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만 전생 배우-31화 (31/178)
  • Chapter14. 연기로 때렸더니(1)

    진호는 경찰서에서 한 동안 견학을 하며 배운 것이 있었다.

    전생 체험은 일종의 과일이라는 점이었다.

    진호라는 커다란 나무에 달린 과일.

    셜록 홈즈도, 다른 유사한 전생들도 진호가 형사의 사람을 보고 배우면서 더욱 단단해졌다.

    이건 말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과정이다.

    이미 셜록 홈즈였지만 더욱 셜록 홈즈가 되는.

    한 사람의 인생을 더 깊이 파고 들어가 작은 디테일들을 낱낱이 살필 수 있게 된 것이다.

    ‘내가 많은 것을 배울수록 전생의 경험도 단단해져.’

    결론은 그것이었다.

    많은 경험, 많은 기억을 가진다 해도 결국 주인은 진호 그 자신.

    뿌리가 튼튼해야 나무가 단단한 것처럼.

    연기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보다 선명하게 알게 되었다.

    “일찍 오셨네요.”

    그리고 그걸 눈앞의 여자에게 알려 줄 생각이다.

    예정보다 30분 늦게 도착한 진유미가 느긋하게 다가왔다.

    “좀 늦었군요.”

    “차가 막혀서요. 겨우 30분 늦은 거로 뭐라 하실 건 아니죠?”

    “뭐라 하면 듣기는 할 겁니까?”

    “글쎄요. 딱히 귀담아 듣고 싶은 사람의 목소리가 아니라면.”

    비웃음 비슷한 걸 던지고는 총총 걸어 박종찬에게 다가갔다.

    그에게는 ‘감독님~’이라는 애교 섞인 말투로 접근했다.

    이래서 늦었으니, 저래서 늦었으니.

    순 변명뿐이었다.

    “아이고야. 촬영장에 암 여우 하나가 있으니 이거 앞날이 어둡네.”

    그 꼴을 보고 혀를 차는 건 진호만이 아니었다.

    문호준이 어느새 다가와 끌끌거리고 있었다.

    “선배님 오셨습니까.”

    “됐다, 됐어. 커피 한 잔 할 텨?”

    “괜찮습니다. 촬영 전에는 입에 뭘 안대는 습관이라.”

    “그래. 아주 진지하네. 저쪽 암 여우도 좀 배웠으면 싶은데.”

    문호준은 뒤로도 암여우, 살쾡이, 구미호 등 비슷한 느낌으로 진유미를 험담했다.

    연기판에서 구를 만큼 구른 그의 눈에도 진유미의 행동은 도를 넘은 구석이 있었다.

    다만, 그걸 눈앞에서는 말 못 하니 이렇게 뒤에서나 씹어 댈 뿐.

    어찌 보면 처량한 험담이었다.

    “슛 들어갑니다. 준비해 주세요.”

    하지만 정면에서 욕할 수 있는 수단이 딱 하나 있다.

    진호는 스탭들을 가로질러 카메라 앵글의 중심으로 이동했다.

    그 너머에는 진유미가 있었다.

    #

    영화 촬영은 시간상의 순서대로 진행되지 않는다.

    결말을 먼저 찍기도 하고 여건이 허락되는 부분부터 진행하기도 한다.

    이번 촬영도 그런 부류였다.

    진유미의 스케줄 상 둘이 조우하는 장면을 먼저 찍기 시작한 것이다.

    “하아. 결국 교체 없이 찍게 됐네요. 이렇게 된 거 잘 찍어 봐요. 이제 와서 무를 수도 없으니.”

    “최선을 다해서 찍을 겁니다.”

    “말은 뭐······”

    “그러니까 경고하죠. 유미 씨. 정신 똑바로 차리고 따라오세요.”

    “뭐라고요?”

    리허설이 끝나고 본 촬영에 들어갔다.

    진호는 잠시 눈을 감고 배역에 몰입하기 시작했다.

    경찰서에서 숙식하며 연구한 캐릭터였다.

    성격, 표정, 말투.

    모든 부분이 캐릭터로 맞춰졌다.

    “슛 들어갑니다.”

    카운트가 끝나고 카메라가 돌기 시작했다.

    작중 진유미의 캐릭터는 피해자의 절친.

    경찰의 수사가 지지부진하자 자신의 발로 뛰며 피해자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인물이었다.

    그런 그녀가 피해자 부친과의 만남조차 무감각하게 대하는 남주를 만나는 것이다.

    “이봐요! 어떻게 그럴 수 있어요!?”

    앙칼진 목소리.

    다만 그뿐이었다.

    목소리 안쪽에서 느껴져야 할 강한 분노가 없었다.

    “누굽니까, 당신?”

    진호는 그녀를 감정 없는 목소리로 응대했다.

    이것은 남호와 일맥상통하는 느낌.

    그에게는 피해자나 피해자의 관계자나 그다지 관심 없는 분류였다.

    “선영이 친구에요! 선영이 아버지가 당신을 찾아가서 빌었다고 하는데, 어떻게 그걸 그냥 외면하죠!? 그러고도 당신이 경찰인가요!?”

    “수사는 절차에 맞게 진행 중입니다.”

    “그런 말로 변명이나 하지 말라고요!”

    콱, 하며 진호의 어깨를 움켜쥐는 진유미.

    두 사람이 사선으로 서로를 바라보며 강렬함을 전달하는 씬이었다.

    “······으.”

    “컷! 컷! 유미 씨! 집중하셔야죠.”

    하지만 새어나온 진유미의 신음에 씬이 망가졌다.

    박종찬이 대본을 휘두르며 앞으로 뛰어나왔다.

    “죄, 죄송해요. 조금 긴장했던 거 같네요.”

    “긴장 푸시고. 시선 교차하는 것으로 끝이니까 집중만 합시다.”

    “네. 다시 해 볼게요.”

    다시 신호를 받아 카메라가 돌아갔다.

    같은 대사 같은 시선을 주고받은 뒤 마지막 장면을 다시 연기했다.

    바짝 붙은 거리에서 서로를 바라보는 장면.

    ‘뭐, 뭔데!?’

    이번에는 진유미가 눈을 감고 말았다.

    ‘컷! 컷! 컷!!!’ 화를 내듯 소리치는 박종찬의 목소리가 컸다.

    “유미 씨. 집중 안 할 겁니까? 눈은 왜 감아요?”

    “······다시 해 볼게요.”

    “제대로 갑시다. 이런 평범한 씬에서 고생하면 안 되죠.”

    또 다시 카메라가 돌아갔다.

    진유미는 이번에야 말로 제대로 하겠다며 눈에 힘을 딱 주고 진호를 응시했다.

    감정을 끌어 올리거나 표정 관리 같은 건 없었다.

    어차피 편집과 보정으로 처리를 하면 되는 일.

    여기서는 그냥 바라보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커어어엇!! 유미 씨! 뭐하는 겁니까!?”

    하지만 이번에도 진호를 바라보지 못했다.

    그만 눈을 질끈 감으며 고개를 돌려버린 것이다.

    분명 그전까지는 잘만 바라보던 눈인데.

    자신도 이해를 할 수 없었다.

    “내가 말했죠? 잘 따라오라고.”

    “······무슨 짓을 한 건가요?”

    “아무것도. 배역에 대한 준비가 있었다면 받아 낼 수 있었을 겁니다.”

    진유미는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사람이 감정을 담아봐야 얼마나 담겠는가.

    다 그게 그거라 여겼다.

    무슨 초능력자도 아니고 눈빛을 못 견디는 건 말이 안 된다.

    “컷!!”

    “커어어엇!!”

    “컷! 컷! 컷!!!”

    “유미 씨!!”

    하지만 한 씬으로 1시간 반 가량.

    고작 한 장면을 감당하지 못하고 계속 되풀이 했을 때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 잠깐만 쉬었다가 갈게요.”

    가끔은 말 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진다는 사실을.

    #

    “이거 좋네.”

    울상이 된 진유미를 보며 진호가 나직이 웃었다.

    그가 그녀에게 보낸 눈빛은 절대 초능력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정상적인 것도 아니었다.

    일종의 과잉.

    캐릭터의 감정만 쏙 뽑아서 극도로 증폭시킨 뒤 표출해 낸 것이다.

    이건 말 그대로 정상적인 범주를 넘어섰기 때문에 어설프기 짝이 없는 진유미가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계속 질질 끌 수는 없고······”

    여기서는 이 정도면 됐다.

    전체 촬영을 위해서라도 다음 단계로 갈 때.

    하지만 아직 촬영은 길고 찍을 씬은 넘치도록 남아 있었다.

    ‘견뎌보라고.’

    별 것 아니라 치부하던 연기를.

    진호의 웃음이 어딘가 사악했다.

    #

    진호는 완전히 배역으로 몰입해 들어갔다.

    그는 냉정하고 타인에게 무감각한 형사.

    사물을 호기심으로 바라보고 관찰하는 걸 좋아하는 어딘가 변태적이고 괴상한 인간.

    그런 그에게 살인범이 나타나며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재미있군요. 이 인간. 절 유인하고 있어요.”

    “재밌다는 말이 나옵니까?”

    “다른 말은 못 찾겠군요. 살인유희에 빠진 범인이 절 노리고 있다는 사실. 이보다 자극되는 건 없어 보입니다.”

    범인이 남긴 흔적을 쫓았다.

    놈은 언젠가 부터 고의로 흔적을 남겼다.

    자신을 쫓아오라고.

    자신을 잡아 보라고.

    일종의 도전장이었다.

    진호는 이를 거부하지 않았다.

    사건을 깊이 파고들어 그 내면으로 헤엄쳐 들어갔다.

    “이, 이렇게 해서 범인을 잡을 수 있다면 저도 따라가겠어요!”

    진유미는 악독한 싸움판의 관찰자였다.

    그녀는 친구의 죽음을 풀기 위해 진호에게 의탁하며 스스로를 수렁으로 던져 버린 인물이다.

    위험한 걸 알면서도 벗어나지 못하는.

    보통 사람에 가깝기 때문에 더욱 진호와 대비되는 인간이었다.

    “각오는 돼 있어요?”

    “······”

    “컷! 컷!! 스탑!”

    제대로 찍었다면.

    #

    “이거 계속 이러면 곤란합니다.”

    박종찬이 담배를 뻑뻑 피며 하소연을 했다.

    그의 맞은편에는 진유미와 그녀의 매니저.

    제작사 쪽에서 나온 또 다른 관계자가 위치하고 있었다.

    “거, 감독님이 예쁘게 봐주세요. 영화가 좀 어렵다 보니 애가 긴장 한 거 같은데.”

    “아니, 그게 말입니까 방구입니까. 어려우면 연기 대충해도 돼요? 영화 망칠 겁니까?”

    “크흠. 좀 살살 하라 이거죠. 대사나 분위기 좀 바꾸고. 네?”

    “허. 참. 장난해요? 지금 찍은 씬 보고 아무것도 안 느껴집니까? 진호 씨 열연하는 거 안 보여요? 완전 역작이 될 가능성이 있는데, 상대역이······어우 씨.”

    차마 면전에서 욕은 못하고 박종찬이 피던 담배만 밟아서 껐다.

    “차라리 따로 찍어서 교차 편집하는 건 어떤가요? 우리 애가 주눅 들어서 그런 거 같은데.”

    “안 돼요. 안 됩니다. 두 사람을 한 앵글에 담아서 대비해야 극의 긴장감이 살아요. 따로 찍으면 그게 뭡니까? 따로국밥도 아니고.”

    “끄응. 그럼 뭐 어떻게 하자는 건가요?”

    “아니, 좀 3자는 나가라고요. 거기 유미 씨. 여기 연기하러 온 거 아닙니까? 뒤에서 뭐해요? 이분들 유모입니까? 유미 씨 애에요?”

    박종찬의 쏟아내는 목소리에 진유미가 움찔했다.

    그녀는 이런 분위기가 낯설었다.

    촬영장에 가면 누구나 자신을 환대했었다.

    웃으면 좋아하고 카메라 앞에서 적당히 자세만 잡아도 박수 치며 환호했다.

    그런데 이곳은 대체 뭘까.

    자신에게 따박따박 따져 묻는 감독도 대놓고 적의를 드러내는 진호도.

    심지어 주변 스텝들마저도 자신을 반기지 않는다.

    이런 건 견디기 힘들었다.

    “저, 저 잠깐 쉬다가 올게요.”

    결국 진유미는 상황을 외면하고 도망쳤다.

    그리고 그것이 그녀가 촬영장에 모습을 드러낸 마지막 날이었다.

    #

    [감독 폭언? 욕설? 촬영장 불화로 모습을 감춘 여배우 진유미]

    [사라진 여배우. 촬영장의 혹독한 환경. 재조명을 받다]

    [그녀는 어디로? 여배우 진유미가 여자의 몸으로 겪어야 했던 수많은 고난들]

    며칠 뒤 기사가 쏟아져 나왔다.

    촬영장에서 진유미가 도망친 이후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음을 알아챈 것이다.

    “악질이네, 이거.”

    그리고 기사의 내용은 지독하게 편향적이었다.

    “진유미 쪽에서 손을 쓴 거죠. 이거 완전 우리만 나쁜 사람 됐는데.”

    “하, 참. 우리가 뭘 어쨌는데 이런 식으로 기사를 쓰는 건지.”

    “하여튼 기자 새끼들이 더 문제야.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그냥 넙죽 받아서 쓰잖아.”

    감독인 박종찬을 포함해 촬영팀 쪽에서는 난리가 났다.

    욕은 욕대로 들어먹는데, 이걸 해명해야 할 당사자는 모습을 감추고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더 억울한 건 따질 수가 없다는 점이다.

    제작비의 대부분을 대고 있는 회사가 진유미의 부친 쪽.

    그녀가 등 돌리고 나가면서 영화 계획 자체가 삐걱거리기 시작한 것이다.

    “아무래도 이거 다 같이 가서 사과라도 해야 할 거 같습니다.”

    “뭔 소립니까? 우리가 사과를 왜 해요? 촬영 망치고 도망친 건 그년인데.”

    “아니 그럼 어째요?”

    “아니, 촬영 펑크냈으면 계약 상 어쩌고 저쩌고로 잘라야지. 안 그래도 마음에 안 들었는데 그냥 배역을 교체해 버립시다.”

    “아이고, 이 양반아. 물정을 그렇게 모르나? 여기서 유미 씨 자르면 영화가 통째로 파토납니다. 파토요.”

    현실적으로 갑은 진유미 쪽이고 을이 감독 쪽이었다.

    이미 언플까지 해 놓은 마당에 배역 교체는 무리수였다.

    “형. 어떻게 해요?”

    “······”

    덕분에 근심이 깊어져 가는 건 진호였다.

    연기로 고집을 꺾어주자, 라고 생각을 했을 뿐.

    설마하니 촬영장에서 도망친 뒤 언플이나 할 줄이야.

    그래도 배우인데 이런 행동을 할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내가 책임을 져야지.”

    무거워진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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