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14. 연기로 때렸더니(2)
진호는 박종찬과 회사에 연락을 한 뒤 움직였다.
자신이 진유미를 설득해보겠다, 라는 내용으로.
하지만 사실 설득 같은 게 될 리 있겠는가.
말을 압축하자면 고개 숙이러 가는 것이다.
연기, 그런 식으로 안 할 테니까 돌아와 달라고.
“하. 고민되네.”
전해 받은 주소지를 앞에 두고 진호가 망설였다.
영화 자체의 운명을 고려하자면 한 몸 희생하는 것이 답일 수도 있다.
감독이나 스텝들을 고려하면 그게 빠른 길.
하지만 백 번 양보해도 이건 옳은 길이 아니다.
대체 잘못 한 사람은 배 째라 있고 나머지가 고생을 해야 한단 말인가.
‘짜증나는군.’
그냥 연기만 하면 됐다.
배역을 이해하기 위해서 경찰서까지 다녀오고 온갖 노력을 다했다.
근데 별 시답지 않은 여자 때문에 이 모양이다.
현실이 어쩌고저쩌고 하는 족쇄는 여전했다.
“이럴 때 하늘은 안 돕고 뭐하는 건지.”
쨍하기만 하늘을 올려다보며 한숨 내쉬었다.
이럴 때는 구전동화처럼 하늘에서 동아줄이라도 떨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권선징악.
왜, 좋지 않은가.
— 황천의 바람이여!
“응?”
다른 누군가 있는 건가?
진호가 깜짝 놀라서 주변을 돌아 봤다.
하지만 주변에는 개미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그저 쨍하던 하늘이 조금 노랗게 보일 뿐.
우우웅—!
“아, 깜짝이야.”
그리고 그와 동시에 품 안의 폰이 울렸다.
가슴을 쓸어내리며 통화 버튼을 눌렀다.
회사에서 온 전화였다.
“진호야, 너 이거 못 믿을 거다!”
최현석의 목소리가 굉장히 들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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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유미는 겁에 질려 도망쳤지만 그게 그녀의 본질은 아니었다.
그녀는 영악한 여우였다.
인터넷 기사 등으로 상황의 흐름을 간파했다.
누가 갑이고 누가 을인지를 알아챈 것이다.
‘흥. 당연하지.’
자신은 진유미였고 부모님은 부모님 자체였다.
고작 감독 나부랭이와 건방지기 짝이 없는 배우 몇 명이 자신을 창피 줄 수 없었다.
촬영장에서 있었던 두려움 따위는 싹 잊고 이 상황을 어떻게 이용할지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영화 싹 다 엎기 싫으면 조만간 와서 사과하겠지?”
“그럼. 당연하지. 제깟 것들이 뭐라고 우리 유미를 울리는 건데. 싹 다 와서 무릎 꿇지 않으면 얄짤 없어.”
“역시 언니가 뭘 좀 아네.”
곁에 있는 매니저도 비슷했다.
애초에 회사가 진유미를 캐스팅 할 때부터 보모 형식으로 붙여 준 인물.
쓴 소리를 할 사람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은 둘째 치고 그 인간 둘은 반드시 나한테 사과하러 와야 해.”
“누구? 감독?”
“감독하고 홍 진호. 그 인간. 날 물 먹이고 창피 줬으니 자기들도 그만큼 벌을 받아야지. 아니면 영화고 뭐고 영원히 없을 줄 알라고.”
특히, 진호.
감독의 쓴 소리는 백 번 이해 할 수 있다 치지만 그는 달랐다.
고작 회사원이었던 인간 주제에 조금 재주가 있다고 건방지게 자신을 바라보며 연기 운운하는 태도라니.
누구도 자신에게 그딴 짓을 할 수는 없었다.
심지어 얼굴도 못생긴 남자 따위가.
“오기만 하라고. 아주 태어난 걸 후회하게 만들어 주겠어.”
받은 창피를 열 배 백 배로 돌려 줄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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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흘이 지났다.
여배우가 잠적하고 영화 촬영이 중단 된 시간이 무려 열흘이나 지난 것이다.
기자들은 매일같인 소스를 물어가 넙죽넙죽 기사를 썼다.
하나하나가 자극적이고 대중의 이목을 잡아끄는 제목이었다.
“왜 안와?”
그런데 일이 조금 이상했다.
이 정도로 언론이 흔들렸으면 반응이 나와야 정상.
위에서 압력을 넣고 감독이든 출연자든 뭐가 됐든 와서 사과를 해야 맞다.
근데 무려 열흘이 지날 동안 반응 한 번이 없었다.
“언니. 회사에서는 뭐래?”
“그게 나도 잘 모르겠어. 위에서 따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기는 한데.”
“따로 이야기를 해? 대체 무슨 내용인데?”
“나한테 그런 이야기를 해 주겠니? 직접 한 번 전화해 볼래?”
매니저가 폰을 내밀었지만 진유미는 고개를 저었다.
전화 해 봐야 무슨 어려운 말만 늘어놓을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그런 말을 들을 거면 그냥 인터넷 기사나 한 줄 더 읽는 게 속 편했다.
적어도 이쪽은 전부 자신의 편이니까.
“······어?”
[여배우의 일탈. 촬영 중간 도망쳐 버린 배우 진유미 씨의 행동으로 영화 촬영 전체가 정지돼 버리는 일이 발생했다. 이는······]
어디 동네 흔한 기사가 아니다.
메인 언론 중 하나에서 이런 식의 기사를 올렸다.
‘이럴 리가 없는데.’ 진유미가 입술을 씹으며 기사를 쭉 내렸다.
평소 같으면 ‘언니 힘내요.’, ‘유미 화이팅’등의 댓글이 달려 있어야 할 자리에 전혀 딴판인 글들이 위치하고 있었다.
“······원래부터 건방졌어? 발연기나 하는 주제에 계속 주연을 먹어? 제작사 측 돈줄이라고 배짱을 부리다가 욕을 먹었다? 뭔데? 왜 이딴 글들이 달려?”
“유, 유미야 신경 쓰지 마. 그냥 모르는 것들이 하는 말일 뿐이야.”
“기다려 봐. 이거 언제 올린 기사야? 어? 하나 둘이 아니잖아!”
기사를 타고 다른 것들을 열람했다.
2~3일 전부터 기사 내용이 조금씩 바뀌고 있었다.
진유미가 촬영에서 도망친 내용은 같지만 그 원인이 달랐다.
감독과의 불화, 연기 실패, 무책임한 도주 등.
비교적 실제 상황에 근접한 내용이 기사로 쏟아지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그녀를 옹호하던 여론도 슬금슬금 달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뭐, 뭐야. 왜 이딴 말들이 달리는 건데!? 피해자는 나라고! 내가 피해자인데 왜 나한테 뭐라고 해!?”
“유미야. 일단 좀 진정하자.”
“진정하게 생겼어!? 이 글들 좀 보라고! 나한테 욕하잖아! 감히 제깟 것들이 뭐라고 나한테 욕을 해!?”
핏대까지 세우며 발작하는 진유미의 모습에 매니저가 움찔했다.
평소 조곤조곤 말을 하며 ‘여배우’를 연기하는 그녀이지만 실상은 이랬다.
애초에 모델이나 배우 역시 그녀 고집에 못이긴 부친의 금력으로 이룬 결과.
이 정도 생떼는 애교에 불과했다.
“있어 봐. 핸드폰 어디 있어? 나, 아빠랑 통화 좀 해야겠어.”
“여기. 여기 있어.”
진유미는 건네받은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통화음이 이어지는 동안 잘근잘근 입술을 씹었다.
이미 피부가 뜯겨져 나가 핏물이 보였다.
그럼에도 멈출 수는 없었다.
이런 초조함 따위는 참아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 아빠. 나야, 유미.”
그래도 괜찮다.
아빠면 모든 걸 해결 해 줄 테니까.
건방진 감독도 배우도 언론사도.
그녀는 그때까지 그렇게 믿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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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하하. 진짜 사람일은 모른다니까.”
박종찬이 목젖이 보이도록 크게 웃었다.
조금 전 제작사 측의 협의 내용을 전달받고 나오는 중이었다.
“잘 끝났습니까?”
스텝 중 하나가 냉큼 다가와 물었다.
촬영이 스톱되고 벌써 보름이 훌쩍 지난 시점.
밥 벌어먹기 위해서라도 중요한 일이었다.
“기존 제작사 측에서 손을 떼고 물러나기로 했네.”
“완전히 말입니까? 그럼 영화는 어떻게 되나요?”
“중국의 미디어 회사 황천에서 이어받기로 했네.”
“황천? 아, 요즘 잘 나간다는 그 회사 말이죠?”
“음. 중국 쪽 영화시장 확충을 위해서 막대한 자본을 쏟아 붓는 회사야. 헐리우드, 한국 영화시장, 일본 시장 등 각국에 손을 대는 중이지.”
중국 영화 시장은 최근까지도 내수에 막혀 있었다.
돈이라면 십 수 억의 중국인들이 충분히 벌어다 주지만 그것이 되레 영화 질에는 독으로 작용했다.
어설픈 CG에 민족의식에 함몰되는 영화 스토리 등.
때문에 일부에서는 이를 타파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그것이 황천과 같은 회사들이다.
막대한 자본력으로 해외 기술력이나 연출 방식 등을 흡수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 영화에요? 우리가 무슨 CG범벅 헐리우드 영화도 아니고. 그렇다고 중국인이 포함된 것도 아니고. 그쪽에서 우리를 왜 지원해요?”
“그게 또 기가 막히다는 거 아니냐. 황천 회장의 첫째 아들이 한국 미디어 광팬이야. 유명한 영화뿐만이 아니라 예능이나 드라마다 섭렵했다는 거지. 근데 얼마 전에 우연하게도 진호의 전작을 본 거야.”
“드라마요?”
“어. 거기서 확 꽂혔다는 거야. 이 사람하고 일을 하고 싶다고. 근데 당장은 영화 촬영 중이고 그렇다 보니 군침만 흘렸던 거지.”
“아.”
그 뒤로는 간단했다.
황천은 막대한 자금력으로 제작사를 압박하고 영화에 대한 권리를 가져왔다.
애초에 진유미가 촬영장에서 도망간 것은 사실.
무작정 버티는 것은 무리였다.
적당한 선에서 합의를 했다.
“진유미는요?”
“잘렸지.”
단 하나의 조건.
촬영을 방해한 진유미의 퇴출이었다.
배우의 역할을 등지고 떠난 건 그녀였기에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키야. 운이 좋으면 이렇게도 일이 풀리는군요. 설마 하니 국산 영화에서 중국 자본 덕을 볼 줄이야.”
“흐흐. 이 친구야. 이게 어디 운일까.”
“아, 그럼 운이 아니면 뭡니까?”
“중국 애들이 좋아 하는 말 있지 않냐. 진인사대천명. 일단 할 일을 다 해 놓고 그 다음에 하늘에 맡기는 거다. 진호가 연기를 기똥차게 해 놓았으니 이런 행운도 생기는 거지.”
“하긴. 그 말이 옳습니다.”
합의 끝나고 난 다음 날.
보름 간 스톱 돼 있던 촬영은 재개되었다.
여배우를 다시 뽑기 전, 개인 씬 부터 빠르게 찍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 즈음해서 기사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여배우의 오만함이 불러온 나비 효과]
[갑에서 을로. 여배우 진유미의 나락여정]
[여배우의 고집에 손을 들어 준 제작사. 함께 뒤안길로 사라지다]
[여자이기 이전에 배우다. 진유미의 민낯을 낱낱하게 파해 쳐 보자]
[배우, 진유미의 진면모. 거짓의 벌은 참혹했다]
언제나 그렇듯 대중은 냉정하다.
화살의 방향은 이미 틀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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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유미의 퇴출 이후로 여배우를 새로 뽑았다.
안소미라는 스물 중반의 여배우였다.
처음부터 박종찬이 염두에 두고 있던 인물.
나이는 아직 어리지만 아역시절부터 갈고 닦아 온 연기 내공이 대단했다.
진호도 한 씬 호흡을 맞춰 본 뒤 대단히 만족해했다.
“자자. 속도 냅시다.”
그 뒤로는 강행군이었다.
이미 촬영 스케줄이 보름 넘게 밀린 터라 쉴 틈이 없었다.
밤 샘 촬영은 기본이고 고강도의 일정이 이어졌다.
하지만 딱히 불평하는 사람은 없었다.
진유미가 있었을 때와 지금의 차이를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된다, 라는 느낌.
“컷!! 좋습니다! 아주 좋아요!”
연기라는 건 결국 호흡이다.
개인의 역량이 지극하더라도 주변에서 받쳐주지 않으면 빛을 잃기 십상.
진유미와 함께 연기 할 때가 그랬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상대역 역시 출중한 연기력을 바탕으로 진호의 깊은 연기를 받아내고 있다.
합은 두 배, 세 배, 아니 그 이상의 효과를 보였다.
보다 멋진 그림을 만들기 위해 스텝들도 자진해서 노동력을 제공했다.
그러기를 석 달.
영화는 클라이맥스에 도달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