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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0만 전생 배우-16화 (16/178)
  • Chapter7. 한층 더 깊이(2)

    “으아아아!!!”

    남일수는 화를 참을 수가 없었다.

    벤의 좌석을 발로 걷어차고 대본을 마구 던졌다.

    그래도 화가 안 풀려서 벤 천장을 주먹으로 후려치기까지 했다.

    “야, 야. 참아 좀. 밖에서 다 쳐다보잖아.”

    “그럼 뭐 어쩌라고요! 아아아! 시팔! 개 짜증나!”

    “일수야.”

    “형도 들었잖아요! 거기 있던 새끼들 전부 나보고 안 된다고, 부족하다고 떠드는 거! 시팔, 다 늙어빠진 새끼들이 요즘 연기에 대해서 뭘 안다고!”

    남일수의 매니저는 무어라 한 마디 더 할까 하다가 그만 두었다. 나름 몇 달을 같이 다녔다고 대충 성격은 이해하고 있었다.

    대중적으로 보이는 쾌활하고 밝은 모습은 가식.

    실제로는 다혈질적이고 남을 무시하는 건방진 성격이었다.

    “시팔, 문제는 그 새끼야. 그 새끼.”

    조금 진정이 됐는지 남일수의 목소리가 차분해졌다.

    “하는 일마다 나타나서 훼방 놓고. 뭔데, 대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연기라고는 쥐뿔도 모르던 놈이잖아! 근데 왜 나타나서 지랄이냐고, 지랄은! 으아아아!!”

    아니, 차분해진 척 했을 뿐이다.

    다시 화를 토하며 좌석을 발로 걷어찼다.

    “형. 형. 솔직하게 말 한 말해 봐요. 그 새끼랑, 나 중에 누가 더 괜찮았어요?”

    “어, 어? 아니, 그야 난 일수 네가 훨씬 낫지.”

    “그렇죠? 형도 그렇게 보는 거죠? 그 새끼 목소리나 깔고 눈만 가늘게 뜨면서 있어 보이는 척 하는 거라니까. 요즘 누가 그렇게 연기를 해? 거기 있는 노땅들이 죄다 고루해 처먹으니까 그런 거에 끔뻑 죽는 거지.”

    매니저에게 선택권은 없었다.

    실제로는 그 역시 진호의 연기에 빠져서 상대역인 남일수를 제대로 관찰하지 못했음에도.

    “에이 썅. 됐어요. 어차피 그 새끼 분량이라고 해 봐야 쥐똥만큼 나올 텐데. 어차피 시청자들이 원하는 내 얼굴이라 이겁니다.”

    “아, 분량 조정 된 거야?”

    “이제 하겠죠. AJ에서 나 밀어주기로 약속했는데 설마 그 이상한 아저씨 하나 때문에 망치기야 하겠어요?”

    “아. 그렇구나.”

    매니저는 아쉬움을 느꼈지만 입 밖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안 그러겠지.”

    그냥 입맛만 다셨다.

    #

    “또 대본 수정이라고?”

    촬영을 며칠 안 남긴 시점.

    진호는 또다시 수정 된 대본을 받았다.

    상황과 대사가 꽤나 많이 수정되어 있었다.

    “와, 이거 너무하네. 진호 오빠 쪽이 완전히 거덜 났는데?”

    “······”

    은서의 말대로 대본에서 수정 된 부분은 대부분이 진호 분량이었다. 전체 분량으로 비교하자면 조연이라고 보기도 우스운 수준으로 격하되었다.

    “이거 소문이 사실인가 보네.”

    “소문?”

    “작가진이랑 감독님 교체한다는 소문. 여차하면 드라마 배우진도 갈아엎을 수 있다는 얘기가 있어.”

    “촬영을 며칠 안 남기고?”

    “······일하다 보면 가끔 있는 일이야.”

    진호 입장에서는 납득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은서 말대로 종종 있는 일.

    최종 결정권을 쥔 인물이 실무자와 마찰을 빚기 시작하면 사람이 덜컥덜컥 잘려나가는 건 비일비재하다.

    아예 작품이 뒤집어 지는 경우도 간혹 있다.

    “어떻게 해? 이래서야 시작도 전에 난파당하게 생겼잖아.”

    “감독님과 작가님께 따로 얘기를 좀 해보자.”

    “분량 늘려달라고? 그럴 힘이 있으려나?”

    “아니. 그냥 내 분량 때문에 싸우지 말라고. 내 분량만 잘려나가는 걸 보니까 그 문제로 싸우는 거 같잖아.”

    분량이 잘려나가는 건 분명 가슴 아픈 일이다.

    역량을 마음껏 보여주고 싶은 건 배우가 가지는 가장 기본적인 욕구니까.

    “적어도 괜찮아. 사람들이 알아봐주면 돼.”

    하지만 방법이 없다면 줄여도 좋다.

    적은 분량 안에서 자신의 빛을 뽐내면 되니까.

    그렇게 할 마음도 자신도 진호에게는 있었다.

    조조와 주왕. 여러 전생을 오가며 다듬어진 남호 캐릭터는 이미 완성 돼있었다.

    “누가 손해인지 보여주자고.”

    촬영까지는 이제 며칠이었다.

    #

    연예부 기자들은 가십에 민감하다.

    스캔들, 밀회, 술집 난투, 고성방가 등.

    기사를 접하는 사람들이 최대한 자극적으로 느낄 수 있는 정보를 수집한다.

    그런 면에서 이번 드라마 촬영은 호재였다.

    “안 됩니다. 이제 촬영 막 시작했는데 외부로 공개 할 내용이 어디 있겠습니까.”

    “에이, 그러지 말고 조금만 풀어줘요. 우리도 소식은 알려야 하지 않습니까.”

    “에헤이. 안된다니까.”

    “조금만, 조금만. 네?”

    촬영 직전에 터진 스캔들, 주연 배우와 조연 배우의 불화설, 감독 교체설, AJ의 압력설 등.

    잘 차려진 잔칫상 같았다.

    그렇기에 가십지 ‘스타라이트’에서 나온 윤예슬은 촬영 현장 기사를 포기 할 수 없었다.

    “거기 뭔데 이렇게 소란스러운 거냐?”

    “아, 감독님. 여기 이 기자분이 자꾸 취재를 하고 싶다고 들이미는 통에.”

    “취재? 어디서 나왔습니까?”

    “스타라이트 소속 윤예슬입니다. 감독님은 전에도 한 번 뵌 적이 있죠?”

    “아? 아아. 기억나네요. 그때도 이런 상황에서 만나지 않았습니까?”

    “아하하. 발 빠른 기자의 숙명이죠.”

    기사에 대한 협조가 안 된 상황이라면 방법이야 몇 가지 밖에 없지 않은가.

    몰래 찍든가 현장 스텝에게 비벼서 사진이라도 건져야 하는 것이다.

    윤예슬은 두 번째를 선호했다.

    “그래, 윤 기자님은 우리 드라마에서 뭘 건져가려고 오셨나?”

    “에이, 알면서 그러시네. 드라마에 잡음 엄청나게 많은 거 알죠? 촬영이 온전하게 끝나기나 할지 의문인 사람도 많아요.”

    “거, 그다지 고마운 관심은 아니네. 근데 우리 쪽 일은 우리가 알아서 잘 합니다. 촬영도 순조롭게 진행 중이고.”

    “그럼 촬영 한 컷 어때요? 밖에서 다들 수군거리고 있으니까 제대로 촬영이 되고 있다는 증거로.”

    윤예슬이 슬금슬금 가려운 부분을 긁었다.

    어차피 드라마 제작사 측에서도 기자들에게 뿌릴 촬영 컷 따위를 준비해 둔다.

    제작사는 홍보를 하고 기자들은 조회수를 먹고.

    나름의 공생관계가 형성되는 것이다.

    “흐음.”

    “뭐, 길게는 안 쓸게요. 촬영 현장이 이렇다. 소문과는 다르게 훈훈하다. 이러면 오케이 아닙니까?”

    “······좋아요. 대신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부탁이요?”

    “네. 촬영 기사는 그렇게 내되, 주변에 감상을 좀 전해 주셨으면 합니다.”

    윤예슬의 고개가 기울어졌다.

    홍보용 기사 정도라면 이해하겠다.

    하지만 기사는 기사로 따로 내고 입소문을 부탁한다?

    조금 기묘한 이야기였다.

    “따로 내용을 강요하는 건 아닙니다. 마침 씬 하나가 준비 중이니 그걸 보고 개인 감상을 그대로 옮겨 주시면 돼요.”

    “감상평을 주변에 전해 달라?”

    “기자들만큼 입소문이 빠른 곳도 없지 않습니까.”

    그냥 평범한 홍보 청탁일까?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윤예슬이 고개를 끄덕였다.

    소문을 내고 안 내고는 어차피 자유.

    기사 거리만 낚아 갈 수 있으면 된다.

    “자, 이쪽으로 오시죠.”

    “오호. 기대가 되는군요. AJ에서 밀어주는 신인 남일수와 전직 아이돌 은서 양의 합작품.”

    “포인트를 잘못 두셨군요.”

    “네? 그게 무슨 소리죠?”

    “씬을 보면 이해가 될 겁니다.”

    감독 지남운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촬영장으로 앞서갔다.

    그는 자신이 왠지 철없이 아이가 된 것 같다는 기분을 받았다.

    또래를 놀려 주는 개구쟁이의 느낌.

    “저, 저 배우 분의 이름이 뭐라고요?”

    그래, 이런 느낌말이다.

    #

    촬영에서 있어서 힘든 점을 꼽자면 한두 가지가 아닐 것이다. 연기는 기본이고 먹고 쉬는 불편함, 배역에 따른 복장, 밤까지 이어지는 촬영의 피로함까지.

    하나의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 많은 고통이 수반된다.

    하지만 실제로 배우들을 괴롭히는 건 다른 부분이다.

    “또 연장입니까.”

    “미안하게 됐어. 앞 촬영이 길어져서.”

    바로 기다림이다.

    촬영 씬이 배정된 배우는 현장에서 준비를 하고 기다려야 한다. 그 시간은 짧게 몇 분 부터 길게는 몇 시간까지 늘어난다.

    촬영이라는 건 고무줄 같아서 예단이 안 되는 터라 그냥 날짜를 바꿀 수도 없다.

    게다가 진호는 신인에 소속사조차 없다.

    현장에서는 모두가 바쁘기 때문에 그를 챙겨주는 일 따위는 기대하기 어렵다.

    구석, 작은 의자 정도에 엉덩이를 걸친 채 계속해서 촬영 시기를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어이쿠, 이게 누구야. 우리 진호 배우님이잖아.”

    “······”

    반면 주연인 남 일수의 대접은 다르다.

    연기력이고 나발이고 그는 일단 AJ에서 밀어주는 주력 상품. 반감이 있는 감독, 지남운 조차 그를 홀대 할 수 없다.

    일단 대기시간부터 다르다.

    웬만한 촬영 스케줄은 그를 중심으로 구성된다.

    촬영장에 딱 와서 씬을 찍고 그냥 떠나버리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그가 늦기라도 하는 날에는 꼼짝없이 다른 사람들이 기다리게 되는 것이다.

    촬영장 배려는 또 어떤가.

    의자부터가 다르다.

    구석에 쪼그려 앉아야 하는 진호와는 다르게 그는 편한 접이식 의자에 몸을 기댈 수 있다.

    그 크기가 감독인 지남운의 것과 거의 비슷할 정도였다.

    “기다리기 힘들지? 그럼, 내 벤에 가서 잠이라도 자다가 오든가. 대단하신 배우님인데 피곤하면 안 되잖아.”

    “사양하죠. 방영 전 마지막 분량인데 최대한 집중력을 유지하고 싶네요.”

    “아, 그랬나? 이거 촬영 분량이 거의 없다보니 까맣게 잊고 있었지 뭐야.”

    방영 전 마지막 촬영 분량이다.

    쉴 새 없이 촬영을 이어간 남일수와는 다르게 진호의 분량은 그야말로 손에 꼽을 정도.

    아마 방영이 시작되면 1, 2화 내로는 얼굴을 보기도 힘들 수준이었다.

    “그래도 괜찮은 겁니까?”

    “응? 뭐가?”

    “다음 씬. 저와 같이 호흡을 맞추는데. 그렇게 풀어진 상태로 따라 올 수 있을지 걱정이네요.”

    남일수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가 다음 씬의 상황을 모를리가 있겠는가.

    다 알기 때문에 일부러 진호를 긁으러 온 것이다.

    “누가 보면 그쪽이 주연인줄 알겠어. 같이 찍는 씬이라고 해 봐야 대사 두 마디가 전부잖아. 그냥 가볍게 지나가자고.”

    “가볍게라. 다음 씬은 남주와 남호가 정면에서 맞닥뜨리며 서로를 관찰하는 장면입니다. 드라마의 분위기를 전환시키는 포인트죠. 어설프게 하면 이어져 나오는 장면들이 모두 망가집니다.”

    “이야. 연기 짬밥 좀 먹었나 봐? 아주 술술 나오네? 그렇게 당연한 거 모르는 사람도 있을까? 다 아니까 가볍게 가자는 거야.”

    “그런가요? 그럼 더 이상 상관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분명히 말하는데, 어설프게 연기하다가 장면 째 잡아먹혀도 날 원망하지는 않는 겁니다.”

    “······뭐?”

    진호는 고개만 살짝 들어 남일수를 바라봤다.

    독만 잔뜩 품은 채 으르렁거리는 강아지가 보였다.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꼬리에 힘을 주어 봐도 강아지는 강아지일 뿐이다.

    “배려하지 않을 생각이거든요.”

    “배, 배려? 지금 날 배려했다는 거냐?”

    “네. 남일수 씨의 캐릭터 진수는 약하거든요. 스케치북 위에 연필로 그려 놓은 애들의 낙서처럼. 손으로 슥 지우면 지워 질 것 같이 희미합니다.”

    “너! 지금 내 연기가지고 품평하는 거냐!?”

    발끈한 남일수가 진호의 어깨를 손으로 짚었다.

    “건드리지 마시죠.”

    하지만 그 손은 진호의 차가운 말 한 마디와 함께 떨어져 나갔다.

    남일수 자신도 한 걸음 물러났다.

    할 줄은 몰라도 볼 줄은 알았기 때문이다.

    바라보는 눈은 같았지만 그 안에든 것은 달랐다.

    ‘이 새끼 설마 벌써 남호인 거냐?’

    솜털이 꼿꼿하게 서 있었다.

    “곧 촬영이네요. 기대하겠습니다, 연기.”

    “······”

    자연스레 일어나 바라보는 진호.

    남 일수는 이를 악물고 시선을 마주하려 했지만 몸은 이미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자연적인, 본능적인 반응이었다.

    눈앞에 있는 건 더 이상 진호가 아니었다.

    소시오패스적 성격을 지닌 남호.

    피식자는 어쩔 수 없이 포식자를 두려워 할 수밖에 없었다.

    ‘제, 젠장······!’

    다음 촬영이 벌써부터 두려워 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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