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만 전생 배우-24화 (24/178)
  • Chapter10. 예능도 한 번(1)

    계약은 매우 꼼꼼하게 진행되었다.

    활동에 따른 수익 분배, 회사의 지원 범위, 상호간에 지켜야 할 사항, 특수 사례에 따른 추가 합의 등.

    지긋지긋할 정도로 따지면서 계약을 마무리 지었다.

    그렇게 열을 내던 최현석 마저 마지막에서는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며 혀를 내둘렀다.

    “보통이 아니시네요.”

    “이런 쪽에 강한 분이 있어서.”

    공명 덕분이었다.

    그의 지능이 들어와서 갑자기 천재가 되는 건 아니었지만 신중하고 꼼꼼한 성격은 도움이 되었다.

    두 번 볼 걸 세 번 보고, 세 번 볼 걸 네 번 봤다.

    이 정도로 했는데도 사기를 당한다면 납득 할 수준.

    “그럼 계약도 마무리 지은 김에 한 잔 하러 갑시다. 우리 애들도 애가 달아서 절절매는 거 같은데.”

    “사양하지는 않겠습니다.”

    앞으로 몸담고 살아갈 회사.

    술 한 잔으로 서로의 성향을 알아 갈 수 있다면 싸다.

    “곱창. 좋아하세요?”

    “없어 못 먹죠.”

    마침 메뉴도 마음에 쏙 들었다.

    #

    연극바닥에서만 15년, 35살 박근우.

    군 제대 후 연기를 하기 위해서 학교마저 때려 친 27살 오동찬.

    드라마 보다가 저것보다는 내가 더 연기를 잘하겠다며 연극판에 뛰어든 24살 안수미.

    술 한 잔 걸치며 전해들은 이들의 이야기는 재미있고 흥미롭고 자극적이었다.

    같은 연기라 해도 접하는 방식이 다 달랐다.

    접근하는 방법도 대해는 형태도 제각각이었다.

    “연기는 느낌이지. 느낌 오는 대로 싹 가면 된다고.”

    “아, 진짜. 또 이러시네. 연기는 연습이라고요. 철저한 연습이 바탕이 돼야 제대로 된 연기가 나오죠.”

    “난 그냥 따라하는 편인데. 배역에 맞는 캐릭터를 흉내 내는 쪽이 가장 합리적이지 않아요?”

    은서 등과는 또 다른 방식의 이야기를 했다.

    아이돌을 거쳐서 연기자가 된 은서나 대학의 연기 동아리에서 연기를 시작한 아영이나 FD로 배우들을 봐 온 서훈과도 달랐다.

    진호는 그게 참 재미있었다.

    사람의 숫자만큼 다양한 연기가 존재했다.

    어느 것도 정답은 아닌 거 같았다.

    사람마다 저마다의 연기 방식이 있고, 그것을 갈고 닦아 빛내는 길이 다를 뿐인 것이다.

    “어때. 진호 군. 자네 생각은?”

    그렇기에 진호는 이 질문에 섣불리 답을 하지 못했다.

    연기란 무엇일까.

    자신은 어떤 연기를 하고 있는 것일까.

    “알아가는 중입니다.”

    그저 알아가고 있을 뿐이다.

    첫 회사, 첫 술, 첫 만남.

    이제 겨우 시작이었을 뿐이니까.

    #

    보통 인기 있는 드라마가 종영되면 유명 프로그램에서 주연 배우들을 부른다.

    배우들은 프로그램으로 인기에 탄력을 받고 프로그램은 드라마의 인기에 편승해서 시청률을 뽑아먹는 방식이다.

    일종의 상부상조.

    “방송은 처음이라 많이 떨리네요.”

    예능 프로그램 ‘이야기들’도 마찬가지였다.

    올해로 10년 넘게 이어져 온 장수 프로그램으로 일종의 스타 등용문.

    드라마 종영과 함께 가장 먼저 연락해 왔다.

    “그냥 대본대로만 따라가면 돼요. 너무 긴장하지 마시고.”

    회사에서 붙여 준 매니저 송학이 진호를 달랬다.

    그는 타 회사에서 5년간 매니저로 일하다가 이직한 인물로 경력 자체는 나름 탄탄한 인물이었다.

    “응. 응. 진호 오빠는 그냥 있는 대로 하면 돼.”

    “아, 은서야.”

    송학의 말을 은서가 덧대어 주었다.

    그녀는 이미 메이크업까지 다 마치고 완전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히히. 방송국에서 오빠 보니까 좀 이상하다.”

    “내 얼굴 이상하냐?”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전에는 그냥 같이 연기하는 사람이라는 느낌이었는데 이제 좀 배우 느낌? 너무 빨리 스타가 되면 곤란한데.”

    “스타는 무슨. 종영 기념으로 반짝하는 거지.”

    수많은 배우들이 반짝 떴다가 그냥 사라지곤 한다.

    공중파 예능에 나왔다고 만사가 탄탄대로를 타는 건 아니다.

    특히, 연기에 전념하고자 하는 배우라면 더욱 그렇다.

    “아, 메이크업 끝내면 인사 돌리고. 여기 그런 거 꽤나 깐깐하거든.”

    “그래야지. 그거 말고 따로 충고 할 건 더 없냐?”

    “음. 뭐, 일단은 대본에 충실하게 임하라는 거? 그리고 기회가 된다면 망설이지 말라는 것 정도.”

    “기회가 된다면?”

    “진행자 유석재 선배님. 가끔 대본과 상관없이 질문을 던질 때가 있거든. 그럴 때 어떻게 받느냐에 따라서 인기가 오르기도 하고 떨어지기도 하고 그래.”

    진행자 유석재라면 프로그램의 간판과도 같은 인물.

    간혹 대본과 상관없는 질문으로 출연자들을 떠보는 것으로 유명하다.

    좋은 답이 나오면 그대로 살려서 녹화를 하는 것이다.

    “나한테 그런 질문이 오려나.”

    아직 햇병아리에 불과한 연기자에게.

    진호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

    녹화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프로그램 자체가 오래 되었다 보니 포멧이 고정적이었다.

    드라마 출연진들이 하나씩 자기소개를 하고 대충 명장 등에 대해서 말하는 방식이었다.

    지나간 장면을 돌아보는 타임도 길었고 크게 빡빡한 녹화는 아니었다.

    “그럼 마지막 촬영쯤 돼서야 결말을 알게 된 건가요?”

    “네. 감독님이 끝까지 결말을 숨겼다니까요. 우리도 누구랑 이어질지 꿈에도 몰랐어요.”

    “그거, 할리우드 방식!”

    “할리우드가 뭡니까, 할리우드가. 헐리우드.”

    “허, 헐리우드?”

    간간히 패널들의 꽁트도 이어졌다.

    확실히 배테랑 진행자들답게 녹화가 굉장히 부드러웠다.

    “그럼 다음으로 명장면 따라잡기. 세 분 다 짧게 한 장면씩 재연 해 주실 수 있을까요?”

    그리고 이어진 재연 파트.

    세 사람의 중요 파트를 짧게 연기로 재연하는 방식이었다. 이미 사전에 고지되어 있던 것이라 셋 모두 어렵지 않게 따라갔다.

    심지어 연기를 놓겠다, 다짐한 남일수마저 그럭저럭 괜찮은 연기를 보여 주었다.

    “와. 세 분 모두 대단하네요. 연기가 그냥 물 흐르듯이 나와요.”

    “그 정도 하니까 시청률을 이렇게 뽑는 거죠.”

    “자기야? 그 정도는 나도 알거든?”

    “뭐래요. 무슨 말을 못해.”

    적당한 꽁트를 섞어서 괜찮은 장면으로 버무렸다.

    편집해서 나간다면 세 사람의 연기가 호평을 받을 만 한, 그런 장면이었다.

    문제라면 그 직후.

    “혹시 즉흥 연기도 되나요?”

    반짝이는 유석재의 눈빛과 곤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는 PD.

    그 유명한 유석재의 돌발 질문이 나온 것이다.

    “즉흥 연기요? 갑자기 그런 건 조금······”

    “오빠, 받아야지 뭐해.”

    진호는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고 은서는 그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아, 역시 즉흥적인 건 조금 어렵나요?”

    “연기는 그렇게 막 뽑아내고 그러는 게 아니에요. 저희도 나름 준비를 하고 그래야 연기가 나오죠. 예능이라고 그래도 배우에 대해서 배려가 좀 부족한 거 같네요.”

    “아······하하. 이거 죄송합니다. 제가 연기 쪽은 잘 몰라서.”

    갑자기 쏘아붙이는 진호의 모습에 유석재가 되레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다.

    “잘 모르면 조심 하셨어야죠. 명색이 프로그램의 대표 진행자신데. 이런 식으로 출연자를 골려먹으면 기분이 좋나요?”

    “저기······아. 잠깐 끊었다가 갈까요? 이거 좀 오해가 있으신 거 같은데. 제가 뭐 나쁜 의도로 그런 게 아니라······”

    “선배님! 연기에요, 연기.”

    “어?”

    “즉흥 연기요. 너무 과하게 했나? 이상했어요?”

    진호가 갑자기 표정을 바꾸고 너스레를 떨었다.

    당황해서 쩔쩔 매던 유석재가 한 대 맞은 얼굴을 하더니 ‘어이쿠! 연기라고!?’ 라며 배 잡고 웃는 시늉을 했다.

    혹시나 싶어 경직되어 있던 촬영장도 분위기가 탁 풀렸다.

    PD의 한숨 내쉬는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어우. 연기였어요? 그냥 깜빡 속았지 뭡니까. 와. 당황해서 식은땀 난 거 봐요.”

    “세상에. 선배님 등이 다 축축해요.”

    “자기야, 그건 나도 알거든.”

    “아, 진짜! 무슨 말을 못해!”

    마무리 꽁트까지 부드럽게 이어졌다.

    밖에 서 있던 PD가 유석재 쪽으로 손가락을 돌렸다.

    이에 유석재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녹화를 이어가도 된다는 신호였다.

    ‘요놈 봐라?’

    그의 시선은 맞은 편 진호에게 닿아 있었다.

    장난감을 발견한 어린 아이의 눈빛이었다.

    #

    어느 방송이든 그렇겠지만 잘 하는 쪽을 살리는 것이 중요하다.

    이번 녹화에서는 진호 쪽이 그러했다.

    유석재의 돌발 요구를 능숙하게 받아들인 것도.

    그 뒤로 이어지는 토크에서 자연스럽게 반응한 것도.

    좋은 장면을 뽑아내는 것이 진행자의 몫.

    남은 녹화 분량은 진호 쪽으로 한껏 기울어졌다.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이내 녹화가 끝났다.

    출연자들은 분분히 일어나 인사를 건넸다.

    진호 역시 허리를 90도로 꺾어가며 선배와 PD등에게 바삐 인사를 했다.

    “오늘 수고했어요.”

    툭툭, 손등을 두드리며 진호에게 덕담을 건네는 유석재.

    “별말씀을요. 오늘 선배님 덕분에 편하게 녹화하고 가는 거 같습니다.”

    “이런 예능 프로그램은 처음이었죠?”

    “네. 방송은 아직 좀 낯서네요.”

    “그런 것 치고는 굉장히 잘하던데요.”

    가볍게 인사하고 지나치는 다른 사람과 달리 진호는 붙잡고 몇 마디 말을 더 건넸다.

    “드라마 끝났으니 한동안은 계속 예능 쪽?”

    “아, 네 뭐. 섭외 들어온 쪽은 되도록 나가 보려고요. 회사 쪽에서도 신인이니 열심히 해야 한다고 하고.”

    “그래요. 배우가 신비주의도 좋지만 처음에는 역시 얼굴을 많이 알리는 쪽이 좋죠.”

    “네. 최선을 다해서 하겠습니다.”

    “그래요. 아, 그리고 아까 그 연기 말이에요. 진짜로 즉흥에서 나온 거?”

    “역시 너무 과했었나요?”

    “아니에요, 그런 건. 순발력이 되게 좋은 거 같아서. 혹시 괜찮으면 타사에서 하는 내 방송에 또 나와 줄 수 있을까요?”

    “아······선배님이 하는 방송에요?”

    유석재는 굉장히 다작을 하는 인물이다.

    공중파 외에도 케이블과 라디오까지 섭렵하고 있다.

    프로그램 하나하나가 전부 다른 분위기였다.

    진호는 섣불리 답을 할 수 없었다.

    “진호 씨가 마음에 들어서. 내가 우리 PD에게 한 번 말 해 볼게요. 회사로 연락이 가면 긍정적으로 검토 한 번 해 봐요.”

    “그럼요. 그럼요. 연락이 오면 무조건 나가야죠.”

    “하하. 무조건 정도는 아니고. 그냥 보고 마음에 들면 한 번 생각해 봐요.”

    “네, 선배님. 꼭 다시 뵙도록 하겠습니다.”

    “아유, 예의도 발라라. 대성하겠어요.”

    등을 툭툭.

    마지막 덕담까지 건네며 세트 건너편으로 물러났다.

    진호는 숙이고 있던 허리를 펴며 그 뒷모습을 눈으로 쫓았다.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네.’

    마치 간택을 받은 느낌.

    이것이 예능계 1인자의 위엄인 걸까.

    진호는 꽤 오랫동안 뒷모습을 눈으로 밟았다.

    #

    “유석재 선배님이 직접 섭외를 했다고!?”

    끝나고 돌아가는 길.

    스케줄 때문에 먼저 빠져나왔어, 라는 은서의 톡에 진호가 유석재와의 대화를 언급했다.

    톡이 올라가는 것과 동시에 통화가 걸려왔다.

    “응. PD에게 얘기를 해서 회사 쪽에 문의를 할 건가 봐. 날 섭외 할 만 한 프로그램이 뭐가 있을까?”

    “있기야 여러 개 있지. 워낙 여러 개를 하시니까. 와, 근데 대박이다. 고작 한 번 녹화 한 건데. 그냥 선배님한테 눈도장을 찍고.”

    “눈도장은 무슨. 그냥 신인이고 하다 보니 기회를 주려는 거지.”

    “그럼 남일수는 무슨 원로배우야? 선배님이 딱 보고 느낀 거지. 아, 이 사람은 될 자질이구나.”

    “낯 간지럽다.”

    “좀 간지러워도 돼. 나도 부럽다고!”

    유석재라면 방송가에서 영향력 1, 2위를 다투는 인물.

    흔히 말하는 라인을 타서 나쁠 건 없다.

    “하여튼 오빠. 섭외 들어오면 무조건 해. 남들은 못 잡아서 안달인 줄이라고.”

    “너무 예능 쪽으로 치중하면 안 좋지는 않을까?”

    “아이고, 이 양반아. 그런 걱정은 나중에 해도 돼. 좀만 지나 봐. 드라마 인기 빠지면 이제 나가고 싶어도 안 불러 줘. 배우들은 예능에서의 수요가 한정적이거든. 그러니까 갈 수 있을 때 최대한 가는 게 좋아.”

    배우들 쪽.

    특히 정통 연기를 고수하는 이들 사이에서는 예능을 기피하는 기조가 있었다.

    배우는 오직 연기로만 말해야 한다는 일종의 신념.

    하지만 최근에 와서는 그런 분위기도 많이 희석되었다.

    나갈 수 있을 때 나가라.

    얼굴을 알리고 배우의 매력을 표출하는 것도 업의 연장이라는 분위기였다.

    진호도 진호의 회사도 이를 부정하지 않았다.

    하고 싶은 연기를 하겠다는 것이 무릉도원 속 도사의 삶은 아니었으니까.

    “이왕이면 나한테 맞는 프로그램이었면 좋겠네.”

    이건 작은 바람이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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