”

    “아니. 내가 듣기로는 완벽했어. 거의 네이티븐데? 이걸 준비했다고?”

    “짧은 인터뷰 몇 개랑 혹시 몰라서 수상 소감까지요. 하하. 너무 나갔나요?”

    “이야. 난 우리 홍 배우가 너무 느긋한 거 같아서 걱정했는데, 이제 보니까 전부 기우야. 나보다 더 열심히 준비를 하고 있었잖아?”

    박종찬이 듣기에 전혀 어색함이 없었다.

    발음은 깔끔하고 목소리도 낮고 진중해서 울림이 좋았다.

    “스테파니. 스테파니. 여기 좀 도와주겠어요?”

    아예 통역으로 따라온 통역사를 불러왔다.

    한국 거주 8년차의 미국인으로 영화 관련 통역을 전문으로 하는 여자였다.

    그녀는 진호 옆으로 자리를 옮겨서 예의 인터뷰를 처음부터 끝까지 들었다.

    “진호 씨. 미국에서 거주 한 적 있죠?”

    “아뇨. 저 한국 토박인데요?”

    “거짓말. 이 정도 발음은 완전 네이티브여야 가능해요. 특히, 그 악센트. 텍사스 쪽 느낌이 나던데. 거기서 몇 년이라도 거주 한 적 없어요?”

    “하하. 진짜에요. 전 한국에서 나고 자랐어요.”

    물론, 텍사스에서 평생을 사신 분도 있다.

    한 자루 권총과 멋들어진 서부 모자로 황야를 질주하신 분.

    “그럼, 혹시 불어도 좀 봐 주실 수 있나요?”

    “불어도 해요!?”

    한 분 더 있다.

    파리에서 평생을 나고 자라신 분.

    진호가 고개를 끄덕인 뒤 파리 뒤안길에서 들을 법 한 이야기를 토해냈다.

    박종찬은 놀라고 스테파니는 경악했다.

    불어를 복수 전공으로 하는 그녀의 입장에서 진호의 발음은 완벽했다.

    그녀보다 더욱.

    #

    영화제 당일.

    박종찬이 예고했던 것처럼 엄청난 인파가 몰렸다.

    유명 인사를 구경하기 위한 인파에 취재진이 한 무더기였다.

    카메라 플래시가 연달아 터지고 비명인지 신음인지 모를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왔다.

    제대로 정신을 차리기 어려울 정도였다.

    “자자. 제대로 카메라 봐야지. 포즈도 잡고.”

    그나마 경험이 있는 박종찬이 배우들을 다독였다.

    포토라인에서 자세를 잡고 카메라 앞에서 손을 흔들었다.

    [왜 저렇게 오래 서 있는 거야?]

    [좀 비키라고. 고작 너희를 찍으려고 여기까지 온 게 아니야]

    [하여튼, 멍청한 아시아인 같으니. 예술이라고는 쥐뿔도 모르는 것들이 숫자만 믿고 설치기는]

    늘어진 취재진 중 일부 목소리였다.

    다른 해외 유명인사 차례가 진호 일행에게 막히자 볼멘소리를 터뜨린 것이다.

    저들끼리는 안 들릴 거라 생각한지 모르겠으나 진호 귀에는 똑똑히 들렸다.

    ‘이런 영화제에도 저런 사람들이 있구나······’

    흥분으로 꽉 차 있던 머리가 식었다.

    “자. 이쪽 보고 마무리 할게요.”

    누군가의 목소리에 진호가 살짝 앞으로 나갔다.

    그리고 전력을 다해서 자신의 캐릭터를 연기했다.

    쏟아지는 플래시도 피하지 않은 채 고개를 든 채 맞대응했다.

    짧은 감탄이 여러 곳에서 들려왔다.

    “뭐하는 거야?”

    “선전포고.”

    옆구리 당기는 동료 배우에게 낮게 속삭였다.

    영화제는 이제 시작이었다.

    #

    격식 있는 자리.

    격식 있는 영화들이 하나 둘 소개되었다.

    적어도 예술성 하나로 이 자리까지 올라온 영화들이었다.

    하나하나, 의미가 깊고 뚜렷했다.

    “굉장하네요. 상실의 아픔을 저런 식으로 표현하다니.”

    “놀라운 연기야. 게다가 저 연출을 보라고. 너무 담백해서 소름이 끼칠 정도 아닌가? 거장이 괜히 거장이 아니라고.”

    “배경이 무채색으로 그려진 건 일종의 대비 효과겠죠? 배우의 표정이 뚜렷하게 드러나네요.”

    “음. 의도한 거겠지. 저 깊은 주름을 보라고. 삶의 고뇌가 전부 드러나잖아.”

    진호와 박종찬은 나란히 앉아 영화에 감탄했다.

    어느 하나 특별하지 않은 작품이 없었다.

    감독의 능력도, 배우의 연기력도.

    배울 게 많았다.

    [오, 디올. 옆에 저 인간들을 보라고. 자기들이 뭐라도 된 줄 알고 떠들고 있어]

    [쉐잔. 무시해. 영화제에 저런 무지렁이들이 오는 것이 하루 이틀이 아니잖아. 아시아의 인구를 무시 할 수 없는 건 영화제의 탓이 아니라고]

    [대체 언제부터? 이제 영화제의 권위는 없는 거야? 보라고. 저들은 우리의 언어조차 이해하지 못하잖아]

    감탄과 경이 사이로 또 다시 노이즈가 섞여 들었다.

    바로 옆자리에 앉은 프랑스 남녀였다.

    이들 역시 영화제에 출품작을 내 놓은 영화인들이었다.

    조금 전만 해도 짧게 영어로 인사까지 했었다.

    ‘프랑스가 인종차별이 심하다고 하더니.’

    자기들 땅에 초대받은 이국인들에게까지 이럴 줄은 몰랐다.

    “우리 영화다.”

    “······”

    무어라 한 마디 하려던 찰나.

    진호의 출품작이 소개되었다.

    경쟁 부분 작품들 중 가장 마지막이었으며 어떤 의미로는 높은 주목을 받고 있었다.

    ‘이건 또 기분이 새롭네.’

    커다란 화면.

    수많은 영화계 인물들 앞에서 자신의 연기가 날것으로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민망하기도 하고 흥분되기도 했다.

    과연 이들에게도 자신의 연기가 먹히는 걸까?

    그저 혼자만의 자아도취 아니었을까?

    별별 생각이 다 스쳐갔다.

    “브라보.”

    “굿. 굿. 좋은 영화네요. 역시.”

    “좋은 미장센입니다. 연기도 탁월하네요.”

    다행히도 그건 기우였다.

    사방에서 박수가 쏟아지고 칭찬의 목소리도 이곳저곳에서 들렸다.

    쓴 말을 쏟아내던 프랑스 연인도 조금 다른 눈으로 진호 쪽을 바라봤다.

    [생각보다 영화는 괜찮은데?]

    [흥. 그럭저럭 볼 만 한 수준이라고]

    그래도 인정 못하고 뻗대기는 했지만.

    “수상 가능성이 있을까요?”

    진호는 그쪽에 관심을 끄고 박종찬에게 물었다.

    현지 반응 자체는 진호의 영화가 가장 좋았다.

    “모르지. 애초에 이곳 반응으로 수상이 결정되는 게 아니라서. 어느 정도 지표는 될 수 있지만.”

    “그렇군요. 심사는 따로?”

    “완전 별개의 영역이야. 평이 좋다고 꼭 수상하는 건 아니더라고.”

    평가와 상이 갈린다는 게 이상하지만 실제로 일어난다.

    상에는 기준이 있고 심사위원들은 이를 중점으로 평가한다.

    그렇기에 현지 평가로는 속단 할 수 없었다.

    “마음 비우고 있자. 수상 못 한다고 나쁜 건 아니니까.”

    “네. 여기까지 초대된 것만 해도 충분하죠.”

    충분할까.

    진호는 자신의 말에 답하지 못했다.

    상영 마지막까지 그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

    라드카펫, 상영. 그리고 인터뷰.

    진호 일행은 충실하게 일정을 따라갔다.

    상영 반응이 워낙 좋았기에 인터뷰 분위기도 상당히 좋은 편이었다.

    게다가 진호가 영어로 모든 인터뷰를 진행했기 때문에 현지에서도 상당히 놀라워했다.

    “평론가 평은 벌써 올라왔네.”

    그렇게 일정 소화하고 숙소로 돌아오니 이미 평가가 인터넷에 올라와 있었다.

    심사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지만 대중에게는 충분히 영향을 줄 수 있는 내용이었다.

    “제일 높은 평점이 4.5점. 제일 낮은 건······2점이네요.”

    “2점? 2점은 대체 누구냐?”

    “이명준이라는 사람이요. 유명한가요?”

    “이명준? 쯧쯧. 하여튼 그 인간 여전하네. 신경 쓰지 마. 돈 받고 평론 써주는 걸로 유명한 작자니까.”

    해외 평론도 쭉 살폈지만 2점이 가장 낮았다.

    웃긴 건 국내보다 해외 평론 평점이 더 높다는 점이었다.

    특히, 연기에 대한 거라면 해외 쪽은 호평일색이었다.

    “이 바닥도 깔끔하지는 않나 보네요.”

    “당연하지. 평론가들 중에서 자격 없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데. 지 꼴리는 대로 평점 먹이는 거면 그러려니 하는데, 시류에 휩쓸리고 돈 받아 써 갈기고. 하여튼 별 놈들 다 있어.”

    “그래서 2점이라. 어지간하네요.”

    굳이 사주 할 곳이라면 한 곳이 떠오른다.

    영화제에 초빙까지 받아서 가니까 더 베알이 꼴렸는지도 모르겠다.

    이런 치졸한 수까지 쓰는 걸 보면.

    띠리릭—

    “응?”

    호텔 내선 전화기.

    ‘연락 할 사람이 있었나?’

    진호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수화기를 들었다.

    “손님이요? 아, 네. 제가 내려가 볼게요.”

    프론트에서 걸려온 전화였다.

    “손님? 누가 찾아온 거냐?”

    “네. 벨······로스? 맞나? 그런 분이 오셨다고 하는데. 혹시 알고 계세요?”

    “벨로스? 뤼앙 벨로스?”

    “아. 맞아요. 그런 이름이었어요.”

    순간, 박종찬이 침대를 탁 치며 일어났다.

    눈은 동전 만하게 뜨여 있었다.

    “거장 벨로스를 모르는 거냐!?”

    “영화감독이에요?”

    “그럼! 80년대 프랑스 영화를 주도했던 최고의 감독 아니냐. 지금도 거장 중의 거장으로 활동 중이신데. 어휴, 넌 상식 좀 키워야겠다.”

    80년대까지 내려가면 진호의 상식이 얄팍해진다.

    그렇구나, 라고 고개를 끄덕이다 다시 의문이 생겼다.

    그런 거장이 자신을 왜 찾아왔단 말인가.

    “일단 내려가 보자. 기다리게 하면 안 되지.”

    하지만 그런 생각은 할 시간도 없었다.

    박종찬은 이미 문 밖으로 뛰고 있었다.

    #

    백발의 노신사.

    딱 그런 느낌이었다.

    진호와 박종찬이 로비로 내려오자 그는 두 팔을 벌리며 크게 환영해 주었다.

    [오. 갑자기 찾아와서 미안합니다. 하지만 내일까지 기다릴 수가 없어서요]

    그는 영어를 사용해서 대화를 시도했다.

    그나마 영어에 강한 진호가 통역을 겸했다.

    [만나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벨로스 감독님]

    [하하. 다 늙은 감독에게 무슨 영예가 있을까요. 훌륭한 감독과 신예 배우를 만나는 것이 되레 더 영광이지요]

    그는 겸손하고 예의가 발랐다.

    거장에 나이도 많은 사람임에도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굉장히 겸허했다.

    짧게 이야기를 나눈 세 사람은 근처 펍으로 자리를 옮겼다.

    와인 한 잔에 이야기의 깊이가 깊어졌다.

    [확실히 영화 수준이 높아졌습니다. 더 이상 예술과 대중성을 경계 짓지 않아도 되는 시간이 올 겁니다. 중요한 것은 언제나 역량이지요]

    [다양한 기법의 상승 이전에 사람의 역량을 따지는 거군요]

    [네. 틀이 발전해도 다루는 건 결국 인간이지요. 그런 면에서 여기 진호 씨는 매우 뛰어난 인재입니다]

    벨로스는 진호를 직접적으로 거론했다.

    통역하던 진호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그래서 말인데. 영화제가 끝나고 시상 결과가 어떻든 간에 하루 정도 제게 시간을 내 주실 수 있습니까?]

    [영화제가 모두 끝나고 말인가요?]

    [네. 꼭 진호 씨와 나누고 싶은 얘기가 있습니다]

    벨로스의 얼굴은 진지했다.

    다른 이유가 있는 걸까, 진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 시나리오를 봐 주셨으면 합니다.”

    그건 거장의 초대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