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16. 다시 일터로(2)
예능은 그때마다 트렌드가 다르다.
한때는 가족예능이 주를 이루다가, 언제는 또 동물예능이 주를 이루었다.
지금은 또 유행이 바뀌어서 활동적인 예능이 인기를 구가하고 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퍼즐 서바이벌’.
출연자들과 게스트들이 대결을 하면서 퍼즐을 하나씩 해결해 나가는 방식의 예능이다.
게임 난이도가 상당히 높아서 이를 해결하는 카타르시스가 굉장하다.
“달리기, 구름다리 매달리기, 수조 안에서 키 찾기······이걸 전부 한다고요?”
“대본이 주어지긴 하는데 게임을 다 알려주진 않아. 대충 몇 게 잡아서 연습하고 가는 게 좋을 거야.”
“이거 꽤 빡세네요.”
“요즘은 이런 게 유행이라잖아. 몸 다치지 않게 조심히만 다녀와라.”
최현석은 많은 걸 요구하지 않았다.
어차피 홍보용 예능이니 과하게 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진호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운동이라.’
해외를 대비해서 영어를 준비한다.
그렇다면 액션 영화를 위해서는 몸도 준비 되어야 하지 않을까?
감정 연기에 장점이 있는 건 맞지만 그렇다고 한 가지만 고집 할 생각은 없었다.
다양하게, 다른 모습으로 자신을 보여주고 싶었다.
“촬영이 며칠이죠?”
“어. 일주일 뒤에. 왜?”
“짧게라도 준비를 해 볼까 해서요.”
고작 일주일에 뭐가 될까도 싶지만 안 하는 것보다야 낫지 않겠는가.
‘운동복이 있나?’
진호가 방구석 작심하고 샀었던 헬스복을 떠올려 봤다.
#
“······뛸 만 한데?”
진호는 그 날 바로 움직였다.
운동복 챙겨 입고 뒷산을 뛰어 올랐다.
경사가 그리 가파른 건 아니지만 꽤 높았다.
중간 즈음해서 퍼지지 않을까.
그리 생각했는데 의외로 힘 들이지 않고 완주했다.
“내가 이렇게 체력이 좋았나?”
곰곰이 되짚어 봐도 그건 아니다.
애초에 집밖에 나가질 않는 집돌이 신세에 회사 취직 이후에도 사무 일만 했다.
많이 걸어봐야 지하철정도.
딱히 운동이라는 건 해 본 경험이 없다.
‘그러고 보니 촬영 때도 딱히 지친 적이 없지.’
드라마 촬영 때도 영화 촬영 때도 마찬가지.
스케줄을 따라잡기 위해서 밤샘 촬영을 하거나 몇 시간씩 연장 촬영을 하기도 했다.
몸 좋은 배우들도 피로에 나가떨어지기 일쑤.
하지만 그때도 진호는 멀쩡하게 촬영을 수행했었다.
“체력이 좋아진 건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옳다.
그렇다면 왜?
마땅히 운동한 것도 없는데 갑자기 왜 체력이 좋아진다는 말인가.
산삼이라도 한 뿌리 뽑아 먹었으면 모르겠지만.
“역시 전생체험 덕분인가?”
짚이는 부분이라면 그것밖에는 없다.
예를 들자면 조운 같은 경우.
그는 일생을 전장에서 보냈고 싸우는데 이력이 난 인물이다.
그의 일부라도 몸에 베이게 할 수 있다면 체력이 늘어나는 건 당연한 이야기다.
“······그래. 완전히 이상한 얘기는 아니지. 대금 연주 때에도 명인의 솜씨를 빌려왔고.”
대금 연주라는 것이 단순하게 감정이나 기억만 가진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정확한 운지를 위해서 손가락도 단련이 돼야 한다.
진호는 분명 그 과정을 며칠로 압축시켰었다.
‘전생을 불러온다는 것이 그의 삶을 경험하는 거니.’
그 시간을 몸이 경험한다고 봐도 틀리진 않다.
조운이 되어 전쟁터를 떠돌았으니 체력이 늘어난 것처럼.
“흐음. 그럼 이런 것도 되나?”
진호가 바닥에 떨어져 있던 나뭇가지를 하나 주었다.
그리고 가만히 그러진 뒤 앞으로 뻗었다.
묘하게 익숙했다.
‘이걸 이렇게······’
살짝 발을 바꾸고 자세를 달리했다.
나뭇가지와 시선이 일직선이 되고 균형이 바로 잡혔다.
순간적으로 배경이 겹쳐 보였다.
조운, 자룡이 바라보던 전장의 모습과 뒷산의 배경이 겹친 것이다.
왠지 모르게 가슴이 뛰었다.
슥.
이왕 쥔 겸에 가볍게 움직여 봤다.
발을 끌고 나뭇가지를 뻗었다.
바람을 가르고 들어가는 소리가 경쾌했다.
찌르고, 베고, 휘두르고.
조금씩 흥이 붙어 동작이 빨라졌다.
어느 순간부터는 어떻게 휘두르는지 어떻게 움직이는지 인지하지 못했다.
그냥 느낌이 닿는 곳으로 움직였을 뿐이다.
빠각—
동작이 멈춘 건 나뭇가지가 힘을 이기지 못하고 부러졌을 때.
“하아. 하아······”
진호는 가쁜 숨을 내쉬며 반 토막 난 나뭇가지를 바라봤다.
이미 그의 몸은 땀으로 범벅이 된 후였다.
뒷산 등산로를 완주하고도 멀쩡했던 몸인데 짧은 움직임만으로 이렇게나 지쳐 버린 것이다.
“애각창(涯角槍)이라도 하나 만들어야 하나.”
가쁜 숨에 기쁨이 묻어나 있었다.
#
진호는 매일같이 산을 올랐다.
땀을 흘리고 조운을 불러와 그의 창술을 몸으로 체득했다.
나뭇가지는 인터넷에서 산 목봉이 되었고 어설픈 창질은 숙련된 창술이 되었다.
“이건 확실히 치트키네.”
촬영까지 하루가 남았을 때 진호는 인정했다.
고작 며칠 만에 체력이 붙고 봉술이 손에 익었다.
일전의 대금도 그러했지만 이 전생체험은 잘만 사용하면 완전 사기 능력이었다.
남들은 일생에 거쳐 배워야 할 기술을 단 며칠 만에 체득 할 수 있는 것이니까.
“물론, 태생적인 한계는 있지만. 그래도 이게 어디냐.”
그렇다고 진호가 조운처럼 움직일 수 있는 건 아니다.
타고난 체질이 다르고 한계점도 달랐다.
그저 비슷한 수준까지 따라잡는 것.
그것만 해도 사기인 것은 분명했지만.
웅······!
“네, 대표님.”
때마침 걸려온 전화에 진호가 목봉을 놓고 통화버튼을 눌렀다.
“대금이요? 그것도 해 달래요?”
예능 작가 진 쪽에서 대금 연주를 추가로 부탁한다는 말. 어차피 홍보용이니 장기자랑 하나 더해서 나쁠 건 없다.
진호는 흔쾌히 수락하고는 다시 목봉을 쥐었다.
“대금에 목봉이라니. 이거 완전 무협 고수인데.”
예능에 삿갓이라도 하나 쓰고 나갈까.
진호가 진지하게 고민을 해 봤다.
#
진호의 새로운 장기는 차근차근 준비가 되어갔다.
대금 연주도 한 결 무르익고 목봉을 통한 조운의 창술은 괜찮은 수준이 되었다.
하지만 한 쪽이 순조롭다고 다른 쪽도 그러리란 법은 없다.
최현석은 조금 난처한 입장에 처했다.
“하여튼 인간들이 상도덕이 없어요.”
쾅. 전화기를 내려놓는 그의 손길이 거칠었다.
방송국, 작가에게서 걸려 온 전화였다.
“왜요? 무슨 일 있어요?”
스케줄 조정 차 들렀던 진호가 물었다.
“예능 말이야. 퍼즐 서바이벌. 출연자들이 바뀌었어.”
“네? 우리 팀 나가는 거 아니었어요?”
“출연 조정을 부탁한다고 하더라. 팀 단위로 출연하는 거면 다음번에 하는 게 어떻냐고.”
“다음번에요? 그럼 개봉 후잖아요.”
“그러니까. 할 거면 너 혼자만 출연하는 쪽으로 조정 한다고 하던데.”
“아니, 갑자기 그러는 게 어디 있어요?”
“내 말이 그거 아니냐. 상도덕 없는 새끼들. 아무리 회사 입김이 세다 그래도 이건 아니지.”
최현석이 볼멘소리를 했다.
아쉬운 건 홍보가 필요한 영화 팀이었고, 갑의 위치는 여전히 방송사였다.
“우리 팀 대신에 들어오는 사람이 있어요?”
“어. 박 선호. 너도 알고 있지? TM의 대표 아이돌. 컴백 앞두고 예능부터 뛴다더라.”
“아니, 왜요? 그 정도 급이면 단독 게스트로 나가도 충분 할 텐데. 아니면 그쪽 연예인이나.”
“급하게 섭외를 했다, 라고 말은 하는데. 내가 볼 때는 아니야. TM이 이런 쪽으로는 약았거든.”
“무슨 소리에요?”
“널 이용하려는 거지.”
최현석이 가장 불쾌했던 부분이 이것이다.
의외로 주먹구구식의 움직임이 많은 연예계에서 갑작스러운 섭외 변경은 충분히 이해를 한다.
하지만 섭외 목록을 보자면 의도가 뻔하지 않은가.
“화제성이 좋잖아. 최근에 이런저런 말도 많았고. 너랑 같이 나가면 득이 많다 이거야.”
“그 정도 되는 아이돌도 그렇게 해요?”
“이용 할 수 있는 건 확실하게 이용하는 거지. 게다가 야외 예능이잖아. 여러모로 자기가 뽐내기 좋다 이거지.”
“치사하네.”
“그렇지. 원래 큰 회사가 더 치사해.”
TM이라면 국내 기획사 중 한 손에 꼽히는 곳이다.
방송가에서 그 입김이 안 닿는 곳이 없다.
“어떻게 할래?”
“해요. 한다고 전해주세요. 홍보를 안 할 수도 없고. 이용해 먹고 싶으면 얼마든지 하라고 하죠. 하지만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두고 봐야 할 겁니다.”
야외예능.
상산에서 단련 한 창질 맛 좀 보여줘야 할 거 같다.
#
야외 예능답게 녹화는 밖에서 진행되었다.
진호는 사전 고지를 받고 따로 대기하다가 진행자의 목소리에 맞춰서 나타났다.
프로그램 고정 출연자는 전부 여섯.
게스트는 진호와 박선호 두 명이었다.
“오늘 녹화 만만치 않겠는데? 너무 유명한 분들이 나와서 부담이 어깨에 팍팍 내려와.”
“하하. 선배님, 제가 뭘 유명합니까. 여기 더 유명하신 분들이 널렸는데.”
이곳에서 진호는 박선호를 처음 봤다.
사전에 미리 한 번은 볼 줄 알았는데 녹화 전까지 접점이 없었다.
확실히 잘 나가는 아이돌답게 훤칠한 키에 멋들어진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아이고, 홍 배우님. 직접 이렇게 보니 훨씬 더 멋있는데요?”
“과찬이네요. 선호 씨가 훨씬 더 미남인데요. 역시 아이돌은 다르네요.”
“그렇죠? 역시?”
“네?”
“하하하. 농담이요, 농담.”
툭툭, 가볍게 치며 웃는 모습은 호탕함 그 자체.
성격 좋고 웃는 얼굴이 멋있다고 해서 팬들은 그를 ‘미소 천사’라고 부른다.
직접 눈앞에서 본 진호의 감상은 달랐지만.
“이거 두 분 다 오늘 각오가 남다르겠어요. 한 분은 컴백 전이고, 다른 분은 영화 개봉 전이고.”
“에이, 선배님. 그렇게 말 하면 꼭 홍보 같잖아요.”
“그럼 아닌가?”
“그냥 선배님들과 즐겁게 게임을 하려고 나왔죠. 저야, 뭐 컴백이 잦은데 굳이 홍보가 필요할까요. 진호 배우님은 좀 경우가 다르지만.”
슬쩍 바통을 넘기는 모양새가 익숙하다.
무슨 소리냐고 발끈하기도 애매한 수준.
“전 홍보하러 나왔습니다. 제가 열심히 해야 우리 식구들 빛 볼 거 아닙니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래서 진호는 아예 뻔뻔하게 나갔다.
“이야. 역시 배우는 남다르다니까.”
“크. 진솔함보소. 이래서 내가 진호 씨를 좋아한다니까.”
“언제부터 좋아했다고, 난리여.”
식상한 답이 아닌 만큼 반응도 좋았다.
출연자들이 하나 둘 멘트를 던져서 장면을 잡아주고 PD도 OK 사인을 보냈다.
박선호의 미간이 살짝 일그러졌다.
“자자. 오프닝 녹화는 여기까지니까, 차로 이동합시다. 팀복 지급 받은 거로 갈아입고 준비해 주세요.”
그렇게 오프닝 녹화 30분가량.
출연자들을 반으로 나누어 팀을 정했다.
진호의 팀복은 파란색에 노란색 줄무늬.
어딘가 운동회 가는 분위기였다.
“진호 씨. 야외 예능은 처음이죠?”
팀 단위로 차에 탑승하자 프로그램의 메인 MC인 김의남이 말을 붙여왔다.
“전에 달리는 사람들 하긴 했는데, 그땐 그냥 토크쇼 느낌으로 지나간 터라.”
“아, 맞다. 그랬구나. 그럼 오늘 좀 힘들 수도 있겠네. 평소에 운동 좀 해요?”
“그럭저럭 촬영 버틸 정도는 하고 있습니다.”
“오, 다행이네. 우리 녹화가 좀 빡세거든. 하다가 포기하고 그러면 녹화분에서 아예 잘려버려요.”
“열심히 해야겠네요.”
출연자가 여럿이다보니 분량을 분배하기 어렵다.
활약이 많은 사람 쪽으로 분량을 많이 챙기는 건 당연한 이야기.
김의남은 그런 면에서 진호가 걱정됐다.
“아, 그리고 이건 우리끼리니까 하는 말인데. 우리 PD가 좀 박하게 굴어도 마음 상해하지 마요.”
“아······PD님이요?”
“그 인간이 좀 남 눈치에 예민하거든. 유명 아이돌 나왔다고 하면 그쪽으로 샷을 많이 때려서. 진호 씨도 한창 잘 나가고 있지만 저쪽은······응. 알죠? 무슨 말인지.”
“이해했습니다. 이런 조언까지 해 주시고. 고맙습니다, 선배님.”
“에이, 뭘. 나도 진호 씨 팬이라서 그래요. 이번 영화도 완전히 기대하고 있는 걸.”
김의남은 진호가 마음에든 건지 제법 많은 조언을 해 주었다.
방송가에서 잔뼈가 굵은 진행자의 조언은 천금과 같았다.
진호는 진지한 자세로 이야기를 귀담아 들었다.
“우리 한 번 이겨 보자고요.”
“네, 선배님.”
이길 이유가 한 가지 더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