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12. 차기작(1)
“그래서 아직 결론을 못 내렸다고?”
뉘엿뉘엿 저물어 가는 해를 바라보며 은서가 물었다.
한 손에는 방금 내린 커피가 들려 있었다.
“한참을 의견 조율하다가 스케줄 때문에 나왔지. 쉽지가 않더라.”
“당연하지. 감독들이 얼마나 고집쟁이인데. 자기 주관이 뚜렷하지 않으면 감독질 못해먹거든.”
“너도 그런 적 있어?”
“그 정도는 아니지만 비슷하게는.”
사람마다 다른 법이지만 예술가들은 대부분 에고가 강하다.
자신의 철학을 고집하고 다른 색을 거부한다.
“내가 고집을 꺾어야 하려나?”
“작품은 마음에 들어?”
“······글쎄. 시나리오는 전체적으로 괜찮아. 캐릭터도 좋고. 다만, 마무리가 역시 걸려.”
“그럼 좀 더 싸워 봐.”
은서가 다 먹은 커피 빨대를 손가락으로 튕겼다.
“배우에도 여러 가지 타입이 있어. 감독에 순응해서 캐릭터를 뽑아내는 타입. 감독과 싸워서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타입. 오빠는 후자에 가까운 가 보네.”
“딱히 내가 고집이 세다는 생각은 안 해 봤는데.”
“슬슬, 자신의 에고가 나오는 거지. 처음에는 그저 연기만 해도 좋을 뿐인데. 언제가 부터는 분량이 많았으면 좋겠고. 그러다 보면 이야기를 다른 방식으로 풀었으면 싶은 거야.”
“욕심이라 이건가?”
“욕심이라면 욕심이지. 근데 사람치고 욕심 안 부리는 사람이 있을까? 우린 부처가 아니라고.”
박종찬과 대면한 진호의 전생은 셜록 홈즈.
하지만 그 에고의 바탕에는 자신이 있었다.
감독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주장하고 싶은 진호 자신의 에고.
“어렵네, 어려워. 그냥 연기만 하면 될까 싶었는데.”
“히히. 계속 고민해 보라고. 이 바닥. 쉬운 일이 없어. 끝없이 투쟁하고 자기 자리를 마련하지 않으면 금세 밀려나 버린다고.”
“그건 자기 자랑?”
“산 증인이라 이거지.”
건치를 내보이며 웃는 은서의 얼굴이 참 예쁘다.
가녀려 보이지만 그녀 말마따나 치열한 연예계 바닥에서 살아남은 승자.
웃을 수 있는 것도 강인함의 증거였다.
“근데, 진호 오빠. 한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응? 뭔데? 나 때문에 나와 줬는데 나도 보답을 해야지.”
“그······촬영 말인데.”
“촬영?”
“응. 그때 같이 했던 촬영.”
은서가 빈 커피 컵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목소리도 어쩐지 작아져 있었다.
“아직 촬영이 끝······”
“여기 있었구만!”
“응? 어? 감독님?”
그 순간이었다.
박종찬이 은서의 작은 목소리를 누르며 성큼성큼 다가왔다.
“전화가 안 돼서 말이지. 꺼 놓은 건가?”
“아. 죄송해요. 배터리가 다 나갔었네요. 그보다 여기는 무슨 일로 오셨어요?”
“아이디어가 떠올라서 말이야. 이런 방식은 어떨까?”
박종찬은 가타부타 진호 옆에 앉더니 자신이 써내려간 여러 가지 시나리오를 보여 주었다.
두서도 없고 글씨도 악필이라 보기 힘들었다.
“호오. 이런 식으로. 중간에 살짝 힌트를 던지는 거군요.”
“그렇지. 일부러 트릭 유도를 하는 거야.”
“이러면 설득력도 늘어나고 연기에 대한 부담도 줄겠네요.”
“어때? 마음에 들어?”
“근데, 이 부분은 말이죠······”
하지만 진호에게는 딱히 장애물이 아니었다.
그는 박종찬의 말에 맞장구를 치기도 하고 반대를 하기도 하며 쉼 없이 말을 쏟아냈다.
“······”
덕분에 제3자로 밀려나게 된 건 은서.
그녀는 입을 뻐끔거리며 두 사람을 한 동안 노려보다 낮게 한숨지었다.
‘지금은 일인가.’
열 올리며 논쟁하는 진호의 옆모습이 그럴듯했다.
턱을 괸 채 한참이나 그 모습을 감상했다.
“어이쿠. 은서 양 있었나?”
박종찬이 그녀에 대해서 알게 되는 건 한참 후의 일이었다.
#
진호가 눈을 가늘게 뜨고 상대를 살폈다.
부스스한 머리.
잠을 못 잔 듯한 얼굴.
손끝의 작은 떨림까지.
모든 단서는 결과로 이어졌다.
“네가 범인이다!”
“······뭐래요.”
아영이 부스스한 머리를 털어내며 퉁명스레 물었다.
“하하. 그냥 배역에 몰입 좀 하냐고. 어제 술이라도 달린 거냐?”
“으. 신입 회원이 부쩍 늘어난 덕분에 술자리도 배가 됐다 아닙니까. 회장이 빠질 수도 없고. 아으 속 쓰려.”
“이 시기에?”
“오빠 대문이잖아요. 인터뷰에서 우리 동아리 언급한 덕분에 학교 애들이 왕창 몰려왔구만.”
그랬었나?
진호가 옆머리를 긁적였다.
“근데 여긴 무슨 일이에요? 바쁜 거 아니었어요? 은서 언니가 그러던데, 오빠 배역 하나 따냈다고.”
“어. 영화 하나 들어가기로 했어.”
“여, 영화!? 진짜요?”
“응. 박종찬 감독님이랑 해서.”
“와! 박종찬 감독님! 다른 배역은요? 거기 뭐 감초 역할이라도 안 구한데요?”
좀비처럼 늘어져 있던 아영이 벌떡 일어났다.
눈이 화산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그건 내 권한이 아니라서. 오디션 있으면 내가 날짜 알려줄게.”
“네! 네! 그거라도 좋아요. 으라차! 좋아, 나도 놀고 먹는 회장이 아니라 이거야!”
“기운 좋네.”
“젊음이라 이거죠. 아, 근데 뭐였죠? 오빠가 여기 찾아온 이유.”
뒤늦게 본론을 떠올리고 아영이 물었다.
한창 바쁠 사람이 얼굴 한 번 보자고 찾아왔을 리는 없지 않은가.
“상대역 좀 도와 줄 수 있을까?”
“······상대역이요?”
그걸 왜 여기서?
아영은 두 눈만 깜빡였다.
#
진호는 어릴 적 티비에서 하는 전생체험을 따라했다.
그 이후로 한 번도 못 본 과거의 인물들의 일생을 경험했다.
그렇기에 전생을 경험하는 거라고 확신했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 믿음은 흔들렸다.
조조, 조운, 제갈량.
한 시대의 인물이 대체 몇인가.
이걸 전생이라고 치부 할 수 있을까?
게다가 셜록 홈즈.
이번에는 아예 실존하지 않은 가상의 존재다.
“다양한 상대역으로 연습을 해 보고 싶거든.”
“회사는요?”
“그쪽에도 부탁을 해 뒀지.”
그렇다면 실존하지 않는 캐릭터의 일생은 어떻게 반응하는가.
높은 지성과 압도적인 관찰력으로 유명한 셜록 홈즈.
상상속의 산물이 일생을 반영하여 연기로 투영 할 수 있는지가 의문이었다.
“기다려 봐요. 동아리 애들 불러올 테니까.”
“부탁하게. 끝나면 내가 한 턱 쏜다는 말도 하고.”
“아주 불이 나서 달려올 겁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다양성이다.
소설 속 캐릭터라면 아무리 입체적이라 해도 한계가 있을 터.
다른 인물들과의 차이점을 알고 싶었다.
전생은 과연 전생인가.
그에 대한 해답.
아니, 그보다는 이 ‘캐릭터’가 연기에 도움이 되는가.
“아, 안녕하십니까! 35기 진 옹남이라고 합니다!”
“팬입니다! 팬!!”
“우와, 진짜 진호다!”
“진짜로 고기 쏘시나요!?”
연습 대상이라면 넘치고 넘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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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당천이라 하던가.
진호는 혼자서 3시간 30분 가량을 열 두 명의 대학생들을 상대로 연기해냈다.
아니, 단순히 연기를 해 낸 것이 아니었다.
“······와. 괴물.”
“미쳤다, 진짜. 사람이 저렇게 연기 할 수 있구나.”
“배우가 저런 거라면 나는 포기해야겠는데.”
“괜히 뜨는 게 아니었네.”
압도했다.
같은 연기였음에도 진호는 열 두 명의 대학생들에 따라 전부 다른 모습을 보였다.
그것은 미묘했지만 거대했다.
열 두 명의 다른 진호가 있는 것처럼.
“진호 오빠. 도움이 됐어요?”
“어. 됐다마다. 덕분에 상쾌해졌다.”
열 두 번의 연기와 열 두 명의 셜록 홈즈.
진호는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셜록 홈즈가 실존 일문이든 가상의 인물이든 상관이 없다는 사실.
중요한 건 결국 상상력이었다.
셜록 홈즈라면 어떻게 반응했을까.
셜록 홈즈를 품고 있는 진호라면 어떻게 했을까.
의식과 무의식을 오가며 그 사실을 깨달았다.
“소고기 좋아하냐?”
“네!!!”
“네!”
“완전히요!”
고기값이 아깝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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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호는 오랜만에 하윤이를 만났다.
키도 조금 컸고 얼굴도 성숙해 보였다.
하지만 ‘단역 몇 개 더 했죠.’ 라며 해맑게 웃는 얼굴은 그대로였다.
“오디션 참가한다고?”
“네. 잘하면 진호 형이랑 같이 연기 할 수 있겠어요.”
배역 오디션.
남자 주인공 역할에는 진호가 낙점되었고 나머지 배역을 오디션으로 뽑는 중이다.
물론, 중요 배역은 이미 물밑작업에 들어가 있었다.
“준비는 많이 했어?”
“네. 네. 한 번 보실래요?”
“그래. 해 봐.”
하윤은 금세 진지한 얼굴이 되어 연기했다.
가능한 배역은 신문팔이 소년, 네 번째 피해자, 사건에 팁을 주는 배달부 정도였다.
단순하지만 그래서 더 연기하기 어려운 배역이었다.
“신문팔이 말이야. 새벽부터 나와서 일을 하는데 얼굴이 너무 밝지 않아?”
“그럼 좀 어둡게 할까요?”
“새벽에 일을 하면 보통 그렇잖아. 피곤하고 짜증나고. 처음 몇 개는 힘내서 할 수 있지만 뒤로 갈수록 목소리에 화가 붙지 않을까?”
“그렇게 한 번 해 볼게요.”
진호는 그런 하윤의 연기를 하나씩 짚어줬다.
여러 삶을 체험하고 그 안을 깊이 탐구한 덕분인지 보는 눈도 많이 높아져 있었다.
하나하나가 꽤나 도움 되는 조언이었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네. 떨지만 말고.”
“네. 꼭 합격해서 형이랑 같이 연기할게요.”
“기대할게.”
하윤은 양 손 가득 파이팅을 담고는 물러났다.
‘꼭 합격했으면 좋겠네.’
진호는 속으로 응원을 더했다.
“진호 씨. 미팅 시간. 얼마 안 남았어요.”
때마침 송학이 다가와 시간을 알려 주었다.
진호는 이곳에 하윤을 응원하기 위해서만 온 것이 아니었다.
낙점된 주연배우들의 사전 미팅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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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 배우가 캐스팅 되는 건 여러 가지 루트가 있다.
감독이 선호해서 직접 캐스팅을 하거나 제작사나 배급사 쪽의 요구로 접촉을 하는 경우.
혹은 배역에 맞는 신인을 발굴하기 위해서 대대적인 오디션을 여는 방식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모든 방식에는 장단점이 있다.
감독의 취향대로 영화에 색을 입히느냐, 제작사나 배급사의 취향에 맞춰서 제작을 원활하게 하느냐.
아니면 오디션 같은 방식으로 모험수를 두느냐.
모두가 만족하는 결과 따위는 없었다.
“이쪽이 여주인공 역을 맡게 된 진유미 씨.”
“반가워요, 진유미라고 해요.”
진유미.
슈퍼모델 출신의 배우로 이미 10대에 드라마 주연 자리를 꿰찬 바 있다.
색기 넘치는 외모에 풍만한 몸매.
섹스어필을 바탕으로 많은 인기를 구가하고 있다.
“하하. 우리 유미 좀 잘 부탁하겠습니다.”
하지만 그녀에 대한 설명은 이것으로 부족하다.
그녀가 일찌감치 드라마 주연 자리에 낙점 받고 CF나 화보 등으로 인기를 구가한 이유.
그녀가 모 그룹 이사의 딸이기 때문이다.
배역 경쟁자를 물리치고 CF등을 따내는 것에 그녀의 매력 외의 힘이 작용했다는 건 업계 사람 중 모르는 이가 없는 이야기였다.
“크흠. 잘 부탁이고 뭐고 제대로 연기를 못하면 언제든지 배역에서 빼 버릴 수 있다는 걸 알아주시길.”
“하하하. 거, 박 감독님. 너무 빡빡하게 하지 맙시다. 유미 양 긴장해서 벌벌 떨고 있지 않습니까.”
“다리 꼬고 앉아서 커피를 마시고 있습니다만.”
“어려서 긴장 표현이 그럴 뿐인거죠.”
제작사 측 대표로 온 사람하고 박종찬하고 긴장상태를 조성했다.
작품에만 신경 쓰고 싶은 박종찬에게 외압으로 캐스팅한 진유미는 아니꼬운 대상일 수밖에 없었다.
“자자, 초반부터 무겁게 가지 맙시다. 일단 주연 두 분 인사하시고.”
결국 다른 관계자가 중재하면서 넘어갔다.
진유미와 진호는 자리에서 일어나 서로를 보며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주연 배우는 영화의 핵심.
둘 사이의 합이 얼마나 잘 맞는지가 중요했다.
‘시선이······’
그런 점에서 진호는 불안을 느꼈다.
셜록 홈즈의 날카로운 관찰력은 진유미의 시선이 가진 의미를 단번에 꿰뚫었다.
살짝 가라앉은 눈동자, 좁아진 콧 볼, 말려 들어간 입술까지.
이것은 ‘무시’의 의미였다.
“잘 부탁해요.”
마지막 무미건조한 목소리에서 확신했다.
‘쉽지 않겠는데.’
벌써부터 촬영이 걱정되는 진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