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만 전생 배우-34화 (34/178)

Chapter15. 황천(2)

“더 물어보고 싶은 거라도 있나?”

남자는 진호가 다가가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말을 붙여왔다.

“하하. 얼굴에 쓰여 있습니까?”

“너처럼 촌티 줄줄 흘리면서 파티에서 싸돌아다니는 놈이라면 뻔하지.”

“······뭔가 불만이라도 있어 보이는 목소리입니다만.”

남자의 목소리는 싸늘했다.

“왕호룽. 저 인간이 뭘 말했든 곧이곧대로 듣지 마. 속은 능구렁이 같은 인간이니까.”

“무슨 말입니까?”

“같은 한국인이니까. 아니, 한국인이었으니까 충고하는 거야. 저 인간 망상에 휘둘리면 네놈 앞길부터 박살 날 거다.”

단순한 불만으로 말하는 것치고는 어딘가 강경한 태도였다.

“왕 형님과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건가요?”

“왕 형님. 웃기는군. 그 인간이 네게도 그렇게 말 하든? 왕 형으로 불러. 난 친근한 게 좋아.”

“······”

“흥. 얼굴 펴라. 그리고 정신 똑바로 차려. 저 인간이 어디 뭐 네놈이 예뻐서 여기까지 끌고 온 줄 알아?”

“아니라는 건가요?”

“나도 네놈 같았다. 영화 하나 반짝하고 우쭐해 있으니 왕호룽 그 인간이 와서 제안을 하더군. 같이 일을 하자고. 재능이 아깝다고.”

남자는 입술을 곱씹었다.

그것은 분함이라기보다는 어떤 안타까움에 가까웠다.

“그 인간 수작이야. 너처럼 이제 막 뜬 인간 불러서 이런 허파에 기름 끼는 장면을 머리에 때려 박는 거지.”

“어째서요? 저 같은 신인에게 뭐가 있다고?”

“그 인간 말로는 재능이지. 아시아의 재능. 그리고 중화의 재능.”

“······이해를 못하겠습니다.”

“저 인간. 그리고 저 인간 부친까지. 저기 황천 놈들은 죄다 망상가야. 중국의 발전이 더딘 이유가 문화의 성숙이 부족해서라고 믿어. 그래서 서구권의 문화와 맞서기 위해서 어떤 사명이 있다고 믿는 거야.”

분명 왕호룽도 이와 비슷한 말을 했었다.

중국의 한계점과 그것을 타파하기 위한 비전.

“근데, 그 방법이라는 것이 우습기 짝이 없어. 어떤 치밀한 계획이나 방법론이 있는 게 아니야. 그냥 막연하게 스타를 추구할 뿐이라고.”

“스타를······그래서 그쪽과 저 같은 사람을 스카우트 한다는 겁니까?”

“흐흐. 두고 봐. 저 인간에 휘말려서 며칠만 이 생활을 하면 예전의 나처럼 될 걸? 허파에 바람이 잔뜩 들어가서 당장이라도 스타가 된 것처럼?”

“그랬던 겁니까?”

“그랬지. 그래서 그 제안도 받아들인 거야.”

“제안?”

“그래. 한국 국적을 버리고 중국인이 되는 거.”

남자의 얼굴에는 수치심이 서려 있었다.

“될 거라 그랬어. 날 스타로 만들어 준다고 그랬어.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내 역량이 닿지 못하자 언제 그랬냐는 듯 외면하더군. 이딴 파티? 집어치워. 난 이제 어디에서도 얼굴을 내밀지 못해. 중국에서는 이방인이고 한국에서는 배신자야.”

“그랬군요······”

“그러니까 이렇게 말 해 줄 때 정신 차려. 이딴 화려한 파티. 한 여름 밤의 꿈일 뿐이야. 뭔가를 꿈꾸고 있다면 남의 손이 아닌, 네 손으로 이루라고.”

남자는 그 말을 끝으로 진호의 어깨를 툭 치며 물러났다.

그리고 이내 화려한 파티 속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

파티는 더 이상 흥분되지 않았다.

#

휴가는 열흘이나 이어졌다.

라스베가스를 떠나서 세계 각국 유명한 휴양지는 전부 돌았다.

나중에는 그곳이 그곳 같아 보일 지경이었다.

왕호룽은 그 열흘의 시간 동안 일적인 이야기는 한 번도 꺼내지 않았다.

좋은 걸 보여주고 좋은 걸 누리고 유명한 사람과 교류하게끔 도왔을 뿐이다.

부호가 어떻게 휴가를 보내는지.

그 예시를 완벽하게 보여 주었다.

“슬슬 한국으로 돌아가야겠네요.”

결국 귀국에 대해 이야기를 꺼낸 건 진호였다.

“벌써? 아직 가 볼 곳이 많은데.”

“이 정도면 충분해요. 스케줄 들어온 거 소화도 해야 하고. 다음 작품을 위해서 준비도 해야죠.”

“다음 작품을 벌써?”

“왕 형님 덕분에 스타들을 많이 봤잖아요. 좋은 자극이 됐어요. 영어도 미리 배워두고 다양한 배역을 위해서 몸도 만들고 싶네요.”

“훌륭해. 훌륭한 태도야.”

왕호룽은 연신 박수를 쳤다.

그 모습에 가식은 없었다.

그렇기에 진호는 이야기를 꺼냈다.

“왕 형님.”

“응?”

“벌써 열흘이나 지났습니다. 이제 헤어지면 언제 또 볼지 모르는데, 할 말이 있다면 지금 하세요.”

“왜 그런 말을 하지?”

“열흘 동안 아무것도 원하지 않았잖아요.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베풀기만 하는 사업가는 본 적이 없어요.”

왕호룽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역시 그와 이야기를 했구나.”

“네. 하지만 단편적인 이야기로 평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왕 형님 입으로 직접 듣고 싶어요.”

“그의 말이 전부 사실이라면?”

“뭐, 그렇다 해도 크게 달라지는 건 없겠죠. 어차피 선택은 그의 것이었으니까. 다만, 그런 방식이면 전 따르지 않을 생각입니다. 전 화려함을 쫓아 연기를 시작한 것이 아니니까요.”

전용기에 라스베가스.

화려한 스타들이 즐비한 파티.

분명 눈은 호강하고 그 사치스러움에 가슴이 들떴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미 그보다 더 좋은 걸 알고 있다.

허황된 것을 쫓아 그 즐거움을 놓친다면 그야말로 소탐대실이 아니겠는가.

“하하하. 좋군. 좋아. 역시 내가 사람 하나는 잘 봤어.”

왕호룽은 다시 한 번 박수치며 웃었다.

되레 진호의 얼굴이 어리둥절해졌다.

“배 영수. 그 인간이 어찌 말했는지 알 것 같다. 아마 다 내 탓이라고 했겠지. 하지만 아니다. 방탕함에 빠진 건 그고, 연기를 등한시 한 것도 그다. 결국 자기 무덤을 스스로 팠을 뿐이지.”

“······이렇게 화려한 것들을 보여줬으면서 그런 말을 하는 겁니까?”

“화려함에 젖어 정진을 잊는 자라면 쓸모없다. 재주가 탐나 그를 회유하였으나, 강요 한 것은 없지. 내가 제공하는 건 어디까지나 기회일 뿐이다.”

진호는 약간의 섬뜩함을 느꼈다.

왕호룽의 방식은 마치 악마와 같지 않은가.

온갖 화려함을 다 보여주고 그 안에서 선택권을 주어주었다니.

과연 몇이나 그 화려함의 덫을 벗어 날 수 있을까.

정말로 어려운 일이라 생각했다.

“이렇게 됐으니 솔직하게 말 하지. 나. 그리고 황천. 우리는 중화의 문화적 승화를 추구하고 있다. 서구의 문명에 대적하기 위해서는 물질과 문화. 모두가 필요하기 때문이지.”

“······갑자기 거창해지네요.”

“본래 포부는 거창한 거다. 생각해 본 적 있느냐? 헐리우드에서 독보적으로 활동하는 아시아 배우를? 그의 한마디가 서구권 전체를 울리고 아시아의 격을 올릴 수 있는 그런 인물을?”

없다. 상상이 되지를 않는다.

몇 몇 좋은 활동을 하는 배우는 있지만 그것 뿐.

헐리우드를 대표한다고 말 할 수 있는 배우는 없었다.

“문화의 역성은 그런 한 사람이 이루는 거다. 수조원의 투자와 거창한 계획 따위는 의미가 없다. 오직 하나의 특출난 존재가 문화를 주도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수많은 이들을 회유하는 것이다.”

“중국을 위해서?”

“결과적으로는.”

아시아로 뭉뚱그려서 말하지만 결국 중국이다.

이 정도 호사를 누리고 투자를 약속받으면 국적 따위 버릴 사람은 널리고 널렸으니까.

“진호 아우. 너는 훌륭하다. 아직 많은 것을 더 이루어야 하지만 그렇다 해도 난 확신한다. 너라면 우리의 무기가 되어 줄 수 있을 거다.”

“그래서 귀화라도 하라는 겁니까?”

“해라. 난 말하는 걸 망설이지 않는다. 한국은 어차피 소국에 불과하다. 그 작은 나라는 널 품지 못한다. 네 격을 깎아내리고 앞날을 망칠 거다.”

“······악담을 하시는군요.”

“아닐 것 같나? 이번에 내가 영화 판권을 사들이지 않았다면 결과가 어떻게 됐을까? 넌 그 사람들에게 무너졌겠지. 자존심도. 영화에 대한 애정도. 연기에 대한 자부심도.”

“······”

아니라고는 말하기 어렵다.

그 날, 진유미에게 가서 사과를 했다면 과연 어떤 기분으로 연기를 하게 됐을까.

분명 예전 같지는 않았을 거다.

“나는 사기꾼이 아니다. 돈은 썩을 만큼 있다. 네가 귀화를 해 준다면 얼마가 되든지 지원한다고 약속을 해 주겠다.”

“달콤한 제안이네요.”

“기회란 왔을 때 잡아야 하는 법이다. 나는 네가 현명한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다.”

백 명에게 이런 기회가 왔다면 몇 명이나 거절 할 수 있을까.

이건 눈앞에 백지수표가 놓인 격이다.

포기해야 하는 건 오직 하나.

국적뿐이다.

‘나라에 대한 애정이라.’

진호가 애국자인가?

전혀 아니다.

나라에서 뭔가를 받아 본 기억은 없다.

정신질환으로 군 면제를 받을 때도 얼마나 고통스러웠는가.

최소한의 보장도 받지 못하고 시달려야 했다.

애정 같은 게 있을 리 없다.

“죄송하지만, 제안은 거절하겠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거절을 했다.

“어째서냐? 알량한 애국심 때문이냐?”

“아뇨. 그런 건 아닙니다. 단지 나라를 택해야 하는 문제라면 넘어갔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한 가지. 배 영수, 그 사람이 말 한 것 중에 한 가지가 계속 걸리더군요.”

“그 인간은 스스로 망한 거다.”

“알고 있습니다. 스스로 선택하고 스스로 망했죠. 그렇기에 더 와 닿습니다. 무언가를 얻고 싶다면 자신의 손으로 얻어내라.”

전생체험의 능력을 깨닫고 난 뒤 스스로 걸어왔다.

몰입을 어떻게 제어하는가, 캐릭터를 어떻게 구축하는가, 디테일을 어떻게 살리는가.

직접 경험하고 실패하고 수정하며 이룬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왕호룽의 꿈을 한 스푼 더하면?

과연 그 결과가 자신의 것이라 말 할 수 있을까?

고루한 정신론이라 해도 좋다.

어설픈 고집이라고 해도 좋다.

하지만 태어나서 정신병자로 수십 년을 살다가 겨우 인정받을 수 있게 됐다.

이 힘을, 이 능력을 남의 꿈 따위에 실려 보내고 싶지 않다.

이것은 오직 자신의 것이며 자신의 꿈을 위한 수단이어야 한다.

“내 꿈은 왕 형님과 같은 길에 있지 않습니다.”

게다가 황천이라면 그 결과를 알지 않는가.

진호는 창천을 쫓았다.

#

휴가는 끝났다.

진호는 전용기를 타고 늦은 저녁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갈 때와는 전혀 다른 마음이었다.

“이제는 왕 형님이라고 부르면 안 되는 겁니까?”

떠나기 전 진호는 왕호룽에게 물었다.

그의 사상과 생각은 어떻든 짧은 인연 자체를 부정 할 수는 없었다.

“일이 틀어졌다고 내가 보복이라도 할 것 같나?”

“글쎄요. 그렇게 쪼잔한 사람은 아닐 거 같은데요.”

“하하. 그 말대로다. 얻지 못해 부수는 것은 소인이나 하는 짓. 관우를 차마 헤하지 못한 조조의 마음이 꼭 내 것과 같구나.”

“조조라. 하하, 그렇군요.”

그 조조 여기에 있습니다만.

진호는 입술을 달싹이다 그만 두었다.

조조의 마음이라 생각한다면 그렇게 두면 될 뿐이었다.

“가라. 네가 좇는 꿈을 마음껏 꾸어 보아라. 하지만 말했듯이 소국은 너를 품지 못할 터. 그 속 좁음에 괴로워진다면 다시 내게 와도 좋다.”

“평소에 대사 같은 거 연습하고 그러십니까?”

“하하. 이리 보니 더 아깝구나.”

웃음 한 스푼에 악수 한 번으로 이별했다.

다시 연이 닿아 만나게 될지는 알 수 없으나, 이 짧은 휴가는 결코 독은 아니었다.

크게 걷는 자는 항상 멈추어 자신을 돌아봐야 하는 법.

진호는 자신을 돌아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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