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11. 그럼 이번엔 광고(2)
조금 삐걱거리기는 했지만 금세 적응되었다.
연인을 연기 할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런 자기 암시 때문에?
은서는 더 이상 지연을 신경 쓰지 않았다.
“아, 좋아요! 굿! 굿! 베리 굿뜨!”
촬영 감독은 연신 엄지손가락을 치켜 들었다.
초반, 어색한 기류에 촬영이 길어질까 걱정했는데 이 모습이면 일사천리였다.
달달한 분위기에 주변 스텝들도 발그레한 얼굴을 할 정도.
광고로 완성되면 효과는 보장 할 수 있었다.
“아니, 이렇게 잘하시는 분이 아까는 왜 그러셨데.”
“연기는 마음가짐 문제라고 하잖아요.”
“이야, 역시. 그럼 기세를 몰아서 마지막 장면까지 한 번에 갑시다.”
촬영은 일사천리로 이어졌다.
필요한 씬을 거의 한 두 테이크 만에 처리하고 완벽한 장면을 뽑아냈다.
감독은 엄지손가락을 들다 못해, 물개 박수까지 치면서 두 사람을 칭찬했다.
이 정도면 그의 감독 인생에서도 기리 남을 역작이 탄생한 수준이었다.
“수고했어. 하면 잘 하잖아.”
“······그야 오빠가 도와줘서 그런 거지. 오늘 고마웠어. 제대로 엉망이 될 뻔 한 걸 구해줘서.”
“난 그냥 촬영이 끝날 때 까지 너랑 사귄 것 밖에 없는데?”
“에잇! 이 아저씨가 왜 이렇게 능글맞아졌어.”
부끄러움에 은서가 진호의 가슴을 두드렸다.
무사히 촬영을 마쳤다는 안도감과 시간이 끝났다는 아쉬움이 함께 느껴졌다.
“수고하셨어요.”
“아. 지연 씨.”
“직접 보니까 진짜 느낌이 다르네요. 연기자 진호 씨라니. 상상해 본 적 없는 모습이에요.”
촬영을 마무리 하고 흩어지기 전.
지연이 다가와 말을 붙였다.
“사람은 여러 가지 면을 가지고 있다잖아요. 그때의 저와 지금의 저는 다른 사람이죠.”
“그렇군요. 그럼 그 모습을 저도 좀 알아 갈 수 있게 허락해 주실래요? 아까 듣지 못한 술 약속의 답을 듣고 싶어요.”
“음.”
진호가 짧게 숨을 골랐다.
그 모습에 은서는 마른 침을 삼켰다.
안 된다고 멱살을 잡을까, 라는 상상까지 머리를 스쳐갔다.
“아쉽지만 그건 안 되겠네요.”
하지만 진호의 답이 먼저였다.
“어째서요? 절 용서하지 못하는 건가요?”
“용서라기보다는 크게 감정이 없어요. 그때 일은 그냥 그렇게 흘려보냈거든요. 지금 함께하지 못하는 이유는 아직 끝내지 못한 약속이 있기 때문이에요.”
“약속?”
“네. 아직 촬영이 안 끝났거든요.”
지연이 어리벙벙한 얼굴로 진호를 봤다.
촬영이라니 대체 무슨 소리인가.
이미 다 끝나서 정리하는 분위기인데.
아니, 그렇지 않다고 해도 촬영과 약속이 무슨 관계가 있다고 거절하는 걸까?
“응. 응. 그렇네. 아직 촬영이 안 끝났네.”
그리고 이 여자는 왜 그 말에 좋아하는 것일까.
지연은 뭔가 짜증과 허무함이 섞인 복잡한 감정으로 진호를 봤다.
한 번 더 매달려 볼까.
작은 미련을 담은 채.
“기회가 된다면 일터에서 다시 보도록 하죠. 들어가세요, 지연 씨.”
“······”
하지만 이내 포기를 해야 했다.
진호의 얼굴에서 읽은 건 삭막함.
더 이상 다가갈 수 없는 벽이었다.
더 이상 자신에게 목매어 사랑을 구걸하던 남자는 없었다.
지연은 마른 입술만 씹어야 했다.
#
왜 그런 말을 했던 걸까.
아니,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었던 걸까.
광고 촬영이 끝나고 진호는 한 동안 고민했다.
자신이 자신 같지 않다는 느낌은 꽤 심각한 일이었다.
하지만 며칠에 걸쳐 고민한 결과.
생각은 잘 접어 사고의 저편에 넣어 두게 되었다.
사람은 변하는 동물.
그 속도가 남다를 뿐 나쁜 건 아니다.
게다가 이 변화가 나쁘지 않다는 건 스스로가 더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진호는 그냥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광고주도 쌍수 들고 만족했다고 하더라.”
“광고가 잘 뽑히긴 했죠.”
“흐흐. 잘 했다.”
“대표님, 웃는 얼굴이 너무 상업적으로 변한 것 같은데요?”
“돈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냐. 광고료가 두둑하니 아주 좋더라.”
연기 운운하던 최현석도 돈에 이렇게 웃지 않는가.
자판기 커피를 홀짝이며 진호도 낮게 낄낄 거렸다.
“자자, 농담은 됐고. 이거 받아라.”
“대본이네요? 또 들어왔어요?”
“드라마 말고 영화야. 박종찬 감독님이 만든다고 하더라.”
“박 감독님이요?”
“너랑 아는 사이라지?”
알다 뿐이겠는가.
연기를 시작할 무렵 단역을 제안했던게 감독님이다.
지금도 안부를 주고받는 사이.
“개인적으로 물어봐도 됐을 텐데. 회사로 보냈네요.”
“공사 구분을 하는 거지. 너한테 부담 주기 싫었을 수도 있고.”
“그런 건가······”
사적으로 물어 봤다면 거절하기 어려웠을 거다.
고개를 끄덕이며 대본을 펼쳐 봤다.
“형사라. 수사극인가요?”
“스릴러에 가까워. 형사가 범인을 쫓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비밀에 맞닥뜨린다는 내용.”
“흐음. 좀 자세히 검토해 봐도 될까요?”
“천천히 봐.”
진호는 자세를 잡고 대본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얼굴 좋고 연기 좋은 배우라 해도 흥행 여부는 결국 시나리오에 달려 있다.
이야기를 선별하는 것도 배우의 능력 중 하나였다.
‘유명 감독이 전생으로 안 나오려나?’
살짝 기대해 봤지만 그런 반응은 없었다.
“어때? 괜찮은 것 같냐?”
“전체 플롯은 마음에 들어요. 근데 살인범이 밝혀지는 방식이 조금······”
“왜? 마음에 안 들어?”
“너무 식상하다고 해야 하려나. 이런 건 감독님한테 말하면 건방지다고 욕먹겠죠?”
“무슨 소리야. 지금은 배우라고 입 닥치고 연기만 하는 시대가 아니라고. 의견은 적극적으로 전달해야지.”
진호가 미간을 찡그리며 대본 옆으로 빈 종이를 하나 꺼냈다.
슥슥, 무언가를 적어 내려갔다.
“아니, 이건 좀 아니지.”
고치고 다시 쓰기를 반복했다.
그 양이 A4용지 넉 장 분에 달했다.
“이 느낌인가. 대표님, 이거 한 번 봐 볼래요?”
“그래, 그래.”
이미 곁눈질로 읽고 있었다.
최현석이 진호가 끼적인 글들을 빠르게 읽어갔다.
기존에 받은 대본 내용에서 몇 가지만 수정한 형태였다.
“이건 더블 트릭이네. 범인을 밝혀냈다고 믿게 한 다음에 다시 한 번 뒤통수를 치자는 거지?”
“그런 느낌이에요. 연출은 감독님의 몫이겠지만······괜찮을 거 같지 않아요?”
“근데 이건 기존 방식하고 많이 달라서. 박 감독님이 좋게 볼지 잘 모르겠네.”
“어필하라면서요.”
“그건 그거로 반응은 또 다르지. 뭐, 어떻게 할까? 내가 이 수정 내용을 감독님에게 전달해 봐?”
“아뇨. 그러지 마요. 그냥 제가 감독님하고 따로 얘기 한 번 해 볼게요.”
아직은 감독과 배우간의 권위에 대해 낯설다.
차라리 사적으로 그에게 조언을 구하는 편이 나을지도.
진호는 폰에 기록된 감독의 번호를 떠올렸다.
“근데 진호야. 이런 발상은 또 어디서 배운 거냐?”
“아, 그거요······그러게요. 제가 그런 걸 어디서 배웠을까요?”
“뭐라는 거냐.”
어디서 이런 아이디어가 튀어 나왔던 걸까.
진호는 기억을 곰곰이 되짚어 봤다.
“······”
마땅히 짚이는 곳이 없었다.
“저 통화 좀 하고 올게요.”
#
며칠 뒤 교외의 작은 카페.
모자를 깊이 눌러 쓴 한 남자가 슬금슬금 그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수상하기 짝이 없는 행색이었다.
“닌자냐? 뭔 꼴을 하고 오는 거야.”
“하하하. 오랜만이에요, 감독님.”
수상한 남자는 진호였다.
모자를 살짝 들어 올리며 인사를 했다.
맞은편에 앉은 박종찬과의 미팅을 위해서 교외까지 나온 것이다.
“인기인 다 됐네. 많이들 알아보든?”
“괜히 북적거리기 싫어서요. 반짝이라도 인기는 인기거든요.”
“그려, 그려. 커피?”
“네. 그냥 커피로 할게요.”
자리에 앉아 주문을 마치고 가볍게 근황을 물었다.
박종찬은 휴식기를 멈추고 새로운 작품으로.
진호 역시 예능 활동을 중단하고 다음 작품으로 넘어가는 시기였다.
“잘 생각했다. 너무 예능이나 그쪽으로 빠지면 연기 흐름이 끊겨. 이 정도면 벌건 충분히 벌었으니 다음 작품을 생각해야지.”
“대표님하고 똑같이 말하네요.”
“최대표? 직접 만나 본 적은 없지만 대충은 알지.”
“아, 그래요?”
“이 바닥이 넓어봐야 얼마나 넓겠냐. 안 그래도 연극 무대에서 활동하던 양반인데 소문이라면 많이 들었지.”
평가는 두 가지로 나뉘어 있었다.
현실을 보지 않는 몽상가와 꿈을 좇는 이상주의자.
박종찬은 둘 다 아니라고 생각했다.
‘머리가 좋은 양반이었지.’
마냥 이상에 허덕일 사람은 아니었다.
“그래서 내 작품에 출연하려고?”
“대본은 꼼꼼하게 봤죠. 시나리오는 마음에 들어요.”
“근데? 그냥 마음에 들면 이렇게 약속까지는 안 잡았을 거 같은데.”
“듣고 불편해 하지 않았으면 해요.”
“이것아. 감독이다, 감독. 내가 무슨 소리를 들으면서 살아 왔을 거 같냐? 마음 편히 말 해 봐.”
그제야 진호가 담아 온 이야기를 풀어냈다.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 개인적으로 변경한 내용.
천천히 또박또박 전달했다.
“······그러니까 후반 전개 방식을 바꿨으면 한다고?”
“과한가요?”
“너무 복잡하지 않을까? 더블 트릭이라는 건 말은 멋있지만 잘못 되면 이해하기 어려워져.”
“그건 알지만 단순함에서는 탈피하고 싶어요. 기존 시나리오대로 진행하면 누가 범인인지 너무 뻔하잖아요.”
“뻔해?”
“아, 아······그런 뜻은 아니에요. 좀 더 이야기가 촘촘했으면 한다는 의미에서.”
역시 어렵다.
진호는 식은땀이 흐르는 걸 느꼈다.
역시 말하지 말 걸, 이라는 후회도 들었다.
겨우 조연 한 번 성공한 주제에 너무 과한 짓인가 싶기도 했다.
“그래. 이야기를 네 방식대로 풀어냈다고 치자. 그럼 중간에 관객들을 속일 장치가 필요한데. 어중간한 트릭으로 그게 먹힐 거 같냐?”
“트릭보다는 설득력으로 가면 안 될까요?”
“설득력?”
“네. 논리적인 것 말고, 주연 배우에 대한 몰입으로.”
간신히 생각했던 바를 전했다.
박종찬의 표정이 꽤 기묘해졌다.
“그러니까 시나리오상의 허점을 허용하더라도 연기력으로 극복하겠다?”
“말이 그렇게 해석되나요?”
“너, 지금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아냐? 감독한테 자신의 작품을 훼손하라는 말이다. 네 연기력으로 나머지를 채울 수 있으니까.”
“그건······”
아닙니다, 라고 말을 하려다 멈칫했다.
정말로 아닐까?
되짚어 보니 부정하기 어려웠다.
시나리오를 쭉 보고 느낀 것은 단조로움.
그 안에 생명과 긴장감을 불어넣을 수 있는 건 극을 꼬아놓아도 설득력을 유지 할 수 있는 연기력이었다.
연기에 대한 자신감.
아니, 오만함.
— 이 이야기의 끝은 정해져 있다네, 왓슨.
나직한, 그리고 어딘가 오만해 보이는 말투.
콧수염을 잔뜩 기른 중년 남자의 얼굴이 스쳐가고 폐부 가득 찌를 듯 한 자부심이 차올랐다.
그것은 스스로에 대한 확신.
지독할 정도로 높은 에고였다.
‘홈즈라고!?’
이건 불가능한 이야기였다.
셜록홈즈는 아서 도일의 작중 캐릭터.
전생이라 부를 수 없는 존재였다.
“제 능력을 이용하라는 말입니다.”
하지만 이 느낌.
이 감각은 너무나도 분명했다.
이 사람은 셜록 홈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