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만 전생 배우-19화 (19/178)
  • Chapter8. 고향에서(1)

    진호는 오랜만에 늦잠을 잤다.

    물 먹은 솜 마냥 몸이 무거웠다.

    평소 같으면 촬영 준비 때문에 호들갑을 떨었겠지만 오늘은 그것도 필요 없었다.

    모든 촬영이 끝났기 때문이다.

    ‘그래. 끝났네.’

    후련하면서도 어딘가 텅 빈 듯한 공허함이 느껴졌다.

    그가 그려낸 남호라는 인물은 이제 더 이상 필요 없는 존재가 되었다.

    한 여자를 사랑한 폭군, 주왕도.

    성공을 위해 남을 이용하던 위왕 조조도.

    하나의 극을 위해 사용되고 다시 수면 아래로 잠들어 버린 것이다.

    “······이런 게 후유증인가.”

    촬영이 끝나고 돌아가는 길에 감독, 지남운이 넌지시 충고 한 바가 있다.

    “진호 씨처럼 감정 연기하는 사람은 촬영을 끝내고 힘들어 합니다. 푹 쉬고 마음을 잘 추스르세요.”

    당시에는 잘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하루가 지나고 전날의 감정이 모두 씻겨 내려가자 그 의미를 이해 할 수 있었다.

    무대의 막이 내리고 불꽃같던 시간이 종료되었을 때.

    그림자 뒤에서 느끼는 배우들의 허무함.

    이것은 찰나를 그려내는 예술가의 업과 같았다.

    “궁상은 그만 떨자.”

    진호가 머리를 툭툭 털며 잠기운을 씻어냈다.

    눅눅해진 이불을 구석으로 걷어내고 팬티 바람으로 스물스물 걸어 나왔다.

    창문 밖으로 보이는 날씨는 유독 좋았다.

    삼삼오오 모여서 나들이 가는 사람도 여럿이었다.

    ‘그러고 보니 곧 어머니 생신이네.’

    고향에나 내려가 볼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

    진호는 아직 아무것도 얘기하지 않았다.

    회사를 그만 둔 것도 연기를 시작 한 것도.

    그냥 늘어놓기에는 부모님께 진 빚이 너무 많았다.

    ‘전생 체험’때문에 얼마나 많은 고생을 하셨는가.

    매일 밤마다 이상한 발작과 함께 알 수 없는 말을 늘어놓는 아들.

    그 아들을 보고 손가락질 하는 이웃.

    치료하기 위해 찾아간 병원의 높은 병원비.

    이중, 삼중의 고생을 겪어야만 했다.

    그렇기에 섣불리 이야기를 꺼내서 가볍게 희망을 줄 수는 없었다.

    “······고향에 좀 내려갔다 와야겠네.”

    그렇게 차일피일 미룬 것이 오늘까지.

    이제는 정말로 밀린 이야기를 전해도 될 거 같다.

    아니, 전해야만 한다.

    본가에 가져갈 짐을 꾸렸다.

    “나도 같이 가.”

    그리고 은서.

    이른 아침에 걸려온 전화에 ‘고향 내려가.’라고 말을 했더니 저녁에 찾아왔다.

    말인즉슨 그녀도 휴가라는 것.

    “나도 촬영 끝났다고 한 며칠 휴가 받았거든. 고향이면 시골 아니겠어? 같이 좀 쉬자.”

    “우리 스캔들 터졌던 거 까먹었어? 같이 내려가면 아주 기자들이 좋아라 웃을 걸?”

    “피. 내가 그걸 모를까봐. 아영이랑 서훈 선배하고도 얘기 해 봤어. 시간 맞춰서 내려가자.”

    “다 같이?”

    “응. 시골에서 힐링하는게 요즘 트렌드잖아. 다 같이 시간 맞춰서 쉴 기회가 또 언제 있겠어.”

    은서는 이미 오두막에서 수박 잘라먹은 얼굴이다.

    휴가 받고 시골에 내려가서 친구들과 푹 쉰다, 라는 깔끔한 플랜이었다.

    “안 돼.”

    “응? 왜?”

    “그게······”

    무어라 답을 하면 좋을까.

    사실 정신병력이 있는데 그걸 말하지 않아서.

    고향에 가면 다 들통 날 것 같으니 안 돼.

    이렇게 설명 할 수는 없었다.

    “아직 연기하는 거 제대로 말도 안 했어. 잘 다니던 회사 그만 둔 것 모르고. 우르르 몰려가서 말하면 좀 그렇잖아.”

    “아, 그런 거였어?”

    “응. 시골에 가는 건 다음으로 하자.”

    “피. 그렇게 말하면 어쩔 수 없지.”

    은서가 한 발 물러났다.

    그제야 진호도 안심 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둘 사이에 약간의 입장 차이가 존재한다는 걸 그때는 알지 못했다.

    #

    “언니. 우리 정말 이래도 되는 걸까요?”

    넉넉한 승합차 안.

    선글라스에 바캉스 복장을 한 아영이 물었다.

    그녀 옆으로는 은서가 운전석에는 서훈이 자리하고 있었다.

    “봐봐. 진호 오빠 이번에 가서 연기하는 거 말한다면서. 나도 겪어봐서 아는데, 그거 되게 힘들어. 갑자기 직장까지 때려치우고 하는 거라면 더.”

    “하긴. 잘 다니던 광고회사를 때려치우고 연기한다고 하면 집에서도 고운 말 안 나오겠다.”

    “그러니까 우리가 내려가서 응원 좀 해 주자고.”

    은서는 진호의 얼굴을 ‘직장 때려치우고 연기하는 20대 후반의 근심’으로 봤다.

    그렇기에 사람을 모아 돕기로 한 것이다.

    “근데 주소는 어떻게 알았다냐?”

    “진호 오빠 네비 찍는 거 몰래 훔쳐봤죠.”

    “이야. 아주 스파이 납셨네.”

    서훈이 혀를 내둘렀다.

    “근데 너 이러는 건 진호가 싫어 할 수도 있다는 건 알고 있지?”

    “그, 그래요?”

    “어. 응원하러 와 줘서 고맙다고 할 수도 있지만 괜히 참견한다고 화를 낼지도 몰라.”

    “······진짜요? 그럼 우리 그냥 돌아갈까요?”

    서훈의 지적에 은서가 갈등했다.

    듣고 보니 괜한 참견이 될 수도 있는 행동이었다.

    “에휴. 고속도로까지 타 놓고서는 무슨. 일단 내려가. 가서 보고 분위기 이상하다 싶으면 그냥 우리끼리 따로 방 잡고 놀면 되지.”

    “역시 서훈 선배가 명석하네요.”

    “그걸 이제 알았냐?”

    서훈이 피식 웃으며 운전대를 돌렸다.

    사실 그에게도 목적은 있었다.

    ‘고향이라.’

    스타가 탄생하면 고향부터 살던 집까지 들쑤시는 것이 방송가의 행동 수순.

    선점해서 나쁠 건 없었다.

    그 역시 PD를 꿈꾸는 방송계 야심가였다.

    #

    진호는 오래된 노송 앞쪽에 차를 세웠다.

    오랜만에 오는 고향은 낯설고 신선했다.

    아주 어릴 적, 그 일을 겪기 전에는 참 많이 오곤 했는데.

    감상이 미묘했다.

    “여기는 그대로네.”

    노송을 지나쳐 언덕길을 내려오자 널찍한 저택이 한 척 나왔다. 예전에도 이런 모습이었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활짝 열린 대문을 지나쳐 안으로 들어갔다.

    “응? 거기 누구요?”

    “아. 작은아버지. 저 진호입니다.”

    “뭐이? 진호라고?”

    안뜰에 나와 앉아있던 작은아버지를 먼저 만났다.

    예전보다 많이 연로해 지신 모습이 눈에 밟혔다.

    “아이고야. 고 조그맣던 놈이 이래 자랐구나. 그려, 그려. 어디 아픈 곳은 없고?”

    “전 건강해요. 작은아버지는 어디 아픈 곳은 없죠?”

    “나야 뭐 늘 그렇지. 그보다 어여 들어와라. 여어, 석주 엄마! 여기 진호가 왔구려!”

    작은아버지는 진호의 손을 잡아 끌며 소리쳤다.

    주방에서 저녁을 준비하던 작은어머니가 버선발로 뛰어나오셨다.

    마찬가지로 깜짝 놀라며 어루만져 주었다.

    ‘조금 일찍 돌아 올 걸 그랬나.’

    이렇게 환대를 받을 줄 알았으면 더 일찍 왔어도 좋지 않았을까.

    그런 작은 후회를 해 봤다.

    “뭐? 진호?”

    아니. 아니지.

    이 사람이 있어서 그랬던 거지.

    진호는 뒤늦게 나와 뒷짐 진 채 자신을 바라보는 한 사람에게서 옛 기억이 떠오르는 걸 느꼈다.

    큰아버지.

    본가의 실질적인 주인이다.

    생활이 어려워 본가로 내려온 가족을 참 모질게 대했던 인간이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큰아버지.”

    “서울에 올라가서 일한다더니. 여긴 왜 내려온 거냐?”

    “아버지 어머니께 인사드리려고 왔습니다.”

    “쯧쯧. 퍽이나 일찍 오는구나. 하긴 밤중에 도망친 놈이 어디 낯짝이 있어야 찾아오지.”

    저 눈빛, 저 목소리.

    진호는 속에서 무언가 울컥 하고 올라오는 느낌을 받았다.

    이래서 본가에는 내려오기 싫었던 것이다.

    자신을 마치 ‘기생충’이나 ‘망가진 것’따위로 보는 시선 때문에.

    “네 부모는 밭일하러 나가 있으니까 그쪽에나 찾아가 봐라. 그리고 인사를 끝내면 그 길로 서울로 올라 가. 이 집에는 네놈이 발 들일 공간이라고는 없으니까.”

    “혀, 형님! 아무리 그래도 몇 년 만에 내려온 거 아닙니까? 집에서 하룻밤은 자고 가게 해야죠!”

    “시끄럽다! 제 발로 나간 놈을 내가 어째서!? 호적을 파도 모자란 놈을 여태껏 남겨 둔 것만 해도 감지덕지해야 할 판이야!”

    말은 저렇게 하지만 진호는 알고 있다.

    그가 집을 떠나 서울로 올라가는 날 언덕길에서 큰아버지를 마주쳤었다.

    한 마디의 조언이나 만류도 없었다.

    사라져서 기분이 좋다는 옅은 미소 뿐.

    애초에 본가 살림 잡아먹는 ‘저주받은 아이’를 반기지 않던 인간이다.

    “작은 아버지. 괜찮아요. 큰아버지 말대로 부모님께 인사만 드리고 다시 서울로 올라갈게요.”

    “아, 아이고. 진호야 그래도······”

    “어차피 본가에서 환영받을 거라 생각하지는 않았어요. 어릴 적에 피해를 많이 준 것도 사실이고. 하지만 그래도 한 가지는 알려드리고 떠나고 싶네요.”

    진호가 꼬장꼬장한 큰아버지를 정면에서 바라봤다.

    예전에는 그렇게 무서웠는데 지금은 딱히 그 정도는 아니다.

    그냥 고집 가득한 노인만 보일 뿐.

    “저. 이제 갈 길을 찾았어요. 전처럼 방황하거나 힘들어 하지도 않아요. 전보다 돈도 많이 벌고. 그러니 큰아버지. 더 이상 전 애물단지가 아니에요. 재산을 갉아 먹지도 저주를 내리는 불길한 존재도 아니란 거죠.”

    “······허. 쥐 알 만 한 놈이 아주 입만 컸구나.”

    “아뇨. 입만 큰 게 아닙니다.”

    그래, 확실히 이렇게 보니까 알 것 같다.

    그렇게 두려워하던 큰아버지는 더 이상 없었다.

    그가 늙어서?

    그런 이유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자신이 변한 이유가 컸다.

    ‘나는······변했구나.’

    더 이상 전생체험이 두렵지 않다.

    그것이 정신병이라고 손가락질 받을 일도 없다.

    되레 축복이고 재능이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큰아버지 앞에서도 당당 할 수 있는 것이다.

    더 이상 과거의 애물단지가 아니니까.

    “저 성공했어요. 큰아버지가 상상하던 것보다 훨씬 더.”

    속이 참 시원했다.

    #

    오랜만에 보는 부모님은 참 많이 늙었더라.

    진호는 밭에서 돌아오는 부모님을 맞아서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참기에는 그 애잔함이 과했다.

    “아이고, 올 거면 미리 연락이라도 좀 하지.”

    “그냥 깜짝 놀라게 해 드리고 싶었어요.”

    “그래, 그래. 일은 잘 되고? 어디 아픈 곳은 없지? 아이고. 왜 이렇게 말랐데. 밥은 잘 먹고 다니는 거니?”

    어머니는 얼굴이 다 닳도록 만졌다.

    말랐다고, 뼈만 남았다고, 밥은 먹고 다니냐고.

    쉼 없이 말들을 쏟아내셨다.

    예전에는 참 듣기 싫었던 말들인데 지금은 어쩐지 기뻤다.

    “아무 일이 없던 건 아니구나.”

    “아버지.”

    “눈빛도 뭔가 좀 달라진 거 같고.”

    마냥 반기기 바쁜 어머니와는 다르게 아버지는 진호의 변화를 알아차렸다.

    툭툭, 두드리는 바닥에 진호가 앉았다.

    “사실 두 분께 드리고 싶은 말이 있어요.”

    “응? 뭔데? 설마 여자 친구라도 생긴 거니?”

    “아, 아니 그런 거 말고요. 아, 어머니. 갑자기 그런 이야기가 왜 나와요.”

    “아니 뭐 우리 진호가 어디가 어때서. 잘 생겼지 키도 크지. 직장도 번듯하게 있고. 참한 색시 하나 만나서 결혼을 딱 하면 좋을 텐데.”

    “잠깐만요. 잠깐만. 일단 얘기부터 좀 들어봐요.”

    부모는 참 한결같은 존재다.

    진호가 어머니의 말을 잠시 중단시키고 그 동안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꺼내 놓았다.

    회사. 전생.

    그리고 연기에 대한 이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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