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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0만 전생 배우-30화 (30/178)
  • Chapter13. 리얼리티를 더하다(1)

    삐걱거리는 형태로 대본리딩이 끝났다.

    진유미는 몇 번이나 더 불만을 제기했지만 그때마다 진호가 받아쳤다.

    애초에 연기력 자체에서 비교가 안 되는 둘이었다.

    고생한 건 결국 주변 사람들이었다.

    마찰이 생길 때 마다 분위기를 환기하고 진정시켜야 했다.

    “그 여자 진짜 악질이네요. 와. 어떻게 그러냐?”

    회사로 돌아가는 길에서 송학이 볼멘소리를 냈다.

    그도 스텝 자격으로 리딩에 참가했었다.

    사사건건 시비 거는 진유미도 꼴 사나웠고 그때마다 어르고 달래는 주변 인간들도 추했다.

    “어지간히 곱게 큰 모양이네요. 주목을 못 받을 것 같으니 대놓고 가시를 드러내는 걸 보니.”

    “얼굴은 그렇게 예쁜데. 사람이 참 추해요.”

    “주변에서 곱다, 곱다 하니까 저렇게 된 거죠. 어디 가서 쓴 소리도 들어 본 적 없을 겁니다. 모든 관심은 자기가 가져야 마땅한데 아니꼽다 이거죠.”

    “이거, 초장부터 영 불안하네요.”

    어찌 아닐까.

    투자를 받고 제작에 들어가도 영화가 엎어지는 건 비일비재한 일이다.

    주연 두 사람이 시작부터 싸우고 있으니 제대로 굴러가기나 할까.

    걱정하는 건 송학만이 아니었다.

    “대표님과 상의해 볼래요? 지금이라도 배역을 고사한다든지.”

    어쩌면 이것이 하나의 해결책.

    “아뇨. 괜찮습니다. 한 번 맡은 배역을 그렇게 쉬이 포기 할 수는 없죠. 조금 어려움이야 있겠지만 극복해 낼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진호는 포기하기 싫었다.

    그건 어떤 비전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오기.

    곱게 자란 아가씨의 투정 때문에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바로 연습하러 가죠.”

    연기로 때려 줄 생각이었다.

    #

    작중 진호의 배역은 경찰이다.

    하지만 스크린에서 그려지는 평면적인 캐릭터는 아니었다.

    정의감 넘쳐서 범인을 때려잡거나 사사건건 사건에 끼어들지도 않았다.

    되레 그런 쪽에는 무관심하고 무감각한 인물이었다.

    “살짝 남호와도 닮았어.”

    그렇기에 박종찬이 캐스팅 한 것일지도 모른다.

    아무래도 연기변신을 하기에는 진호의 경력이 짧으니까.

    전작의 캐릭터를 이어가는 쪽이 인기에도 연기에도 더 유리했다.

    “남호의 성격. 셜록 홈즈의 캐릭터. 그리고······”

    경찰이라는 특성.

    진호는 대본을 바탕으로 캐릭터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그의 전생은 이제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여러 가지 캐릭터가 수십, 수백 가지로 나뉘고 또 합쳐지기를 반복했다.

    “음. 이렇게는 모자란가?”

    하지만 부족했다.

    캐릭터의 입체성이라는 것은 결국 현실에 기반 하는 일.

    남호의 성격에 셜록 홈츠의 관찰력을 지녔다고는 하지만 두 인물 모두 경찰은 아니었다.

    경찰의 사고, 경찰의 방식, 경찰의 시선.

    진호가 알고 있는 건 모두 표면적인 상식에 불과했다.

    “또 다른 전생. 아니, 이번에는 현생에서 찾자.”

    전생 중 누군가 경찰이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1, 20년만 지나도 확확 바뀌는 것이 현대의 사법체계.

    단순한 경험이라면 과거의 것으로도 충분하겠지만 이번에는 조금 더 디테일 한 것을 추구하고 싶었다.

    현재에서 경험하는 것으로.

    “네. 대표님. 한 가지 부탁드리고 싶은 일이 있는데······”

    느리지만 확실한 방법이었다.

    #

    “현석이한테 이야기는 많이 들었네.”

    진호는 최현석 대표를 통해 지역 경찰서 서장을 소개받았다.

    동문에 친한 친구 사이라고 했다.

    “본래는 안 되는 거지만 현석이 부탁이라서 특별하게 들어주는 거네. 견학 개념이니 절대로 쓸데없는 짓은 하지 말고.”

    “명심하겠습니다. 어려운 부탁이었을 텐데, 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뭐, 가기 전에 싸인 하나 해 주면 그걸로 됐네. 우리 딸아이가 그쪽 팬이라서.”

    “열 장이라도 해 드려야죠.”

    사인 열장과 사진 한 장으로 대가를 지불했다.

    이어, 서장의 호출로 온 형사과 과장이 진호를 인계받았다.

    “자자, 다들 모여. 오늘부터 한 동안 우리와 함께 생활할 홍 진호 씨다. 영화 배역 때문에 경찰에 대해서 배우고자 온 거니까 다들 협조 잘 하고.”

    “이야, 남호 아닙니까? 남호.”

    “뭐야. 너 알어?”

    “알지 인마. 드라마 안 보냐?

    작중 진호의 캐릭터는 형사과 출신.

    영화 시나리오 상 강도 사건을 조사하던 주인공이 범인과 우연히 얽히며 사건이 진행된다.

    행동반경이나 주변 인물 역시 형사과 내부였다.

    “이야, 배역 때문에 공부하러 오셨습니까?”

    “불편 드려서 죄송합니다. 옆에서 조용히 관찰만 하다 갈게요.”

    “아이고, 그거야 상관이 없는데. 배우 분께서 험한 일을 견딜 수 있을지가 걱정이라.”

    “몸 하나는 튼튼합니다.”

    썩 반기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배우를 봤다는 신기함은 잠깐이었고, 결국 불편함만 남았다.

    형사과는 폭행, 조직폭력, 강도 등 강력 범죄를 다루는 경찰 조직.

    그걸 과연 배우가 따라 올 수 있을까.

    과정에서 문제는 없을까.

    모두가 같은 걱정을 했다.

    #

    형사과 1팀 팀장 전일근은 내키지 않았다.

    형사과 업무는 정말로 거칠고 고된 것이 많다.

    다치기도 많이 다치고 잠도 못 자 피로에 골골 거리는 것도 일상이었다.

    그런데 배우?

    서장의 명령이 아니었다면 콧방귀도 안 뀌었을 것이다.

    ‘며칠 고생하면 떨어져 나가겠지.’

    그래서 궁여지책에 아이디어를 하나 짜 냈다.

    용의자 수색 잠복조에 진호를 딸려 보낸 것이다.

    좁은 차 안에서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사람을 기다리며 며칠이나 허송세월을 해야 하는 일.

    배우라면 제풀에 지쳐서 떨어져 나갈 거라 생각했다.

    “잡았다고?”

    “네. 삼일 째 되는 날인가, 애인 보러 온 놈을 진호 씨가 발견해서. 고대로 습격해서 잡았습니다.”

    “삼 일 째에? 멀쩡했고? 뭐, 집에서 자다가 그때 우연히 온 거야?”

    “아뇨. 우리보다 더 열심히 하던데요? 아주 그냥 눈에 불을 켜고 감시하고 있어서, 좀 자라고 말리기까지 했습니다.”

    근데 어째 상황이 조금 이상하다.

    감시 업무에 딸려 보낸 형사들이 말하기를 ‘일하기를 우리보다 더 형사 같았다.’라고 감탄에 감탄을 거듭했다.

    고작 배우가 말이다.

    “그래봐야 반짝이지. 배우 나부랭이가 얼마나 버티겠어. 괜히 이상한 환상 같은 거 심어주지 말고, 더럽고 힘든 일 쪽으로 끌고 다녀.”

    “그러다가 서장님한테 혼나지 않을까요?”

    “됐어, 인마. 현장은 팀장거야. 내가 내 사람 굴리는데 누가 뭐라고 그래?”“뭐, 저희야 팀장님이 까라면 가는 거죠.”

    그래서 며칠을 더 굴렸다.

    증거품 수색을 위해서 하수도를 배회시키고 무섭기 짝이 없는 건들들 취조도 밖에서 구경하게 했다.

    보통 사람이라면 학을 뗄 만큼의 강행군.

    하지만 진호는 힘들다는 말 한 마디조차 하지 않았다.

    되레 업무에 치인 형사들만 앓는 소리를 냈을 뿐.

    “거, 진호 씨. 한 번 물어나 봅시다.”

    결국 전일근은 자신이 직접 진호를 맡았다.

    왜 이렇게 열심히 하는 거냐.

    적당히 하다가 돌아가면 안 되는 거냐.

    이런 걸 따져 묻기 위해서.

    “수사 과정 말입니까? 곁눈으로 보기는 했는데, 제가 말하면 업무에 방해가 될까봐······”

    “아니, 그런 건 또 언제 봤습니까?”

    “상해 건이라서 유심히 봐 뒀죠. 보아하니 배우자를 용의자로 보고 있던데.”

    “일단 뭐 제 1용의자죠. 알리바이도 없고.”

    “그렇죠. 그렇긴 한데······”

    하지만 묻기도 전에 이야기가 다른 쪽으로 흘렀다.

    최근 난항에 빠진 주부 상해 사건이었다.

    “아, 뭡니까? 말 흐리지 말고 끝까지 해 보세요.”

    “그냥 개인적인 의견이니까 흘려 들으세요. 사실 신고 초기부터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거든요.”

    “이상해요?”

    “네. 집 앞에서 습격을 당했다고 하는데 시간이 한 낯이잖아요. 근데 주변 청취 내용에서 다른 인물을 봤다는 내용이 없더군요. 복도식 건물 1층이면 상가나 놀이터에서 훤히 보이는 구조인데.”

    “그런데요?”

    “어쩌면 범인 따로 없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요.”

    “범인이 없다?”

    전일근이 관심을 보였다.

    안 그래도 용의자 압축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건이었다.

    “자해공갈이죠. 스스로 상해를 가한 뒤, 피습을 당했다고 신고를 한.”

    “동기가 뭡니까? 딱히 그럴 이유가 없어 보이는데.”

    “이건 뭐 제 생각이긴 한데······아마 내연남 때문이지 않을까 합니다.”

    “내연남? 내연남이 있다는 내용은 없습니다만.”

    “반지를 자주 빼서 자국이 희미해진 부분이나, 새것으로 보이는 키홀더. 차가 있음에도 자주 택시를 이용해서 교외로 나간 점 등······그냥 몇 가지 눈에 밟히는 부분이 있더군요.”

    전일근은 잠시 멍하니 있다 내부 전화로 팀장을 호출했다.

    그리고 사건 내용을 쭉 훑으며 다시 브리핑을 받았다.

    놀랍게도 진호의 말은 모두 사실이었다.

    “이야. 이거 어쩌면 진호 씨 말대로 내연남이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부부관계가 안 좋다는 말에 단순 상해 사건이라 생각했는데. 어쩌면 더 복잡할지도 모르겠어.”

    “조금 더 조사해 보겠습니다.”

    추가 지침을 더 내렸다.

    사건 해결에 실마리가 생겼다는 사실에 형사들은 조금 더 밝아진 얼굴로 움직였다.

    “허, 이거 참. 진호 씨. 전직 흥신소 출신이거나 그런 건 아니죠?”

    “설마요. 그냥 곁에서 보고 배운 걸로 운 좋게 찍은 겁니다.”

    “운으로 다 되면 우리도 그냥 점집 차리죠. 이번에는 확실히 신세 졌습니다.”

    “신세라고 할 게 뭐가 있습니까. 저도 배우기 위해서 같이 일 하고 있을 뿐인데.”

    “허······볼수록 참 대단하네요. 배우는 다 그런 겁니까? 생소한 배역 맡을 때 마다 직접 발로 뛰고?”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고. 근데 이번에는 좀 더 열심히 해야 할 이유가 있어서요.”

    “이유요?”

    전일근의 질문에 진호는 웃는 걸로 답을 대신했다.

    아무리 진심이라도 경찰 앞에서 ‘때려주고 싶은 여자가 있어서요.’라고 말 할 수는 없었다.

    무기가 연기라고 해도.

    #

    시간이 훌쩍 지나가 촬영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진호는 경찰서 견학과 연기 연습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날을 보냈다.

    그나마 친하던 은서 등과도 연락이 어려울 정도로 바쁜 나날이었다.

    “이제 촬영 들어간다고?”

    “네. 촬영 들어가면 이제 더는 못 올 거 같네요.”

    “거, 아쉽네. 진호 씨가 있어서 편했는데.”

    팀장 진일근이 입맛을 다셨다.

    진호를 탐탁지 않게 여겼던 건 초반 뿐.

    동행에 익숙해지고 넌지시 이런 일 저런 일 상의를 하다 보니 이렇게 도움 되는 사람이 또 없었다.

    뛰어난 관찰력에 훌륭한 상황 추리력.

    현직 형사들이 놓치는 부분도 많이 잡아냈다.

    이제는 떠나는 것이 아쉬울 따름이었다.

    “하하. 그 동안 참 많이 배웠습니다. 나중에 영화 개봉하면 시사회에 초대할게요.”

    “오, 그래주는 건가?”

    “당연하죠. 신세 진 게 있는데.”

    게다가 성격은 또 어떠한가.

    배우라고 오만한 것도 아니고 항상 웃는 얼굴이다.

    싹싹하고 예의가 발라서 형사과 내에서도 싫어하는 사람이 없다.

    ‘이런 사람은 뭘 해도 성공하지.’

    딸이라도 하나 있으면 소개시켜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영화 잘 찍고. 우리한테 배운 거니까 형사 역에 어설픈 모습이 있으면 안 돼. 누가 봐도 형사구나, 싶게 연기를 하라고.”

    “명심하겠습니다. 서에 누가 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서 연기할게요.”

    “그래. 아, 그리고 한 가지만 더. 전에 말했지? 이번에는 더 열심히 하는 이유가 있다고. 그거, 지금 들어 볼 수 있을까?”

    못내 궁금했던 부분이다.

    진일근이 진호에게 은근하게 다가섰다.

    진호의 답은 짧고 간결했다.

    “혼내주고 싶은 여자가 있어서요.”

    지금이라면 가능 할 거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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