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만 전생 배우-26화 (26/178)
  • Chapter11. 그럼 이번엔 광고(1)

    대금을 다루는 배우.

    이 자체만으로 벌써 흥미가 생긴다.

    그런데 그 대금을 굉장한 수준으로 다룬다?

    이러면 또 흥미의 수준이 다르다.

    녹화분이 방송으로 나가기도 전.

    이미 몰려든 청중들에 의해서 대금 연주가 인터넷으로 퍼져나갔다.

    그 반향은 대단했다.

    하루 만에 조회 수가 10만을 넘고 댓글도 천 개가 넘게 달렸다.

    “네, 네! 확인해 보고 연락드리겠습니다!”

    대중의 반응에 예민한 것은 방송사.

    인터넷에서 난리가 나자 섭외 문의가 회사로 밀려들었다.

    단순 토크를 넘어서 야외 예능이나 퀴즈쇼 등에서도 섭외가 들어올 정도였다.

    프로그램 방향과 상관없이 인기를 업고 가겠다는 의미였다.

    “어우. 아주 죽겠다. 오늘만 해도 이게 벌써 몇 통인지.”

    블루 아이 대표, 최현석이 앓는 소리를 냈다.

    매니저 송학이 혼자서 처리하게는 방대한 일이었다.

    중요한 전화는 대표인 그가 직접 처리했다.

    그 숫자가 수십 통이었다.

    “그 정도에요?”

    “말을 마라. 방송사 섭외만 있었겠냐? 대학 축제, 지방 행사, 결혼식, 고희연. 심지어 대금 협회에서도 너한테 연락 왔어.”

    “와. 그걸 다 내보내실 건 아니죠?”

    “무리야. 몸이 두개 있어도 이건 다 못 해. 도움이 될 만 한 것만 추려서 나가야지.”

    최현석이 손사래 쳤다.

    돈 뽑아먹기 급급한 기획사였으면 현금 우선인 행사부터 돌렸겠지만 여기는 아니었다.

    비전과 계획이 있었다.

    “일단 급 있는 예능은 하나 하자. 달리는 사람들이 좋을 거 같아. 해외 쪽에서 소모가 많이 되는 건 미리 해서 나쁠 게 없지.”

    “해외요? 벌써?”

    “미리 눈도장 찍어 두는 거지. 본래는 영화 홍보나 종용 기념 정도로 게스트를 많이 부르는데, 이번만 특별히 널 개별로 섭외 한 거 같아.”

    종영 기념으로 나가기에는 시간이 많이 흘렀다.

    게스트가 여럿 등장하는 회차에서 특별히 자리 하나를 추가하는 형식.

    못하면 묻히고 잘하면 눈에 띄는 자리였다.

    “예능은 꽤나 피로하던데.”

    “지나치게 소모는 안 할 거야. 해외 대비해서 하나하고 인터뷰 형식의 프로그램 두 개 정도. 시간 되면 라디오도 하나.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

    “작품은 어때요? 들어 온 거 있어요?”

    “자잘하게 몇 개 정도. 네게 어울리는 건 없어 보여서 커트했는데. 따로 보내줄까?”

    “네. 가능하면 들어오는 건 전부 보여주세요.”

    하든 안하든 보고는 싶다.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는, 그런 사람이고 싶었으니까.

    #

    “으아아! 일이 너무 많잖아!”

    은서가 발을 동동 구르며 앓는 소리를 냈다.

    “야야. 일 많은 좋은 거지. 앓는 소리 마.”

    “보너스 받았다고 회사를 옹호하려 하지 마요!”

    “헷.”

    스케줄을 소화하러 가는 벤의 내부였다.

    은서의 응석은 여전히 매니저 소윤이 받아주고 있었다.

    “진짜 요즘 일이 너무 많잖아요. 행사를 하루에 몇 개나 돌리는 거야.”

    “돈은 젊어서 벌어 둬야지. 지금 놀아서 뭐하냐.”

    “사람이 여유는 있어야죠! 이러니까 우리나라 연예인 수명이 짧은 거라고요.”

    “진호 씨랑 못 만나서 그런 건 아니고?”

    “와. 언니, 운전 중인 걸 다행으로 알아라. 뒤에서 춉 날리려다가 참았으니까.”

    부루퉁하게 답하긴 했지만 일부는 사실이다.

    스케줄이 워낙 바쁘다 보니 만나는 건 둘째 치고 통화 할 시간도 없었다.

    그녀만큼은 아니었지만 진호 역시 바빴으니까.

    ‘너무 유명해지면 곤란한데.’

    연예계 바닥이 어떤 곳인가.

    온갖 독물들이 득실거리는 야생이다.

    진호 같은 순진무구한 어린양은 금세 잡아먹히고 말 터.

    걱정에 잠도 안 왔다.

    “정 그렇게 보고 싶으면 연락이라도 해 봐. 변명거리 필요하면 언니가 생일이라도 이동시켜 줄까?”

    “에이, 이 언니가 못하는 말이 없어. 내가 뭐 연락 못해서 이러는 줄 아나.”

    “아니었어?”

    “지금은 좀 그렇죠. 나 바쁜 것도 바쁜 거지만 진호 오빠도 한창 중요한 때고. 이럴 때 괜히 스캔들 만들어서 좋을 건 없잖아요.”

    “그러니까 진호 씨 못 만나서 이런 건 맞네?”

    “아, 좀! 운전이나 해요!”

    버럭 외치는 은서의 목소리에 소윤이 낄낄거렸다.

    어린 나이부터 연예계 바닥을 굴렀는데도 아직 순수한 동생이 참 귀여웠다.

    ‘이것도 사장님 덕분이긴 하지만.’

    어지간히 컨트롤을 했어야지.

    답답하긴 했지만 그래도 덕분에 별 다른 트러블 없이 지금껏 은서가 커리어를 이어 갈 수 있었다.

    “응? 회사다. 은서야, 잠깐만 조용히 해 줄래?”

    “네, 네. 은서는 벙어리에요.”

    볼멘소리를 뒤로 한 채 통화를 연결했다.

    “광고요? 누구랑?”

    힐끔, 백미러로 은서의 모습을 엿봤다.

    #

    진호는 연기를 시작하면서 돈을 생각해 본 적은 없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럴 겨를이 없었다.

    회사를 그만두고 능력을 깨우치면서 자연스럽게 연기 쪽으로 빠져 들었으니까.

    “5천만 원이요?”

    그래서 광고비를 들었을 때 깜짝 놀랐다.

    드라마 회당 촬영료를 다 합쳐도 광고 한 번 찍는 것보다 적었다.

    “아직은 페이가 좀 약하네. 인기가 더 오르고 그러면 광고료도 오를 거다.”

    “이게 적은 거라고요?”

    “적지. 대표 주연작이 두어 개만 더 있었어도 몇 배는 더 받았을 거다.”

    “와. 이래서 광고 광고 하는구나.”

    드라마 백날 찍어봐야 광고 한 편만 못하다.

    물론, 그 광고가 드라마 덕분에 찍을 수 있게 된 건 있지만 조금은 허무하기까지 하다.

    돈 되는 걸 결국 다른 일이니까.

    “진호 오빠!”

    “응? 아. 은서야. 왔어?”

    성큼성큼 다가오는 건 은서.

    진호와 마찬가지로 이번 광고에 캐스팅 되었다.

    광고 컨셉 자체가 커플이었기 때문에 동반으로 출연이 확정 된 것이다.

    “진짜 오랜만이다.”

    “거의 한 달 돼 가나?”

    “응. 응. 진짜 스케줄이 살벌해. 그치?”

    “일이 많으면 좋은 거지. 그 동안 별 일은 없고?”

    “나야 뭐 행사만 주구장창 돌았지. 오빠는? 그 동안 예능 몇 개 하던데? 따로 차기작 준비는 안 해?”

    자연스럽게 옆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시나리오는 몇 개 들어왔지. 근데 아직 마땅한 건 못 찾았어.”

    “이번에도 드라마? 주연 쪽으로 들어왔어?”

    “몇 개는 주연. 근데 뭔가 느낌이 안 오더라.”

    “회사에서는? 뭐라고 안 하고?”

    “천천히 고르래. 대표님이 딱히 압박하고 그러는 타입은 아니라서.”

    “와. 부럽다. 우리 사장님은 그냥 일, 일, 일. 날 아주 잡아먹으려고 안달이야.”

    “하하하. 인기 좋을 때잖아.”

    이제는 같은 일을 하는 동업자이기 때문에.

    두 사람의 이야기는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그보다 광고 컨셉은 들었지?”

    “응. 연인 간에 마사지 기구를 사용하는 느낌?”

    “콘티보니까 접촉이 꽤 많던데. 괜찮겠어?”

    “······응. 뭐. 드라마에서도 있었으니까.”

    드라마에서는 흔한 키스씬도 없었다.

    손잡고 애절하게 바라본 뒤 포옹하는 것이 전부.

    이번 광고 콘티에 포함 된 신체접촉은 둘 사이의 최대치였다.

    “저기, 두 분. 촬영에 앞서서 전체적인 흐름을 한 번 더 짚고 갈게요.”

    “바뀐 게 있나요?”

    “소소하게 수정 된 곳이 있어서요.”

    촬영 스텝이 다가와 둘을 안내했다.

    광고 촬영 감독과 관계자들이 모인 방이었다.

    “······어?”

    진호는 그곳에서 낯익은 한 사람을 발견했다.

    이제 와서는 딱히 기억조차 잘 나지 않는 사람.

    “지연 씨?”

    “오랜만이에요, 진호 씨.”

    전 회사 동료.

    한 때 짝사랑을 하던 여인.

    지연. 임 지연이었다.

    #

    은서는 영 내키지 않았다.

    짧은 설명으로 듣기로는 전 회사 동료.

    하지만 둘 사이에 오가는 눈빛이나 이런 게 그냥 회사 동료의 것이 아니었다.

    과거의 연인이기라도 한 걸까?

    은서는 회의 내내 집중을 할 수 없었다.

    “그럼 변경 내용은 이렇게 가죠. 은서 씨도 괜찮겠죠?”

    “······”

    “은서 씨?”

    “네?”

    “컨셉 변경이요. 이대로 해도 괜찮을까요?”

    안 보던 사이에 무슨 종이들이 한 가득이다.

    은서는 제대로 살피지도 못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지금은 신경이 온통 다른 곳에 쏠려 있었다.

    “그럼 잠깐 쉬고 촬영에 들어가도록 하죠.”

    가장 먼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

    진호는 참 묘하다고 생각을 했다.

    오랜만에 본 지연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한 때 보았던 추악한 모습이 거짓이기라도 한 것처럼.

    “회사 그만두고 여기로 옮겼어요.”

    “그랬군요. 하긴 계속 다니기는 힘들었을 테니.”

    “차라리 잘 됐어요. 옮긴 회사도 마음에 들고. 전보다 일하는 재미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이야기를 나눌수록 깨닫는 것이 있었다.

    그녀에게서 더 이상 전과 같은 떨림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옛 회사의 동료.

    더러운 일에 엮여서 갈라진 그런 동료에 불과했다.

    말 한 마디에 심장이 쿵쾅거리고 눈빛 하나에 오금이 저리던.

    그런 떨림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어찌 됐든······이곳에서 잘 하길 바랄게요.”

    “잠깐만요, 진호 씨. 나, 그때 일로 진호 씨에게 제대로 사과도 못 했어요. 괜찮다면 우리 만나서 술이라도 한 잔 하지 않을래요?”

    “술을?”

    “네. 그때 이후로 많이 생각해 봤거든요. 참 내가 모질고 멍청했다는 걸 깨달았어요. 누가 진짜 좋은 남자인지 알아보지도 못하고. 술이라도 같이 한 잔 하면서 사과하고 싶어요.”

    지연은 거리를 좁히고 진호의 소매를 가볍게 잡았다.

    젖은 눈매에 약간 잠긴 목소리.

    매혹적인 모습이었다.

    “진호 오빠.”

    “아. 은서야.”

    둘 사이의 미묘함을 가르고 들어 온 건 은서.

    그녀는 큰 걸음으로 진호 곁에 서서는 남은 한 쪽 소매를 손으로 움켜쥐었다.

    그리고 보란 듯 당겼다.

    “촬영 준비하러 가자.”

    “아직 시간이······”

    “미리 준비해야지. 벌써부터 빠지는 거야?”

    “빠지긴 누가. 그래, 가자. 지연 씨 전 촬영 때문에 이만.”

    “아······”

    지연이 무어라 답을 하기도 전에 은서가 진호를 끌고 촬영장으로 이동해 버렸다.

    언뜻 입술 깨무는 지연의 얼굴이 보였지만 은서는 콧방귀 뀌며 무시했다.

    연예계 바닥 6년.

    그 시간 동안 배운 게 있다면 억척스러움 뿐이다.

    소매를 끄는 그녀의 힘은 장사였다.

    #

    촬영은 꽤나 삐걱거리며 진행되었다.

    컨셉 자체는 단순하고 쉬웠지만 중요한 건 주연 둘의 케미였다.

    근데, 그 주연 중 한 명의 상태가 썩 좋지 않았다.

    “컷. 컷. 다시 한 번만 갑시다. 은서 씨. 오늘 컨디션이 많이 안 좋은가 보네. 좀 쉴까요?”

    “······죄송합니다. 5분만 시간 줄 수 있나요?”

    “네. 한 숨 돌리고 다시 하죠.”

    감독의 허락 하에 잠시 촬영장을 벗어낫다.

    세트 밖, 발코니에 몸을 기대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아, 멍청아. 왜 이러니.’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남자 주인공인 진호에게 몸을 기대며 사랑을 속삭여야 하는 역할.

    하지만 그때마다 촬영장 밖에 서 있는 지연이 눈에 밟혔다.

    무시하자 무시하자.

    몇 번이나 속삭였지만 쉽지 않았다.

    감정이 깨지고 어색함에 얼굴에서 묻어 나왔다.

    “이런 건 연예인답지 않잖아.”

    연예계 바닥은 치열한 전쟁터.

    아무리 감정이 요동쳐도 일에 영향을 미쳐서는 안 된다.

    사랑을 하든 증오를 하든 질투를 하든.

    결국 사람들이 봐 주는 건 카메라에 비친 모습일 뿐이니까.

    “뭐가 연예인답지 않은데?”

    “어?”

    “고민이라도 있는 거냐?”

    너요, 너.

    라고 목 끝까지 넘어온 말을 삼켰다.

    곁에 다가온 진호를 힐끔 보고는 한숨을 토했다.

    “오늘 되게 실망스럽지?”

    “그렇다고 말하면 때릴 거냐?”

    “때리긴 무슨. 솔직하게 말 해 줘.”

    “흠.”

    진호는 답 대신 고개를 기울여 은서를 봤다.

    조금은 시무룩한, 어딘가 넋이 나간 듯 보이는 얼굴이었다.

    그 모습은 채워주고 싶은 욕망을 자극했다.

    과거 지연에게서 받던 떨림과는 다른.

    색다른 느낌이었다.

    “이렇게 할까?”

    “응?”

    그래서 문뜩 말이 나왔다.

    “오늘 촬영이 끝날 때 까지만 우리 사귀자.”

    “······어?”

    “연기가 어렵다면, 잠깐이라도 진심으로 하는 거야. 그럼 지금처럼 헤매지 않을 거 아니냐.”

    “뭐, 뭐, 뭐?”

    “촬영이 끝날 때 까지만 사귀자고.”

    이건 카사노바의 영향일까.

    진호는 자신이 말을 하면서도 자신 같지 않다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반대로 이것이 지금의 자신이라는 느낌 또한 받았다.

    새빨갛게 변한 은서를 정면에서 바라 볼 용기 역시.

    “할래? 말래?”

    빨간 토마토가 위아래로 움직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