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만 전생 배우-29화 (29/178)

Chapter12. 차기작(2)

사전 미팅 자체는 길지 않았다.

주연배우와 관계자들이 가볍게 인사를 하는 정도.

작품 내적인 이야기는 거의 나오지 않았다.

“가시죠.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제가 사도록 하겠습니다.”

실제로 대부분의 관계자들이 이런 입장이었다.

안면 텄으니 술이나 한 잔 하자.

어딘가 가벼운 회식 분위기였다.

“전······”

“아, 특히 주연 두 분은 빠지면 안 됩니다. 이럴 때일수록 자리 지키면서 작품의 돈독함을 유지해야죠. 안 그렇습니까, 감독님?”

“끄응.”

박종찬은 내키지 않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주요 관계자들이 전부 움직이는 자리를 마냥 무시 할 수도 없었다.

불편해하는 진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한 두 시간만 참자.”

“원래 이러는 겁니까?”

“가끔. 돈 놀음이 흥에겨우면.”

인기 많은 배우에 대량의 자금.

영화판의 많은 관계자들이 단 두 가지로 영화의 흥행을 예상하곤 한다.

실제로 얼마나 많은 변수들이 그 안에서 작용하는지 전혀 알지 못 한 채.

그렇기에 몇 가지 단순한 변수만으로 이들은 성공하리란 확신으로 웃을 수 있는 것이다.

“자자. 다들 들어오시죠.”

그렇게 낯선 차를 타고 낯선 길을 따라서 도착한 곳.

진호는 생전 처음 보는 고급 일식집이었다.

입구부터 기모노를 입은 여성이 나와서 일행을 안내하고 고급 조각상과 그림 따위가 곳곳마다 배치되어 있었다.

너무나도 익숙하지 않은 분위기였다.

“이런 곳에는 처음 오시나 봐요?”

지금껏 말이 없던 진유미다.

진호는 무어라 답을 할까 망설이다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익숙지 않은 것이 부끄러운 일은 아니었다.

“흐응. 듣기로 전에 일반 회사원이었다고. 맞나요?”

“네. 광고 회사에서 잠깐 일을 했습니다.”

“광고회사. 직원?”

“네. 그냥 일반 직원이었죠.”

“그렇군요.”

진유미는 웃는 듯 아닌 듯 미묘한 얼굴로 스쳐갔다.

가게 안으로 들어가기 전 그녀가 건넨 대화의 전부였다.

‘뭐야, 저 여자.’

진호는 왠지 불쾌했다.

#

어색하다.

집에 돌아가고 싶다.

진호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나이 많은 사람들 사이에 끼어서 의미 없는 술잔을 주고받는 자리가 불편했다.

“자리가 불편한가 보네요.”

또 이 여자다.

진호는 슬쩍 말을 붙여오는 진유미를 곁눈으로 봤다.

주연은 작품의 꽃과 같다며 두 사람을 붙여서 앉혀 놓은 결과였다.

“말했다시피 평범한 회사원 출신이라서요. 이런 자리는 불편하기만 하네요.”

“그렇군요. 하지만 앞으로는 익숙해져야 할 겁니다. 작품을 하다보면 종종 생기는 자리니까요.”

“······그쪽은 익숙한 겁니까?”

“제게 그런 걸 묻다니. 재미있는 분이네요.”

나직한 웃음.

그 안에 깃들어 있는 건 유쾌함이 아니었다.

술잔을 내려놓은 진유미가 말을 덧붙였다.

“솔직하게 말씀 드릴게요. 전 상대역으로 다른 배우를 원했습니다.”

“······그렇습니까?”

“안 지혁이라고 아시나요?”

“네. 대충은.”

“그 사람이면 상대역으로 충분 할 거 같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아버님께 부탁을 했는데 아쉽게 무산 된 모양이네요.”

이런 말을 대놓고 해도 되는 건가?

진호는 진유미의 생각을 이해 할 수 없었다.

“스릴러라고는 하지만 주연 배우간의 접점이 많아요. 그쪽 얼굴과 제 얼굴. 아무래도 맞는 급은 아닌 거 같네요.”

“급? 급이라고 했습니까?”

“불쾌해도 어쩔 수 없어요. 어차피 영화는 보이는 게 전부니까요. 그쪽과 같은 얼굴로 저와 같은 주연이라는 것이 굉장히 안타깝네요.”

조곤조곤 사람을 씹어 대는 게 이런 걸까?

진호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여자를 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혹시 지금이라도 배역을 고사해 주실 순 없을까요?”

“······그걸 말이라고 하는 겁니까?”

“역시 그렇겠죠. 평범한 회사원이었던 사람이 영화 주연을 언제 또 해보겠어요. 이해합니다.”

“저기. 영화가 얼굴로 만들어지는 게 아닌 건 알죠?”

“연기력이라 이건가요?”

“요인 중 하나죠. 얼굴만큼 중요한.”

“어쩌죠? 어차피 연기력이라는 거, 대충 편집으로 커버가 되는 영역이잖아요. 하지만 얼굴은? 발버둥 쳐도 타고 난 얼굴은 어쩔 수 없죠.”

남일수보다 더 재수 없는 사람이 여기 있었다.

“하아. 더 이상 얘기해 봐야 의미가 없겠네요. 촬영. 어떻게든 해 봐야죠.”

“이봐요······”

“그럼 전 이만.”

진호의 말을 싹둑 자르며 자리를 뜨는 진유미.

그녀는 총총 걸어 관계자들이 있는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생긋생긋 웃는 얼굴 어디에서도 방금 전의 독설은 읽을 수 없었다.

‘재수 없는 년!’

진호는 술잔을 소리 나게 움켜쥐었다.

연기를 시작하고 겪어 본 모든 일 중 최악의 경험이었다.

세상에 이런 사람이 진짜로 있구나, 싶을 정도.

“촬영에서 두고 보자고.”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

“그 여자 유명해.”

핸드폰 너머에서 들려오는 은서의 목소리가 차가웠다.

“너도 같이 작품 한 적 있어?”

“아니. 그렇지는 않아. 근데 같이 일해 본 사람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보통 고약한 게 아니야.”

“그 정도야?”

“감독님이나 높은 사람들한테는 살랑살랑 잘 대해. 근데 조금만 자기랑 안 맞는다 싶으면 가차 없어. 조곤조곤 독설을 뱉는 게 완전 살모사라잖아.”

살모사라는 묘사가 전혀 부족하지 않다.

진호는 직접 경험해 보지 않았는가.

“그리고 하나 더. 남자 배우랑 굉장히 안 좋은 소문이 있어. 이건 확인한 게 아니라서 나도 이렇다 말하긴 그렇지만······”

“얼굴 가지고 품평 하는 거면 이미 겪었다. 자기랑 급이 안 맞는다고 하네.”

“어, 진짜? 와. 그 여자 아주 못됐네. 진호 오빠 얼굴이 뭐가 어때서? 잘 생기기만 했구만.”

“객관적으로?”

“······요즘은 개성 시대잖아. 그거면 충분하지.”

진호가 살짝 울컥하려는 걸 참았다.

“아, 근데. 내가 하려는 말은 그게 아니었어.”

“뭐가 또 있냐? 아주 양파 같은 여자네.”

“소문이긴 한데······남자 배우를 한 번씩 거쳐 간다고 하더라.”

“거쳐 가다니?”

“그거 있잖아. 연기 중에 눈 맞아서 그렇고 그렇게 되는 거.”

“아, 그거. 전부 다?”

“소문에 의하면. 남자를 트로피로 생각한다나?”

그 여자가?

진호는 진유미를 머리에 그리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술자리에서 보였던 태도를 보건데 그럴 가능성은 없었다.

“그건 걱정 안 해도 될 거다. 나한테는 관심이 전혀 없어. 얼굴가지고 급 따지는 여자니까.”

“그래도 또 모르지. 막상 연기 들어가면 얼굴 말고 다른 부분에서 매력을 느낄 수 있으니까.”

“그래도 그건 좀.”

“아니야. 오빠는 자기가 연기 할 때 어떤 모습인지를 몰라서 그래. 밖에서 지켜만 봐도 빨려 들어가는데, 상대역이면 어떻겠어?”

은서 자신이 그랬었다.

진호의 깊은 연기는 사람을 잡아당기는 힘이 있었다.

단순히 외면으로 평가 될 그런 수준이 아니었다.

“하여튼, 그 여자가 꼬리쳐도 절대 반응하지 마.”

“그럴 리는 없지만, 만약에 그렇다 쳐도 내 쪽에서 사절이다. 그렇게 재수 없는 여자는 사양이야.”

“그렇지? 오빠라면 그럴 줄 알았어.”

“너, 왜 그렇게 텐션이 높아졌냐?”

“뭐, 뭐래. 그냥 좋은 배우가 괜히 구설수에 엮일까봐서 그렇지. 난 분명 충고 했다? 나중에 뭐라고 하기 없기.”

말까지 더듬더듬 거리며 황급히 말을 마무리 지었다.

뚝 끊긴 핸드폰을 보며 진호가 머리를 긁적였다.

‘통화로는 카사노바가 안 움직이나?’

여자는 여전히 어려웠다.

#

영화 캐스팅 작업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조연, 단역, 카메오.

필요한 곳에 필요한 사람을 뽑았다.

진유미라는 낙하산이 있기 때문인지 제작사 쪽에서는 박종찬에게 크게 개입하지 않았다.

덕분에 남은 배역은 그의 입맛대로 꾸리는 것에 성공했다.

“형! 저도 뽑혔어요!”

그 안에는 하윤이도 포함되어 있었다.

단역과 조연의 중간 정도.

분량은 적었지만 그래도 대사가 있는 역할이었다.

축하 의미로 뷔페 쿠폰을 보내 주었더니 아주 좋아했다.

“제 대사가 너무 적은 거 같아요.”

문제라면 역시 이 여자.

진유미였다.

“유미 씨. 이 장면은 비중이 크게 없어요. 짧게 지나가는 부분인데 대사를 길게 넣을 이유가 없죠.”

“그래도 제가 처음 등장하는 부분이잖아요. 조금만 더 대사를 넣어 주면 안 돼요? 네? 감독니임.”

배역 캐스팅이 끝나고 대본 리딩을 위해 모인 자리.

순조로웠던 앞 씬에 비해 그녀 파트로 들어가자 벌써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거, 박 감독님. 우리 유미 양이 이렇게 말하는데 대사 몇 개 더 추가 합시다. 그게 어려운 일도 아니고.”

“······”

한 술 더 뜨는 건 스탭 지위로 참여한 관계자들.

카메라 없이 비공개 진행인데 꾸역꾸역 들어와서는 한 자리씩 차지하고 있다.

“안 될까요? 네? 감독님.”

“······짧게 몇 마디만 추가하도록 하죠.”

“와! 고마워요, 감독님. 최고.”

박종찬도 어쩔 수 없었다.

마음 같아서야 머리채 잡아다가 구석에 처박아 두고 싶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영화 자본의 상당수가 진유미 부친 회사 쪽.

배급사와 얽힌 이해관계를 생각하면 지분은 더 올라간다.

이 상황에서 감독은 철저한 을이었다.

“후우. 수정 할 동안 다음 씬 먼저 보죠. 진호 씨. 준비 됐나요?”

“네. 문 선배님하고 대면하는 장면이죠?”

“네. 사건 피해자의 가족과 처음으로 대면하는 장면이니 꽤 중요합니다. 흐름대로. 한 번 가보죠.”

작중 진호의 역할은 경찰.

피해자의 가족을 만나서 범인을 잡겠다고 다짐하는 부분이었다.

“선배님, 잘 부탁드립니다.”

“어이구, 나야 말로 잘 부탁해야지. 우리 스타 후배님 연기를 잘 따라가려면.”

“겸손이 과하시네요.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진호는 선배 연기자 문호준과 함께 호흡을 맞췄다.

상황에 따른 대사와 제스쳐 등은 이미 익혀 두었다.미묘하게 변하는 감정 변화 역시.

“음. 음. 역시 좋군.”

리테이크 없이 한 씬을 통째로 소화했다.

문호준은 매우 흡족한 얼굴로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대본 리딩만 봐도 대충의 견적은 나오는 경력자였다.

진호의 호흡이나 발성.

표정 등은 배역에 대한 충분한 연구를 마친 결과였다.

“생각보다 좀 약한데요?”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유미 씨. 대본 리딩에 대한 건 자기 배역에 대해서만 말해주세요.”

“제 상대역이잖아요. 저래서야 화면에 잘 받을까요?”

“아······”

박종찬은 썅, 이라는 말이 나오는 걸 겨우 참았다.

리딩 과정에서도 연기나 대사 등으로 싸우는 일이 많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배역에 대한 것.

다른 사람의 연기를 두고 왈가왈부하는 건 굉장히 무례한 일이었다.

“제 연기가 마음에 안 드나 보네요?”

“그냥 뭐랄까. 워낙 연기가 좋다고 호평이었잖아요. 기대보다는 조금 못한 거 같아서요.”

“어떤 점이 말인가요?”

“아니, 그렇잖아요. 피해자 부모를 처음 만나는 자리인데 별 다른 감정 동요도 없고. 나무 토막인줄 알았어요.”

“······”

진호는 잠시 말을 아끼고 진유미를 바라봤다.

아직 남아 있는 셜록 홈즈의 관찰력이 그녀를 낱낱이 훑었다.

“유미 씨. 혹시 대본 제대로 안 봤어요?”

“뭐라고요?”

“대본 말이에요. 처음부터 끝까지. 상대역인데 상대 배역 캐릭터가 어떤지 정도는 이해를 하셔야죠.”

좁아지는 미간.

가볍게 들어가는 아래턱.

표정에서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

“극중 제 캐릭터는 냉소적인 사람이에요. 사람을 사물처럼 관찰하는 성격이죠. 그런 인간이 피해자 부모를 만났다고 감정적인 동요를 할 것 같나요?”

“그래도 너무 무미건조하잖아요. 그래서 무슨 재미가 있겠어요?”

“겨우 한 장면 재미있자고 영화 전체를 망가뜨리겠다는 건가요? 이번 영화의 중요 포인트는 긴장감이에요. 신파가 아니라.”

“그래서 뭐. 일부러 그런 연기를 했다, 이건가요?”

“그걸 말로 해야 하는 건 꽤 피곤한 일이네요.”

잘근, 하고 입술 씹히는 소리가 들린 것 같다.

진호는 이 부분에서 확실하게 알아차렸다.

진유미가 엿보인 ‘무시’나 ‘멸시’는 다른 감정에서 갈라져 나온 부가적인 것이었다.

실제로 그녀가 자신을 바라보는 진짜 감정은.

“지금 잘난 척 하는 건가요!?”

질투였다.

“워워. 왜들 이러실까.”

“진정하세요, 진정. 시작부터 이러면 어떻게 해.”

“박 감독님. 잠깐 쉬었다가 가죠.”

“유미 씨. 물 마셔 물. 진정하고. 응?”

우르르 몰려오는 사람들.

그 가운데서 표독스럽게 째려보는 진유미.

진호 역시 맞은편에 서서 그녀의 시선을 정면으로 받았다.

‘트로피라고 하더니.’

어떤 사람인지 조금씩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이년을 어떻게 요리할까.”

남에게는 들리지 않는 목소리.

이건 누구의 감정이었을까.

진호는 굳이 구별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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