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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0만 전생 배우-38화 (38/178)
  • Chapter17. 조운의 창, 악공의 대금, 조조의 눈(2)

    진호는 모 무협 영화 속 배경음악을 가져왔다.

    대나무 숲, 호적수와 맞닥뜨린 한 무사의 비장함이 담긴 음악이었다.

    ‘더러운 짓만 안했어도 그냥 대금만 부는 건데.’

    대금을 빙빙 돌리고 입에 물었다.

    잔잔한 배경음악 속으로 진호가 천천히 녹아 들어갔다.

    훙······훙훙.

    묵직한 바람 소리가 음악 속에서 어울렸다.

    어딘가 비장한.

    무게감 있는 연주였다.

    앞선 박선호의 무대가 워낙 화려했기 때문에 그 대비가 더욱 뚜렷했다.

    “흥. 꼴 같지 않은 짓을.”

    박선호는 팔짱을 낀 채 코웃음 쳤다.

    대금 연주라면 이미 본 적 있다.

    그럴 듯 한 재주이기는 하지만 그래봐야 악기 하나.

    신곡 들고 나와서 춤춘 자신에게 비할 바는 아니었다.

    “어?”

    하지만 그건 조금 이른 판단이었다.

    대금을 문 채 연주만 이어가던 진호가 갑자기 발을 떼기 시작했다.

    바람 소리를 타고 내딛는 걸음.

    사뿐히 바닥에 닿고 대금을 앞으로 뻗었다.

    검? 아니, 그건 그보다 긴 무기였다.

    외발로 서서 대금을 뻗고, 휘두르고, 그었다.

    그 궤적이 놀랍도록 선명하게 눈에 남았다.

    마치 천을 들고 춤추는 무용수 같았다.

    파앙—!

    그렇다고 힘이 없는가?

    전혀 아니었다.

    휘적휘적 선을 긋다, 한 순간 내지른 일격에 뚜렷한 파공음이 들렸다.

    흘러나오는 배경음악과 맞물려 비장함을 만들었다.

    무협 영화 속, 수십의 적에 휩싸인 무사의 비장함이 꼭 이럴 터였다.

    “와. 저기서 연주를 또 한다고?”

    “저게 안 흔들려?”

    “미쳤다. 미쳤어. 저 정도면 기예단 아니야?”

    진호는 한 술 더 떴다.

    거친 움직임에 대금 연주를 더해버린 것이다.

    거의 날듯이 뛰면서 연주를 이어갔다.

    그런데도 놀라울 정도로 흔들림이 없었다.

    소리는 여전히 강하고 비장하며, 동작 또한 정교했다.

    악선(樂仙)이 이러할까.

    너나 할 것 없이 입을 떡 벌리고 지켜봤다.

    “우와아!!”

    “와!”

    그리고 노래의 절정부.

    진호가 몸을 회전하며 대금을 높이 던졌을 때.

    그 반응은 최고조에 이르렀다.

    모두의 시선이 허공에 뜬 대금으로 쭉 따라갔다.

    “······시팔.”

    박선호의 입에서 저절로 흘러나오는 욕설.

    수 미터 가량 떠올랐던 대금은 뒷짐 진 진호의 손으로 쏙 빨려 들어갔다.

    배경 음악이 딱 끝나는 순간에 맞춰서.

    이건 완전 영화였다.

    웰 메이드 영화.

    #

    점심 게임은 진호 쪽이 승리했다.

    어지간해서는 박선호 쪽으로 손을 들어주고 싶은 PD였지만 분위기가 아니었다.

    스텝들은 넋이 나갔고 출연자들은 난리였다.

    심지어 박선호 쪽 팀들마저 달려와서 어화둥둥 하는데 어떻게 결과를 바꾸겠는가.

    한 상 가득 깔린 한정식은 진호 쪽 몫이 되었다.

    “······날 엿 먹여?”

    결과에 가장 분개한 건 역시 박선호였다.

    이번 녹화는 발판이었어야 했다.

    컴백을 앞두고 인지도 조금 쌓은 진호를 누르고 올라서는 방송.

    회사에서도 그걸 원했고 박선호도 찬성했다.

    배우의 인기라는 건 배역을 벗어나면 좀처럼 아이돌을 따라오기 힘든 법이니까.

    근데 이 꼴은 뭘까.

    왜 배우 나부랭이가 달리기는 그렇게 잘 달리고 춤은 또 무슨 무용수마냥 춘단 말인가.

    대금까지 불면서!

    컴백 앞두고 이 방송이 나가면 되레 독이 될 판이었다.

    “그렇게는 안 되지.”

    아니, 그 전에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박선호가 누구인가.

    대한민국 3대 기획사 Tm의 대표 아이돌이다.

    한 번 떴다하면 완판에 매진인 흥행수표.

    고작 드라마 하나 반짝 성공한 배우 따위와는 비교가 불가능한 존재다.

    “유석이 형. 유석이형, 들어와 봐.”

    잠깐 고민하던 그가 매니저를 불렀다.

    “형. 점심 먹고 들어가는 게임에서 나랑 진호 저 인간하고 일대 일로 붙는 거 뭐 있어?”

    “오후 게임? 대부분이 단체전이긴 한데······아. 중간에 밧줄 오르기 있다.”

    “밧줄? 높아?”

    “끝까지 가면 꽤 높지. 왜?”

    “아니야. 나가봐.”

    멀뚱멀뚱 보는 매니저를 내보내고 박선호가 입술을 곱씹었다.

    밧줄을 잡고 올라가는 게임.

    두 사람은 바짝 붙어서 경쟁을 하게 된다.

    카메라가 타이트하게 붙어도 제대로 알아보기 힘든 구도.

    ‘밧줄을 타고 오르다가 사고를 당하면······’

    과연 그때도 좋은 재주가 빛을 발할 수 있을까?

    작은 회사에 먼지 같은 팬덤으로.

    “그냥 적당히 했어야지, 아저씨.”

    박 선호는 자신의 인기를 무기로 사용 할 줄 아는 인간이었다.

    연습생을 거쳐서 스타까지.

    그런 방식으로 성공을 해 왔으니까.

    어찌 보면 흔한.

    연예인이었다.

    #

    녹화는 막바지로 달려갔다.

    게임을 통해서 얻은 힌트로 퀴즈를 풀고 그 단서를 모아서 최종 해답을 얻는 방식이었다.

    전체적인 분위기는 진호 쪽 팀이 우세.

    얻은 힌트 숫자도 많을 뿐더러 전체적으로 화기애애했다.

    어딘가 무거워 보이는 박선호 쪽과는 다르게.

    “하하. 그렇게 연기를 시작했다고?”

    “진짜라니까요. 회사 때려치우고 할 일 없이 놀다가. 덜컥. 그렇게 말이죠.”

    “크으. 역시 사람마다 길이 따로 있다니까. 계속 회사 다녔으면 배우 하나 초야에 묻힐 뻔 했잖아.”

    진호는 팀원들과도 꽤 친해졌다.

    특히 메인 MC인 김의남과는 그새 형 아우 하는 사이가 됐다.

    녹화 중간 중간 이동하면서도 계속해서 대화를 나누었다.

    “그래서 말인데 진호 동생. 앞으로는 어떻게 할 셈이야? 홍보용으로 예능 하나 하고 끝?”

    “그렇지 않을까요? 영화 개봉하고 나면 스케줄 소화도 해야 하고, 차기작 준비도 해야 하고.”

    “차기작을 벌써? 그러지 말고 쉬면서 나랑 예능 좀 더 하면 어때? 내가 볼 때 진호 동생은 예능 쪽으로도 괜찮은 거 같아.”

    “제가요? 에이. 그냥 단발성으로야 재미있지 계속하면 별로에요.”

    “어허. 내가 이래 봐도 이 바닥 25년이야. 척 보면 안다고. 전에 석재 형이 예능 유망주라고 그렇게 칭찬을 하더라니. 오늘 보고 나도 딱 감이 왔어.”

    김의남은 말 그대로 방송가 베테랑이었다.

    흔히 말 하는 방송가 라인 중 하나.

    예능 쪽에서는 그에게 줄 못 대어 안달인 사람이 하나 둘이 아니었다.

    “와. 형님, 진심이에요?”

    “이 바닥에서 오랫동안 구르다 보면 대충 사람이 보여. 당장은 화려하지 않더라도 뿌리가 깊은 사람이 있지. 네가 딱 그런 경우라고.”

    “어, 이거 민망 할 정도의 칭찬인데. 여기서 절하면 되는 건가요?”

    “흐흐. 그 순발력도 마음에 들고 말이지. 어때 생각 있어?”

    “어후. 예능이라······”

    “아, 그렇다고 너무 부담가지지 말고. 그냥 그런 길도 있다 하고, 염두에만 둬. 배우라고 꼭 신비주의에 싸여 있을 필요는 없잖아.”

    김의남은 어깨를 툭툭 두드리는 것으로 말을 맺었다.

    남에게 강제하지 않고 부드럽게 포용하는 것이 그의 리더쉽이었다.

    “진지하게 생각해 볼게요.”

    진호도 진심을 담아 답했다.

    #

    “······역시 해야겠어.”

    박선호는 입술을 잘근 씹었다.

    살갗이 뜯어져서 피 맛이 느껴졌다.

    “선호야, 녹화 준비하래.”

    “응. 지금 나갈 거야.”

    방송가는 인맥이 절반 이상이다.

    컴백 홍보가 주 목적인 것은 맞지만 예능에 출연하면서 인맥을 쌓는 것도 역시 목표 중 하나였다.

    특히 김의남과 같은 방송가 핵심 인물이라면 더더욱.

    팀이 갈려서 아쉬웠지만 틈 날 때마다 친해지려고 노력을 했다.

    ‘근데 저 새끼는······’

    하는 것도 없으면서 같은 팀이라고 벌써 형, 동생이란다.

    게다가 진지한 제안까지.

    아이돌 스케줄에 예능 고정은 버거운 일이지만 그래도 그런 말 듣는 게 어디인가.

    질투심에 속이 베베 꼬일 지경이었다.

    “자. 선호 씨까지 나왔으면 다 모였네요. 마지막 힌트를 걸고 게임을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깊이 심호흡 하며 건너 편 진호를 노려봤다.

    때마침 그도 자신을 보고 있었다.

    ‘웃을 수 있을 때 웃어 둬라.’

    이를 꽉 다물었다.

    “자자. 다들 준비하시고······”

    게임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누가 이기는지도 제대로 못 봤다.

    기다리고 있는 건 마지막 경합.

    “다음 순서는 진호 대 선호!”

    목소리를 신호탄 삼아서 뛰어나갔다.

    경사 진 발판을 밟아 뛰며 굵은 밧줄을 움켜쥐었다.

    바닥부터 3미터 이상.

    바닥에 매트릭스가 깔려 있다고 해도 꽤 부담 가는 높이였다.

    하지만 그렇기에 적당했다.

    “이번에도 어림도 없을 겁니다.”

    “현직 아이돌 씨. 살살 합시다, 살살.”

    “승부에 적당히가 어디 있습니까!”

    방송용 멘트를 던지며 슬쩍 몸을 부딪쳤다.

    움찔, 하고 바라보는 진호의 얼굴이 시야에 꽉 들어찼다.

    ‘그래, 열 받아라.’

    입술을 혀로 핥으며 어깨로 밀었다.

    밧줄에 매달린 채 진호가 휘청거렸다.

    이 정도까지는 경합.

    “깝치지 말라고, 이 아저씨야.”

    하지만 이 이상은 아니다.

    울컥하고 달려드는 진호를 보며 박선호는 미소 지었다.

    완벽하게 그리던 상황이었다.

    퍽, 하고 부딪치는 소리가 컸다.

    #

    일부 사료에서 말하기를 조조는 의심병이 있어, 무언가를 진실 되게 대하지를 못한다고 했다.

    의심하고 또 의심하는 태도.

    신중함의 한계를 넘어서 병적인 집착에 도달했다고도 평했다.

    하지만 이것은 말 그대로 일부의 평이었을 뿐이다.

    조조는 누군가를 지독하게 의심하기도 하나, 한 번 믿음을 준 인물은 끝가지 믿고 쓰기도 했다.

    일을 함에 있어서도 신중함을 버리고 과감하게 나아가는 경우도 많았다.

    이는 한 가지 특별한 점에서 비롯된 결과였다.

    ‘조조의 통찰력.’

    그는 사람과 사물을 보고 평함에 있어서 특별한 능력이 있었다.

    그렇기에 숱한 인재를 얻고 올바른 곳에 썼던 것이다.

    “뻔히 보인다 이거지.”

    그 눈에 어찌 박 선호같은 애송이의 협작질이 보이지 않겠는가.

    너무 얄팍해서 코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일부러 도발해서 사고를 위장하면 팬덤이 적은 자신이 모든 덤탱이를 쓸 것 같은가?

    그렇게 하면 이슈도 끌고 동정 여론도 받을 것 같은가?

    얇디얇아서 창호지 같은 수작이었다.

    “뭐, 뭐하는 거야!?”

    진호는 쓰러지듯 몸을 아래로 뉘이며 박 선호를 아래에서 받쳤다.

    이건 박 선호가 이미 반격에 대비해 몸을 뒤로 빼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말하자면 혼자 설치다 떨어지는 박 선호를 진호가 구해주는 형색.

    박 선호가 그리던 구도와는 정 반대였다.

    “놔!”

    “싫다, 이 머저리야.”

    진호는 그대로 박 선호를 콱 잡은 채 바닥으로 떨어졌다.

    등부터 충격이 강하게 올라왔다.

    깜짝 놀라 소리치는 스텝들의 비명과 출연자들의 고함이 귀를 쨍쨍 울렸다.

    PD는 아예 울먹이고 있었다.

    “이 새끼!! 이거 놓으라고!!”

    그리고 팍, 소리 나게 팔을 뿌리치는 박 선호.

    충격 한 점 받지 않은 몸으로 벌떡 일어나 노려봤다.

    ‘그러니까 네가 머저리라고.’

    그 모습에 진호는 그저 웃었다.

    “아, 아니 난 그런 뜻이 아니라······”

    1을 계획하고 2을 실행하니 100의 결과가 오더라.

    원소를 토벌한 조조의 마음이 이러했을까.

    앓는 소리를 내며 눈을 감았다.

    #

    녹화는 어영부영 마무리 되었다.

    마지막 장면을 두고 편집을 해야 하느니, 말아야 하느니 많은 말이 오갔다.

    진호는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써도 그만, 안 써도 그만이었기 때문이다.

    “쯧쯧. 하여튼 어린 친구가 벌써부터 저래서야.”

    “훅 뜨니까 자기 잘난 맛에 사는 거지.”

    “그래도 진호 씨 덕분에 잘난 콧대 좀 눌러 줘서 좋네.”

    더 이상 건드릴 필요가 없었다.

    아무리 자기 맛에 사는 연예인이라고 해도 스텝들 시선을 완전히 무시 하는 건 불가능했다.

    떨어지던 자신을 구해 준 진호 아닌가.

    그 앞에서 소리까지 치고.

    이 마당에 어떤 가면을 써도 변명이 불가능했다.

    그냥 쥐죽은 듯 녹화를 마무리 하는 수밖에 없었다.

    “진호 동생. 마지막에 일부러 그랬지?”

    “마지막이요?”

    “그거, 밧줄 타고 오를 때. 일부러 먼저 넘어진 거 아니야?”

    “에이. 그거 올라가서 보면 꽤 높아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걸 어떻게 먼저 뜁니까. 그냥 사고에요, 사고.”

    “흐음. 난 아닌 거 같은데.”

    김의남의 의심스러운 시선에도 진호는 그냥 웃었다.

    어차피 진의는 중요 한 것이 아니었다.

    어떻게 보여지는가.

    연예인들은 그 점이 생명이었다.

    “뭐, 어쨌든 점수는 톡톡히 땄어. 오늘의 미담 하나 추가라고.”

    “미담 적립하면 뭐라도 주나요?”

    “주고말고. 롱런 하는 사람은 다들 쿠폰 북 하나 쯤 채워두는 거야. 명심해.”

    툭툭.

    김의남이 가슴을 두드리며 조언했다.

    반짝 스타는 몰라도 방송가에서 롱런하는 사람은 저마다의 이유가 있었다.

    그는 평소 행실에서 그 이유를 찾았다.

    “그래서 말인데. 역시 나랑 예능 하나만 더 하자.”

    “아니, 형님. 고민 할 시간 주신다면서요.”

    “아까워서 그렇지. 그냥 두면 훨훨 날아 갈 거 같아서.”

    “제가 무슨 샙니까. 날아가게.”

    “새지. 큰 새. 대붕이라고 하든가? 내 감이 말하는데 머지않아 진호 동생은 날아 갈 거야.”

    “덕담 스케일도 크시네요.”

    진호가 딱히 부정은 하지 않은 채 웃었다.

    앞일은 앞 일.

    “오지 말라고! 그냥 회사로 가!”

    지금은 그저 설치던 피라미 하나 교육해 준 것으로 만족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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