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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0만 전생 배우-23화 (23/178)
  • Chapter9. 소속사(2)

    “일단 전문 회사가 아닌 쪽은 빼. 곁가지 걸친 기획사들은 괜히 일만 벌려.”

    은서는 우선적으로 종합 연예 기획사를 치워 버렸다.

    종합은 말이 좋아서 종합이지 이거저거 다 건드리는 방식을 의미했다.

    보통 이런 경우는 자본이 부족하고 이를 충당하기 위해서 소속 연예인들을 마구 굴리는 편이다.

    “자본이 불확실한 곳도 빼. 대표 이력이 불확실하다 싶은 건 대부분이 안 좋은 쪽과 선이 닿아 있는 거야.”

    “조폭 같은 거? 아직도 그래?”

    “아직도가 아니라 앞으로도 그럴 거야. 이 바닥이 검은 돈에 취약하거든. 그나마 깨끗한 곳을 고르려면 대표가 다른 사업을 했거나 큰 자본가인 경우를 살펴야지.”

    그래도 투자금 형식으로 자금 문제가 생길 수 있지만 적어도 한 번 걸러낼 정도는 된다.

    은서가 컴퓨터를 통해서 각 회사 대표들을 조사했다.

    “소문이 안 좋은 회사는 패스. 악성루머일수도 있지만 상당수가 이유가 있어서 소문이 퍼지더라.”

    “이런 건 다 어디서 배운 거냐?”

    “아이돌이 나이 먹으면서 가장 많이 하는 생각이 뭔지 알아?”

    “글쎄······?”

    “언제까지 이일을 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야. 나이 먹은 아이들은 파릇파릇한 애들에게 밀리는 법이거든. 그래서 우리 나름대로 알아서 살 길을 모색해야 해. 연기를 하든, 춤을 추든, 회사에 잘 비벼서 한 자리 차지하든. 그것도 아니면 결혼해서 나가든지.”

    냉정하지만 그게 현실이다.

    변함없이 사랑하겠다는 팬들도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서 조금씩 떨어져 나간다.

    결국 자기 앞길은 자기가 알아서 챙겨야 하는 법.

    은서는 이 악물고 자기 앞길을 개척했다.

    그녀가 본래 있던 아이돌 그룹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건 그저 요행이 아니었다.

    “일단 여기 두 곳. 겉으로 보기에는 깔끔하네.”

    “미스틱 소울하고 너울 드림? 둘 다 배우 전문 회사인가?”

    “응. 미스틱 소울은 60년대에 활동하던 이인갑이라는 영화배우가 만든 회사야. 연로하신 배우들이 많이 소속되어 있네. 근데, 최근 활동은······좀 아니다. 거의 양로원 느낌이네.”

    소속 배우라고 해 봐야 겨우 다섯.

    그나마도 활동 하고 있는 건 딱 한 명이었다.

    “다른 쪽은 너울 드림인데. 여기는 좀 특이하네. 회사 대표가 IT기업 사장이었던 사람이야. 주식 다 처분하고 기획사를 차렸다고 하네?”

    “자기 분야도 아닌데 뭐하러?”

    “글쎄. 딱히 그쪽 얘기는 없어서 모르겠어. 소속 연예인은······나름 있네. 활동도 왕성한 편이고. 근데 여기도 주류는 확실히 아니야.”

    소속 연예인의 이력을 보자면 그렇다.

    나름 활동 자체는 많지만 대부분이 케이블의 단역이나 연극부대 찬조출연 정도.

    주력으로 이렇다 할 활동은 보이지 않았다.

    “오빤 어때? 마음에 드는 곳 있어?”

    “이것만 보고는 잘 모르겠다. 일단은 만나서 얘기를 해 보고 결정해야지.”

    “응. 응. 그렇게 해. 너무 섣불리 정하려고 하지 말고. 당장 스케줄 관리가 어려우면 내가 도와줄게.”

    “너무 신세만 지는데.”

    “그런 생각하지 말고. 나중에 나 어려울 때 오빠가 도와주면 되잖아.”

    “그래. 은혜는 꼭 갚으마.”

    은서가 없었다면 어땠을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녀가 있다는 것이 너무나 고마운 진호였다.

    #

    진호는 며칠에 걸려서 연락 온 회사들과 접촉했다.

    이야기를 들어보고 비전에 대해서도 토론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쉽사리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어렵네, 어려워.”

    이제 막 배우의 기로에 서 있는 시점이다.

    이럴 때 고르는 회사가 앞으로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명약관화하다.

    소속사 잘못 골랐다가 계약 문제로 몇 년이고 일 쉬는 연예인들을 많이 보지 않았는가.

    적어도 그런 꼴은 되고 싶지 않았다.

    “······이럴 때는 누가 좀 대신 골라 줬으면 하는데.”

    딱, 세상을 꿰뚫어 보는 혜안으로.

    장단점을 파악하고 완벽하게 도움이 될 곳으로 골라주면 정말로 마음이 편할 것 같다.

    — 주인 어르신. 유 황숙께서 또 찾아 오셨습니다.

    순간, 앳된 목소리 하나가 귀를 간질였다.

    평범하기 짝이 없던 방 안의 전경도 오래된 초가와 같은 형태로 바뀌었다.

    이건 전생 체험이구나.

    진호는 곧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 또 말이더냐? 황숙께서는 이 공명을 참 귀하게 여기는구나.

    공명. 제갈공명.

    잘못 들은 것이 아니면 분명 그리 말했다.

    손으로는 깃털로 된 부채를 가볍게 흔들고 가라앉은 마음으로 초가의 건너편을 바라봤다.

    그것은 삼고초려의 마지막 부분.

    자신이 의탁 할 주인을 선택하는 순간이었다.

    — 가자꾸나. 더 이상은 황숙을 기다리게 할 수 없지. 초가의 공명에게도 이리 예를 보이시는 분이니 어찌 천하를 두고 허투로 움직이실까. 어디, 이 공명의 몸. 한 번 의탁해 보자꾸나.

    초가 문이 열리고 빛이 한 번에 쏟아졌다.

    큰 귀를 가진 누군가 눈에 들어오는 것과 동시에 환상이 사라졌다.

    다시 이곳은 평범하기 짝이 없는 자취방이었다.

    “삼고초려라.”

    진호는 자신이 어떤 기준으로 회사를 골라야 할 지 깨달았다.

    #

    회사들을 천천히 살피고 메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읽었다.

    그 과정에서 며칠이 지나고 하나 둘 떨어져 나갔다.

    너무 잰다고, 조건이 까다롭다고 진저리 치는 이들도 여럿이었다.

    진호는 그럼에도 섣불리 선택하지 않았다.

    들어온 섭외 문의는 은서의 도움을 받아서 처리하고 계속해서 인내심을 발휘했다.

    정말로 자신을 얻고 싶어 하는 회사를 구하기 위해서.

    “남은 건 여기뿐인가.”

    그렇게 깐깐한 거름망을 견디고 살아남은 회사가 딱 하나 있었다.

    이름은 블루 아이.

    은퇴한 배우가 자비로 차린 회사였는데 소속 연예인이 고작 셋 밖에 안 될 정도로 신생이었다.

    규모나 자금 같은 걸로 따져보자면 앞서 갔던 회사들보다 훨씬 약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진호가 이 회사를 눈여겨보는 건 지극정성으로 보내 온 메일 때문이다.

    “이 정도면 적어도 얼굴은 봐야겠지.”

    몇 번이나 ‘회사에 대한 질문’으로 메일을 다시 돌려 보냈다. 그럼에도 블루 아이 쪽에서는 더욱 더 정성을 들여서 답신을 보내왔다.

    그 분량이 수십 장에 달할 정도.

    회사 기초가 어떻고 구조와 비전이 어떤 지도 아주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었다.

    게다가 메일마다 구구절절이 들어있는 진호에 대한 마음. 반드시 같이 일을 하고 싶다는 마음이 화면 너머에서도 느껴질 정도였다.

    다른 회사의 사무적인 접촉과는 느낌이 달랐다.

    “적어도 이 사람은 내 연기를 제대로 봐 준 거 같으니까.”

    세 번째 메일을 받고 진호가 답신을 보냈다.

    #

    “아이고, 진호 배우님!”

    회사 입구에 도착하자 대표가 신발도 안 갈아 신고 달려 나왔다.

    “아, 음. 처음 뵙겠습니다. 진호라고 합니다.”

    “하하하. 알죠. 알다마다. 제가 그 드라마를 얼마나 재밌게 봤는데요. 아차차. 정신 좀 봐. 전 여기 블루 아이 대표를 맡고 있는 최현석이라고 합니다.”

    블루 아이의 대표 최현석.

    프로필 상 그의 나이는 55세.

    하지만 키가 크고 몸이 단단한 것이 나이보다는 훨씬 어려 보이는 외모였다.

    심지어 옷도 검은 셔츠에 청바지였다.

    “메일로 번거롭게 해서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첫 회사다 보니 신중하게 되더군요.”

    “어이쿠, 그런 말씀 하지 마시죠. 저도 소속사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렇게 돈 다 털어서 회사를 직접 세운 거 아닙니까. 엄하게 당하는 애들 없었으면 해서.”

    최현석은 자랑스러운 얼굴로 회사를 가리켰다.

    규모가 큰 건 아니었지만 회사에 대한 그의 마음 자체는 굉장히 진지했다.

    “들어가서 천천히 얘기할까요?”

    “그래야죠. 아, 그리고 안에서 몇 명 더 기다리고 있습니다. 오늘 진호 씨와 계약한다고 하니까 얼굴 좀 보고 싶다며 다들 나와서는. 이거 참 회사인지 놀이터인지. 하하하하.”

    “소속 연예인들 말인가요?”

    “스케줄 없으면 쉬라니까 이렇게 나왔지 뭡니까. 다들 참견하기를 좋아하는 성격이라서. 너무 귀찮아하지 않았으면 좋겠군요.”

    회사 직원과 어지간히도 친하게 지내는 모양이다.

    이건 단점도 존재하는 방식이기는 하지만, 당장은 좋아 보였다.

    진호 역시 꽉 막힌 집단보다는 이런 쪽을 선호했다.

    “오. 오오. 남호다, 남호.”

    “와. 진짜 남호야. 화면보다 실물이 조금 더 나은데?”

    “오. 실물이야, 실물. 개신기해.”

    대표 사무실에 도착하자 웅성거림이 먼저 반겼다.

    나이대가 다른 2남 1녀가 먼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쉿. 쉿. 손님 오셨는데 일단 좀 조용히 하자?”

    “와. 대표님 혼자서 얘기하려고. 치사해라.”

    “응. 응. 치사하네.”

    “아오, 이것들이. 야, 일단 저쪽으로 좀 가 있어.”

    최현석은 몰려와 있는 이들을 구석으로 쭉 몰라내고 빈자리를 진호에게 안내했다.

    이정도면 친하다는 수준을 넘어서 거의 가족 같은 분위기였다.

    “평소에 친하게 지내나 보네요?”

    “하하. 이거 못난 꼴을 보였네요. 전부 다 같은 극단 출신이다 보니 내외하는 게 아직 서툴러서요.”

    “같은 극단? 아, 연극 하실 때?”

    “네. 극단 해체 할 때 절 따라온 애들이죠. 다들 무모한 도전이라고 만류 할 때 유일하게 믿어 준 애들입니다.”

    그렇다면 이해가 간다.

    회사를 차리고 들어온 이들이 아니라 회사가 만들어 질 때부터 함께 해 온 식구.

    분위기가 가족 같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가족 같은 회사에 절 계약해도 괜찮은 겁니까?”

    “그럼요. 진호 씨가 딱입니다. 저희가 회사를 차릴 때 서로 간에 약속 한 게 있거든요.”

    “약속?”

    “네. 돈은 못 벌어도 제대로 된 배우를 키우자. 이게 회사를 차린 모토였습니다.”

    최현석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저기 저 애들도 전부 같은 생각입니다. 오직 연기 하나. 다른 건 다 부차하고 제대로 연기하는 사람들을 모아서 회사를 꾸려가는 게 꿈입니다.”

    “······쉽지 않은 꿈이네요.”

    “하하하. 다들 그래서 만류하고 그랬습니다. 너무 이상적이라고. 하지만 그래도 다들 이전투구하는 바닥에 저 같은 인간 하나쯤 괜찮지 않습니까.”

    이상을 꿈꾸는 남자.

    매력적이지만 그만큼 위험하기도 하다.

    실제로 공명이 받들어 모신 유비의 마지막이 어떠했는가.

    꿈만으로는 모든 걸 이룰 수 없는 법이다.

    “망설여지는 거죠?”

    “네?”

    “하하. 눈빛에서 보입니다. 과연 이 남자를 믿고 따라가도 될까 싶은 망설임.”

    “부정은 못하겠네요.”

    “괜찮습니다. 당연히 그런 생각이 들겠죠. 어쩌면 그 걱정이 옳을 수도 있습니다. 얼마 안 가 회사가 망할 수도 있는 거고. 하하하.”

    웃으며 할 얘기는 아니었지만 최현석은 크게 웃었다.

    “근데 진호 씨. 전, 다른 건 다 제쳐두고 딱 하나만 약속 하겠습니다.”

    “약속 말입니까?”

    “네. 이 회사가 망하지 않는 한에는 진호 씨가 하고 싶은 연기. 그 연기를 할 수 있게끔 모든 역량을 다 동원해서 돕겠습니다.”

    “그러다 망하면 어떻게 합니까?”

    “그때는 무릎 꿇고 사과해야죠. 별다른 수도 없으니 뭐······하하하.”

    얼핏 대책이 없는 사람 같기도 하다.

    하지만 그가 보내온 메일에 적어 둔 비전과 사업계획 등은 상당히 구체적이었다.

    적어도 아무 생각 없이 일 벌리는 사람은 아니라는 의미.

    그렇다면 이런 단순함이 마음에 든다.

    적어도 ‘배우 진호’라는 한 사람을 전적으로 관리 해 줄 거라는 믿음은 드니까.

    “그럼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제가 받은 섭외 문의 중에서 어떤 걸 선택하면 좋을 거 같습니까?”

    미리 섭외 내용을 따로 뽑아서 정리해 왔다.

    며칠을 고민하고 걱정한 끝에 필요한 프로그램은 내정해 둔 상황.

    과연 그것이 최현석과 맞아 떨어질지 궁금했다.

    “호오. 벌서 이렇게나 섭외가 들어온 겁니까?”

    “이제 막 막방이 끝났으니까요. 한 동안은 인기를 누릴 수 있겠죠. 하지만 여기 반짝이라는 건 알고 계시겠죠?”

    “인기야 있다가도 없는 것. 배우라면 내실을 다지는 쪽이 좋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들어온 섭외를 무시 할 이유는 없죠.”

    최현석이 씩 웃으며 종이 몇 장을 뺐다.

    “이 프로그램들. 전부 주연 팀과 참여하는 거죠?”

    “네. 저를 포함해서 주 조연 3인 이상으로 섭외가 됐어요.”

    “그럼 이것들 위주로 나가세요.”

    “어째서죠?”

    그가 선택한 프로그램들은 두서가 없었다.

    공통점이라면 드라마 주연들과 함께 나간다는 것.

    개인 샷을 받지 못하는 점에서는 차라리 손해가 더 많아 보였다.

    “원 샷보다 비교 샷이 좋습니다. 여기 주연이었던 남일수 씨. 진호 씨가 연기적으로 완전히 찍어 누른 상대죠. 상대적으로 더 매력적인 모습을 어필 할 수 있습니다.”

    “단순 외모에서는 그가 저보다 나은데요?”

    “아뇨. 아직은 드라마 이입이 안 빠질 때죠. 시청자들은 남일수가 아닌 진수로 진호 씨가 아닌 남호로 봅니다. 누가 뭐래도 진수보다는 남호가 훨씬 더 매력적이죠.”

    아직 드라마 잔영이 남아 있을 때 비교우위로 매력을 뽐낸다.

    “어딘가 조금 치사해 보이는데요?”

    “하하. 이전투구를 안 한다고 했지 쓸 수 있는 걸 쓰지 않는다고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전 좋은 배우를 연극판에서만 찾는 고루한 인간이 아닙니다.”

    “좋게 보이는 법도 알고 있다?”

    “그것을 배우가 원한다면 말이죠.”

    진호가 최현석을 조금 달리 봤다.

    이 인간, 그냥 나이만 먹고 이상을 좇기 위해 자신의 회사를 차린 사람이 아니다.

    쓸 수 있는 것은 쓰고 원하는 것은 취하는.

    실리적인 면도 그 이상에 포함이 되어 있었다.

    “계약합시다.”

    정확하게 진호가 원하는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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